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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ㅣ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평점 :
천천히 걸어야 했는데, 빨리 걸어서 다리가 아픈 느낌이 듭니다. 다리가 많이 아픈 건 아니고, 빨리 걸어서 다른 생각은 못한 것 같아요. 이런 건 처음이 아닙니다. 늘 그래요. 실제 걸을 때도 둘레 잘 보지 않을지도. 하나도 안 보는 건 아니고 오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보면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걸 알지도 모를 텐데. 그냥 지나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제가 걸으면서 천천히 자세히 둘러보지 않아서 쓸 게 별로 없는가 봅니다. 걸으면서 여러 가지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해요. 지난날을 돌아보는 건가. 그러기도 하고 앞으로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볼 일을 마치면 뭘 해야지 하기도 합니다.
제가 걷는 길은 거의 비슷해요.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서 백수린은 집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길을 잃지 않으려 하고, 다른 나라에선 길을 잃어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사는 곳이어도 잘 가지 않는 곳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몇 달 전에 거의 가지 않던 곳에서 길을 헤맸군요. 잘 모르는 길을 걸으면서 이러다 집에 못 가는 거 아닌가 했네요. 한동안 모르는 곳이었지만, 다행하게도 제가 아는 길이 나왔어요. 그저 걸으려고 나간 게 아니어서 잘 모르는 길을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네요. 그냥 걷기도 하면 좋을 텐데 여전히 그러지는 못합니다. 볼 일이 있어야 밖에 나가고 걸어요. 그러면서 걷기 좋아한다고 하는군요. 어디든 걸어다니니 걷기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요.
서울 하면 많은 사람과 높은 건물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울 잘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했네요. 아직 서울에도 옛모습이 남은 곳 많을 텐데. 옛모습이라 해도 아주 오래전은 아니고, 미처 재개발 되지 않은 곳. 그곳 그러니까 백수린이 사는 곳도 재개발 될지 모르지요. 이젠 달동네라는 말 잘 안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수린이 오래된 단독주택에 사는 모습 보니 백수린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 소설은 그 집에 살기 전에 쓴 거군요. 그곳은 재개발이 된다는 말이 있었던 곳이었어요. 재개발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해도 되는 곳이 있고 안 되는 곳이 있겠지요. 서울, 하니 한국은 오래된 걸 그냥 놔두지 않는군요. 건물이 오래되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네요. 처음에 튼튼하게 지으면 나을 텐데. 아주 많이 만드는 산업혁명 뒤부터는 튼튼하게 만들지 않게 됐을지도. 집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언덕 위 집이라는 말 좋게 들리지만, 살기에 편하다고 못하겠습니다. 단독주택이니 마당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마당은 없다고 합니다. 마당이 있다 해도 콘크리트 바닥이겠군요. 넓지는 않아도 그런 곳 있지 않을지. 제가 집을 잘 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없다고 하면 없는가 보다 해야 할 텐데. 백수린은 M 이모가 사는 곳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 동네에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 살게 됩니다. 거기가 언덕 위 집이에요. 이모는 친이모는 아니고 백수린 어머니 친구예요. 저는 이모도 엄마 친구와도 친하지 않네요. 백수린도 친하게 지낸 사람은 M 이모뿐이었군요.
어느 날 백수린이 사는 동네에 예전에 알았던 E 언니가 이사왔어요. 이사온다는 걸 안 건 아니고 이사했다는 말을 듣고 물어보니 같은 동네고 집도 아주 가까웠어요. 그런 거 보니 부럽더군요. 가까이에 친구가 있다고 자주 만날 것 같지는 않지만. 시간이 가면서 백수린은 이웃하고도 알고 지내요. 서울에도 이웃과 이야기 나누고 사는 사람이 있네요.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 않을 텐데. 아파트에 살아도 앞집이나 옆집과는 친하게 지낼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그런 사람 많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백수린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소설에서 본 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다는 아니어도 소설 속에 백수린 할머니 모습도 조금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백수린과 함께 산 개 봉봉이 이야기도 있습니다. 백수린은 어렸을 때는 개를 무서워 했다고 해요. 봉봉이는 달랐습니다. 백수린은 봉봉이가 떠날 때까지 함께 했군요. 그 시간 쉽지는 않았겠습니다. 봉봉이 어릴 때는 괜찮았겠지만, 나이를 먹고 아팠을 때는 백수린 마음도 아팠겠지요. 봉봉이가 건강할 때는 함께 걸었지만, 봉봉이가 인대를 다치고 걷기 어려울 때는 백수린이 안고 걸었어요. 봉봉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백수린은 봉봉이와 걷던 길을 걷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봉봉이 떠올리겠군요. 처음보다 많이 슬프지 않기를.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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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산동네의 낡고 작은 단독주택에서 사는 게 관리인이 따로 있는 공동주택에서 사는 것보다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또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이 집을 무척 좋아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유난히 활달한 고양이들 울음소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 집에는 유리창이 많아서, 나는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짙어지는 우듬지 색깔과 석양 농도로 계절이 깊어가는 걸 알 수 있다. (196쪽~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