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몽룡의 동주열국지 3 - 진초시대
풍몽룡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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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3》권은 중원의 패자 진(晉)나라와 남방의 신흥국가 초나라의 패권 경쟁을 다루고 있다. 진문공 이후 진나라는 제나라를 이어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됐지만 남방의 초나라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살펴봐야 할 점은 과연 《열국지》 소설이 다루는 메인 스토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와는 다르게 춘추전국시대라는 긴 세월을 담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삼국지》는 세 나라를 뜻하고 《열국지》는 열 개의 나라를 다루고 있는데(실은 열 개 이상의 나라가 나온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삼국지》에 비해 《열국지》가 훨씬 넓고 방대하다. 《삼국지》에서도 엄청난 인물과 사건이 나오는데 《열국지》는 이를 훨씬 압도하고 있으니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역사 소설, 특히 나라와 나라가 물고 물리는 전쟁 소설 장르는 핵심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삼국지》의 경우 전반부는 조조와 원소의 싸움이며 후반부는 위, 촉, 오 삼국의 대립인데 이도 결국은 위나라와 촉나라의 싸움이 메인이다. 그럼 《열국지》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대립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번역본이다.

 

진(晉)나라와 초나라는 《열국지》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우선 두 나라의 경쟁은 중국 춘추시대를 살피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다. 진문공이 제환공을 이어 패자가 됐을 때 가장 까다롭게 저항했던 세력은 초나라였다. 진(晉)나라와 초나라는 여러 부분에서 이질적인데 지역적으로 구분하자면 진(晉)나라는 북방, 초나라는 남방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진(晉)나라는 주나라로 비롯하는 황하문명 세력인데 반해 초나라는 야만적인 나라 즉 오랑캐였다. 학문적으로 살펴보자면 진(晉)나라가 위치한 북방은 주공의 제도를 토대로 선대의 문명을 골자로 하는 유가와 묵가가 발전했다. 반대로 초나라에서는 자유분방한 도가 사상이 주류를 이뤘다. 그렇기에 두 나라의 경쟁은 단순한 패권을 넘어 황하 문명의 이념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찰해보자.

 

먼저 진(晉)나라의 왕족은 주나라의 천자와 동성이었으며 그렇기에 두 나라는 지역적, 혈연적으로도 가까웠다. 그렇기에 진(晉)나라는 주나라의 우월한 문명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으며 성장했다. 주나라의 예악은 이후 공자와 묵적에 의해 각각 유가와 묵가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공자의 유가는 주나라의 제도와 질서를 회복하고 무너진 예법을 수호하는 입장을 보이는데 이런 사상적 흐름은 필연적으로 보수주의와 연결된다. 아무튼 중원의 진(晉)나라는 천자국인 주나라를 대신하는 황하문명의 계승자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초나라는 진(晉)나라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서주시대에는 초나라를 오랑캐로 여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이런 관념은 춘추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초나라는 중국 남쪽의 방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토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중원의 문명 세력권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 국제사회의 노골적인 무시에 칼을 갈았던 초나라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혁혁한 내실을 다지고 나라 전반의 체제를 정비하여 국제사회의 패자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렇다 보니 초나라에서는 위계와 질서를 강조하는 학문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도가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대립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많은 역사에서 재현됐던 야만과 문명의 대립. 춘추시대 중원에서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진문공은 성복대전을 통해 초나라를 박살 내고 국제적으로 진나라를 패자에 지위에 올렸다. 그러나 진문공 사후 진나라는 권신과 외세에 의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틈을 타서 초나라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목왕 시절부터 중앙집권이 가속화되고 패권전쟁에 다시 들어갔다. 당시 목왕은 이복동생 직의 무함을 받고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거병을 하여 부왕인 초성왕과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보위에 올랐다. 이후 활발한 대외정책을 펼쳐 진나라 수중에 있던 정나라와 채나라 등의 약소국가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목왕 사후 초나라의 영웅이자 가장 위대한 군주인 장왕이 등극하였다. 장왕은 부군의 탄탄한 유산을 토대로 초나라를 패자의 위치로 세운 군주였다.

 

문명과 야만의 대결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문명과 야만의 승패는 문명의 압승일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적어도 기원전 중원에서는 어느 한쪽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전통적인 강국 진(晉)나라는 호락하지 않았고 초나라의 기세 역시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런 호각지세의 상황 속에서 초장왕이 문명국인 진나라를 굴복시키고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첫 번째로 '열등감'을 꼽을 수 있다. 초나라는 이전부터 실력이 있는 국가였지만 중원의 나라들로부터 무시 아닌 무시를 당했다. 무시를 당하게 되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행동한다. 첫 번째 분노만 하는 경우, 두 번째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무시당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경우. 대다수의 사람은 첫 번째인데 반해 초나라의 군주들, 특히 장왕은 두 번째 부류였다. 격렬한 열등감은 발전의 기폭이 되었고 초나라는 야만을 탈피하고 문명의 세력권에 진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실력이다. 문명과 야만의 싸움에서 야만이 몰락하는 경우는 문명에 비해 절대적으로 세가 약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일어났던 스파르타쿠스 검투사 반란은 문명과 야만의 격돌 서양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란이 실패한 것은 결국 힘과 세력,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초나라는 중원 남쪽의 드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이 있었다. 그렇기에 로마의 검투사들과 다르게 실패를 하더라도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고 손실을 회복할 여유도 있었다.

 

세 번째로 난세에 있어서 야만에 대한 고찰이다. 일반적인 치세에서는 기득권의 문화가 유용하지만 난세에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난세에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혁신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국가들이 두각이 드러나는데, 초나라의 야만성 역시 이러한 예에 속한다. 진과 초의 전쟁 이후에도 중원은 농경문화민족과 유목문화민족이 끊임없이 반목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시대를 발전했다. 농경민은 유목민에 비해 세련된 문화를 가졌고 유목인은 농경민이 결여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 넣었다. 초나라의 역할은 붕괴하는 주나라 중심 문명에 물리적 충격을 가하여 중원 대륙에 역동성을 불어 넣고 발전의 기폭을 앞당겼다.

 

그럼 두 나라의 경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야만을 상징했던 초나라의 영토가 중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중화문화의 확장과 더불어 초나라가 가진 야만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존의 중화문명에 초나라가 편입된 결과, 중원의 패권은 초나라보다 훨씬 낙후된 나라들까지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야만국이었던 초나라도 패자의 자리에 오르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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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의 동주열국지 2 - 진문시대
풍몽룡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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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2》(이하 열국지로 표기) 권의 주제는 중원문화의 부활이며 주인공은 진문공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진나라는 크게 두 나라로 나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는 난세를 통일했던 진(秦)시황의 진나라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는 문공은 중원에 위치한 진(晉)나라의 군주였다. 두 나라는 쓰는 한자가 다르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동주시대가 열리고 환공이 패자를 칭하며 국제질서를 힘의 논리에 귀속시켰지만, 제나라의 패도는 1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제환공 사후 중원에서 주목받는 나라는 송나라와 초나라 그리고 진(秦)나라 정도였다. 여기서 초나라와 진(秦)나라는 각각 남방과 서쪽에 치우쳐져 문화적으로도 낙후됐고 오랑캐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패권 경쟁에 주역으로 나설 수 없었다. 제환공 사후 후계구도가 정해지지 않은 탓에 제나라에서는 궁정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는데 송나라의 군주 양공은 이를 제압하고 제나라의 공자 소를 제효공으로 세운다.

 

송양공은 이에 힘입어 자신이 제나라를 대신해 패자의 지위에 오르려는 야망을 가지고 회맹을 주도했지만 환공의 제나라 시절과 비교해볼 때 송나라는 국력이 너무도 약했다. 그러나 양공은 이를 간과하고 패자의 지위에 올랐다고 자만하다 신흥 강국인 초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 이때 양공의 군대는 유리한 입장이었지만 공정한 조건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양공의 명예욕 때문에 초나라 군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싸움 결과 초군이 승리했는데 이를 빌미로 양공은 세간에서 인의를 쫓다가 패망한 지도자로 조롱 당한다.

 

한편 중원의 진(晉)나라에서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군주의 처첩들과 자식들이 싸움을 하였는데, 훗날 진(晉)문공에 오르는 공자 중이는 정치적 정쟁을 피해 기나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당시 진(晉)나라는 후계구도 때문에 정치가 극도로 혼란했는데 서쪽의 진(秦)나라의 군주 목공은 공자 중이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사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중이를 진(晉)나라의 군주인 문공으로 세우는데 큰 일조를 한다.

 

 왕위에 오른 문공은 제환공에 이어 패도를 이어갔고 남방의 신흥세력 초나라를 정복하면서(성복전투) 두 번째 패자를 선포한다. 진(晉)나라의 패도는 제환공과는 다르게 근 200년을 이어갔다. 즉 춘추시대를 주도하는 패자의 자리를 무척 오랫동안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진(晉)나라의 세력권이 옛 주나라의 세력권이었다는 점이다. 동주시대로 넘어가면서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는 붕괴했지만 그런 주나라를 대신하여 황하문명의 맥을 이은 것이 바로 진(晉)나라였다. 첫 번째 패자인 제나라는 중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전통적인 주나라의 문화와 거리가 있었다. 또한 진(晉)나라가 주나라와 동질성을 가지는 것은 결정적으로 왕족의 성씨가 주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즉 혈통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주나라와 진(晉)나라는 무척이나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우수한 문명의 발상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정치적 노련함을 겸비한 리더의 역량은 진(晉)나라의 새로운 바람을 열었으며 그 결과 진(晉)은 새로운 패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열국지》 뿐만 아니라, 많은 고전이나 역사서에서는 황화 문명과 주나라의 문화를 이은 진(晉)나라를 매우 호의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진(晉)나라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초나라와 비교해볼 때 온도차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 시기의 주인공은 진(晉)문공이지만, 오랑캐로 취급받은 진(秦)목공과 초성왕 등등의 활약도 눈여겨볼 만하다. 실제로 두 군주는 각각 진(秦)나라와 초나라의 관제와 국력을 정비한 인물들인데, 안타깝게도 나라가 변방에 치우쳐서 주목받지 못한 명군들이다.

 

문공은 단순히 진(晉)나라의 국력을 신장시킨 것을 넘어 쇠락하는 주나라 문명, 그리고 황하문명을 새롭게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진(晉)나라는 '좋은 집안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아서 성장한 귀공자'를 연상한다. 문명을 대표하는 입장인 진(晉)나라. 이들의 패권을 깬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바로 야만을 상징했던 초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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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의 동주열국지 1 - 제환시대
풍몽룡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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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이하 열국지)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로 《삼국지연의》와 《초한지》 등과 함께 중국 3대 역사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다. 오늘날 《열국지》는 《삼국지연의》보다 유명하지 않지만, 작품 배경의 역사적인 의의를 따지자면 《삼국지연의》 훨씬 중요하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정책, 제도와 같은 하드웨어와 철학과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고루 발전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제도와 사상을 최초로 정리한 이는 주나라 시대의 주공이다. 주공은 조카인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내실을 다진 인물이다. 주공은 인의를 바탕으로 예악을 통하여 나라의 사상과 제도를 정비하였고 봉건제를 통하여 지방 제후들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종갓집인 주나라의 권위를 드높였다. 주변 제후들, 열국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주공은 예와 악을 전면적으로 앞세웠지만, 주나라가 천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패권, 즉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예악을 통해 국가 간의 서열을 규정한다 하더라도 힘이 없다면 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역사에서는 영원한 승자란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주나라의 국력 역시 기울기 마련인데, 중국의 첫 번째 난세인 춘추시대는 그런 주나라의 몰락에서 비롯했다. 주나라 시기는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로 나뉘는데 이는 도읍이 어느 쪽에 있었느냐로 구분한 것이다. 서주시대 때에는 주나라의 국력이 강했지만 도읍을 동쪽으로 이동한 동주시대는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제도와 사상을 최초로 완성한 주나라는 왜 몰락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후대 왕들의 무사안일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서주말기를 다스렸던 주선왕, 주유왕은 정사를 돌봄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참소와 비방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개인적 쾌락을 탐닉하는데 몰두했다. 그 결과 나라 내부에서는 권력을 두고 정쟁이 일어났으며 내외적인 이유로 동쪽으로 천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주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결국 예악이 붕괴, 그리고 봉건제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처럼 받들던 주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본 제후국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대외적으로 무한 패권 경쟁으로 돌입하게 됐으며 내부적으로는 권력을 두고 정치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질서의 문란, 예의의 몰락, 그리고 힘에 의한 패권주의가 무르익은 중원 대륙에서 몰락한 주나라를 대신한 나라가 바로 제나라였다. 춘추오패, 춘추시대에 첫 번째 패자라고 할 수 있는 제환공은 형제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뒤 군주의 자리에 올라 원수였던 관중을 중용하고 나라를 정비한 뒤 무력을 통하여 무너진 국제질서를 힘으로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주변 열국 입장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는 제나라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제환공의 제나라는 중원의 맏형 노릇을 자처했다. 물론 환공은 주나라 천자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중원의 패권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주공이 설정했던 예악은 패권 앞에 무너진 셈이다.

 

제환공이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중 덕분이다. 관중은 명분보단 실익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했는데 특히 상공업을 강조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나라의 부를 이용하여 환공은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시도했고 그 결과 규구회맹을 주최하여 제나라의 국력을 전국에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나라의 성세는 제환공 대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관중 사후 환공의 주변에는 간신들이 들끓었고 충신은 중용되지 못했다. 환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는데, 말년에는 자신이 이룩한 패자라는 성과에 안주한 결과, 간신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지하게 된다. 그 결과 궁정에서 중용한 간신들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환공의 시체는 궁 안에 방치되어 구더기가 들끓는 상황에 이르렀다.

 

주나라와 제환공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사안일이다. 사람은 잘 나갈 때에 마음을 놓는데, 역사적인 부분을 고찰해본다면 쇠락의 시작은 성공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주나라 후대의 왕들이 선대의 초심을 잊지 않고 나라를 다스렸다면 봉건질서가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춘추시대와 같이 패권을 앞세운 시대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제환공 역시 관중 사후 초심을 간직했다면 제나라의 패도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사에 있어서, 초심을 간직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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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영, 삶을 풍요롭게 가꿔라 (수정증보판) - 임어당이 극찬한 역대 최고의 잠언집
장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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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몸살을 앓는 2020년에도 여김 없이 봄은 왔다. 벚꽃과 진달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형색색 봄의 전령들은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춘분의 내음을 자랑하지만 애석하게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포근해지는 계절,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계절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기에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하고자 생각했다. 그랬기에 고심하며 선택한 고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유몽영》 이다. 그럼 《유몽영》과 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유몽영》은 잠언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유명세를 얻지 않은 듯 보이지만 중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잠언집은 《명심보감》과 《채근담》을 꼽을 수 있다. 《명심보감》은 유교적 교훈을 담은 책으로 초학자나 아동용 훈육서로 널리 보급되었고, 《채근담》은 인생 처세에 집중한 내용으로 유, 불, 선 3교의 가치관이 두루 녹아있는 책이다. 《유몽영》 역시 이들 저서와 비슷하게 인생에 대한 처세, 교훈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명심보감》과 같이 특정 사상에 특정 계층을 염두에 둔 책은 아니며 《채근담》처럼 딱딱하게 교훈적인 내용만으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적당하고 여유 있게, 직설적이지 않고 완곡한 전개가 돋보였다. 그렇기에 여유를 가지면서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는데 가장 주목할 부분은 꽃과 바둑, 술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특히 꽃에 대한 비유가 많은 점이 이색적이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분위기는 확 다른데, 꽃에 대한 내용과 비유가 많기에 화사한 봄에 어울리는 책처럼 다가왔다. 그렇기에 비록 아름다운 꽃구경은 물 건너갔지만, 책을 통하여 마음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유몽영》의 저자인 장조는 오늘날로 말하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끝내 떨어진 뒤 실의에 빠져 출세의 길을 접고 세속을 등지며 문사들과 교류를 하며 저술로 울분을 달랜 인물로 중국 청나라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차분하게 전개되는 책의 내용과 구성은 저자를 둘러싼 비관적인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명필은 작가의 불안정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사기》를 쓴 사마천이나, 《육경》을 정리한 공자 등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유몽영》의 저자 장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차분하게 정리한 이 책을 보면서 오히려 작가의 불운한 과거에 대해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다.

 

혹자들은 이 책을 보면서 세속에서 출세도 못한 인물이 고고한 척, 꽃이나 바둑 등등의 기예를 논한다고 아니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꼬아서 생각해보면 능력도 없는 사람이 허영만 가득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의 품격은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없을 때 드러난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 가장 최선은 그 사람이 힘들고 좌절할 때 어떻게 처세하는지를 살피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장조는 힘든 순간에도 자신만의 생각과 품격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런 모습이 허세로 보일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오히려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장조는 《유몽영》에서 자신의 울분을 최대한 절제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책 곳곳에 숨기지 못한 울분이 더러 섞여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몽영》은 장조의 진솔한 마음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는데 계획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순 없다. 온갖 변수들이 가득한 것이 인생이니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진 못했지만 자신의 품격을 최대한 지키다 간 장조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처럼 불행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승화할 수 있는 멘탈을 지닌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불행 속에서 《유몽영》과 같은 격조 어린 작품을 탈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기에 적어도 나에게는 비록 불우한 삶을 살았던 장조의 모습이 구차하거나 비루하기보단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아무튼 코로나 때문에 어수선했던 마음을 여유로운 문장으로 씻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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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 하 - 난세 리더십의 보고 한비자
한비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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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학문적 성격의 인문고전 《한비자》


인문학을 크게 분류하자면 문, 사, 철로 나눌 수 있다. 문은 문학, 사는 역사, 철은 철학이다. 일반적인 인문고전은 이들 세 영역 중 하나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정 저작들은 세 영역 모두를 아우르며 간학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한비자》는 정치사상서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역사와 문학적인 측면도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 고전은 역사와 철학에 치우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근대 정치사상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주 저작인 《군주론》과 《로마사논고》를 통해 정치철학을 내세우는데 자신의 사상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검증한다. 동양의 정치사상서인 《한비자》와 《맹자》, 《대학연의》 등등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그러므로 정치고전에서 철학과 역사는 각각 법조문과 판례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한비자》에서 철학과 역사에 관련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문학적인 요소가 보이는 점은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동양의 정치에서 문학은 하층민의 교화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런 역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학파는 유가다. 그렇기에 공자는 《시경》을 정리했으며, 《맹자》와 《대학연의》 같은 정치서에서도 시를 윤리적으로 해석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한비자》는 유가 사상서와는 다르게 시가 아니라 세간에 통용되는 우화나 민담 등을 참고하여 반영했다. 우화나 민담은 세간에 떠도는 사건들에 허구를 가미하여 스토리텔링 끝에 만들어진 것인데, 오늘날의 소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산문 문학이 발전하기 전 《이솝우화》가 제작됐는데 이런 점에서 우화나 민담은 소설과 산문문학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한비자》는 역사적 사례와 세간에 떠도는 민담과 우화를 적극 반영하여 법가 정치철학을 집대성한 책으로 인문학의 세 범주인 문, 사, 철의 속성을 고루 반영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비자》의 의의


인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두루 내포하고 있는 《한비자》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유구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고전은 급변하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통용되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비자》는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불변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에 대한 통찰이다. 한비는 인간을 긍정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견해는 도가사상과 비슷한데, 《노자》에서 이를 은유적이고 완곡하게 표현했다면 《한비자》는 직설적으로 폭로하듯 내뱉었다. 한비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이익으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기에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서 군주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직록과 작위를 신하에게 내려서 신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신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군주의 욕망(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군신, 양자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충성이나 인의 따위의 이타적인 부분이 개입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시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근로활동을 이어간다. 기업들 역시 소득창출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우고 활동하며 국가 간의 관계 역시도 명분보다는 실용을 최우선적으로 앞세운다. 그렇기에 이익에 입각한 한비자의 관계론은 오늘날 사회 풍조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현실성이다. 제자백가의 사상 전쟁에서 법가는 다른 사상들을 물치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난세 중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나라는 진시황제의 진나라인데 그는 나라 내부를 법가의 사상으로 정비하였다. 즉 군주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필두로 내세운 진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중원의 제국시대를 알린다. 즉 중국의 통일은 법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여타 다른 사상보다 법가가 현실적으로 탁월하다는 반증이다. 한비는 책에서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과거의 통치술을 현세에 구현하려고 한다며 그들의 복고적인 성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변하는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한비의 현실적인 주장은 급변하는 시세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제도적으로 공정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법가에서의 법은 국가 통치의 기준임과 동시에 신민들 간의 공정을 의미한다. 법 앞에서 제국의 만민은 평등하게 포상과 처벌을 받는데 이는 고위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진행된다. 유가나 묵가에서는 강제적인 법보다는 인의와 같은 도덕, 겸애와 같은 박애를 내세워 처벌조차도 최소화하자는 입장인데, 법가의 주장과는 대조적이다. 법가의 입장에서는 인의와 겸애로 국사를 볼 경우 국정 농단과 신민들의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기에 예외 없는 강력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한비가 주장한 법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법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집행되는가? 여전히 우리는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며 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렇기에 공정성, 투명성을 상실한 오늘날, 《한비자》에서 주장한 공정의 가치는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한비자》의 비판


《한비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왔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커다란 교훈과 의의를 주는 고전이다. 이번에는 교훈적인 측면이 아닌 책에서 비판하고 싶은 부분을 독자의 입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꼽아보려 한다. 


첫 번째로 《한비자》의 내용은 결국 군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리더들이 《한비자》에 열광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역시 처음 《한비자》를 접했을 때 강력한 리더십에 매료되어 무비판적으로 《한비자》를 좋아했었다. 다른 제자백가에 비해 《한비자》의 내용은 매우 명료하며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강력한 군주의, 군주에 의한, 군주를 위한 철학이 《한비자》의 전부니까 말이다. 그런 한비가 꿈꾸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절대 권력의 강력한 군주가 휘두르는 강력한 법제 시스템 앞에 백성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피지배층은 최고 지배층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도구로 전락하며, 모든 만민은 군주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극단적인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마치 여왕벌과 여왕개미 아래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일벌과 일개미의 모습처럼 부국강병이라는 구호 앞에 개인의 자율이 침해받는 제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비가 추구한 제국의 모습은 이런 극단적인 사회였다.


강한 리더십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비가 주장하는 리더십을 따르게 될 시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로 이어진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절대 권력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개개인의 자유가 공리에 의해 침해받는 사회, 너무도 강력하여 도저히 견제할 수 없는 리더... 한비가 활동하던 전국시대에는 인권이 없는 시대였으며, 정치 제도 역시 군주정이 유일하였으므로 이런 극단적인 정치사상이 통용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권력은 최고지도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대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존립해야 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는 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다. 바람직한 공리주의 역시 개인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로 과연 나라의 부패는 제도 개선만으로 개선될 수 있느냐이다. 국가 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인간에 대한 접근, 두 번째가 제도에 대한 접근이다. 한비는 철저하게 인간을 불신했기에 법과 술, 세로 대표되는 제도적 입장으로 치국에 접근한다. 반면 유가는 성선설을 주장했기에 바람직한 정치는 제도보다 지도자의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입장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바람직한 국가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올바른 제도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 구성원의 의식은 높아도 이를 보장할 수 없는 제도가 없다면 한계가 있으며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졌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악하다면 나쁘게 활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법가 사상의 가장 큰 맹점은 인간을 신용하지 않는 부분인데, 한비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한비가 추종하는 군주 역시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 법가는 군주의 권한을 극도로 높이는 입장인데 이런 무소불위의 군주를 어떻게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가의 경우 전제왕권의 견제 역할로 지식인들을 설정하고 있으며 바람직한 군주는 바른 신하의 직간을 구분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법가는 이런 행위를 군주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한다. 결국 무소불위의 권력을 규제하는 것은 군주 스스로에 몫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한비의 철학에 따르자면 법가철학은 필연적으로 지도자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리해보자면 한비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군주 중심의 절대 권력을 구축하게 되면 나라가 올바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군주 역시 탐욕을 추구하는 인간이므로 결국 국가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비의 정치철학은 《한비자》에서 우화로 예를 든 '모순'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부분과 의식적인 부분 두 영역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하며, 특히 지도층의 경우 권력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내면을 수양해야 한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법가가 주장하는 성악설이 과연 옳은 것일까? 유가와 법가는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극단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선악 양면을 동전처럼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와 공동체에서는 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익이 가장 최우선이 된 사회 풍조에서 마냥 선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인간 사회에서는 선과 악을 골고루 볼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한비가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악하고 이익만을 탐하는 존재라면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기 몸 하나의 보존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와 봉사활동이 이어졌으며, 전국에서 대구 경북으로 자원하여 나간 의료진이 활약 역시 빛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인간이 선을 지향하며 선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인간성을 부정한 한비는 과연 이런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결론


오랜만에 본 《한비자》는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고전은 시대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보편적인 교훈과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한비자》는 중국 최초의 제왕학서, 동양 최초로 지도자의 리더십을 고찰한 책인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으로 볼 때, 책의 가치는 세월이 지나더라도 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회독은 신동준 선생님(이하 신동준)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신동준의 번역은 특히 동양 고전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데, 번역도 번역이지만 역대 《한비자》의 주석서를 비교 대조하여 설명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한 신동준의 번역서는 기존 학계와는 상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이번 《한비자》에서도 이 저술이 한비의 단독 저술이라는 점, 그리고 한비의 죽음이 이사가 아닌 요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역자는 수많은 동양 고전을 번역했지만 대체로 부국강병과 전제정치와 밀접한 법가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긍정하고 있다. 나는 법가에 대해 역자의 생각과 온도차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번역본을 통해, 역자의 해설을 통해, 법가의 유용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9년 고인이 된 역자의 부고 소식을 접하면서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1년이 지난 지금, 역자가 가장 애정 하던 《한비자》 번역본의 개정쇄가 나와서 놀랐는데, 오랜만에 역자 특유의 힘찬 어조의 해설을 접하니 생각의 호불호를 떠나 무척 반가웠다.


내가 《한비자》를 접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평도 이번을 포함하여 세 번 정도 쓴 것 같은데, 뭐든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 이번 서평을 끝으로 《한비자》에 대한 글은 당분간 쓰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한비자》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서평을 작성했다. 아직 풀어내지 못한 생각 - 유가와 법가의 통치술 비교, 기능론과 갈등론적 시각으로 바라본 유가와 법가사상, 마키아벨리 저작과 한비자의 비교 등등 -이 많지만 훗날로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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