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발전할 수 없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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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발자취는 동아시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양의 여러 열국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계승해왔으며, 더러는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사는 동아시아 문명을 주도하는 축이었으며, 그렇기에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동양문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원 대륙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분열된 시대이며, 두 번째는 통일 제국의 시대다. 전자는 난세, 후자는 치세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분열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시대(5호 16국 시대), 오대 십국 시대를 꼽을 수 있겠고, 통일된 제국 시대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기가 대표적이다. 보통 역사의 흐름은 난세와 치세가 반복되는데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찢어진 세력은 끝내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지지만 그 제국의 수명이 다하고 난세가 도래하면 또다시 군웅들이 할거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분열된 시기보다 제국의 시대가 더 좋을 것 같지만, 역사를 꼼꼼하게 해석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오늘 리뷰할 도서의 주인공인 당나라는 중국의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난세 중에 난세인 전국시대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진시황제의 진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법가를 앞세운 폭정이 극도에 달해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왕조 한나라는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어수선했던 사상과 행정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유학을 극도로 숭상했다는 것이다. 한나라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한무제는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들을 무찔러 한나라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림과 동시에, 사상에 있어서 유교의 일원화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이후 중원 대륙에서 유학은 나라의 으뜸 이념이 되었으며, 이는 2000년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런 한나라가 몰락하고 삼국시대를 거쳐 잠시동안 진나라가 통일을 하는가 싶더니 이민족들의 침탈로 인해 중원은 다시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 난세의 시기를 통틀어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명명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한나라 때 형성된 유학 일원화 사상이 느슨해지고, 자유분방한 도가 철학이나 방술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시기, 중국의 북방은 여러 이민족들이 점령하여 새로운 왕조들을 개창하였는데, 이로 인해 중원에 이민족들의 풍습이 대거 유입되었다. 즉 중원의 북방에는 유목민들의 문화가, 남방에는 한족의 문화가 공존했던 것이다. 이를 좀 더 풀어보자면 역사에 있어 난세의 시기는 무차별적인 혼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명, 사상과 사상의 융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겠다.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수나라인데, 수나라 역시 앞선 진나라와 같이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당나라에 권좌를 내줬다. 그리고 당나라는 중원을 300년 동안 다스리게 되는데, 지금까지 중원에 들어섰던 나라들 중 한나라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권좌를 유지한 나라는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중원을 다스린 제국인 만큼, 당나라의 발자취는 중원을 넘어 동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책을 통해 면밀하게 살펴본 바, 당나라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위진남북조 시대의 흔적인 유목문화와 한족 문화의 융합

2. 사상과 종교의 다원화 (유교, 도교, 불교의 공존)

3. 중화문명권의 확장과 개방적인 문물 교류

당나라 시대의 키워드를 하나로 정리하자면 '포용과 다원화를 존중하는 개방성'이다. 이전에 들어섰던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중앙집권을 도모하며 일원화된 체계를 추구한 것과 무척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당나라 시대에도 지식인층이나 지도자층의 기본 이념은 유교에 입각하였지만, 불교와 도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서양 행상들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국제도시로 명성을 쌓았다. 같은 통일왕조더라도 한나라의 수도 장안, 낙양과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던 셈이다.

당나라의 다원성은 이후에 들어서게 되는 송나라와 비교할 때에도 두드러진다. 당나라 몰락 이후 5대 10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송나라가 통일하는데, 문제는 이 송나라에서 탄생한 주자학에 있었다. 주자학은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강화하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더한 학문이다. 주자학의 탄생 이후 중원에 들어서는 나라들은 주자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 역시 멸망할 때까지 주자학을 신봉했다. 즉 송나라는 주자학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동아시아 문명에 주류 사상으로 고착화했다. 이런 모습은 한나라의 유학 일원화 정책과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주자학적 사고관에 함몰된 지식인들은 유학을 으뜸으로 숭상한 한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반면, 다원화된 사상과 문화를 추구했던 당나라와 청나라에는 베타적인 시각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편파적인 시각이며, 당나라와 청나라는 중국의 대륙에 사상과 종교, 문화의 다원화를 추구했고 유목민과 한족 농경문화를 융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왕조라고 생각한다. 이들 왕조가 있었기에 동아시아 문명국가들은 유교와 더불어 불교 도교의 문화를 다양하게 추구할 수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위상을 가진 당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흔히 우리는 당나라의 지도자를 생각할 때, 아버지와 형, 동생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정관의 치를 구성한 태종 이세민에 관심을 집중한다. 확실히 태종은 불세출의 명군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출중했으며, 정치적 식견 역시 탁월했다.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대체로 난세를 치세로 바꿨던 경우가 많으며, 권좌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피를 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당 태종 이세민을 비롯하여, 명 태종 (훗날 성조로 바뀜) 주체, 청 태종 홍타이지 그리고 조선에 태종 이방원 등등이 있다. 이들은 군사적 업적이 탁월했으며, 정쟁을 통하여 권좌를 획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태종 이세민은 여러 나라의 태종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 역시 말년에 자만으로 인해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후계구도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운 것이 압도적이니, 후대인들에게 명군으로 인식됐다.

나는 널리 알려진 당 태종보다는 당 현종에 더 관심이 갔다. 당 현종 이융기도 초년의 모습은 당 태종과 흡사했다. 측천무후의 집권 이후 혼란했던 당나라 국정을 바로잡았는데 여기에 중심적으로 앞장선 인물이 바로 당 현종이다. 그는 태종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스스로 습득했으며 이를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숱한 정쟁 끝에 황위에 올라 백성들을 위한 정사에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나라의 중흥기, 개원성세는 그렇게 당 현종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 현종의 치세는 용두사미로 끝난다.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권신들에게 양보하고 주지육림을 탐하여 제국의 몰락을 앞당겼다. 중앙의 정치 시스템이 타락하자 그 틈을 탄 지방의 번진 군벌 세력들이 궐기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녹산의 난이었다.

중국이라는 넓은 땅을 한 사람이 통치하려면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역대 황제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나 군벌 세력을 어떻게 통제할까 고민하였는데, 현명한 지도자들은 이를 잘 통제했지만, 어리숙한 황제들은 도리어 번진 세력들의 먹이로 전락했다. 주색에 빠진 당 현종은 초년의 기개 있는 모습을 상실했고 초심을 잃었다. 이후 당나라의 황제들은 비대한 지방 번진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황제 입장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은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환관들 뿐이었기에, 이들을 총애하여 군권을 양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환관 세력의 정치적 전횡으로 이어졌는데, 실권을 가진 환관들이 도리어 황제를 업신여기고 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된 것이다. 이렇듯 당나라 중후반기의 모습은 밖으로 지방 세력들이 날뛰고 있고, 안으로는 환관들이 도당을 지어 황제를 핍박하고 있었다.

300년의 당나라 역사를 개괄하여 보면 뛰어난 성군보다는 혼군이나 암군이 월등히 많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무측천과 양귀비 등의 여걸들의 활동도 두드러지며, 환관의 전횡, 그리고 지방 세력의 궐기 등등도 두루 드러나 있다. 무측천의 등장에 대해서 기존의 사관들은 매우 비판적인 시각이지만, 그래도 변명 아닌 변명을 끄적여보자면 남성 중심주의 제국에서 여성 황제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보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이런 여황제의 출현 역시도 당나라의 개방성과 관련이 깊지 않나 생각이 든다.

동양의 역사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계층의 수요를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반복되는 교훈을 음미하며 정치의 직간접적인 자양분으로 삼았다. 고루해 보이는 왕조국가의 역사가 급변하는 오늘날 현대사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역사교육의 인식이 약해지는 오늘날, 자국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에 중국의 역사까지 읽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역사란 반복되는 인간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인류는 이 보편성을 거울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열어왔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존재가 집단생활을 영위한 아래, 시공간을 초월하며 드러난 '인간만의 보편성'을 감히 간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급성장하는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DNA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문화적 코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적 코드를 분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겠지만 그들이 살아온 발자취,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나라는 중국인의 사고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제국이다. 그렇기에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당나라의 역사를 살피려면 단편적인 검색에 의존해야 하거나, 너무나도 방대하며 전문적인 원전(가령 예를 들면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을 살펴야 했다. 이 책은 비전문가도 손쉽게 당나라의 역사를 조감할 수 있게 서술되어 있으며, 중국 역사의 입문서로도 안성맞춤이며, 나아가 깊이 있는 내용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급성장하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 혹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고자 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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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4 - 로마와 지중해 세계 리비우스 로마사 4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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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그리스 반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대부분인데, 원전의 권수로는 31 ~ 4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주적이었던 한니발은 그리스 지역의 실력자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한니발의 패배 이후 로마는 후방에서 계속 신경을 긁던 그리스 지역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고, 그 결과 3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 끝에 그리스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해양(지중해)으로의 진출과 정복전쟁에 대한 자신감이다. 강대국 카르타고를 두 번이나 이겼다는 사실은 로마의 자존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리스 세력과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헬레니즘 문화의 주도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시초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손꼽은 지역이다.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도 그리스 지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리스의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유 역시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비롯했다. 조선 시대까지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문자인 한문으로 글을 읽고 썼는데, 마찬가지로 이 당시 로마의 지식인들은 그리스 헬라어를 바탕으로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를 공부했다. 예로부터 동양 문화를 주도했던 나라가 중국이라면 고대 서양 문명을 주도했던 지역은 로마가 아닌 그리스였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서구 문화 나아가 헬레니즘 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은 그리스지만, 실질적인 힘은 카르타고를 무찌른 로마에게 있었다. 이 당시 그리스 지역은 로마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도시국가들끼리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입장에서 그리스는 '언젠가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로마인들은 '난폭한 야만인'으로 통용되었고, 자부심이 강한 로마인들 입장에서 그리스인들은 '문화적 수준은 높지만 이를 지탱할 실질적인 힘이 없는 허풍쟁이들'로 비쳤다. 그렇기에 로마는 '그리스 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 아래에 그리스 지역으로 군사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 문명을 힘으로 계승'하겠다는 의도였다.

 

문화를 힘으로 쟁취하려는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지중해를 이용하여 해양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타깃이 바로 그리스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식민지 정책을 본받았는데 기존까지 로마는 점령한 도시에 대하여 동맹 관계로 예우하고 존중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점령지들을 속국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편 그리스의 맹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는 야심만만했으며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한니발의 제의를 받아 로마의 신경을 건드렸는데 양국의 전황을 살피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로마 입장에서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랬기에 포에니 전쟁 직후 사절을 파견하여 전쟁의 구실을 찾아 그리스 지역을 정벌하는데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로마는 제국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스페인, 카르타고, 그리스를 시작으로 서쪽으로는 서부 유럽 갈리아와 영국,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지방까지 세력권을 형성했다.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에 있어 스페인과 카르타고 점령이 물리적인 실력 과시였다면, 그리스 점령은 영토 점령보다는 정신적인 사상과 문화를 흡수, 계승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스 점령을 끝으로 로마는 서구 문명의 계승자임을 증명했으며, 제도와 군사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국가로 공인받았다.

 

고대 ~ 근세의 강대국들은 대부분 제국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왜 그랬을까? 노골적으로 꼬집자면 부유와 풍요 때문이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고단하고 괴로웠지만 그 이득은 엄청났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전쟁 배상금을 비롯하여 엄청난 이권을 챙겼고, 이에 맛 들인 로마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더욱더 많은 영토를 추구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부유와 풍요가 과연 국가의 발전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되는가이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부와 풍요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의식이 높은 국가일지라도,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없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로마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가의 부와 풍요가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넘치는 풍요가 국가 발전에 있어 반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로마는 그리스인들의 추구하던 사치와 쾌락, 환락들의 요소들도 남김없이 수용했고 이런 과도한 풍요는 결국 로마의 정신의 타락,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또한 제국주의를 추구하던 로마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에 한계를 느꼈다. 로마의 원로원과 호민관들은 광활한 속주의 지방관들을 견제할 여력과 힘이 없었는데, 이런 틈을 타서 속주의 지방관들은 군벌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군벌 세력들의 경쟁을 통해 로마는 1인 독재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카이사르와 그를 계승한 아우구스투스다. 역대 이래로 로마의 지성인들은 공화정 체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보장받았기 때문인데, 절대자의 노복이나 신민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으로 인정받는것을 명예로 생각했다. 그래서 리비우스를 필두로 하여,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 등등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그리워하며 찬양하였다. 18세기 서양 사회에서 신분제 타파 운동이 일어난 것도 고대 그리스 이래로 '자유'에 대한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인데, 이런 정신의 근원을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넘치는 풍요는 국가를 외향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공화정이라는 정치 제도를 붕괴시키는 시초가 된다. 공화정이 사라진 뒤, 로마는 탐욕스러운 황제들의 지배를 받는 제정 사회로 진입하였다. 물론 황제의 지배를 받는 로마 제국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았지만, 공화정 시대보다 시민들의 자유의지나 사회적 활력이 결여된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의 메인은 그리스 정벌이지만, 포에니 전쟁의 주축이었던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최후도 자세하게 나와있어 흥미를 끈다.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남아 내정 개혁을 시도하지만 친로마 의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축출되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 의탁했다. 한니발은 강적 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시리아와 카르타고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안티오코스는 차례로 로마의 침략 앞에 무너졌고 한니발 역시 소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망명자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스키피오는 동생 루키우스의 그리스 정벌에 군사 참모로 참여하였는데, 소아시아에서 감찰을 나갔을 때 숙적 한니발과 마주하게 된다. 두 장군은 여기서 허심탄회하게 서로를 인정했으며 훈훈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만남을 두고 리비우스가 지어낸 허구로 의심했다.

 

스키피오의 최후 역시 한니발과 비슷했다. 조국을 구원한 스키피오는 명성과 권력이 정점에 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원로원들의 질시와 질투를 받았다. 결국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압박을 받아 해안 도시 리투르눔으로 은거하여 고향인 로마를 다시 찾지 않았다. 로마를 구원했으며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스키피오의 업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거대한 업적 때문에 스키피오는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 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그런 상황을 뼈져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키피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공화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입장을 상기하며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렇듯 포에니 전쟁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로마의 군벌 세력은 권력과 세력이 강하여도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 권을 끝으로 현재 전해지는 《리비우스 로마사》 완독을 완료했다. 책을 통해 로마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로마 초기의 활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즐거웠다. 비록 온전하게 전해 내려오지 않고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고전이지만 이번 번역을 통해 리비우스의 수려한 필력을 접할 수 있게 된 점도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묵직하고도 의미 있는 고전으로 새해를 열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 이번 《리비우스 로마사》 완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에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고전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의 요약본'과 '폴리비우스의 《역사》'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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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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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3》의 내용은 포에니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1,2,3차 중 가장 치열했던 2차 포에니 전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책은 로마를 괴롭혔던 문제적 인물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등장과 알프스 진군으로 시작하여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굴복시키는 부분에서 끝맺고 있다. 지금까지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어왔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로마사는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과장하자면 로마사 = 전쟁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포에니 전쟁은 지금까지 로마가 성장하기 위해 치러왔던 전쟁들과는 급이 달랐다. 포에니 전쟁은 양국의 국력이 가장 융성한 시기에 일어났으며, 어느 한쪽의 우열도 쉽게 논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 치렀던 전쟁이 소규모 전투였다면 포에니 전쟁은 가히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와 카르타고 두 강대국은 번영을 위해 지중해와 스페인 영토를 자국의 영향력에 두려고 노력했기에 세력권 충돌 이후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3번의 큰 전쟁이 벌어졌다. 그랬기에 양국은 서로에 대한 원한이 깊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입장에서도 카르타고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전쟁이었다. 카르타고는 1차 포에니 전쟁 패전 이후 이를 갈며 국력 신장에 힘을 쏟았고, 한니발이라는 뛰어난 군사 천재를 앞장세워 철천지원수 로마를 이기기 위해 치밀한 복수를 준비했다. 로마 역시 전쟁 초기 카르타고 군의 카운터펀치에 제대로 휘둘려 국토가 유린되지만, 파비우스의 지연전술, 마르켈루스의 시리쿠사 점령 및 소규모 게릴라 공격, 스키피오의 스페인 세력권 탈환과 카르타고 급습 등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끝내 승리를 쟁취한다. 1,2,3차 포에니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 바로 2차 포에니 전쟁인데 《리비우스 로마사 3》 번역본을 통해 독자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긴박한 상황,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영웅적인 업적, 전쟁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 앞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처 방법 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포에니 전쟁의 주역인 두 나라인 로마와 카르타고는 군대 운용 방식이 무척 상이했다. 로마의 경우 군대는 기본적으로 자국민이 주력군을 담당하고, 식민지나 동맹 도시에서 파병된 군사들을 보조 인원으로 활용하였다. 반면 카르타고의 경우 주력군을 용병으로 구성했기에 로마에 비해 소속감이 떨어졌다. 용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 군대였기에 군의 규율을 다지기 위해서는 카리스마가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카르타고의 지휘봉을 잡은 장군은 카리스마가 뛰어난 용장 한니발이었다. 한니발은 엄격함이라는 채찍과 물질적 풍요라는 당근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소속감이 결여된 용병 군대를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그 결과 포에니 전쟁 초반에 카르타고군은 승전을 거듭했고 로마군은 연이은 패배를 겪으며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로마의 다양한 인재 활용이 부각되었는데, 카르타고의 경우 한니발 원톱 체제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로마의 경우 지연전술을 주로 사용하며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던 파비우스, 지속적으로 게릴라 부대를 활용하여 한니발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로마의 검' 마르켈루스, 패기 있는 기상과 비범한 전략을 구사했던 스키피오 등 시기와 상황에 맞게 필요한 인재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했다. 그렇기에 하나의 뛰어난 장군에 의존했던 카르타고는 다양한 인재를 활용하던 로마를 이길 수 없었으며, 한니발의 패색이 짙어지자 승리의 여신은 필연적으로 로마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비우스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포에니 전쟁의 승리 원인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손꼽는 것이 '로마의 정의감'이다. 그러나 이는 '강대국의 시야에서 바라본 자문화 중심주의'가 아닐까?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사관의 기록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로마식 정의관을 접하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중화주의'였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한나라에서도 자신만의 문화를 중심으로, 으뜸으로 여기며 다른 이민족들은 오랑캐로 여기며 배척했는데 로마식 정의관도 이와 매우 흡사했다. 따지고 보면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고 한나라와 흉노는 세력 확장과 그에 따른 이득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면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세력권을 넓히려는 탐욕과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시기에 강대국들은 자국을 발전시키겠다는 욕망의 충돌 사이에서 이기는 것이 곧 정의고 패배하게 되면 몰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카르타고와 흉노는 패배하여 멸망했고, 로마와 한나라는 '정의'로운 문명국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럼 로마의 승리 원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바로 다양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였고, 두 번째는 바로 자국민 중심의 군대를 구성하였기에 카르타고 군에 비해 소속감과 의무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바로 한니발의 군대가 탐욕과 욕망, 풍요에 길들여져 기강이 빠진 이유인데, 로마의 세력권 중 환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카푸아에서 겨울을 나게 된 것이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카푸아는 로마의 목전인 캄파니아 지방의 맹주였으며, 로마의 오랜 우방으로 활동하던 도시였다. 그러나 한니발의 위세에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 정복군에게 온갖 환락과 쾌락을 선사했다. 탐욕스러운 용병이 주축이었던 카르타고군은 카푸아의 환락에 전의를 상실하였으며, 그 결과 날카로운 기세를 잃어버리고, 전투의지 역시 무뎌졌다.

 

책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 가장 주축이 되는 인물은 한니발과 스키피오다. 두 장군은 당대 최고의 전술가였으며, 나라의 국운을 책임지고 싸운 용장들이었다. 또한 이 두 인물은 해설에서도 언급했듯 가족들 역시 포에니 전쟁과 깊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한니발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 군대를 지휘했던 하밀카르 바르카였고, 스키피오의 아버지도 1,2차 포에니 전쟁 때에 로마군을 이끌고 활약했던 장군이다. 한니발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로마에 깊은 복수와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키피오 역시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해 카르타고를 무찌르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두 인물 모두 전투에 대한 투지, 그리고 적군에 대한 깊은 적대심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장군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는데, 한니발은 카리스마를 내뿜는 외향적 장군인 반면 스키피오는 온화하고 인덕을 갖춘 덕장에 가까웠다. 또한 한니발은 자신의 욕망과 용병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부도덕한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여기까지 보면 리비우스가 한니발보다 스키피오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스키피오의 온화한 성품 때문에 일어난 문제점도 꼬집고 넘어갔다. 한니발은 군사들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관리하여서 휘하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스키피오 부대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스키피오의 도덕적이고 온화한 성품이 통솔에 있어 이점으로 작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리비우스는 로마 사람이며 《리비우스 로마사》는 기본적으로 로마의 위대함을 부각하기 위해 쓰인 역사서다. 만약 리비우스가 로마의 치부를 감추려고 했다면, 스키피오에 단점을 숨기고 한니발을 더욱 악독하게 서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한니발의 장점도 인정함과 동시에 스키피오의 단점들을 최대한 공정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객관적인 서술 덕분에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있어 리비우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1~10권, 초반부는 온전하게 전해지는데 왜 그 뒤의 내용은 파편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10권 이후에 전해지는 내용은 21 ~ 45권이 전해지는데, 방대한 내용 중 왜 하필 21 ~ 45권만 전해지는 걸까?'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내 나름대로 추론을 해서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 ~ 10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 덕분인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을 바탕으로 하여 쓰인 책이기에, 이를 읽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을 소중하게 보관하지 않았을까.

 

그럼 21 ~ 45권은 왜 전해지는 것일까? 21권의 시작은 한니발의 등장인데,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30권에 이르러 전쟁이 종결 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이 마무리되는데, 이 사이의 내용은 비교적 온전하게 내려져오고 있다. 왜 2차 포에니 전쟁이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일까.

 

좁은 식견으로 이유를 판단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 시기의 내용은 무척 재미있다. 예로부터 역사서는 딱딱하고 지루한 서술이 많은데 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 리비우스의 글은 역사서가 아닌 전쟁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표현과 수사가 생동감 있다. 또한 한니발과 스키피오라는 두 주인공 가문을 주축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거대한 메인 플롯과 더불어 다채로운 서브플롯들을 설정하고 있어 읽고 즐길 거리가 풍부했다.

 

두 번째는 2차 포에니 전쟁은 중요성이다. 앞서 서술했듯 로마에게도 카르타고에게도 2차 포에니 전쟁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이 전쟁의 승패로 인하여 식민지 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느냐, 국가의 멸망이냐의 기로에 섰기 때문이다. 로마의 발전단계는 여러 시기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식민지 정책을 활발하게 진행한 것은 2차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였다. 그랬기에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는 '로마 제국 탄생의 밑거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 지역에서 간을 보며 신경을 거스르게 했던 마케도니아를 정벌하는데 그 과정을 담은 내용이 30 ~ 45권에 나와 있다. 그렇기에 전체 로마사의 비중에서 2차 포에니전쟁은 무척 중요했고 그랬기에 이 시기 기록이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역사적 패자인 한니발에 대해서 깊이 동정하는 것은 어쩌면 리비우스의 생동감 있는 필력 덕분일 것이다. 만약 《리비우스 로마사》의 2차 포에니 전쟁의 내용이 전하지 않았더라면, 한니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하고 생동감 있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 문헌으로는 폴리비우스의 《역사》와 플루타르코스의 《비교 영웅전》 정도인데, 폴리비우스의 책은 번역본도 없으며 서술도 무미건조하여 리비우스의 글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의 《비교 영웅전》의 경우 안타깝게도 2차 포에니전쟁의 중심인물인 스키피오를 서술한 부분이 없어졌다. 그런 점에서 한니발은 적국 출신이지만 2차 포에니 전쟁을 심도 있고 디테일하게 묘사한 리비우스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2차 포에니 전쟁을 가장 디테일하게 표현한 고전은 《리비우스 로마사》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다.

 

번역본 기준으로 1000쪽에 육박한 거대 벽돌 분량이지만 내용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기에 독서에 빠진 날들이 무척 즐거웠다. 남은 번역본은 4권 로마와 지중해 세계인데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로마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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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세트 - 전4권 리비우스 로마사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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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새해, 인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만한 대작이 완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 기뻤다. 그 주인공은 바로 《리비우스 로마사》로,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기존에 출간된 1,2권을 포함하여 남은 3,4권을 동시에 발간하면서 총 4권의 세트 전질을 완성했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로마의 역사서 중 가장 권위 있는 작품이자 고전으로 마키아벨리를 포함한 서구의 지식인, 명사들에게 필독서 또는 애독서로 손꼽는 책이다. 책은 150권으로 기획됐지만 저자인 리비우스는 141 ~ 142권을 쓰다가 사망했다는데, 완성되지 못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부분은 1~10권, 그리고 한니발과 스키피오 장군의 싸움을 다룬 21권 ~ 30권(국내 번역 단행본 3권 분량), 그리스 정복을 다룬 31 ~ 45권(국내 번역 단행본 4권 분량)이다.


1,2권을 읽어본 바, 리비우스는 역사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문장과 수사가 아름답고 표현 역시 무척 세련됐다. 그는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는 역사서에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과 수사를 덧붙여 맛깔나는 표현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는데, 이런 점은 동양의 역사 아버지이자,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사마천의 필법과 비슷하다. 사마천의 《사기》 역시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과 견줘도 떨어지지 않는 문장을 자랑하여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역사의 탈을 쓴 문학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리비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두 저자는 각각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손꼽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양 문화 영향 덕분에 《사기》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진 반면, 《리비우스 로마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서구의 《사기》'라고 할 수 있는 《리비우스 로마사》가 완역됐으니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인문학 수준을 한층 격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를 깊이 있게 탐독하여 재해석하고 정리하여 《로마사 논고》라는 책을 완성한다. 마키아벨리는 방대한 《리비우스 로마사》 중에서 초반 부분 즉 1권 ~ 10권까지의 내용에 집중했는데 주된 내용은 로마의 건국과 이탈리아 대륙 통일을 다루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건국 과정과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리비우스 로마사》를 토대로 하여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어 사분오열된 중세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리더와 정치체제를 희망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각각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에 담아냈다. 이렇듯 마키아벨리에게 《리비우스 로마사》는 지적인 영감을 선사했던 중요한 고전이었다.


이번에 완역된 번역본 기준으로 내용을 살펴보자면 1권은 로마의 건국,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수립을 다루고 있고 2권은 도시국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새롭게 출간된 3권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1,2,3차 포에니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2차 포에니 전쟁을 조명하고 있다. 3권을 통하여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과 로마를 구원한 스키피오의 무용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4권은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동쪽 그리스 지역을 정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체제로 들어선 로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서구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그리스와 로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담은 역사 고전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리스의 역사를 다룬 유명한 고전으로는 그리스의 시작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다루고 있는 책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그리스 반도 전쟁 직후의 긴밀한 시기를 다룬 크세노폰의 《헬레니카》 등을 꼽을 수 있다.


고대 서양 문명은 그리스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꽃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로마는 그리스의 정신, 뛰어난 철학과 자유를 추구한 제도를 이어받은 국가로 고대 서양 문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중 로마의 초창기이자 공화정 시기, 제국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담은 고전이 오늘 소개하는 《리비우스 로마사》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로 인하여 로마 제정으로 들어선 시기를 다룬 책은 타키투스의 《연대기》, 그리고 《역사》가 대표적인데, 수에토니우스의 《열두명의 카이사르》도 참고할 만하다. 로마 제정의 전성기에서 쇠망사를 다룬 고전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가 유명하다.

시간의 흐름으로 시대를 서술한 방식(편년체 - 앞에 설명한 고전들은 모두 편년체다)이 아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기전체)는 그리스와 로마 영웅을 서로 비교하여 우열을 논한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비교 영웅전》이 있다.

이렇듯 《리비우스 로마사》는 로마 역사의 초반부를 다루고 있는 고전이기에 무척 중요한 책으로 인식됐다. 《리비우스 로마사》가 완역되어서 우리는 리비우스의 수려한 문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며, 기존에 번역된 서구의 유구한 역사 고전들과 비교 분석을 할 수 있게됐다.


2019년에 완역된 역사 고전 중에서 《리비우스 로마사》와 견줄 만한 책이라면 반고의 《한서》를 꼽을 수 있는데, 두 책 모두 중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번역이 되지 않았었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중요성은 앞에서 누누이 언급했으니 생략하고,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계승한 역사서로 동양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손꼽아온 역사책이다. 두 책은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제국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리비우스 로마사》는 고대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로마의 부흥기를 다루고 있으며, 《한서》는 고대 동양 문명을 대표하는 한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두 책을 비교, 대조하여 읽으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동질감과 이질감을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대작을 접하게 되니 기분이 설렌다. 1권과 2권은 읽어봤기에 연휴를 맞이하여 3권을 읽어나가고 있다. 3권과 4권 역시 자세하게 읽은 뒤 개별 리뷰 포스팅도 작성할 예정이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므로 조바심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나갈 생각이다. 새해 좋은 양서와 함께 시작하게 되어서 기분이 매우 좋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분들, 그리고 로마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감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출판사에서 《리비우스 로마사》의 전질 요약본(Periochae)도 단행본으로 번역하여 출간했으면 좋겠다. 앞에서 언급하다시피 《리비우스 로마사》는 142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저술됐지만 초반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없어진 내용을 모두 요약한 글도 전해지고 있다. 번역본 4권 말미에 전체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했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차라리 단행본 하나를 더하여 요약본까지 총 5권으로 세트를 구성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후에 요약본이 번역되여 출간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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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을 제거하는 비책 - 위대한 역사를 만든 권력 투쟁의 기술
마수취안 지음, 정주은 외 옮김 / 보누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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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았을 때 제목이 무척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정적을 제거하는 비책이라. '굳이 정적을 제거하면서까지 나의 안위를 도모해야 할까? 상생하는 길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끝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나는 한나라의 역사를 다룬 고전 《한서》를 완독하고 있는데, 한나라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름난 명신이나 충신보단 간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단 한나라뿐일까? 인류사를 통틀어서 고려해볼 때, 좋은 위인보다는 악인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 이어진 이래, 지역과 문명을 막론하고 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케이스는 전무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종교 안에 흐르는 관념은 보편적으로 선을 추구했다는 소리인데, 냉정하게 살펴볼 때 인류사가 과연 선하게 흘러갔는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사는 '악의 연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락과 부패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도대체 그토록 선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익을 탐내는 마음, 즉 탐욕이 주요한 원인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이권이 많은 곳에는 타락한 인간들이 들러붙어서 극단적인 이윤 추구를 위하여 추악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오늘날에도 여러 조직에서는 권모와 술수를 부리며 사내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선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고결하고 아름다운 정신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본다고 해서 남도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태도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무조건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을 두고 멍청하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그럼 어떻게 처세를 하며 살아야 할까? 핵심은 착하게 살 건 나쁘게 살 건을 떠나, 나를 공격하려는 상대의 권모를 읽고 미리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인배들이 주로 사용하는 권모나 술책 등등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정적을 제거하는 비책》은 당나라를 살았던 내준신의 《나직경》을 골자로 하여 재해석한 책이다. 내준신은 측천무후 집권기에 총애 받던 권신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정적들과 선량한 충신들을 모함하여 권력을 유지했던 소인배였다. 그는 자신의 권모술수를 작은 책 한 권으로 만들어 정리했는데, 그 책이 바로 《나직경》이다. 당시 권모술수로 보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 측천무후인데 《나직경》을 읽고 '짐도 여기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칭송했다 하니 이를 통하여 그 내용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책은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데 《나직경》 원문을 재해석한 경구가 앞에 위치하고, 이에 따른 역사적 사례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나는 사례들의 80%는 알고 있어서 두꺼운 쪽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독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살펴본 바, 《나직경》의 원문은 분량이 매우 적은 편인데, 본서는 《나직경》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재구성한 뒤 역사적 사례를 붙였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살펴보면 중국사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동양사와 권모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 같기도 하다. 책을 통하여 《나직경》을 살펴본 바 그 내용은 무척 악랄했다. 날조, 기만, 사기, 횡령, 권모, 술수, 형벌 등등 조직생활에 있어 온갖 기술적인 모략들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준신은 소인배 중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다. 요즘의 표현으로 치자면 소위 '네임드 간신'이었던 셈이다. 그런 거물이 정리한 권모술수 비책인 만큼 깊이 있게 음미해 볼 만한 내용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예시나 사례 중심의 글을 무척 싫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권모술수를 가까이한다는 것을 두고 비천하고 비열하다며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중국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윤리고 둘째는 권모다. 선악으로 구분해보자면 백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윤리고, 흑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권모였다. 여기서 윤리를 담당했던 사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자의 유가, 그리고 묵적의 묵가를 꼽을 수 있다. 권모를 상징하는 사상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병가, 외교학의 종횡가, 그리고 법가인데, 이 세 가지 사상은 도가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고대 이래로 중국을 다스렸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국경 밖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경 민족인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확한 농작물인데 그들은 오랑캐라고 불리는 유목민들이 쳐들어와 물자를 약탈해가는 것을 극도로 민감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오랑캐를 이길 방법을 생각했고 최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역설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면서 중원에는 다양한 권모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권모술수는 중원 국가의 발생 이래로 대대로 발전, 계승되어 왔던 사상이기에 그들의 정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중국을 꿰뚫어보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주로 구사했던 권모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준신의 《나직경》 역시 중국 중세의 권모술수를 종합한 도서이기에 탐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에서 권모의 필요성을 생각해보자. 상대가 나를 술수로 압박하는 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술수를 부린 상대도 나쁘지만 이를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렇기에 각박한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기 위해,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모술수를 배울 필요가 있다. 본서의 제목처럼 권모를 활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적어도 나 자신을 지키는 칼로 사용할 순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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