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라도, 그중 특히 남도 땅은 예로부터 권력과 거리가 멀었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풍수의 대가 도선이라는 스님이 활동했는데 주로 남도 쪽에서 활동을 하며 명당 터에 사찰을 창건했다. 땅을 보는 데 뛰어난 혜안을 가졌던 도선국사는 왜 많고 많은 땅 중에서 하필 전남에서 활약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전남 지역이 예로부터 권력에서 소외되어서 민초들의 정신이 가장 잘 살아있는 곳이었으며, 그렇기에 민본 중심의 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도선국사의 활약 덕분에 신라 말, 그리고 후삼국 시대에는 남도의 명당 터에 유서 깊은 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들어서면서 전남 지역은 또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후백제의 핵심부 중 하나인 나주를 공략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은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후백제의 왕 견훤의 뒤통수를 때린 습격이었다. 공격은 적진 한복판을 기습하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그렇기에 왕건의 고충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이때 호남 사람들이 보여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훗날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의 왕위에 올라 전남 지역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기용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사람이란 동물은 이렇듯 좋은 일보단 나쁜 일에 더욱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자신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 역시 호남 사람들의(나주) 호응 덕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왕건은 그들의 열의를 두려워했고 끝내 외면했다.


두 왕조를 거치면서 형성된 프레임은 조선왕조에도 유효했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뒤 삼한의 명산, 산신들에게 왕조의 안녕과 축원을 드렸는데, 유독 지리산에서만 좋지 않은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지리산은 호남과 영남을 가르는 곳에 우뚝 서 있지만, 이 산의 역사적인 내력을 쭉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소외된 호남의 흐름과 무척이나 닮았다. 남한 땅에서 가장 거대하고 방대한 산자락이라 그런 것일까. 유독 이 산에는 반골 기질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다.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한 의병들, 실패한 동학농민운동의 농민들, 빨치산 부대 등등... 이념을 초월하여 순탄하게 살지 않았던 당대의 풍운아들은 지리산 산자락으로 도피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리산은 한 많은 그들을 넉넉하게 품어냈다. 그렇기에 지리산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호남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 이런 남도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이었던 동학이 피어났다.

원래 동학은 경상도 땅인 경주에서 최제우가 창시했다. 그러나 영남의 땅이 어떤 곳인가. 역대 이래로 정치의 최전선을 담당하던 곳이었으며 선비문화의 원류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있어 극단과 극단은 때론 상통하기도 하는데 경상도와 동학이 이런 관계다. 사농공상이 철저하게 구분된 선비문화를 지키는 데 으뜸인 지역에서 가장 낮으며, 민중적인 사상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제우 역시 지역적 보수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다 죽는다.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리를 더욱 가다듬으며, 동학은 한층 더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가장 낮은 남도의 땅에서, 낮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가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이 필연은 역사의 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전봉준, 김개남, 그리고 손화중 등등의 동학도는 무장봉기를 통해 남도의 행정력을 마비시켰다. 그들은 수탈이 일반화된 남도의 구슬픈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고, 백제의 멸망 이후로 줄곧 대접받지 못했던 민초들은 이들을 열렬히 호응했다. 남도, 그리고 전라도 일대, 충남 지역까지 민초들의 울부짖음은 이어졌다. 동학군의 아우성은 당시 중앙정부의 무능을 상징했다.


그들은 열망했다. 사농공상이 없는 나라, 차별받지 않는 나라, 최소한 인간답게 살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 현대인인 우리가 봤을 때에는 당연히 누려야 마땅한 것들을 요구하고 열망했다. 세계가 평등사상으로 재무장하고 있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봉건주의 신분제를 고집했다. 참다못한 민초들은 동학을 빌려 사람답게 살 권리를 주장했다. 무능한 국가는 동학군을 두려워했고 결국 일본을 불러들여 민초들을 탄압했다. 체계적이지 못한 움직임, 지도부의 분열 등등으로 인해 동학군은 패배를 했으며 스러졌고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책은 그런 동학 혁명의 흐름을 유적지 위주로 디테일하게 추적한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동학은 굉장히 낯설다. 종교 하면 불교나 그리스도교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동학이라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전해지는 경전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안에 스며든 인간 중심의 사상 역시 사라져가고 있다. 잊힌 사상을 답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을씨년스러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답사 역시 그랬다. 당시 뜨겁게 타오른 장소들은 쇠락하여 흔적조차 마모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텅 빈 공터에서 흰옷을 입은 한 무리의 환영들이 보이는 것 같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나 역시 눈을 감으니 그 무리들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다. 냉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근본적인 원인을 여럿 꼬집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학은 이 땅에서 처음 태어난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불교도 천주교도 유교도 인간 중심을 외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타국에서 건너온 외래 사상이다. 그런데 동학은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리의 사상이다. 이 땅에서 처음 일어난 사상인만큼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학을 따른 사람들은 지식인이나 교양인이 아닌 핍박 받은 백성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하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아쉬움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근대화 바람의 서막을 연 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점이 아닐까.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에게 온갖 한계를 거론하며 냉소적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한계가 있더라도 용기 있게 길을 간 것에 대해 축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책은 표지를 보니 최근에 나왔으며, 일전에 리뷰했던 《신정일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와 흡사한 것으로 봐서 세트인 것 같다. 두 권의 책 중 개인적으로 이쪽이 훨씬 좋았다. 전작인 사찰 답사기는 다소 가볍고 경쾌하게 글을 썼다면, 이번 책은 울분에 찬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저자의 감정에 공감을 하며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동학과 천주교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이 두 사상의 근대화 공로에 대해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시각이나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 두 사상의 공통점은 바로 평등과 자유였다. 신분제 왕조 국가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평등과 자유. 이렇다 보니 문자를 아는 기득권 유자들은 이 두 사상을 싸잡아 비난했고, 후대인은 그들의 남긴 기록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생각한다. 동학의 유적지를 하루빨리 돌아봐야겠다고, 어영부영하다가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에 역사적인 장소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도 나를 들볶는다. 타인이 쓴 답사기로도 이토록 가슴이 아린데, 정작 내 발로 찾아가 살피게 되면 아픔의 증폭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오늘날 개인의 인권이 보편화된 이 시대에서 과연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열망했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올바르게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확언할 수 없는 않는 화두를 가지고 조만간 남도 땅을 다시금 밟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정일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부터 불교 답사를 시작하면서 사찰과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집에는 국내에 나온 유명한 절집 답사기는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에 도보 여행가인 신정일 선생이 사찰과 관련된 책을 냈다고 하여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책은 작은 편이었으며 페이지 수에 비해서 책장도 잘 넘어갔다.


같은 사찰을 소개하더라도 작가에 따라서 포인트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가령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편은 유교수 특유의 현학적이고 심미적인 문체가 돋보이며 최완수 교수의 《명찰순례》 시리즈는 절집에 대한 역사적인 고증에 중점을 둔 깊이 있는 해설이 특징이다. 건축학자 김봉렬 교수의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시리즈는 사찰 가람배치와 전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산사 답사로 명성이 자자한 선묵 혜자 스님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 산사》 책은 기존의 책과는 다르게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절집을 소개하고 있어서 이색적이다. 강호 동양학의 대가인 조용헌 선생의 사찰 답사기는 풍수지리적인 해석이 인상적이다.


그럼 신정일 선생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첫 번째로 평이한 난이도다. 절집 답사에 대해 초심자들이더라도 무리 없이 책의 내용을 소화할 수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 역시 절집에 대한 설화와 역사, 고증 등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유홍준 교수의 책이나 최완수 교수의 책처럼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기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물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내용은 모두 담고 있다.


두 번째로 지리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꼽고 싶다. 신정일 선생은 대중들에게 《신 택리지》 전집으로 대한민국 전역을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그렇기에 저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에 대한 부분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도 그런 저자의 지리적인 묘사와 식견이 듬뿍 녹아있다. 특히 공감했던 점은 해남 미황사 편에서 여느 절집들은 본당 부근보다 사찰이 끼고 있는 산책로가 더 매력적인 경우가 있다고 강조하며 미황사의 부도전으로 가는 길목을 꼽은 부분이다. 또 강진 백련사 역시 절집 부근보다 다산초당으로 이어진 산책로가 아름답다고 극찬했는데, 책에 거론한 사찰과 산책로를 모두 돌아봤기에 저자의 주장에 이백 프로 공감했다.


세 번째로 꼽고 싶은 점은 유명한 관광 사찰이 아닌 나름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한적한 사찰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산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조용한 분위기인데, 관광 사찰은 인파가 많이 몰려들기에 절집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경주 불국사, 양양 낙산사, 속초 신흥사, 양산 통도사... 등등 이름만 들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거찰들이 이에 속한다. 반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찰들은 대체로 조용함을 간직하고 있는 '뼈대 있는 절집'이 대부분이라 선정을 참 잘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곡성 태안사'와 '화순 운주사', 그리고 '양주 회암사'였다. 올해 초 양주 회암사는 템플스테이를 예약해놨기에 조만간 방문할 예정이고 전남에 포진된 두 사찰 역사 빠른 시일 내에 찾아가서 답사를 할 예정이다. 물론 이 책에도 관광지 절집을 소개하고 있긴 한데, 여주 신륵사, 해남 미황사, 공주 갑사 정도다. 이보다 더 큰 관광 사찰들은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한 해에는 메이저급 대찰과 교구본사, 관광 사찰들을 중심으로 답사를 했다. 그러나 올해에는 규모나 유명세보다는 분위기, 그리고 나름의 내력을 가진 흙 속의 보석 같은 가람들을 둘러보고 싶다. 책에 소개된 사찰들의 절반은 가보지 않았는데 덕분에 올해의 답사 계획에 큰 도움을 줄 것 같다. 갈 곳은 많은데 여유시간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다름이다. 그렇기에 주체할 수 없는 역마살을 책을 읽는 것으로 달랜 느낌이다. 아무튼 전남의 유구한 가람들을 답사하러 조만간 나서야겠다. 물론 이 책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풍류의 커다란 축을 읊어보자면 가장 으뜸이 바로 시(詩)이고 그다음이 서예(書)이며, 말미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미술(畵)이다. 그렇기에 지식인 층 가운데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에 두루 능통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세 가지 영역 중 가장 대우받는 것은 바로 시(詩)다. 중화문명의 영향이 짙은 동북아시아 국가에서는 유학의 아버지 공자가 시를 유난히 좋아하고 많이 읊었기에, 옳은 사대부가 아니더라도 즉석으로 시문을 짓지 못한다면 주변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도층은 풍류가 아닌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시문을 짓고 읊는 것에 공력을 다했다. 서예 역시 마찬가지다. 유학과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글씨란 글쓴이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사회의 기득권층은 태어나고 자라면서부터 글씨 연습을 시작으로 글공부에 물꼬를 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와 서예의 공통점은 바로 문자(文)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근대 이전에 시대에서는 문자란 지배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으므로, 미술(畵)보다는 훨씬 격조 있는 대우를 받았다. 풍류의 말미를 차지하는 미술은 지배층이 좋아하고 향유하는 문화였지만, 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두고 속된 말로 천박하는 등의 비하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시각이 무비판적으로 투영된 것인지, 예스러운 문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문과 시문을 읽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외의 서예나 그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이름난 절집들을 답사하면서 명필들이 남긴 편액을 읽고 분석하면서 서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편액과 주련을 읽어나가면서 풍류의 나머지 한 영역인 그림에도 호기심이 일어났는데, 서예는 그래도 사찰의 스님들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림 쪽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이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림 영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모르는 분야를 새롭게 배울 경우, 그 분야의 역사를 우선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의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자 한다면, 의학에 대한 역사를 먼저 공부한다. 이럴 경우 고대 이래로 현대까지 의학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나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에 도서관에 들려 우리나라의 미술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책을 한 권 선별해서 차분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선 후기에 다다랐을 때,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과 민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단원 김홍도에 흥미가 갔다. 그래서 거시적인 미술사적을 잠시 뒤로하고 겸재와 단원에 대한 책을 검색해봤는데, 최근에 김홍도의 전기가 발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른 구해 읽어나갔다.


나를 비롯한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 사람들은 그저 교과서에서 민화의 대표작을 통하여 김홍도를 만난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김홍도는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오늘날 그가 남긴 자필은 전하지 않기에 그의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시중에 파는 책들 가운데에서 김홍도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기술한 서적은 의외로 찾기가 힘들다. 도서사이트에서 검색 결과 그림 작품에 집중한 책이 대부분이던데, 앞서 강조했지만 나는 배움에 있어 역사성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화가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고 싶었다. 화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삶을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홍도의 삶을 서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풀어낸 이번 신작에 기대가 컸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너무 어렵게 쓰여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초반부를 읽어보니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무난하게 읽히는 것으로 봐서 대중적인 눈높이를 적절하게 설정한 것 같다. 책은 평전이 아닌 전기이기에 김홍도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평가는 결여되어 있다. 그저 주어진 사료를 적절하게 분석한 뒤, 이를 토대로 김홍도의 삶을 풀어내고 있는데, 전통적인 문인들의 전기의 경우 그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해석하여 재구성한다면, 김홍도의 경우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을 분석하여 작가(김홍도)의 심경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쓴 김홍도의 모습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읽는 내내 공감을 하면서 읽어서 그런지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김홍도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출중했지만 상류층 양반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생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는 표암 강세황과 심사정이라는 스승을 필두로 이인문, 강희언, 김응환 등등의 벗이 있었으며, 장사를 크게 했던 지인들로부터 커다란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등... 그는 중인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하나로 신분의 한계를 넘은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당시의 평범한 중인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의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임금의 어전을 그린 공으로 벼슬을 얻은 그였기에, 벼슬길에 있어서는 괄시를 받기도 했으며, 녹봉이 없이 일을 한 경우도 꽤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괄시, 그림을 그리는 직업에 대한 천대, 경제적인 곤궁함, 조정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봉은 나오지 않는 열정페이의 현실 등등...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홍도는 현실의 난제한 어려움을 그림에 대한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세간에서 유명세를 치른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보냈으며, 벗들과 나름의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만 '치란무상'이라는 고사처럼 김홍도의 삶 역시 영화와 쇠락의 시기가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됐다.


김홍도의 일생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통 일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이 일치하며, 그 일에 몰두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갔으니 그의 삶이 개인적으로 너무도 부러웠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줬던 많은 인맥들이 있었다. 양반이었지만 중인을 차별하지 않았던 스승 표암 강세황과의 인연, 평생지기라고 할 수 있었던 이인문과의 우정, 함께 산수를 거닐며 그림을 그렸던 김응환,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수제자 박유정, 그리고 곤궁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줬던 거상들 인맥까지...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그 재능을 세상에 꽃피울 수 없는데, 김홍도의 경우 출중한 재능과 더불어 좋은 인맥들과의 만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에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을 해 보자면 김홍도와 같이 출중한 재능과 인맥을 가진 사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무런 인맥이 없이 평범하게 살다 간 일반적인 민초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보통 김홍도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민화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생각 외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겸재 정선과 마찬가지로 산수화도 그렸으며, 양반들이 좋아할 만한 유교 경전에 나오는 그림, 산신도, 그리고 왕실의 그림과 임금의 어전, 그리고 동물을 묘사한 그림도 그렸다. 전기를 쓴 저자의 상세한 묘사와 설명이 있었기에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역시 기본 지식이 없이 관찰하기에는 민화 만한 것이 없었다. 민초들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묘사, 역동성, 그리고 해학성 등등... 특별한 설명이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민화였으니까. 김홍도의 민화 속에는 양반층에게 속되다고 폄하된 조선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으며 민화 속에서 외면받은 민초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책에서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장르는 민화였다. 이토록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김홍도를 '민화의 으뜸'으로 손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최신의 학계 내용을 반영하여 김홍도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출생지를 비롯하여 위작에 대한 부분, 그리고 정조와의 관계에 대한 이견 등등은 최근의 연구결과를 적극 반영한 것이라 더더욱 흥미가 갔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해설도 거북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으며, 김홍도의 대표작들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두께에 비해 책장도 술술 넘어갈 정도로 평이한 서술이 주를 이루지만, 수록된 그림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읽기를 조심스럽게 권장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역사책 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있었다. 최근에는 이 책을 두고 편향된 사관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논평하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출간 당시에는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받은 작품이었다. 영웅주의 사관, 제국주의적 논리를 합리화하는 책이었기에 지성인들에게는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표현 덕분에 로마사에 친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하여 로마에 대해, 나아가 서양사에 대해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인기 이후, 한동안 역사 장르 도서계에서는 'xx인 이야기'라는 유사 제목을 가진 책이 다수 출간되었는데, 그중 눈에 끄는 작품은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다. 이 책은 다방면으로 중국을 해석하고 있지만 역사보다 문화적인 시각을 우선하고 있기에 역사적 시각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준 작품이었지만 주관적인 취향을 배제하고 판단하자면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두 시리즈를 접하고 읽으면서 일본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밀도 있게 분석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김시덕 교수가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출간한다고 하니, 내심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며 쾌재를 불렀다. 김시덕 교수라면 일본을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며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나는 김시덕 교수가 번역한 《교감 완역 징비록》을 읽었는데, 풍부한 자료와 주석이 돋보였으며 우리나라의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 그리고 적군인 일본의 사료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징비록》을 해석한 점도 돋보였다. 특히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과 《난중일기》의 저자 이순신을 묶어서 '동인 중심의 역사 서술 시각'이 오늘날 한반도의 임진전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 것과 동인의 시각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대세의 시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필력 있는 기록'에 있다고 꼬집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주장은 자칫 성웅으로 신격화된 이순신과 류성룡의 위업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국수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혹은 주입된 역사관을 그대로 배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을 대담하게 전개한 저자의 용기와 객관성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있어 감정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두 번에 걸친 침략전쟁, 식민지,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적인 문제 등등... 그렇기에 국내에서 일본을 다루는 대중 도서의 대다수는 대체로 감성적인 부분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감정의 골을 유발하는 나라일수록 냉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교감 완역 징비록》의 역자 김시덕 교수가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낸다고 하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는 고대와 중세는 거치지 않고 16세기인 근세부터 시작하여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데, 내가 지금 리뷰하고 있는 책이자 시리즈의 첫 권은 바로 가장 흥미진진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 - 일본의 군웅할거 시대와 조선과의 전쟁, 그리고 통일의 과정까지 - 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역사책이 권력자와 정치적 흐름을 으로 설정하여 주된 포인트로 전개한다면 이 책은 하층민의 움직임과 문화가 상류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거시적인 정치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하층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중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가톨릭이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역사서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저자는 이 부분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근세와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에 동아시아 국가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한다. 근세 시대에 일본에서 가톨릭은 하층민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평등사상은 신분제로 규정된 왕조 체계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기에 지도층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물론 국가가 분열되고 통일전쟁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려고 노력하지만, 국가가 안정화되고 대외적인 팽창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임진 정유전쟁의 실패) 이에야스는 서양의 종교 세력을 탄압하여 지배층의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노력하였다. 특기할 만한 점은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가톨릭 사상은 탄압하더라도 교역이나 무역에 있어서는 관심을 가진 것인데, 이를 통해서도 동시대 일본의 지배층이 조선과는 다르게 좀 더 개방적이고 실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일본사를 바라볼 때 수많은 다이묘들이 할거하는 상황과,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영웅주의적 관점에 주로 집중하는 것 같다. 이 시대를 다루고 있는 일본 저자들의 책(국내에 번역된 책)을 살펴보자면,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처세와 정치력, 그리고 개인적인 영웅담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이런 시각의 도서들은 대체로 얄팍한 처세나, 흥미 위주의 신변잡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책으로 일본의 근세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가히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 내부의 상황뿐 아니라 일본 외부의 세계를 포함하여 거시적인 관점으로 16세기 일본을 조망하고 있는데, 이렇다 보니 일본 자국의 정치 동향에만 집중하여 분석한 영웅론과는 내용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대중 역사서는 일본을 다룰 때 기껏해야 동아시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일본인 이야기》는 동아시아를 넘어 식민지 경쟁이 진행 중인 유럽 열강들이라는 플레이어를 끌어들여 일본사와 결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세계사의 흐름에서 일본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특기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책을 통해 한층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일본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었는데, 이런 저자의 관점은 글로벌 시대의 역사관에 걸맞은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아쉬운 점을 두 가지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제한된 분량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에 다소 산만한 느낌도 들었다. 나의 경우에는 저자의 부연 설명이 참 좋았지만, 주 논제에 집중하는 독자들이라면 다소 산만하게 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서두에서 가톨릭과 조선과의 관계 그리고 일본 내부의 통일전쟁 흐름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다루고자 노력했다고 했지만,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가톨릭에 대한 내용이 뒤에 두 내용보다 훨씬 많이 할애된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근세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에 있어서 가톨릭 세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이를 너무 부각하다 보니 조선과의 관계와 일본 정치사의 흐름의 서술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을 느꼈던 것 같다. 조선과의 관계는 둘째로 두더라도 일본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어땠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근세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이 시대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 책에서 언급하는 사건들을 바로바로 쫓아갈 수 있었지만,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시대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생각한 점과 느낀 점은 일본의 실용주의적인 관점이다. 당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각각 서양 세력과 조우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서구 세력에 호기심을 보인 반면 조선의 경우는 가장 단호하게 대처했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지배체계를 뒤흔드는 가톨릭 사상은 탄압하는 반면, 서구 나라와의 교역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또한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역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세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또한 저자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지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뛰어난 위인은 두 가지를 두루 갖춰야 하는데, 첫 번째는 행운이며, 두 번째는 바로 그 행운을 받아먹을 수 있는 능력이다. 16세기 서구세력은 동아시아 3국에 러브콜을 날렸지만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나라는 결과적으로 일본밖에 없었다. 중국 역시 관심을 가졌지만 중화사상이라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져서 서구사회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려 하지 않았고 조선은 아예 그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이렇듯 역사에 있어 탁월한 능력은 결국 자신에게 오는 행운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요즘. 최근 발간되는 일본과 관련된 도서들은 대체로 반일감정을 고조하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이 책은 냉정한 태세를 유지하며 역사적인 관점으로 일본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반일감정도 좋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우선이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역사를 통해 뛰어난 인물이나 국가를 분석해 본 결과, 발전하는 인물과 국가는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배척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을 객관적으로 알기 위한 최적의 도서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심도 있게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연말 책을 손에 잡았던 3일 동안 지적으로 충만한 여행을 떠났던 것 같아서 굉장히 행복했다. 다음권이 기다려지는 시리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종 이방원을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철혈군주, 조선의 초석을 다진 군주, 군사 식견이 높은 군주 등등. 여기에 건축왕이라는 수식어도 빠트릴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계천은 태종이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였다.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 많은 명당들을 두루 둘러봤다. 우리나라의 토지는 산지가 대부분이기에 산세가 좋은 곳은 많지만 반대로 물의 지세가 좋은 곳은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한양은 앞에 거대한 한강을 끼고 있으며 뒤에는 산자락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니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한양 도성과 한강의 거리는 떨어져 있어 한양 도성 백성들이 실제로 한강물을 활용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지금의 종로구 일대인데, 지금은 청계천이 흐르고 있지만 조선이 건국할 당시에는 하천이 없었다. 이를 걱정한 태종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을 필두로 하여 청계천 공사를 감행한다. 이렇게 규모가 큰 공사의 경우 다른 왕이었더라면 신료들과 탁상공론식 토론을 거치며 미적지근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을 텐데 태종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공사를 속전속결로 감행한다.

 

하천 공사를 마친 뒤 태종은 내친김에 경복궁의 메인 누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회루를 이어 건설한다. 이렇게 태종과 박자청은 1년에 거대한 공사 두 가지를 끝내는데, 리더인 태종의 뚝심과 실무자인 박자청의 탁월한 능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외에도 태종의 건축적 업적은 여럿 있는데 창덕궁 건설, 종묘 증축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종묘의 경우 이성계가 집권할 당시 지어졌는데 당시의 모습은 길쭉한 일자 형태의 전각이 전부였다. 태종은 심심하게 보이는 일 자(一) 형 종묘 전각 양 끝에 월랑을 설치하여 종묘의 구조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종묘 안에 공신전과 영녕전 등의 전각을 건설했다. 또한 종묘 앞 구역에 가산(假山)이라는 인공 숲을 조성하여, 건축의 자연미와 인공미를 조화하는 식견을 보여줬다.

 

물론 이 모든 건축적 업적은 실무자 박자청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박자청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대 임금의 사당인 종묘와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공사를 자기 멋대로 처리할 순 없을 것이다. 아마 실무적인 능력이 탁월한 박자청이기에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디자인을 태종에게 보여주고 태종의 결제를 받은 것을 바탕으로 공사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봐도 결국 건축의 최종 디자인은 태종이 결정하는 꼴이니 태종의 건축 안목이 탁월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록에서는 박자청에 대하여 굉장히 부정적으로 기록한다. 박자청은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공사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6조의 수장인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베타적인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학식이 없는 박자청이 변변치 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도 박자청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으로 기록하고, 대간들도 수시로 박자청을 탄핵하지만 태종은 허울 좋은 학식보단 '능력'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 군주라 사대부들의 집중포화 속에서 박자청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태종의 건축철학을 실제로 구현할 인물은 당시 박자청 외에는 전무했기 때문이리라. (비슷한 예로 태종은 무인이지만 우의정에 오른 조영무의 탄핵도 적극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에서 사대부들의 베타적인 모습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요점을 추려보면 태종이 기획한 건축은 실용과 심미, 그리고 인공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에 있어 이토록 탁월한 안목을 지닌 지도자는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이 골격을 잡아 완성한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의 뛰어난 건축적 안목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에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번 권에서는 전체적으로 나라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 제도 정비, 지방제도 정비, 군사제도 정비, 예법 정비, 그리고 왕실 종친들의 서열 정리, 청계천과 경회루를 중건하는 모습 등등... 태종 하면 그저 처남을 때려잡고 아버지를 압박해서 왕이 되어서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시각이 많은데, 실제로 태종은 정쟁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조선의 발전에 대해서 늘 고민했던 리더였다. 정쟁과 정치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오늘날 정치판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인은 많은 반면, 실질적인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태종은 이 두 가지, 정쟁과 치국을 동시에 행했다. 태종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사사건건 트집 잡는 대간들과 척을 지고, 정권을 위협할만한 세력들을 제거하는 정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태종이 위대한 점은 이런 정쟁을 통해 획득하고 유지한 권력을 철저하게 치국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정쟁 속에서도 국가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으며, 창고를 부유하게 만들고, 예법을 정리했으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본 청계천 공사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일련의 정쟁 활동 속에서도 태종은 중심을 잘 잡았다. 자신을 압박하는 대간들을 억누르면서도, 연산군처럼 극단적으로 대간들을 없애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간들의 언로 행동은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본은 소통이니까.

 

그래서 태종의 정쟁은 나름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더라도 최소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태종의 모습이 아니라 더욱 신선했다. 물론 정도전을 비롯한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뒤끝을 보여줬지만, 태종에게 있어 이런 증오의 대상은 극소수였다. 선조나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을 도모하여 쓸데없는 대규모 희생을 불렀다. 그러나 태종은 문제의 주모자만 처리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신하들은 태종에게 '살려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태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꺾인 세력인데 무엇을 더 무서워하는가?, 설사 반란이 일어난다 한들 진압할 자신감이 있으니 걱정 마라.' 이런 태종의 모습에서 다른 군왕들이 가지지 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노련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태종과 안정된 정권을 확인하면서 난세가 치세로 바뀌고 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국가와 통치에 대해서는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터진다. 바로 세자 양녕.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녕의 일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된다. 재위 11년에서도 양녕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기록이 종종 있었는데 12년에는 더욱 많아졌다. 세자의 사부인 이래의 완곡한 주청 밑에 사관이 '세자가 잡인들과 어울려 논다.'라고 써놨는데, 이를 통해 양녕의 일탈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태종의 조치다. 다른 일은 칼같이 처리하는데 반해 양녕에 일 앞에서는 미적지근하고 감싸주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날이 갈수록 국가의 기틀은 튼튼해져 가는 반면, 미래 권력을 이어받을 세자의 일탈 역시 깊어진다. 태종의 모토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인데, 그런 점에 비춰봐도 너무 안일하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아무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종의 안일한 대처 덕분에 조선은 대한민국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세종의 집권 배경에는 양녕을 버리고 충녕을 선택한 태종의 결단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선택은 태종이기에 가능했으니까. 태종이 양녕을 꾸중하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만약 꾸중한 결과 정신 차려서 양녕이 왕으로 등극했다면, 세종이란 존재는 조선에 없었을 것이며, 내가 쓰는 이 서평도 한자로 기록했을 것이다. 변수가 많은 역사에 있어서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본다. 미적지근한 태종의 태도가 세종의 집권으로 이어졌으니 맏이의 일탈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한 태종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고 있는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태종답지 않은 미적지근한 처리가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느껴졌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