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최혜영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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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권) 완간은 그 자체로 사건인데, 2권에서 처음 선보이는 세 편의 신규 번역이 눈에 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넥세노스」다. 「메넥세노스」는 대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연설문으로 보아야 하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 2권의 유명한 연설, 전몰자를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내세워 패러디하고 있다.

 

천병희의 번역까지, 세 가지  「메넥세노스」 원전번역을 만날 수 있어
가장 먼저 이정호의 원전번역(2008, 이제이북스)이 있었고, 2018년 12월에 박종현의 번역이 그리고 이번에 천병희의 번역까지, 세 가지  「메넥세노스」 원전번역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6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두 종의 번역이 추가된 것이다. 이정호의 번역만이 존재할 때, 이 대화편을 다룬 논문을 읽었다. (인터넷 보기 가능) 장지원의 논문,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교육적  해석>(2015)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01751
초록을 잠시 살피자.
"『메넥세노스』에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대조적으로 신적 질서에 따라 자족할 수 있는 덕 있는 시민들의 폴리스를 아테네의 이상향으로 제시하며 시민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회와 희극, 비극 작품과 같은 방식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매체가 발달해 있었는데, 전몰자 추도 연설 역시 시민들의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

 

시민들에게 영향 미치는 매체가 발달, 추도연설도 유사한 기능을 수행
페리클레스는 전몰자 추도 연설에서 아테네는 전 그리스인의 학교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폴리스는 실제로는 델로스 동맹의 기금과 시민들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플라톤이 구상한 아테네의 이상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읽은 후에 「메넥세노스」를 읽어야 플라톤의 기획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의 핵심(새로움) 주장은 추도식, 전몰자를 위한 추모 의식 자체가 시민 교육마당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리스 비극 공연이 시민(교양) 교육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추도식 또한 그랬으며 특히, 당대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행하는 추도사는 그 자체가 뚜렷한 교육 목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을 읽은 후에 「메넥세노스」를 읽어야
반공이 거의 국시처럼 여겨지던 시절,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주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국적인 차원의 반공궐기대화를 하던 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장년과 노년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생 상담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을 알고 지낸 지 오래 되었는데, 성인들을 대상으로 가치관을 변화시키느니 하는 강연이나 계발서 등은 거의 대부분은 허구라고 단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어떤 식이건 성인이 될 즈음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이 형성되고(머리가 굳어지고), 이를 바꾸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 그러므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글짓기를 반공 글짓기로 시작했던, 기성세대가 이념갈등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논하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만큼 청소년기에 접하는 교육이 평생 영향을 미치는 것, 추도연설 형식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추도식마저 교육의 일환이었음을 앞서 소개한 논문을 짚어내고 있는 것.

 

추도식마저 시민교육의 일환이었음을  「메넥세노스」 분석으로 밝혀
때문에 비극 공연이 시민교육의 일환이었음은 당연한 것, 그런데, 최혜영의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그리스 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그리스 비극의 공연 의도(집필 목적)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그리스 신화에 뿌리로 하여 인간의 고뇌, 욕망, 운명, 복수, 저주 등 인간 심연의 본성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시공을 초월하여 인기를 끈다. 그리스 비극이 그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을 문학 작품으로만 이해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는 것. 특히, 1부에서는 비극 작품들의 공간 배경을 중심으로, 주요 비극작품들을 살피는데, 궁극적으로 아테나이 입장에서 아테나이 시인들이 쓴 작품을 아테나이 시민들을 관객으로 공연되었다는 점, 그러므로 거기에 아테나이 중심의 세계관이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장 테바이 배경 비극, 2장 아르고스, 3장 스파르타, 4장 코린토스 그리고 5장 아테네 배경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비극을 문학작품으로만 이해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 풀어
아테나이와 테바이는 인접한 국가이지만, 한일관계가 그러하듯이 오래된 갈등관계를 유지하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테바이를 페르시아 전쟁 즈음에 가장 먼저 페르시아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인다거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스파르테와 협력하며 아테나이를 코앞에서 괴롭히면 긴장하게 만든다. 아르고스는 친아테나이 정책을 펼치지만 필요시 '중립'을 선언한다거나 등거리 외교가 기조였다. 코린토스는 시종일관 아테나이와 적대관계일 뿐만 아니라 스파르테 펠로폰네노스 동맹의 주도국으로 오랜 전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페르시아 전쟁 발발 이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비극작품들이 공연된 시기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서 작품을 교육적 목적을 읽는 일을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하고 있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대립·협력 관계 나라(비극 공간배경)와 친소 관계 반영
"아테네 비극작가들은 사회의 교사이자 공인된 유행어의 입안자, 공인된 전통의 생산자이기도 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의 녹을 먹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조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비극시인들이란 사회를 가르치는 교사요, 국가에 유용한 조언자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27면)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이처럼 테바이를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 신들의 불문율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 명예로운 행동이 짓밟히는 사회, 남자와 여자가 전도된 사회, 왕가 여성이 결혼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되지도 못하여 왕실의 후손이 끊어지는 사회로 그려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테네는 민주정의 나라, 신들을 경외하는 나라, 남성이 남성다운 사회, 자손이 번창하는 사회로 그려지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60면)

 

아리스토파네스, “비극시인들이란 사회를 가르치는 교사요, 국가에 유용한 조언자들”
비극 공연은 공동체 디오니소스 제전에 바쳐진 전체의 종교 행사였다. 뿐만 아니라, 테바이 등 '적국'의 기세를 꺾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이기도 했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정치적인 행사이기도 했다. 추도식까지, 「메넥세노스」를 교육적 효과 차원에서 해석하는 논문을 소개한 것은, 비극은 오죽했겠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이러한 측면에서 비극 작품의 탄생 배경을 밝히는 흔치 않은 국내 비극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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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인질이다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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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논문 형식이라 잘 읽히지는 않는데, 그래도 다루는 내용이 놀랍다. 제시하는 사례 말고도 살면서, 꼭 <그것이 알고 싶다>(SBS)를 즐겨 시청하지 않아도 주변 혹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때마다 왜 그럴까, 던진 질문에 대한 일련의 대답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이거 뭐지?’ 하면서도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일 것이다. 머리말 첫머리에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거 뭐지?’  질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 생성되는 경험

맞는 얘기인데, 이처럼 책을 읽는(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힘겨운 여정이 된다는 것. '어렵다‘는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흔히 철학서적 읽기에서 겪는 어려움과 다른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이하다. 고정관념이 한 방에 깨질 것이며, 그럴 내용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렇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독서를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과정이며 기다리는 순간인가? 또 하나 여성들을 지칭할 때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 대한 배경설명이다.

"'우리'를 쓰기로 한 건 이 책이 여자들에 의해, 여자들을 위해, 여자들을 대상 독자로 쓰인 여자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을 모든 독자가 확실히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3면)

라고. 그렇다면 남자 독자인 나(필자)는 봐서는 안 되는 책을 '훔쳐보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보다 더 그럴듯한 설정이 또 있겠나 싶다. 그 진의를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문제를 우리가 자각하고 우리가 먼저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특히 남자들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는 사실 확인으로 읽는다.

 

누군가 특히 남자들이 '해주는' 것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더라

페이퍼로 이 책을 다룬 바 있거니와, 이 책의 근간(출발점)이 되는 여남 간 유대감을 다룬 그레이엄의 논문이 발표된 해는 1991년이란다. 이 논문은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는데, 그만큼 논문의 결론은 충격적이며 도발적이었다. 필자는 페이퍼에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연동하여 다뤘는데, 양귀자 작가가 이 논문을 읽고 이 작품을 썼는지 여부가 궁금해진다. 그만큼 이 책이 다루는 사례들과 소설 속 상황은 다른 듯하면서도 의외로 깊이 있고 복합적인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상황은 그 인질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 그리고 제기하는 문제점을 폭로하고 사회문제로 등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질극을 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의 헤드라인은 「여자의 삶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이다. 첫 문장을 이미 얘기했다. 25년이란 아마도 이 책의 원전 초판 시점(1994)을 기점으로 하는 듯하다. 4반세기가 흘렀음에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수정 교수 등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멘트를(최근의 사건을 다룬 콘텐츠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회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스톨홀름 증후군에 대한 언급이 숱하게 나왔을 것이다. 
 

25년간 상담가, 심리학자, 페미니스트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 25년이라니..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벌어진 인질극을 취재하던 기자 대니얼 랭은 인질범과 인질 사이에 싹튼 '일종의 공동체 의식'에 흥미가 생겨 당사자들을 인터뷰한다. 이 책 2장에서는 1974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 실린 랭의 기사를 바탕으로 사례를 소개한다. 이 시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주저자인 그레이엄은 논문을 통해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어 이 이론에서 가지를 친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서술한다. 여남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질극은 우리의 너무도 가까운 일상 속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

필자가 흥미롭게 읽은 한 대목을 고르라면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의 스웨덴 스톡홀름을 포함한 실제 인질극의 사례와 74면에서 시작되는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이다.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 협상팀은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 웬만하면 인질점-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것. 스톡홀름 증후군을 역이용하여 인질의 안전을 기한다는 얘기다.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어쨌든 저자도 머리말에서 '경고'했지만 단숨에 읽기에는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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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7 - 알키비아데스 1.2 / 힙피아스 1.2 / 미노스 / 에피노미스 / 테아게스 / 클레이토폰 / 힙파르코스 / 연인들 / 서한집 / 용어 해설 / 위작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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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훈련소에서 일정 기간 훈련을 마친 신병들을 여러 부대(자대)로 배치하는 인사담당관의 기분이랄까,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7권’에 실린 플라톤의 저작들을 두루 읽었는데, 글로 정리하려니 난감하다. 처음 읽는 작품들이 상당수가 있어 반가웠지만 몇 마디씩만 얹어도 장문의 글이 될 것이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구구절절 읽으면서 메모한 것들을 모두 늘어놓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한두 편만 언급하는 것도 좀 그렇다. '위작들'로 묶였지만 그 안에는 길이가 들쑥날쑥한 6편의 대화편이 있다.「서한집 Epistorai」에는 짧은 편지도 있지만, 플라톤이 직접 쓴 것으로 평가하는 일곱 번째 편지의 경우는 자전적인 내용을 포함한 상당한 분량이다. 우선 이번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먼저 출가된 원전 번역 사례들을 살핀다.

 

처음 읽는 작품들 상당수라 반가웠지만, 두려운 스크롤 압박
먼저 『알키비아데스 1,2』(김주일/정준영, 이제이북스)는 2014년에 출간되었다. 앞서 정암학당 플라톤전집 시리즈로 「서한집 Epistorai」은 『편지들』(김주일/강철웅/이정호, 2009년 3월)이란 제호로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노스 Minos」와 「에피노미스 Epinomis」다. '법률에 관하여' 논하는 「미노스」와 '새벽회의 또는 철학자에 관하여'가 부제인 「에피노미스」는 플라톤 최후의 역작 『법률』과 관련이 깊은데,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묶일 때 두 작품은 부록으로 『법률』편의 앞과 뒤에 붙여 소개된다는 것, 『플라톤의 법률』(서광사, 2009년 9월) 역주서를 내면서 박종현 선생도 부록으로 두 편을 소개하여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에피노미스(Epinomis)는 '<법률> 부록'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새벽회의'는 『법률』12권에서 언급되는데, 『법률』에서 새벽에 나랏일을 논하는 엘리트집단을 말한다(「에피노미스」는 '그 지혜를 추구하도록 새벽 회의 회원들에게 촉구해야 합니다'로 끝난다). 이 말들을 곧게 펴셔 다시 얘기하면, 「미노스」와 「에피노미스」 읽기는 쉽지 않다는 것. 『법률』과 연계해야 하니 품이 좀 들어가는 독서가 될 것이다.

 

『법률』과 연계해야 하는  「미노스」와 「에피노미스」 
이상은 철학 연구자들의 번역이니, 친절한 해설이나 주석을 참고하시고, 천병희의 텍스트와 간명한 주석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알키비아데스 I·II」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의 『향연』(후반부)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알키비아데스 전'으로 독립시켜 읽고 싶을 정도로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의 전력이 담겨 있어, 역시 필독해야 할 참고서가 아닐까 한다. '비교열전(대비열전)'으로도 불리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로마의 장군 코리올라누스(기원전 490년 활동)와 비교되는데, '영웅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후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지 않아야 할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대표사례다. 그러나 천병희의 '영웅전'에는 그리스 5인 로마 6인의 영웅들만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어 '알키비아데스 전'은 다루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와 『헬레니카』(크세노폰)를 토대로 '알키비아데스 전'을 썼다고 한다. 『헬레니카』도 좋은 알키비아데스 참고서다.

 

현대의 ‘나쁜 남자’의 신화 알키비아데스 읽기 지도
「알키비아데스I·II」, 특히 「알키비아데스I」에서 소크라테스는 애증(愛憎) 관계인 알키비아데스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정치계로 나서려는 것을 만류한다. '사람의 본성에 관하여'란 부제가 심상치 않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04년에 살해당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이점이 소크라테스의 사형 선고와 무관하지 않다. 양부였던 페리클레스의 사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시민들과도 원망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록」6장에는 20세도 채 안된 플라톤의 형 아리스톤이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대중연설가가 되려고 나서는 것을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설득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반면 같은 책 7장에서는 노 글라우콘(플라톤의 외할아버지)의 아들인 카르테미스가 이미 저명인사이고 당대의 정치가들보다 유능함에도 정치에 입문하려 하지 않아 소크라테스가 이를 설득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I·II」와 함께 살피면 흥미로운 텍스트다.

 

정치가의 꿈 접은 플라톤의 속마음 엿보기
「힙피아스I Hippias meizon」(아름다움에 관하여)에서 소크라테스는 ‘잘나가는’소피스트 힙피아스를 만나 '무엇이 아름다운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를 집요하게 묻는다. 흥미로운 미학논쟁인데 정의가 일단락되었다 싶으면 다시 뒤집는, 힙피아스를 괴롭히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논쟁술이 흥미롭다.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과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플라톤이 쓴 것으로 확실시되는「힙피아스II Hippias elatton」의 부제는 '거짓에 관하여'다. 힙피아스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힙피아스가 아테나이에 출장올 때면 머무는 집의 주인 에우디코스가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아킬레우스)와 『오뒷세이아』(오뒷세우스)를 읽은 이들을 위한 ‘작품토론’이랄까, 두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등장인물들의 품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능력자이며 좋은 사람냐, 현재의 상식과는 이반되는 역설이 왜 가능한지, 논의의 결과를 내는 흥미로운 대화편이다. 길지 않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
「테아게스」(Theages)의 부제는 '지혜에 관하여'인데, 데모도코스-테아게스 부자(父子)와 소크라테스 셋이 나누는 대화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참주라도 되겠다는, 그래서 최고의 선생님(소피스트)을 만나게 해달라는 아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데모도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맡기고……. 앞서 거론한 알키비아데스를 설득하는 듯한 소크라테스의 논리가 등장하는데, 결국 소크라테스는 테아게스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 정치란 무엇인지 복잡하지 않게, 소크라테스가 왜 젊은이들을 선동한 죄목을 받게 되었는지, 실감나게 당대의 소크라테스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화편이다. 「클레이토폰 Kleitophon」(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클레이토폰의 도발은 통쾌하며, 「힙파르코스」(이득을 사랑하는 사람)는소크라테스와 그의 학우가 나누는 대화인데, '(셜령 그 과정이 사악하더라도) 이득을 사랑한다고 남을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힙피아스II」에서 이미 맛본 현대의 상식과 부합하는 역설을 나름의 논리로 입증하고 있다. ‘악용(惡用)’은 금물.

 

현대의 상식과는 다른 역설을 입증하는 논쟁, 악용은 금물
(arete)미덕: 최선의 성향; 사멸하는 생명체의 그 자체로 칭찬받을 만한 상태;

그것을 가진 자가 그 때문에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마음가짐; 법률을 준수하는 것;

그것을 가진 자가 그 때문에 더없이 탁월하다고 일컬어지는 상태; 준법정신을 낳는 마음가짐.
미덕(arete)에 대한 이와 같은 풀이처럼「용어 해설 Horoi」에는 184개의 개념에 대한 간명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수사학/시학』)에서 다루는 풀이들과 비교하면 흥미롭지 않을까?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아도 사람의 마음(감정)은 거기서 거기, 많이 달라진 것은 없더라.

 

184개 용어 간명하게 정리「용어 해설」,『수사학』과 함께
6편의 「위작들 Notheuomenoi」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 수록된 어느 작품이라도 얘기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작품 자체보다는 위작 논란으로 더욱 주목받은 작품들이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7권’에는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도 그렇고, 주요 대화편들에서 복잡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비해 간명하게 논쟁의 기술을 엿볼 수 있어, 플라톤 대화편 읽기의 개론서라고 할까, '그리고 플라톤전집 7권'(의외로 7권이 보물일 수 있다)이 가지는 의미는 현재로선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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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2 - 파이드로스 / 메논 / 뤼시스 / 라케스 / 카르미데스 / 에우튀프론 / 에우튀데모스 / 메넥세노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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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라톤전집Ⅱ에 수록된 대화편 8편 가운데 첫 번역인 세 대화편을 중심으로 얘기하겠다. 초기 대화편인 「에우튀프론」(Euthyphron)과 중기 대화편에 속하는 「에우튀데모스」(Euthydemos)와 「메넥세노스」(Menexenos)다. 중기 대화편 「파이드로스」와 「메논」은 2013년 5월에, 초기 대화편인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는 2015년 1월에 한 권씩으로 출간된 바 있다. 플라톤전집Ⅱ는 플라톤의 초기 4편, 중기 4편의 대화편을 수록하고 있는 것. 기존에 출간된 대화편들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몇 차례 다룬 작품이다. 가능하다면 대화편마다 한두 가지씩 천병희 번역이 가지는 의미를 살필까 한다.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라톤전집Ⅱ, 초기와 중기 대화편 4편씩 수록
No1「에우튀프론」은 박종현의 주석서로 일찍이 2003년에 번역되었다. 2018년 1월에는 정암학당 플라톤전집(20, 강성훈 옮김)이 오랜 만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천병희의 번역이 나온 것. 박종현은 「에우튀프론」을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과 한 권으로 출간하였다. 이들 네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최후 관련 4부작으로 분류되는 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집필 시점과 무관하게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기 전후, 사형이 집회되는 순간까지 몇 차례 대화를 나누는데,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왜? 재판정에서의 ‘변론’ 이전에 진행된 대화는「변론」의 내용(과정)을 변론하거나 보완하고 있다. 「에우튀프론」은 그런 콘텐츠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 단서는 '지식에 관하여' 논한 『테아이테토스』끝부분에서 발견된다.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테아이테토스, 210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다음 날 테오도로스(테아이테토스의 대담자)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는데, 그 대화가 『소피스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진행된 대화가 『정치가』로 집필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중심에 있고, 이후 『크리톤』과 『파이돈』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테아이테토스』 대화가 끝나고 고발장 관련 예비심사를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간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을 만나는 것, "기원전 399년 일흔 살쯤 된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앞두고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주랑에서 에우튀프론을 우연히 만나 나눈 대화"가 「에우튀프론」이다.

 

「변론」이전에 변론을 위한 대화편 하나 추가요,「에우튀프론 」

멜레토스가 고발한 사유를 에우튀프론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1)(멜레토스는) 우리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그 '누구'란 소크라테스다) 2)옛날부터 믿어온 신들을 믿지 않고 생소한 신들을 만들어내는 까닭에 나를 고발했다('나'는 소크라테스다). ‘경건에 관하여’ 논의하는 「에우튀프론」는 고발 사유2 곧 '불경죄'와 관련되어 있다. 불경은 경건하지 못한 것,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변론' 이전에 소크라테스가 결코 불경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며칠 후 「변론」의 ‘변론’으로 기획(구성)한 셈이다. 고발사유 1)은 흔히 '소피스트 혐의'로 불리는데, 「에우튀프론」 대화에 이어 진행된 『소피스트』와 『정치가』가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다. 또한 심오하기 그지없는 '지식에 관한' 논의 『테아이테토스』는 「에우튀프론」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불경죄 협의에서 벗어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최후와 관련해서는, 실제 대화가 이뤄진 순서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테아이테토스』-『에우튀프론』-『소피스트』-『정치가』-『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
「에우튀프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이냐, 에우튀프론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하지만 명확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무리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질문이 등장한다. “경건한 것은 신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가?"(10a,전집2 362면) 이른바 '에우튀프론 딜레마' 혹은 '에우튀프론 문제'라고 불리는 유명한 질문이다.

 

“신들에게 사랑받기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에 신들에게 사랑받는가?"
No2「에우튀데모스」의 부제는 '논쟁에 관하여'다. 액자 형식인데, 액자 밖 주 대담자는 소크라테스와 죽마고우인 크리톤이다. 크리톤(Kriton)은 다른 대화편 『크리톤』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에게 목숨부터 부지하고 후사를 도모하자며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조목조목 그러나 차분하게 반박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는 『크리톤』에 이어 두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을 엿볼 수 있다. 심각한 철학 논쟁을 다루면서도 이들 죽마고우는 서로를 배려하고 시종일관 따뜻한 대화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 책 플라톤전집2권에 수록된 「뤼시스」는 '우정에 관하여' 논의하고 우정의 사례가 등장한다. 하지만 『크리톤』에 이어 「에우튀데모스」에서 두 대담자가 나누는 대화의 행간에서는 우정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액자 밖 두 대담자의 대화를 읽는 가운데, 얻는 팁일 뿐이다. 친구 크리톤에게 소크라테스가 들려주는, 자신이 주도한 논쟁에 대한 이야기기는 첨예하고 때론 잔혹한 정로도 무차별 공격과 방어, 말의 전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론에서 다루기로 하자) 다만 「에우튀데모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여느 희극보다 내용과 형식에서 조화를 이룬 한 편의 희극 작품으로 대접을 받았고 그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였다.

 

심각한 철학적 논쟁 다루지만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우정 어린 대화가 돋보여
No3「에우튀데모스」가 한 편의 훌륭한 희극으로 평소의 소크라테스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메넥세노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연설가로 ‘데뷔’한다. 「에우튀데모스」는 내재한 수수께끼가 하도 많아서, 다채로운 논쟁거리가 되며 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천병희의 「메넥세노스」 번역은 어떤 의미일까, 간단하게 언급한다. 천병희는 한 포털사이트의 인터뷰에서 번역의 가치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처음에 그리스어 텍스트를 대하면 완전히 앞이 캄캄합니다. …… 여러 가지 번역이나 주석 등의 도움을 받아서 손질을 좀 하면 괜찮은 번역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내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때 어떤 희열 같은 걸 느끼죠."-[네이버 지식백과] 번역가 천병희의 서재(2015. 05. 28.)
원전(작품)의 재료인 해당 언어에 얼마나 정통하느냐와 별개로 번역 과정에서는 풀리지 않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기존 번역(다른 언어권 번역을 포함한다)이나 그 주석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풀린다는 얘기다. 한 단어가 한 문장이 이런 추리과정을 통해 완성된다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천병희는 자신의 기존 번역을 참고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병희의 「메넥세노스」 번역은 어떠했을까?
연설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해서 텍스트는 길지 않다. 해서 관련 대화편들과 묶는 계기가 없었을 뿐, 「메넥세노스」 번역 자체는 수월했으리라. 「메넥세노스」는 전후에 소크라테스와 메넥세노스가 나누는 대화(액자 밖)가 있지만,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행하는 연설(형식)이다. 그리고 이 연설(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 제2권 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사(Ⅱ권, 34~46장)를 패러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원전)번역가가 천병희(2011년 6월, 숲)다. 소크라테스가 패러디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전쟁사' 본문에 등장하는 40여 편의 연설문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부분. 달리 얘기하면 페리클레스의 해당 연설은 번역가 천병희에게 1/n일 뿐이며 여기서 n은 40쯤이 되는 것.

 

'전쟁사' 페리클레스 추도사 패러디가 「메넥세노스」, 천병희의 빛나는 번역
투퀴디데스는『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역사)의 주요 국면마다 ‘행한 것으로’ 연설문이나 대화를 재구성하여,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창조하여 활용한다. 2008년 1월, 정암학당 플라톤전집으로 『메넥세노스』를 출간할 때 옮긴이(이정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부록으로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문을 옮겨 놓아 소크라테스의 추도 연설과 함께 살펴볼 수 있게" 한 것. 일종의 배려다. 그러나 당시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번역이 없을 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메넥세노스」는 관련 작품 해설이나 친절한 주석보다도 ‘페리클레스의 연설’를 읽기 전 혹은 후에 비교 독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화편이다. 플라톤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인지 왜 그러는지 도무지 감(感)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병희는 2011년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부문)을 받는데, 수상작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다. 이번 플라톤전집 완역도 그렇고 상(賞)을 받으셔야 할 역작이 숱하지만, 그런 번역가 천병희에게 흔치 않았던 수상이다. 어쨌든 그 수상작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였고, 거기 수록된 유명 연설과 관련된 패러디 연설인 「메넥세노스」를 이제야 천병희의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것. 이것만으로도 아니 이것이야말로 이번 「메넥세노스」를 읽는 즐거움, 진가(眞價)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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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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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을 당할 만하지 않은 사람이 치명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변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고통의 감정'.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clcos)'을 정의한다. 이어서『수사학』은 연민의 감정을 자세히 살핀다. 정의에서의 '변고'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이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머지않아 당할 법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다가올 일과 관련되어 있단 얘기다. "연민의 정을 느끼자면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이나 친구 중 한 명이 어떤 변고를, 그것도 우리가 연민에 관한 정의에서 말한 것과 같거나 그와 거의 비슷한 변고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수사학> 2권 8장-연민, 16~19행) 필자는 이 책을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데, 저자는 어떤 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심적 상태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논의를 이어간다. 

 

『수사학』은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

『13번째 증언』을 읽었다. 저자가 응한 인터뷰들과 관련 기사들도 읽었다. 책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올리다가, 윤지오 배우의 책과 인터뷰에서 느낀 어떤 감정이랄까, 그것을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까, 『수사학』몇 장을 읽어가면서 추적해보게 돠었다. 10년 동안 저자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동료배우(언니)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일까? 책보다 인터뷰들을 먼저 보아서인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미안함'이었다. 책에는 죄책감, 자책감이란 단어도 보인다. 자신의 처지가 동료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첫 실명 인터뷰(<故장자연 씨 동료의 최초 증언(윤지오)_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윤 배우는, 그 기획사에 소속되기 전에 ‘언니’와 몇 개월을 알고 지냈다고 했다. 윤 배우 부모님은 캐나다에 살고 있었고, 언니는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신 상태라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 윤 배우는, 자신은 위약금을 물고 기획사를 나온 상태였으나 "언니는 나오고 싶은 상태"였지만 "그럴 수 없어서 기획사를 나오기 위해 작성된 문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뉴스들이 다루고 있으니, 이만큼만 언급하자.

 

『13번째 증언』과 인터뷰를 접하며 먼저 떠오른 말은 '미안함'

그런데, <수사학>을 살피는데, '미안함'이란 항목이 없다. 가장 근접한 감정들을(항목) 살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연민'이었다. <위키백과>는 연민(憐愍/憐憫)을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한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국어사전은 연민(憐憫)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유의어로, 동정(同情)을 소개한다. 같을 동[同]에 정 정[情]이다. 낯설고 새롭다. 명사 '동정'의 기본의미는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알아주거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란다. 이런 사전풀이를 앞세우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술과 비교핼 볼 필요는 느껴서다.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안면은 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야 한다.'는 것. 그럴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기에 그렇단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끔찍한 것(기억)은 가련(可憐)한 것과는 다르며, 때로는 연민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란다. 연민과 ‘반대되는’ 그 감정은 무엇일까?
끔찍한 것이 나의 문제로 다가오면 우리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한다. <수사학>에 따르면 10년을 마음감옥에서 보내고 있는 윤 배우가 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곧 '연민'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비록 남남이지만 윤 배우가 언니의 비극에 ‘참전하고’ 있는 정도가 연민 그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책의 한 대목에 주목한다.
"죽음으로 말하려 했던 언니의 고통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기억들을 피하지 않고 다시 마주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13번째 증언』 244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가 숱한 증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다.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 가운데 희생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잠재독자를 향하는 저자의 마음이야말로 ‘수사학’이 정의하는 연민에 가깝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수사학>에 따르면 연민에 가장 ‘대립되는’('반대되는'이 아니다) 것이 '분개(nemesan)'이다(같은 책, 2권 9장_분개). 그러데 이 감정도 예사롭지 않다.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되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는 분개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도리라는 것.”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연민’이다. 그리고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다. 이렇게 연민과 분개는 대립각을 형성한다. 자신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 예상될 때 가지는, 연민보다 더욱 깊이 참전하는(반대 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수사학>은 이번에도(‘분개’의 경우도) '어떤 불상사가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웃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생긴다.'고, 분개라는 감정도 ‘부당하게 번영하는’ 상대와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단다. 이에 따르면 『13번째 증언』이나 인터뷰는 ‘분개하는’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분개하게 하지만, 앞서 제기한 어떤 ‘미안함’과는 좀 다른 듯하다.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  연민과 대립각을 형성

오히려 저자가 겪은, 겪고 있는 그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하고 있거나 아직도 두려움 그 자체로 보인다. '두려움'(수사학 2권 제5장)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다. 세월이 약이라고는 하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작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분개의 대상이 되오 있으며, 먼저 떠난 동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 친구를 제대로 배웅하기 위해 용기를 낸 자가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뭔가 한참 잘못되어 있다. 『일리아스』라는 서사시의 배경은 10년 전쟁(트로이아 전쟁)이다. 그러나 그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일반화하면 ‘인간의 분노’다. 전쟁 10년째에 이르러 ‘끝내’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분노’란? <수사학>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 없이 명백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 하는, 고통이 뒤따르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복수'나 '고통이 따르는 욕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데, 차분히 생각하면 심오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헥토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들인다. ‘자신의 친구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분노를 거두는 것. 『일리아스』는 이처럼 주제인 분노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곧바로 ‘자신의’ 분노를 거두어들이는 아킬레우스

<수사학>은 앞서의 정의에 입각하여,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일부)에게 화를 낼 것이며, 그 이유는(분노하는) '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 책 2권 제2장-분노)이란다. 『일리아스』를 떠올리면 얼른 이해가 된다. 『13번째 증언』의 저자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떤 미안함이고 자책감이고 회한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히는 과정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연민'과 '분개' 사이에 있을까? '두려움'과 '분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수사학』의 목차를 살펴보기시를. 이 가운데 몇몇 항목들을 살폈으나 저자가 고인에게 느끼고 있는, 그 아음 읽기는 실패한 것 같다. 다만 그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인간이 가진 감정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 책이 일종의 '감정사전'이면서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연민과 분개와 두려움과 분노를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사각형 내부에 한 점을 찍는다면 과연 어느 지점이 될까? 과연 이런 가상의 사각형 안에 한 점을 찍을 수는 있는 것일까?  책 『13번째 증언』과 저자의 인터뷰, 관련 기사들을 대하는 마음은 예사롭지 않다.  『13번째 증언』 저자가 책의 출간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우정이랄까. 그 아레테(arete)를 굳이 우리말 한 단어로 옮긴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닐는지.

 

*이 글은 『13번째 증언』이란 책과 인터뷰들을 보면서 착안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방점을 찍은, 필자의 '의견'이라, 해당 책과는 연동하지 않습니다. 이 책과 관련된 리뷰는 따로 올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필자 timeroad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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