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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원정기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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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분은 아래 *1참조)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인용이 좀 길어 앞부분을 이 글 아래에 실었다. 스무 살 시절, 아니 그보다 앞서 80년대 초반 고교 시절에 만난 김수영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詩論)-<詩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이다. 시인의 삶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유명한 시론이기도 하고, 포도송이에 알알이 박힌 알맹이처럼 숱하게 인용되고 재해석되고 새로운 논지 전개에 물꼬를 터주는 유명한 시론이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내게는 겨우 한 문장쯤으로 이 시론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원군은 비겁하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자유하다'는 좀 그렇고 '자유롭다'의 상태에 스스로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얘기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프레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얘기한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다른 버전으로 이야기할 뿐 진정 자유로운 시를 내용에서도 형식에서도 쓰지 못하고 있음, 쓸 수 있음에도 쓰지 '않고' 있음에 대한 자기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지금 얘기하는 김수영의 시론(詩論)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도' 시론(時論)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론을 쓰던 당시에도 지금도 우리나라는 원군인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휴전 상태인 것이다. 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미국이 취한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마침내 미국(미군)이 한국에 머무는 이유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심증은 가득하나 '물증'이 없던 시절은 가도 비로소 그들의 존재(정체)를 자각한 계기가 광주민주항쟁이었다. 어쩌면 김수영의 '원군은 비겁하다'라는 말은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 (Xenophon). 그는 기원전 431년경에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54년경에 죽었다.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고 죽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플라톤과는 동문수학한 사이. '아나바시스'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를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앞서 언급한 '원군'이라는 단어와 거기에 묻어 있는 이런저런 의미를 떠올리곤 했다. 아테나이 출신의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퀴로스에게 고용된 그리스인 용병대에 참가한다. 당시 그는 꽃다운 20대. 페르시아. 부왕 다레이오스(2세)는 맏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는다. 그러나 왕비인 파리사튀스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차남인 퀴로스가 왕위를 물려받도록 강추!! 차남 퀴로스-소 퀴로스-도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형이 즉위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암살기도를 하여 사형될 운명이지만 역시 어머니의 간청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결국 쿠로스는 그리스 원군(용병)까지 동원(고용)하여 반역을 꾀하는 것. 바로 이 전쟁에 크세노폰이 원정군의 한 사람으로서 참전하고 있다. 원군이 지원군의 약자라고 할 때, 원군은 도움을 구하는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파견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이 참여한 이 원정대는 '원군'이라기 보다는 '용병'에 가깝다. 국가 차원에서의 파견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익-돈, 물질적인 부, 잔리품을 포함함-을 목적으로 파견된, 거래로서의 전쟁(참전)으로만 보기에는 당시를 전후한 세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부분이 <페르시아 원정기>를 읽으면서 자꾸 확인해야 했던 질문이다.

사실, 아테나이인들이건 스파르테인들이건, 거슬러 올라가 <일리아스>(호메로스의)에서부터 만나는 전쟁마다 그 전후과정을 살피면 답은 분명하게 나온다. 전쟁을 해야 하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제 참전하는 이들은 장군이고 사병이고 간에 전리품에 관심이 더 많다. 역설적으로 전리품을 탐내지 않는 장군들의 인품이 빛난다(영웅전의 주요 인물들, 그렇지 못한 인물들의 사례도 담겨 있다). 궁극적인 목적이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비지니스' 였음을 알고 다소 실망하게 되는 전쟁들이 수두룩하고, 어쩌면 '약탈'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먹어야 사는 '동물의 세계'를 보라.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존재를 위한 순간들, 고대의 인간들이 미개해서가 아니고 어쩌면 그들에게 전쟁은 자연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전쟁은 21세기를 사는 현재에도 동물성에 충실한 '약탈'의 유전자를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시각은 명분이 약한, 크세노폰의 참전에 대한 '변론'이 된다. 어쩌면 '명분'을 앞세우나 결국은 '약탈'이 목적인 것보다는 비겁하지 않은 참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 '1만인' 용병 이전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태수들에게 고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만 인'과 더불어 비로소 용병의 역사에서 새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옮긴이 서문) 그런데 자신들을 고용한 퀴로스가 어이없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인솔하던 장군들와 대장들이 페르시아왕측의 술수에 의해 처형된다. 타국에서 오도가도못할 상황에 처한 것. 그러나 이들은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한데 뭉쳐 나중에 스파르테군에 합류할 때까지 2년 가까이(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 용병인 그들에게 궁극의 목적이었던 전리품은 제대로 얻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목숨이 그들의 전리품이었던 셈이다. 특히, 크세노폰은 비전투 참모로 용병부대에 끼어 있었는데, 마침내 그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오르고, 본인의 참전기이기도 한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고전을 집필하였으니 노고에 대한 품값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이 원정기의 초반부 상황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퀴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 소개를 상당 부분 생략하는데, 크세노폰의 <원정기>가 이미 있기에 그러하다, 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중에서도 크세노폰의 기록은 마치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크세노폰의 생동감 있는 묘사는 직접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필자는 여기서 크세노폰이 빠뜨린 것을 보충하는 정도로만 기록하겠다."(영웅전, 동서문화사 간 1857면)그런데, 플루타르크(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는 크세노폰보다 한참 후에 기록들에 의지해서 당시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원정군으로 참전했던 크세노폰을 비전투요원이었기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자신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퀴로스가 죽고 목과 손이 절단되는-관행적으로- 바로 그 현장에 크세노폰이 없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장성과 그리고 다름 아닌 그 전투의 결과로 갓끈떨어진 처량한 신세에 이르른 그가 수집하고 정리한 정보들이 만만한 것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지만 오히려 '영웅전'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동생 퀴로스를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해프닝이야말로, 흥미롭기는 하나 그저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아님은 말고 식의 기록일 수 있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군대에는 크세노폰이라는 아테나이인이 있었다. 그는 장군도 대장도 사병도 아니었고, 그가 행군에 참가한 것은 그의 옛 친구 프록세노스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록세노스는 또 그가 오면 퀴로스의 친구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자기에게는 퀴로스가 조국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페르시아 원정기>, 3권 1장 4정) 원정에 참가해야 하나, 말하야 하나 크세노폰은 스승이면서 친구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와 상담까지 했다는, 자기 이야기를 제3의 서술처럼 시치미 뚝 떼고 이어가는 모습이 귀엽다고 할까?

*한편,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동서문화사의 영웅전은 서두에 아게실라오스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팔십이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하나 전쟁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힘들자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이었으니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라는 것이 세상의 평가였다.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 대 카토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플루타르크의 진단에 별풍선 세 개를!)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국익을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바로 이 대목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단적으로 李대통령-맥쿼리 유착의혹 다룬 ‘맥코리아’ 개봉!).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의 용병 파견은 일종의 인력수출이다. 스파르테는 이미 알고있듯이 문(文)보다는 무(武)를 숭상하는 상무국가로, 비록 나라살림이 넉넉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부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이라는 점을 법과 체제에 반영한 나라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군인들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나라살림이 넉넉해야 군수물자와 군량을 댈 수 있는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영화 <300>의 테모필라이 고개에서의 전투에서보듯 스파르테 전사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니, 스파르테가 가진 최대 자산은 전투능력과 지휘능력이 출중한 군대였고, 아게실라우스 왕은 그들이 가진 경쟁력 있는 군인(인력)들을 수출해서라도 국가재원을 마련했던 것이다.

크세노폰 (Xenophon, 기원전 431년경~기원전 354년경)의 페르시아원정은 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이다.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84세에 세상을 뜨는데, 이집트 용병출전이 80이 넘어서라고 했으니 기원전 366년무렵이다. 페르시아원정 시점이 35년쯤 앞이다. 그리스 세력의 한 축인 스파르테의 왕도 용병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것은 후에 일이지만 크세노폰이 용병대의 일원으로 페르시아의 내전에 참전하는 것이 그렇게 큰 흉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당시의) 인지상정일까? <페르시아 원정기>를 쓰기 위한 참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 크세노폰의 젊은 혈기,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충동, 모험심.. 로드무비의 원조인 <오뒷세이아>의 애독자였을 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꾸만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맞은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크세노폰의 참전 동기에 대한 답도 되지 않을까. 원군은 비겁하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다면 혹은 명분이 솔직하다면 원군 그 자체라도 비겁하지 않을 수 있다. 플랜트 수출(plant export)은 생산설비나 대형기계 등을 비롯하여 관련기계의 설치·가동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공장 전체를 수출하는 것을 말한다.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한 용병들, 그리고 아게실라우스 왕이 이끈 스파르테 군인들의 이집트 용병 파견은 단지 용병들만이 아니라 일종의 전투력을 갖춘 시스템을 판매한 플랜트수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1: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김수영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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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군은 비겁하다! 헉헉 거리면서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네여. 김수영과 크세노폰과.. 아게실라오스 스파르테,, 잘 읽었슴다.

timeroad 2012-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죄송!!
 
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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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 넓다!" 무슨 일이고 참견하고 간섭하는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오지랖'이란 우리말로서 윗옷의 앞자락을 말한다. 곧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옷의 앞자락이 넓다는 뜻. 웃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안에 있는 다른 옷을 감싸버릴 수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무슨일이나 말이든간에 앞장서서 간섭하고 참견하고 다니는 것을 비유하여 오지랖이 넓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 오지랖이 넓으면 몸을 구부릴 때나 움직일 때나 옷에 이물질이 묻을 확률이 높다. 고생이 상당했으리라. 해서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역사의 아버지께서는 오지랍이 참 넓으신 분으로 세계의 오지 곳곳을 찾아다닌 오지 기행가라고 생각하는데,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세이브해줘서 감사하다는 얘기다.

헤로도토스가 <역사> 구조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담 형식의 지리학적 인종학적 민속학적 역사적 자료들이 대량을로 제시되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화의 소재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을 골라 '책을 다룬 책'처럼 새롭게 창조해내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나는 느낌이다.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될만큼 그 출발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쟁 이야기 중간중간에 양념에 해당하는 삽화와 수집한 정보들을 아낌없이 넣어 버무린 덕분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헬라스인과 비 헬라스인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과 비 헬라스인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을 밝히는 데 있다."고 <<역사>> 서언에서 탐사보고서를 쓴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도 말이다.

주로(主路)를 따라간다 싶으면 어느새 샛길,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정복할 대상을, 혹은 정복한 대상의 민족과 종족들의 이런저런 풍습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양반 구라가 대단하다는 감탄하게 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로테스크한' 역사가 아닌 흥미진진한 읽을거리가 되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퀴로스 왕이 난공불락으로 축성한 앗시리아의 바뵐론을 정복한,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정복이 된 바뵐론에 대한 전쟁담과는 달리 그들의 축성이나 풍습 몇가지에 더 비중을 두고 얘기한다. 그가 소개하는 바뵐론의 가장 현명한 관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의 관습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 가장 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듣자 하니, 일뤼리콘의 에네토이족도 이 관습을 지킨다고 한다.) ..마을마다 매년 한 번씩 다음과 같은 행사가 열렸다. 시집갈 나이가 된 처녀들이 소집되어 전부 한 곳에 모이면, 남자들이 그들을 둘러선다. 그러면 전령이 처녀들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인다. 경매는 가장 예쁜 처녀부터 시작되는데, 그 처녀가 높은 값에 팔리면 그 다음으로 예쁜 처녀를 경매에 붙이곤 했다. 처녀들은 노예가 아니라 아내로서 팔렸던 것이다. 장가들고 싶은 바뷜론 남자들 가운데 부자들은 젊고 예쁜 여인을 사려고 서로 더 높은 값을 제시했다. 그러나 장가들기를 원하는 하층민은 미색(美色)은 따지지 않고, 못생긴 처녀를 아내로 얻고 돈까지 덤으로 받았다."(역사, 1권 196장 초반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분위기 떠오르기도 하고,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는 술과 여인들이 등장하는 밤의 무대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농기계가 편리함을 주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농자천하지대본이던 우리에게 가족의 수는 그 집안의 농업노동력이었듯이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어찌되었거나 적령기의 남녀가 결혼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미모가 기준이 되고, 그에 따라 돈이 가치 기준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유감스럽지만, 하지만 지참금을 여자가 가져오건 남자가 신부측에 바치건 '거래성 혼인'은 혼인 제도 그 자체에 깔려 있는 것이니..좀더 지켜보자.


"전령은 가장 잘생긴 처녀들을 다 팔고 나면 가장 못생긴 또는 불구인 처녀를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이되, 가장 돈을 적게 받고 그 처녀에게 장가들겠다는 남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잘 생긴 처녀들을 팔고 생긴 것이라, 어떤 의미에서는 잘 생긴 처녀들이 못생기고 불구인 처녀들을 시집보내는 셈이었다."

(이 점은 음음, 마음에 든다.)


"자기 딸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았고, 처녀를 샀다 해도 보증인 없이 집으로 데려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와 동거할 것임을 보증하는 보증인을 세워야만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둘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남자는 받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도 원한다면 경매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관습이었으나, 지금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자꾸만 결혼 연령이 늦어지거나 독신을 고집하거나 또한 결혼하고 싶어도 청년실업 때문에 결혼은 꿈도 못꾸는 청춘들이 많은 우리의 지금 상황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지만, 응용해볼 여기가 있는 관습이 아닐까? 결혼을 못하는 농촌총각들도 결혼할 수 있고, 먼 이국으로부터 온 며느리들, 다문화가정의 문제도 앞서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 등등
그런데 바뵐론이 함락이 되면서 이런 전통도 사라져버렀다고 헤로도토스는 기술한다. "그들은 요즘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들이 여자들에게 부당한 짓을 하거나 외국으로 데려가지 않기 위하여.] 바뷜론이 함락되며 살기가 어려워지자 궁핍한 서민들은 모두 딸에게 매춘을 시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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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1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촌총각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인구정책이 좀 나아질 수 있을까요? 태어났으면 종족을 번식해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이거늘..

timeroad 2012-12-0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데, 그렇담 더욱.. 지금이야 기계힘을 빌리지만 가족 수가 많으면 농본사회에서는 짱이었잖아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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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자 뤼쿠르고스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전기의 첫문장은 역설이다. 그에 관해, 그가 남긴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니……. 소설도 아니고 한 인물의 생애라는, 사실에 기초한 전기물의 첫 대목치고는 상당히 그렇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렇다. 검소, 절제, 용기스파르테를 떠올리게 하는, 키워드들, 그 밑그림을 완성한(‘그린이 아니고) 이가 입법자 뤼쿠르고스이다. 플라톤도 대화편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체로 스파르테를 지지한다. 노골적이다.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교육 방식, “스파르타식이란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은 독자라면, 뤼쿠르고스를 만날 필요가 있다. 영화 <300>은 이러한 시각 교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지상에 어떻게 저런 나라가 있지, 하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제목에서 깊이 읽기라고 했지만, 잘 읽히는 글과 번역을 따라 가면 되기에 중언부언일 뿐이다).

한 사례만 살펴보자. 뤼쿠르고스는,

 

"불평등과 불공평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가재도구도 나누려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테인들이 재산의 직접 몰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는 에돌아 정치적 수단으로써 그들의 탐욕을 극복했다. 먼저 그는 금화와 은화를 모두 거둬들이고 철전(鐵錢)만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무겁고 부피가 큰 철전에 얼마 안 되는 가치밖에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100므나의 가치를 보관하는 데도 집 안에 큰 창고가 필요했고, 그것을 운반하는 데는 황소 한 쌍이 필요했다. 일단 이러한 법령이 효력을 발휘하자 온갖 종류의 범죄가 라케다이몬에서 사라졌다.“

_31~32, <뤼쿠르고스 전> 중에서

 

불평등과 불공평을 완전히 없앤다.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극복하지 못한 인류의 과제를 그는 해소하고자 했다. 1)감출 수 없게 2)가지고 있어도 남이 부러워하지 않게 3)아무런 이득이 안 되므로 훔치거나 뇌물로 받거나 빼앗거나 약탈할 일도 없게. 화폐의 나아가 철()이라는 광물 자체가 가진 가치까지도 거세한다. 철전은 쇠가 발갛게 달았을 때 식초에 넣어 식힌 까닭에 너무 물러서 다른 용도로는 활용할 수 없었다.”

 

인간 평등이란 가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근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요원한 과제가 평등임을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 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의 저작에서 발견한다(기원전 700~800년쯤 뤼쿠르고스가 펼친 입법). 뤼쿠르고스의 수많은 개혁 가운데 으뜸은 원로원 창설이고, 두 번째이자 가장 혁명적인 것은 토지의 재분배이다. 불평등과 불공평을 없애기 위한 노력(위 인용문)과 공동식사제도(부에 대한 열망을 근절할 요량으로), 이런 개혁과정에서 부자들이 저항하고 한쪽 눈을 못 쓰게 되는 테러를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등장부터가 거룩하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퇴장하는 모습에는 감동이 있다. 자신이 이룩한 일에 대한 자부심,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 가장 위에 있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정에 대한 경계이다. 좋은 정책이나 법안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소중하고 쉽지 않다. 좋은 정책은 그것을 슬기롭게 계승하여야 하는 것은 정사(政事)를 논하는 이들-정치인들-의 기본 덕목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국민과 나라 안팎 사정마저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왜 읽지 못하는가? 바뀌어야 하므로 바꾸는…….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입법)은 다 이루었다! 그는 모든 백성을 민회에 소집해놓고 이미 취해진 조치로도 국가의 번영과 미덕을 증진하기에 충분하겠지만 아직도 가장 중대한 일이 남아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델포이 신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공표할 수 없다고. 자기가 델포이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존의 법을 준수하되 바꾸거나 변경하지 말아 달라 당부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 델포이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굶어 죽는다. 동포 시민들을 영원히 맹세에서 풀어주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진(自盡)한다. 정치가는 죽으면서도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 그만큼 정치가의 인생 종말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덕행(德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의 생각, 그의 실천이었다.


뤼쿠르고스의 입법들은 혁명적이고 개혁적이다. 집필 시점에도 이미 절제와 검소의 미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에 대한 반증이다. 단지 정신만이 아니라 혁명 자체를 수출한다는 혐의를 받았던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이룩한 것을 생각한다. 체가 쿠바의 관료로만 머물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생의 마지막까지 볼리비아에서 뿌린 당시에는 미완의, 혁명의 씨앗들. 뤼쿠르고스의 흔적을-일생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삶 그 자체가 드라마였던- 체에게서 발견한다.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그것은 "역사가의 시각으로 정치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들의 내면세계와 성격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영웅의 영웅다움을 기술"한 덕분이다. 사마천의 <사기>보다는 <사기열전>,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더 잘 읽히는 맥락에 닿아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전> 서두에서 이렇게 밝힌다.

"내가 쓰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전기이며, 한 인간의 미덕 또는 악덕이 언제나 그의 가장 탁월한 행적에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며, 수천 명이 전사한 전투나 엄청난 전쟁 장비나 도시의 포위보다는 오히려 우연한 발언이나 농담 같은 하찮은 일에서 한 인간의 성격이 더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244<알렉산드로스 전> 서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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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s1985 2010-07-0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원전 800여 년 전을 살아간 사람이 남긴 행적이라는데, 정말 시사적으로 와 닿는 살아있는 역사같네요. 님의 글을 읽다보니 잘 읽었습니다. 오랜 만에 님의 리뷰를 읽게 되어 기분이 좋네요.

timeroad 2010-07-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얘깃거리가 많은 책이지요. 최근 얘기를 하지 않았나 싶은데, 읽는 때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 책의 묘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한번 본 영화 또 보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 많은 반면에 말예요.

timeroad 2022-04-18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2022년 4월 18일에 줄이고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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