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을 참고하여,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이 전쟁을 왜 일어났을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제1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나아가 '인간의 분노'인데, 10년 전쟁 가운데, 본격전투는 나흘(4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서사시는 당대의 거대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 1권에서 27년 전쟁(기원전 431~404)의 역사를 쓰는데,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이전의 그리스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이 전쟁(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배경, 아니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만나는 트로이아 전쟁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니므로, 『일리아스』읽기 전후에 한 차례 읽는 것이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지금 소개한 내용들만 살펴보 아도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아래 내용 정리에서 ‘아티케’는 아테나이로, 헬라스는 '그리스'로 보아도 될 것임. 인용은 <전쟁사>1권이며, 가령 출처 [1(3)]은 1권의 1장 2절이다.괄호 안은 필자의 설명이다.)

'땅이 기름진 곳일수록 주민이 자주 바뀌었다.'[1(3)] (그러나) '땅이 척박한 앗티케(아테나이인들이 사는) 지방에는 옛날부터 파쟁이 없었고, 늘 같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1(4)] '전쟁이나 내분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들이 헬라스의 다른 지방에서, 안정된 공동체인 아테나이로 망명하여 그곳 시민이 되었고, 그 결과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여 앗티케 땅으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아테나이는 이오니아 지방에까지 이주민을 내보내야 했다.'[1(6)] (그러나) '헬라스 공동체는 허약하기도 하고 서로 교류가 없던 까닭에 트로이아 전쟁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모아 트로이아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에 바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3(4)]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헬라스에서 최초로 함대를 창건한 사람은 미노스다. 그는 지금 헬라스 해(에게 해)라고 부르는 바다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에게 해의 남쪽)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처음으로 식민시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통치자로 앉힌다. 그는 또 세수(稅收) 확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해적을 퇴치하고자 했다. 트로이아 전쟁 이전이다. 식민(植民)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식민시', '세수 확보', '해적 퇴치'와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당황스럽다.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아테나이가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헬라스 전체보다는 '앗티케(아테나이)'의 역사처럼 다가온다(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사람이다).  당시 해적질은 오늘날 강도짓과 같은 불법(부정)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경제활동으로 취급되었다. 섬에 있는 도시든 육지에 있는 도시든 '장기간' '지속된' 해적질 때문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야했다. 해적들은 자기들끼리도 약탈하고, 항해 여부와 상관없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을 약탈했다. <전쟁사>를 좀 더 읽어보자. 
 '옛날에는 헬라스인들과 대륙(아시아)의 해안지대나 여러 섬에 살던 비(非) 헬라스인들이 배를 타고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해적질은 유력자들이 주도했는데,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고 백성들 중 약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 이것이 그들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또한 이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광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5(1)] '…… 그리고 옛 시인들도 바다에서 상륙하는 자들에게 으레 "당신들은 해적이오?"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데, 이는 질문 받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는 자들은 그런 행위를 비난받아 마땅한 짓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5(2)] 

 

 '식민시', '세수확보', '해적퇴치'와 같은 용어들의 자연스러움이 당황스럽다. 

"당신들은 해적이오?"와 관련하여 『오뒷세이아』 3권 초입이 자주 거론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오뒷세우스)의 생사 여부를 수소문하려고 트로이아 원정의 전우를 찾아 퓔로스를 갔을 때다. 네스토르(왕)가 식사를 대접한 후 나그네들은 누구냐고 텔레마코스 일행에게 묻는 대목이다.

 

"그대들은 뉘시며 어디서부터 습한 바닷길을 항해해 이리로/ 오셨소? 그대들은 장사를 하려는 것이오? 마치 해적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듯이 말이오."  -『오뒷세이아』 3권 71~74행.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경계하는 빛이 없을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째에 이른 시점이다(오뒷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20년째). 다시 <전쟁사> 1권.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아 원정에 나서기까지의 얘기다. 식민시 개척과 보호와 관련 있는 진술이다. '그러나 미노스가 함대를 장악한 뒤로 해상교통이 활발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섬에 식민시를 건설하고 악명 높은 해적들을 몰아냈다.'[8(2)] '그리하여 바닷가 주민은 부를 축적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약자들은 이익이 될 것 같아 강자들의 예속을 받아들였고, 강자들은 획득한 자본에 힘입어 작은 도시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8(3)] '이런 상태가 제법 오래 지속된 뒤에야 헬라스인들은 트로이아 원정길에 올랐다.'[8(4)]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앞서 살폈듯 척박한 땅(아티케)을 가진 아테나이인들은 곡물을 비롯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했다. 이런 물품들은 주로 헬레스폰토스해협(아시아 지역) 일원에서 왔는데, 배편을 이용했다. 헬레스폰토스해협은 바로 트로이아(트로아스)의 앞바다다. 일리아스』에는 트로아스가 얼마나 풍요로운 그리고 축복받은 땅인지 자세히 소개한다. 헬라스인들에게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또한 헬라스의 해양국가들은 헬레스폰토스해협 일대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소탕할 필요가 있다. 생필품 공급선이 안정화를 위해서다. 물론 '파리스의 선택'(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또 하나의 전쟁 원인을 살필 수 있다. 스파르테의 왕 메넬라오스(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동생)의 아내인 헬레네를 트로이아(파리스)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한 ‘명예회복 전쟁’이다.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스파르테의 왕 튄타레오스에게 맹세했다. 까닭에 그리스 주요 국가들의 왕들이 함선을 몰고 전사들을 거느리고 종군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명분일 수 있다. 일찍이 미노스가 일군 해상도시들의 '안전' 도모, 어쩌면 이 원정 자체가 일종의 생계활동은 아니었을까? 거기다가 앗티케는 인구가 너무 많았다. 약탈하는데 세운 공과 그것을 배분하는 동안 발생한 '불공정'이 전쟁 중에 일어난 또 하나의 전쟁이다.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트로이아 전쟁은 왜 1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그보다 10년 동안 어떻게 그리스연합군은 수성전(守城戰)에만 집중하는 트로이아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원정군은 늘 불리하다. 특히, 그 많은 전사들의 식량과 전쟁물자들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일리아스』 9권에서 그들의 절절한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라며 사절단으로 온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가 거세게 쏘아대는 말들이다.

 

"꼭 그처럼 나는 숱한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또 낮은 낮대로 피비린내 나는 숱한 날을 적군과/ 싸우며 보내기 일쑤였소. 그자들의 아내들을 위해서 말이오./ 사람이 사는 열두 도시를 나는 이미 함선들을 타고 가서 파괴했고,/ 또 육로로도 기름진 트로이아 도처에서 열한 도시를 파괴했소./ 그리고 그 모든 도시에서 값나가는 보물들을 수없이 노획해 와서/ 모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갖다 바치곤 했소." -『일리아스』 9권 : 325~331행)
배를 타고 열두 도시를 파괴했고, 육지에 있는 도시는 트로이아 성 하나만 남겨놓은(열한 도시를 파괴했다) 상태다. 『일리아스』 곳곳에는 '12(열두)'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전체’ 혹은 '모두'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헬레스폰토스해협을 낀 바다와 육지, 인근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초토화했다는 얘기다. 그동안 아킬레우스의 맡은 역할은 피비린내가 가득하며 처절하다. "마치 어미 새가 저는 고생을 하면서도 구할 수 있는/ 모든 먹이를 아직 깃털도 나지 않은 새끼들에게 갖다/ 먹이듯이,"(9권 323~325) 해적질을 하여 그리스연합군의 전쟁 자금과 군량을 확보했다. 그가 선봉장으로서 나선 보급투쟁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멤논은.. 그가 오뒷세우스에게 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유독 나에게서만 마음에 맞는 여인을 빼앗아 가졌소. 그녀와 동침하며/ 재미나보라지! 하나 무엇 때문에 아르고스인들이 트로이아인들과/ 싸워야만 했던가? 무엇 때문에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백성들을 모아/ 이곳으로 데려왔던가? 머릿결 고운 헬레네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필멸의 인간들 중에 아트레우스의 아들들만이/ 아내를 사랑한단 말이오? 천만에! 착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법이며, 나 역시 비록/ 창으로 노획한 여인이긴 하지만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소." -9권, 336~343행

브리세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한 '내 아내'로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다. 결국 메넬라오스의 아내(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 아니냐, 그의 형 아가멤논에게 날리는 직격탄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묵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이 10년째인 점, 앞서 인용한 『오뒷세이아』가 10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10년 후인 점을 고려한다. <전쟁사>의 기술을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경제활동(해적 행위)은 『이솝우화』가 그러듯이 약육강식의 '정의'에 따른 공적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킬레우스의 어미 새 비유는 얼마나 그럴듯한가! 흔히 『오뒷세이아』를 한 편의 로비무비이며 '성장소설'로 이야기한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바다(항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개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러한 제국주의의 욕망이 극대화된 시기를 대변한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이전에 씌어진 『일리아스』의 배경이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이며, 안정적인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사> 1권 투퀴디데스의 진단에 따르면 그러하다.


『일리아스』의 배경은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호메로스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이라 전제하지만 <전쟁사> 1권 초반부에서 트로이아 전쟁 규모를 살피는 역사가의 시선은 예리하다. 원정군의 함선에 승선한 자들은 전사이면서 선원이어야 했다(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시에 선장도 선원들도 일정 급여를 주고 고용하였으며, 전사들의 역할은 따로 있다). 원정에 나서는 전사들 수를 최소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갑판도 없이 옛날 해적선 모양으로 건조된 함선에 무구(武具)를 몽땅 싣고 난바다를 건너야 했으니까. 신들의 개입이 많을수록 인간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을 많고 크다.

 

"그 이유는 인구(전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식량을 조달하기 힘들어 싸우는 동안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정도로 인원을 줄였던 것이다. 그들은 상륙 직후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도 모든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식량이 부족해 케르소네소스 반도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해적질을 일삼은 것 같다." -<전쟁사> 1권 11(1)
케르소네소스 반도는 에게 해의 북동쪽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끼고 있는 트라케의 반도이다. 에게 해와 흑해를 있는 프로폰티스 해(海) 입구에 있으며, 건너편 트로이스(트로이아)와 비좁은 해협을 끼고 마주보고 있다. 농사가 한두 달에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연합군들이 이처럼 분산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무려 10년째 계속되었던 것,  원정군이나 성에 갇힌 트로이아 군이나 이 전쟁은 '생존투쟁'이기도 했던 셈이다. 먹어야 싸울 수 있고, 먹여야 싸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전쟁이었음을 <전쟁사>의 저자는 예리하게 분석하는데, 27년 전쟁을 살피는(읽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경제력은 예나지금이나 가장 든든한 전쟁의 조건이다. 또한 경제제재는 또 얼마나 ‘오래된’, 그들에게는 ‘확실한’ 전쟁무기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3-2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팁1]해적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 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남서해안은 ‘왜구들‘로 불리는 해적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때문에 ‘진도(珍島)‘‘는 조선시대에, 유사시 섬 전체의 주민들을 소개(疏開)시켰다. 오늘날의 ‘진도군청‘쯤에 해당하는 관청이 전남 해남군 대흥사 입구에 ‘임시관공서‘로 설치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언젠가 소개할 날이 있을 것이다.
 
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망’과 더불어 ‘교만(Hybris: 히브리스)’은 『일리아스』를 읽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이 서사시에서 가장 먼저 이 교만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킬레우스다. 반면에 '미망(ate)'을 처음 그리고 자주 거론하는 이는 아가멤논이다. 이런 미망과 교만이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데에서만 등장하는 것일까? 현대 서구인들(특히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데서도 그 DNA가 살아있음을 엿본다."(이 글에 피력한 필자의 의견에 대한 요지입니다.)

 

『일리아스』 19권 핵심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화해 장면이다. 그리고 19권을 대표하는 핵심어 하나만을 고르라면 ‘미망’이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체면치레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망은 『일리아스』 의 제1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임을 고려하면, 이 서사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가급적 관련 언급(텍스트)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9권.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복수하고자 다짐하고, 복수를 하자면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다.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 때문에 전투불참을 선언한 그로서는, 그런 선언을 뒤집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가멤논과 화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군 지휘관들과 전사들이 회의장으로 모여든다. 마지막으로 아가멤논이 참석한다. 먼저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향해, 자신들이 여자 하나 때문에 불화한 것을 개탄한다. 이제 상황이 안 좋으니 감정을 억제하자고 제안한다. 분노를 거두겠다. 화해를 거부하고 계속 화를 낸 것은 옳지 않았다고, 그리스 군을 일으켜 전투에 나서자고 권한다. 자기도 싸우겠다고. 그리스 전사들은 아킬레우스가 분노를 거둔 것을 기뻐하지만, 아가멤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말을 한다[그러자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들 가운데로 걸어 나오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19권: 16~77행] 아킬레우스에게 직접 대답하는 것도 아니고, 회의장에 대중을 향해 말한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나오지 않은 것이 내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들의 책임이라고.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이렇다.

 

"하지만 그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고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과
어둠 속을 헤매는 복수의 여신에게 있소이다. 아킬레우스에게서
내가 손수 명예의 선물을 빼앗던 그날 바로 그분들이
회의장에서 내 마음속에 사나운 광기를 보내셨기 때문이오.
신이 모든 일을 이루어놓으셨는데 난들 어쩌겠소?
미망(迷妄)은 제우스의 맏딸로 모든 이의 마음을[91]
눈멀게 하는 잔혹한 여신이오. 그녀는 발이 가벼워 결코
땅을 밟는 일이 없지요. 그녀는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니며 
사람들을 넘어뜨리는데 둘 중 하나 꼴로
걸려들게 마련이지요."(19권: 86~95)

 

아가멤논은 그 책임을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모이라) 그리고 복수의 여신(에리뉘스)에게 돌린다.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여자를 빼앗은 것은 이 신들이 자기에게 ‘아테’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 아테는 보통 미망(迷妄)으로 옮기는데, ‘정신적으로 눈 먼 상태’를,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피해, 손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아래 ‘강대진의 책’) 
그런데 『일리아스』에서 ‘미망’이란 단어는 2권(아가멤논의 꿈_함선목록) 아가멤논의 발언에 처음 등장한다(이 글의 맨 뒷부분 인용, ‘교만’이란 말을 처음 언급하는 이가 아킬레우스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출전(出戰)에 앞서 관례에 따라 말로 전사들(아레스의 시종들)을 시험하는, 전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슬쩍 떠보는 대목에서다. 

 

"친애하는 다나오스 백성들의 영웅들이여, 아레스의 시종들이여!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나를 큰 미망에 빠뜨리셨소이다."(2권: 110~111행)

 

이 경우 아가멤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제우스가 보낸 거짓 꿈에 속아 (아킬레우스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출전 준비를 하는 것. 9권에서도 아가멤논은 미망을 언급한다. 전세가 트로이아 군에 밀려 위급한 상황이기에, 여기에서의 ‘미망’은 앞(2권)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의 '신 탓'은 습관적이며 상습적임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이여, 아르고스인들의 지휘자들 및 보호자들이여!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나를 큰 미망에 빠뜨리셨소이다."(9권: 17~18행)

 

역시 9권에서 이번에는 네스토르(제안)에 대답하여 ‘미망’을 언급한다. 네스토르는 아가멤논의 과오를 지적하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우정의 선물과 상냥한 말로 달래고 설득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 “나는 그러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렸건만 그대는 자신의 거만한 마음에 복종하여(9권: 108~109)”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 많은 원로라고는 하지만 네스토르의 지적은 날카롭다. 이런 네스토르의 말에 아가멤논이 대답한다.

 

"노인장! 그대는 내 미망을 거짓 없이 사실대로 지적해주었소. [115]
내가 어리석었음을 부인하지 않겠소. 제우스께서는 지금
그 사람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아카이오이족 백성들을 무찌르시거늘
그분이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야말로 실로 만군(萬軍)의 가치가
있소이다. 내가 사악한 마음에 복종하여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니,
이를 바로잡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상금을 기꺼이 바치겠소."(9권: 115~120행)

 

흥미로운 것은 『일리아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미망’(이란 개념)은 9권과 19권에서 보듯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 그 중에서도 아가멤논의 ‘과실’과 연관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일리아스』의 제1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점, 그 분노를 유발한 이가 아가멤논이며, 분노는 한 여인(브리세이스)을 빼앗은 데서 촉발되었음을 생각하자. 물론 아가멤논이 자신의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아니다. "희랍인들은 늘 인간의 결정이 두 가지 수준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의 영향이기도 하고, 자신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강대진,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452면) 9권에서 약속한 바 있는 보상금을 언급하는 아래 인용에서 그러함을 읽을 수 있다.

 

"먼저 내 마음을 눈멀게 한 미망의 여신을 잊을 수가 없었소. [136]
하나 내가 이렇게 마음이 눈멀고 제우스께서 내 지혜를
빼앗으셨으니 나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보상금을 내놓겠소." (19권: 136~138행)

 

아킬레우스에게 주기로 약속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인정이다. 자신의 ‘지혜를 빼앗은’ 제우스에게도 잘못이 있단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고 흔쾌히 인정하면 될 것은 결코 그러는 법이 없다. 물론 이 전쟁 전체를 지휘하는 총감독은 제우스이고, 앞서 2권에서 살폈듯이 제우스는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지만 아가멤논은 인간들의 왕(왕중의 왕)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 한다.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9권에서도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화해를 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오뒷세우스)의 말을 들으며, 아가멤논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그 맥락에서 읽어낸다. 그럼에도 19권에서 아킬레우스는 대중들이 모두 듣는 자리에서 ‘미망’을 언급하며, 제우스가 준 ‘시련’ 때문에 아가멤논이 자신을 분노하게 했음을 '보란듯이'  언급한다.
 
"아버지 제우스여! 그대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미망을 주시나이다. [270]
그렇지 않았던들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내 가슴속 마음을
격분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내 뜻을 거슬러 고집스레
소녀를 데려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는 결국 제우스께서
많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죽음이 닥치기를 원하셨던 탓이오.
자, 우리가 어우러져 싸울 수 있도록 그대들은 가서 식사하시오!" (19권: 270~275)

 

아가멤논 스스로가 미망을 언급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소녀(브리세이스)를 데려간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킬레우스가 전적으로 아가멤논을 용서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소녀 때문에 많은 그리스 전사들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왕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두에(1권) 호메로스가 그리는 트로이아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피고 있다. 아가멤논이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여러 참가자(국) 중에서도 ‘실세’였음을 언급한다.

 

"아가멤논은 이 왕국을 물려받은 데다 누구보다도 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트로이아 원정군 모병에는 충성심보다는 위압감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 호메로스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 아가멤논은 누구보다도 많은 함선을 이끌고 갔고, …(중략)… 내륙에 살던 그에게 상당 규모의 함대가 없었다면, 바닷가에서 가까운 소수의 섬들 말고 다른 섬들까지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9(3), (투퀴디데스/천병희/숲) 

 

‘호메로스의 중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을 전제하고 하는 기술이지만, 그가 당시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기에 아가멤논은 이런 대군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슬려 오르면 아가멤논은 펠롭스의 자손이며, 펠로폰네소스(반도)라는 지명은 ‘펠롭스의 섬’이란 뜻임을 상기한다. 19권 맨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 아가멤논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마저도 한때 미망(아테)에 눈이 먼 적이 있었다(신화)고, 하물며 인간은 나는 오죽하겠는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진심으로 아가멤논을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23권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경기를 마무리할 무렵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19권)은 절친이자 시종인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에 나서야 하며, 전투는 혼자서만 치를 수 없는 것, 결국 아가멤논이 나서야만 하기에, 내심이야 어쨌든 화해하는 모양새를 갖추는데, ‘미망(ate: 아테)’이란 개념은 절묘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미망’과 더불어 ‘교만(Hybris: 히브리스)’은 『일리아스』를 읽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이 서사시에서 가장 먼저 이 교만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킬레우스다. 분노가 치밀어 아가멤논을 죽이려하자 이를 제지하는 아테네 여신에게 하는 말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기스를 가지신 제우스의 따님이여!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교만을 구경하기 위함입니까? [202]
내가 지금 그대에게 하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즉,
이제 곧 그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일리아스』: 1권 201~205행. 

 

그런데, 이런 미망과 교만이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데에서만 등장하는 것일까? 현대 서구인들(특히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데서도 그 DNA가 살아있음을 엿본다. 과연 자리를 박차고 떠난 그 회담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의견과 해설이 분분하지만, 제2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와 그 참모진들이 보인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봄이 오나 했더니, 한반도의 평화의 봄은 아직 멀리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아이테토스 - 지식에 관하여 푸른시원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의 대화만이 아니라,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상대방의 질문이나 의견에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맞아요!"다. '네.'라고 하거나, "그래요"나 "네, 그렇습니다."하면 될 것을 습관적으로 "맞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려니 하지만 좀 생각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맞아요'는, 상대방에 의견(주장)에 동참하는 나의 '의견(판단"을 포함한다. 'A는 B이다.'는 상대방의 진술이 참이라면 '맞아요.'는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A는 B이다.'가 아닌 경우에도 습관적으로, '예우'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맞아요'라고. SNS나 각종 기사 등 콘텐츠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좋아요'는 그나마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맞아요'는 '좋아요'와 사뭇 다르다. 발언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 포함하고 있음에도 그런 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에 '맞아요!'라고 대응하는 사람이 싫지 않다. 또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맞아요'는 나는 당신의 '하나뿐인 내 편'임을 인증하는 일이기도 한다. '맞아요!'에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나는 그렇게 진술하는 당신을 항상 '믿어요'라는 진단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당신을 항상 믿는다. 때문에, 이번 진술도 '맞을 것'이라는 '신뢰' 또는 동지적인 '믿음'의 반영이며, 'A가 실제로 B가 아닌' 경우에도 '그렇군요.'하고는 나름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맹목적으로 그런 줄도 모르고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틀린 진술을 교정할 기회 자체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과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의 차이는 크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 사유의 발생학이랄까,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함으로써,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꼬치꼬치 그리고 천천히 복기(바둑에서)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서구 철학을 이끈 사람은 플라톤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자가 '신들'에서 '인간들'로 이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널리 알리는데 힘을 쏟은 철학자, 그가 플라톤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직접 펼치지 않는다. 일련의 대화편들을 통해 문제를 툭 던지는 것이다. 연못에 던진 돌이 동심원을 일르키게 하듯이다. '대화편들'은 나라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은 순간에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유력한 정치가가 하는 정치연설처럼 하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여느 비극과 다르지 않는 하나의 '문학 작품'일 뿐이다.

공연을 통해 당대의 시민들이 처한 상황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행위(여론몰이)를 한 장르는 희극(아리스토파네스로 대표되는)이었다. 반면, 비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인간됨의 정체성을 캐묻는 데 집중했다. 오늘날 철학 영역에서 플라톤이 '대화편'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한 일을 비극 작가 중에서는 소포클레스가 했다. 그가 작시술을 배웠던 선배 아이스퀼로스가 전적으로 신의 영역에서 신들의 세계에 의지했다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입각하여 세계를 보려 했고, 그런 작품 세계를 펼쳐 놓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비록 7편뿐이지만, 소포클레스가 완성한 비극의 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수석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의 의미는 입증되고 있다.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문의 시원(始原: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비롯되는 처음)이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비해, 3대 비극시인 가운데, 제3시인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나 '비극의 완성자'(소포클레스)처럼 딱 떨어지는 규정(닉네임)이 힘든 점이 있다. 서양철학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자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 시대정신을 자신이 익숙한 장르에 담아낸다는 것, 이렇게 볼 때 플라톤과 소포클레스가 한 일은 장르가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저마다의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플라톤의 '작품'은 정치연설이 아닌 것이다. 

5.18광주항쟁의 의미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하는 말이지만.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몇몇 시인들이 참여하여 동인을 형성했다. <5월시>다. 일종의 협동조합을 결성한 이들의 목표는 1980년 5.18의 진실을 시를 통해서 온 나라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시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런 '서정시인'들도 상당수 속해 있었다. '맞아요!'라고 동의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작품'은 대상화되는 것이라서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한 움직임, 그런 '한계'를 안고서 나름의 움직임을, 노고를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인들이 시로 나섰다. <시학>에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시를 쓴다 해도 그는 시인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기능성의 법칙에 맞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점에서 그는 이들 사건의 창작자[역사상 많은 사건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옮긴이 주석]이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창작자에 의해 그 사건이 재구성됨으로써(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비로소 '보인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플롯'이 좋은 작품의 필수요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한다. 가령, <그것이 알고 싶다>(sbs)는 그런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문필가 플라톤의 작품 <테아이테토스> 이야기를 하자. <테아이테토스> 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 하지만 테오도로스 님, 우리 내일 아침 이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멜레토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1)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2)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아테나이인 중 1인다. 왕의 주랑이란 아테나이 아고라에 있던 주랑.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하는데, 대화편 <소피스트>의 대화가 바로 다음 날 진행된다. 기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소크라테스가 잠시 법정에 간 날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소피스트>이후에 <정치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변론>을 해야 하는 본 무대(법정)에 나서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무려 세 편의 대화마당을 가진 것이다. 

-<정치가/소피스트>[플라톤(지은이), 천병희(옮긴이)|도서출판 숲 | 2014년 7월]의 대화 시점은 '소피스트'가 먼저이고 '정치가'가 다음이다. 이들 대화편 이전에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의 지"를 역설한 <테아이테토스> 대화가 이뤄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있고, 대화순으로 보면 <크리톤>과 <파이돈>이 이어진다. 플라톤은 참 뒤끝이 '상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변론'을 중심에 놓고, 평생에 걸쳐 스승을 변호하고 있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받아들리자면 그렇다. 좀 그렇지 않은가!

-<정치가>는 소송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앞서 아테네법정에 출두한 다음날, 나눈 대화이며 이날에 앞서 나눈 대화들이 <소피스트>에 수록되어 있다. 그 하루 전에 나눈 대화가 <테아이테토스>(지식에 관하여)로, 소크라테스가 인생을 마감하게 결정적인 재판을 코앞에 두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런 대화를 나눴단다. 그런 대화편 3부작이다.

-(숲의)<정치가/소피스트>의 수록 순과는 달리 사실은 <소피스트>가 <정치가>보다 먼저 진행된 대화다.  특히 앞부분, 소피스트란 어떤 존재인가 찾아가는 짧은 문답들이 흥미롭다. 두 대화편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의 고유한 영역을 찾는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를 찾아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유사품' 소피스트(<소피스테스>)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으며, 사이비 정치가와 거리를 두고자(<정치가>) 한다.

-<정치가>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전 대화편의 소크라테스 자리(역할)에는 낯선 '방문객'이 앉아 있다. 말하자면 외부초빙강사인데,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요즘말로 'X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대화편에 스승을 등장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던 플라톤이 집필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를수록 자기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 과도기에 방문객(X맨)이 주대담자이자 이론을 주창하는 이로 나서는 것이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는 '변론'을 보완하는 대화편으로 '무지의 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초점은 '변론'에 맞춰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실제 그렇게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으로 만드는, 설정 그것이 <테아이테토스>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처음에 그랬듯이, 대답하기를 망설이기보다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말해야 하네.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찾게 되든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둘 중 한 가지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일세. 사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 보담이라고 할 수 있지."(187c)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자네가 앞으로 다른 생각들을 임신하려다가 임신에 성공하면 지금의 이 탐구 덕분에 더 훌륭한 생각들을 임신하게 될 걸세. 설령 임신하지 못하더라도 자네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덜 부담스럽고 더 유순한 사람이 될 걸세.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210c)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변론'을 보완하는 결정적인 말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변론'에 앞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그렇군요."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 모르는 것이 무엇이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지의 지. <테아이테토스>는 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변론>의 부록이다. '그래요'보다는 '맞아요!'에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연대를 기원전 430~425으로 추정한다. 소포클레스는 '그 해' 비극경연에서 2등을 차지한다.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 2등(엄선하여 출전한 3인 중)이라니, 좀 아쉽다. 그만큼 작품의 주제가 충격적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왜 공연 시기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6년 중 어느 해의 가을이나 봄일 텐데, 추정되는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당시 그리스의 ‘역사’를 펼쳐야 할 때다. 공연연대로 추정하는 기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초기에 해당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참고하자.

 

무려 27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지만 트로이아 10년 전쟁(『일리아스』가 다루는)이 그랬듯이 전쟁 기간 내낸 치열한 전투만이 이어진 것응 아니다. 당시 항구를 낀 아테나이시에는 거의 모든 아테나이인들이 도시를 성(城)으로 삼아, 변두리 농촌지역의 시민들이 파란을 온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거의 대부분의 전쟁기간을 그들은 그렇게 버텼다. 해군력에서 우위에 있는 그들은 넓은 바다가 피란처였고, 그들의 전쟁자금원인 식민시들이 지중해 곳곳, 특히 페르시아 연안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수많은 함선에 올라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육상전에서 우위인 라케다이몬인들(펠로폰네소스동맹의 주도국)에 맞서 싸우는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천재지변이 아니고는 아테나이 시 안에서는 일상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리라. 봄가을 두 차례의 주요한 축제 기간에 열리는 비극경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극이 시작되기 전에 발생한 역병(疫病)으로 테바이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나 당시 왕은 지혜롭기로 인류 최고로 추앙받는 오이디푸스였다. 그는 몇 해 전 테바이를 위기로 내몬 괴물 스핑크스의 위협으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도시를 위기에서 구한 사람이다. 때문에, 시민들은 왕을 찾아와 그때처럼 이번 위기에서도 도시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비극의 초반 상황을 주목한 학자들은, 이처럼 역병으로 위기를 맞은 상황이 극 중 상황이, 비극경연이 이뤄지던 당시의 아테나이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7년 전쟁' 2년차(기원전 431)에 발생한 역병으로 아테나이인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다. 전쟁 기간 동안 라케다이몬인들은 수시로 아테나이를 침공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며 ‘도시라는 요새’를 박차고 나온 그들과 일전을 겨루기를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우외환, 아테나이는 안팎으로 위기 상황이다. 그해 여름이다.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몰라 의사들은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환자들과 접촉이 잦으니 실제로 의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인간의 그 밖의 기술도 전혀 소용없었다.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그 밖에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해도 소용없기는 매일반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불행에 압도되어 그런 노력마저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2권 47장)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이삭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 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역병이 도시를 뒤쫓으니

(『오이디푸스 왕』5~8헹, 전체 1530행 중)


아테나이를 휩쓴 역병은 기원전 429년까지 이어져 그해 여름, 당면한 전쟁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의 황금시대를 지휘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는데, 역시 역병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서 소포클레스는 테바이를 배경으로 한 「안티고네」(441년 공연)로 비극경연에서 수상한 바 있다. 이즈음 앞선 작품과 내용상 연결되는 <오이디푸스 왕>을 구상하고, 초안을 써놓았을 수 있다. 그러나 비극경연에 참가하여 발표되지 않으면 그것은 쓰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공연연대가 곧 집필연대인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에서 비극의 공연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 모두가 엄선한 그 해의 필독서 몇 권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우랄까, 시민들은 기꺼히 관객으로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기원전 430~425년에 해당하는 6년 가운데 어느 해의, 봄이나 가을에 공연된 것일까? 


역병이 그해 여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431년 가을(비극경연은 봄가을 한 해 두 차례 열림) 이전일 수는 없다. 역병 발생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듬해인 430년 봄쯤으로 공연 시기를 늦춰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430~425년 가운데 어느 해라고 하면 그 범위가 넓다. 그만큼 이 시기에 축제도 비극경연도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그 어수선함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 시기는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전일까, 이후일까? 단지 역병만이 아니라---. 테바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비극이 공연되던) 아테나이인들에서 페리클레스의 존재감은 무척 컸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죽음이 가져온 아테나이인들의 상실감과  <오이디푸스 왕>은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공연 시기가 그가 사망한 기원전 429년(여름) 이전일지 이후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이 물음 하나를 가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초입 부분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작품이고 현실은 현실, 또한 비극은 비극이고 전쟁은 전쟁, 역사는 역사일 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메르스를 제압하지 못하던 몇 년 전을 기억한다. 질병 확산을 막지 못해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고, 지자체의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연기되거나 끝내 열리지 못하였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전쟁 중인 아테나이의 상황 또한 축제(비극경연)을 열기에는 '불편한'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편으로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비슷한 행위'는 또 무엇일까? 오히려 그런 방편으로 <오이디푸스 왕>은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닐까?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개최한 축제에서 당시 시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작품을 소포클레스는 쓴 것이 아닐까?  

 ‘왕의 부덕한 소치’로 가뭄,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은 일어나고 나라는 위기에 처한다. ‘오이디푸스 왕’을 희생양으로 삼아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희생 제의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해석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전학자 베르낭(Vernant)이 대표적인데, ‘신들의 응징으로 집단이 위기에 빠질 때 규범적인 해결책은 왕을 희생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일리아스』는 역병(疫病)이 창궐하여 전멸 위기에 처한 그리스연합군 진영에서 시작된다. 신탁에 따라 역병의 원인을 밝히고 역시 신탁에 따름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역병의 원인제공자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인간들의 왕의 교만 때문이다. 이 일로 하여 아가멤논의 리더십은 복구 불가할 정도로 훼손되며, 참혹한 비극이 이어진다. 일종의 응징이다.
베르낭은 ‘왕을 희생양 삼기’라는 점에서 그리스의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에서 실행되던 이 제도는 독재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추방하기 위한 제도였다. 공정한 재판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아고라에서 공동집회가 열리면 시민들은 질그릇조각(도편:陶片)에 자기가 생각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그렇게 지목된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먀, 지목된 사람은 방어할 수 있는 절차도 없다. 떠나야 하고 떠나는 것이다. 아테나이의 입법자 솔론은 이러한 관행을 “한 도시는 그 도시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도 그렇게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을 찾아가 말년을 의탁하고 이국땅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뒤이어 아테나이를 해상제국으로 이끈 사람이 페리클레스가 아닌가, 물론 아테나이가 역병(과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리클레스를 제거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희생양-왕’으로 해석할 때, 또한 관객(시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전쟁의 진짜 원인을 투퀴디데스는세 차례나 강조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펠로폰네소스동맹이라는 육상세력의 주도국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이 해상 세력(델로스동맹)의 주도국 아테나이인들의 세력이 날로 확산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단언하는 투퀴디데스의 진단을 저버릴 수 없다. 사망하기 반 년 전 초겨울 페리클레스가 행한 '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추도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40여 편의 연설문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며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업적에 관해 들으면 샘이 나서 연사가 과찬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 ’남들에 대한 칭찬은 각자가 자기도 들은 대로 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선까지는 용납되지만, 일단 그 선을 넘어서면 시기와 불신을 사게 됩니다.(이 책, 2권 35[2] 살아있을 때는 누구나 경쟁자들의 시기를 사지만 죽은 자들에게는 누구나 경쟁심이 없어져 따뜻한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2권 45[1])

 

페리클레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처럼 들린다. 리클레스는 이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다 죽었다. 그거 남긴 유언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할 것,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지 말 것,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임." 아테나이인들은 이런 경고를 묵살했고,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끝내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소포클레스가 말년에 쓴 또 하나의 명작「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오랜 기다림 끝어 '마침내' 추방되어 방랑하지만 곧 신의 구원을 받고 신적인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콜로노스의 수호신이 된다. 그가 영면하게 되는 그 땅을 그 도시를 그가 지킬 수 있는 일종의 선물을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을 배출한 귀족가문출신이고 스스로가 민주제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아테나이의 민주제를 확립한 페리클레스를 열렬히 찬미자하였다. 미처 하지 못한 얘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희생양-왕-오스트라시즘’ 부분은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철학자 양운덕의 해설을 참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 회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회상한' 저술들의 '발견'은 그간 플라톤에 ‘의해’ 추정할 수밖에 없던 소크라테스 읽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것이다. 그간 번역가 천병희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필두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시작하여, <국가>를 위시한 중기 대화편들, 후기 저작을 대표하는 <법률>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원전 번역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번역사를 ‘새로’ 썼다. 위작 논란에서 자유로운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을 한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새로 열린 길이었다.

 

새로운 번역사를 쓰다,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을 원전번역한 천병희
그런데 궁금했다. 그런 천병희 선생이 우리말로 옮길 다음 책은 무엇일까? 그런데, 뜻밖에도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이라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번 저작은 이후에 출간되었지만 선생은 오래 전에 번역하여, 플라톤 대화편 번역에 가늠자로 삼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자상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화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문득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저 산 저 너머에 걸린 무지개나 그 숲 어디쯤에서 노래하는 파랑새처럼.
그런데 천병희의 크세노폰 번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에 펴낸(단국대 출판부) 것을 새롭게 다듬어 펴낸 <페르시아 원정기>(숲, 2011)가 있다. ‘원정기’에 이어 필자는 번역 출간된 크세노폰의 다른 저작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이은종 옮김, 주영사, 2012)를 읽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흥미진진했지만 그 연장선에서(저자가 페르시아에 원정 과정에서 취재한 자료를 기반으로) 쓴 <키로파에디아>는 한 편의 소설(실제로 옮긴이는 소설로 규정했다)처럼 부담 없이 읽혔다. "이 사람 뭐지?" 필자는 크세노폰이 다루는 주제도 그렇거니와, 그의 글이 가진 독특한 스타일(문체, 기술 방법)에 매료되었다. 크세노폰은 그 시대에 어떻게 ‘작품’인 듯 ‘작품’이 아닌,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을 하였을까? 그 '용기'가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 그 ‘무엇’을 한동안 고민하면서 찾아야 했다. 부제에서 보듯 <키로파에디아>는 일종의 전기로 교육 문제를 다룬다. 한 인물의 혈통, 타고난 자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아 탁월한 지배자가 되었는지, (비록 적성 국가의 위인이라도) 아테나이의 독자들에게 모범을 제시한다.

 

플라톤 대화편 번역의 가늠자로 '회상록'은 미리 번역되지 않았을까?
크세노폰은 그리스에 大퀴로스(페르시아, 아카이메니다이 왕조의 시조)의 리더십을 소개하는 것이다. '리더는 따르는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당연하신 말씀이다), '항상 좋은 리더는 없다'(때론 따르는 사람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리더십의 발휘에 필수적인 도구(tool) 중 하나가 '두려움'이란다. 국내에서만 17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에서 충무공은 전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처럼 <키로파에디아>에서 소개하는 리더십에는 야전의 지휘관이기에 현장에서 터득가능하였을 생생함이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적진에서 터득한 그 나라의 리더십을 자국의 1만 용병들을 탈출시키는데 적용한다. <페르시아 원정기>는 그런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도 빛날 뿐만 아니라 응용 가능한 가치를 담고 있다. 때문에 <키로파에디아>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기>는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알렉산드로스가 휴대한 고전이 <일리아스>만은 아니었던 것).
크세노폰이 사건을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기술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자전적 저작으로, 그러한 저작을 대표한다. 이 <원정기>에 퀴로스2세의 용병 제안을 받아들인 크세노폰이 고민하는 대목이 있다. 적성국가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한다! 이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왜 사전에 용병 참여 여부를 나와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란다. 용병대의 참여가 훗날 고향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출전하더라도 신탁에 가서 묻는 등 (신중했다는) 모양새를 갖추라고 조언한다(머잖아 국가의 신들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될 소크라테스의 당부다). 두 사람이 부자(父子)나 다름없는 사제지간이었음을 엿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천병희 해설) 있다. 

 

생전의 소크라테스와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페르시아 원정기>
이것이 크세노폰이 생전의 소크라테스를 만난 마지막으로 기록이다. 그런데 크세노폰(기원전 430/25년경~355/50년경)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와 플라톤(기원전 427~347)과는 달리 5년 남짓의 특정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 어쨌든 2년 동안의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 기간(기원전 401년 3월~399년 3월)에, 아테나이의 소크라테스는 사망한다.
때문에 그는 기원전 399년의 아테나이, 소크라테스가 고발되어 재판정에 펼친 세기적인 변론을 지켜볼 수 없었다[플라톤은 이 재판을 참관했다(1)]. 투옥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감옥에도(2), 사형 집행 현장(3)에도 크세노폰은 배석할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이 과정을 지켜본 플라톤(당시 28세)에 비해(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이란 대화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 물리적인 거리에서 시간상의 차이에서 크세노폰은 스승의 죽음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배석했다는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들은 내용을 토대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쓴다. 동명의 플라톤의 대화편에 비해 길이는 짧고 깊이가 없다고 평가된다. 또한 스승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담담하다. 재판 현장의 속기록을 읽는 듯이 세세한 플라톤의 <변론>에 비하면 무성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자신의 '변론' 서두에서부터 단도직입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깔린 핵심을 짚는다. 집필에 앞서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로부터)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최후의 삶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플라톤을 비롯한)의 글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읽었다.

 

단도직입, '변론' 서두에서 스승의 죽음을 진단하는 크세노폰
그런데 이들의 기록은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고 일축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당한 것은 그가 고발된 죄(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신들을 들여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때문이 아니라(변론 자체에서는 이겼으나) 당시 기득권자들(시민배심원)의 심기를 거슬린 '괘씸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결론짓는다.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 내용보다는 그의 변론 태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거침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는데, 행간 곳곳에서 "이 양반, 큰 코 닥칠 줄 알았어."라는 저자의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듯하다.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소크라테스와 나눈 평소의 대화 스타일(말투, 태도 혹은 근성)을 잘 알기에 가능한 진단이다. 스승의 죽음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이들 사제지간의 우정은 두터웠고, 그만큼 허물없었음을 엿본다. 당대에 그리고 훗날의 독자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가까웠을 것으로 예상한다. 때문에 거두절미(去頭截尾)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가 증언하는 비밀, 그(소크라테스)가 "의도적으로 잘난 체하는 말투를 썼음"을, 짧은 지면에도 일부를 할애하여 소개한다. 

 

헤르모게네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헤르모게네스: 어째서 그렇습니까?
소크라테스: 나는 불의한 짓이라고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것이야말로 변론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변론> 앞부분의 서술을 대화로 구성_필자)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길게 늘어놓을 이유가 없으며 그의 스타일도 아니다. 이런 짧은 길이 때문에 장황한 연설문(변론 내용) 형식의 플라톤의 <변론>에 대한 일종의 소회(리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변론’은 플라톤의 관련 대화편 <크리톤>과 <파이돈>에 대한 리뷰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왜 그랬을까(독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대답할 수 있는 해석적 질문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처럼 간명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1)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2)배심원들의 반감을 ‘산’ 탓에 자신의 유죄를 더 '확실하게' 만들었다. (3)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일단 결정하자 죽음 앞에서도 유약해지지 않고(플라톤의 <변론>) 죽음을 기다릴 때도(<파이돈> 죽을 때도(<파이돈> 쾌활할 수 있었다.(크세노폰의 <변론> 32~33)
크세노폰의 '변론'은 같은 책에 수록된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의 연장선에 있는,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아니 '변론'은 상대적으로 긴 '회상록'(이 논문 전체라면)에 대한 개요(그 논문의 '초록')이며 서문이다. 그런데 간명한 '변론'에서 크세노폰은 고발자 중 1인인 멜레토스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가 발언을 상세히 재구성한다. "…… 나를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그대가 고발하는 것이 더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소?"라고. 재판에 관해 세세히 보고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던 크세노폰이 굳이 '소크라테스는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걸까?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연한 태도(일련의)를 '통해' 최후의 순간까지 시민들을 교육하였다고(가르침을 행하였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당대의 플라톤에게, 훗날 플라톤을 의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마중하는 후학들에게 크세노폰은 '가볍게'(경박 혹은 경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 회상록은 그리스판 <키로파에디아>
크세노폰은 용병으로 참전한 경험에서 <페르시아 원정기>를 썼고, 더불어 <키로파에디아>라는 그 성격을 "역사서도 정치철학서도 아니며 사실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로 규정"(역자 서문)할 수밖에 없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두 권의 대표 저술을 하게 되는 원정 기간에 고국에서는 스승이 사형선고를 받고 ‘서거’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크세노폰은 세 편의 회상록에 늘 가까이 있었지만 그 때는 몰랐던 ‘파랑새’를 상기함으로써, 또 하나의 아테나이 시민교육을 위한 ‘키로파에디아’를 남긴 것은 아닐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작품’들(대화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려볼 수 있는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그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 당대의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들에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그처럼 어려웠다면, 그런 소크라테스를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이 골프스타의 행보를 쫓는 갤러리처럼 따랐을 리 없다. 오히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을 통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상식적인) '설득하는' 소크라테스(삶과 철학)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크세노폰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 세계도 엿보는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9-02-12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크세노폰의 저작들과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함께 설명해 주시니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저는 크세노폰이 지은 책은 여태껏『페르시아 원정기』밖에 읽은 게 없는데, 그 책에 나타난 크세노폰의 불굴의 용기와 지혜에는 정말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여담입니다만, 크세노폰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여기저기 등장하는데(<아게실라오스 편>, <안토니우스 편> 등), 숱한 영웅들의 가슴 속에 귀감으로 남아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더군요.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나오고, 다른 책에서도 자주 마주친 적이 있는데 여태껏 읽어보지 못했네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크세노폰의 저작들을 한꺼번에 쭉 읽어보고 싶습니다.
* * *
두 사람의 갑작스럽고 이상한 죽음은 나에게 고통과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한니발에게도 존경을 표한다. 그는 그토록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 나오는 크리산테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칼을 뽑아 적을 치려는 순간, 후퇴 명령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곧바로 무기를 거두고 겸손하게 물러났다. 이런 것에 비하면 두 영웅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어리석게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렇다고 두 영웅의 행동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펠로피다스는 적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복수하고자 용기를 내어 한 일이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펠로피다스와 마르켈루스의 비교> 중에서

timeroad 2019-02-14 18:42   좋아요 2 | URL
플라톤에게 28세는 터닝포인트입니다. 턴레프트인지 턴라이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그렇게 보인다이지 숱한 연구 결과가 있을 (후손들) 그들의 논의야 어찌 알겠어요, 다만 뭔가 다름이 있다. 소포클레스가 처음으로 비극경연에서 우승활 때 그 나이가 28세라네요. 고맙습니다.

oren 2019-02-12 1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를 인류 최고의 인물로 숭앙했던 몽테뉴도 크세노폰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난 김에 『몽테뉴 수상록』 중에 <이름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 있는 흥미로운 글을 덧붙여 봅니다.(옹테뉴는 도대체 모르는 게 없는 둣한 사람인데도, 평생 동안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화두로 삼고 살았다니,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 * *
수많은 혈족들에 동성 동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잡다한 민족·시대·국가에도 또 얼마만큼 많은가? 역사상에는 소크라테스가 셋, 플라톤이 다섯, 이리스토텔레스가 여덟, 크세노폰이 일곱, 데메트리오스가 스물, 그리고 테오도르가 스물 있었다.

timeroad 2019-02-14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세계는 이미 인간 세상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채색이 화려하지는 앉지만 비록 흑백화라도. 4B연필은 스케치에 필요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2B연필이더군요. 현장에는 비도 내리니까요. 몽테뉴는 밑그름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