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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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아 말하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고전들을 읽는 소회는 이와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웠던 지난 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다시 맞이한 여름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삼 세 판이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세 차례는 해야 지는 쪽의 아쉬움이 덜할 수 없다. 이기는 쪽에도 단지 운(運)만으로 이긴 건 아니라는 뿌듯함을 선사한다. 얼마 전에 고전번역가 천병희의 『일리아스』 개정판이 나왔다. 세 번째 수정판이다. 간명한 ‘옮긴이 서문’에서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전 하나를 우리말로 다듬고 또 다듬은 노장의 소회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의 『일리아스』 첫 우리말 원전번역은 1982년에 이뤄졌다. 1996년에 1차 수정판이 나왔고, 정년퇴임 직후인 2006년 2차 수정판부터 도서출판 숲에서 펴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한 권이라도 더 옮기고자 하는 선생의 바람과 일상생활의 거의 전부가 된 꾸준한 번역작업, 덕분에 지금 우리 독자들은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쉬운 우리말로 그리스 라틴 고전들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새로운 원전 텍스트를 한 권이라도 더 내고자 몸과 마음이 바쁜 와중에도 고전 중의 고전, 고전들의 고전 우리말 『일리아스』를 틈틈이 다듬은 결과가 이번 3차 수정판(2015년 6월)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설전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 하이라이트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에는 인류 최초의 전쟁 서사시답게, 유명한 전투들이 등장하는데, 이번 개정판 출간 또한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 속 세기의 대결이 그러하듯

개정판 출간도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
무엇보다 이번 수정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후주 체제에서 각주 체제로의 전환이다. 선생의 뜻을 출판사가 받아들여 거의 새로 펴내는 공정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다. 후주가 더 나은지 각주가 더 알맞은지는 책의 성격에 따라(주석들이 본문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나을지 1차 판단은 저자와 출판사의 몫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好)/불호(不好)가 엇갈리는 주문이 이어졌으리라. 일반적으로 책이라는 물품을 공급하는 입장에서는 깨알 같은 주석들이 독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에 후주 체제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특히 고전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구매한 데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하나까지 가급적 이른 시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고전이며, 잘된 번역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 그럴 때라야 지속적인 출간과 업그레이드, 곧 사후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번역은 이미 그 진가가 입증된 다른 문화권의 다른 언어로 된 이야기를 우리 문화권에 우리말로 접목한다는 점에서 ‘창조’에 가깝다.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의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결국은 주석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라야 한다. 한 차례 읽고 지나치는 소품이 아니라 소장하면서 읽고 또 읽는 걸작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후주 체제를 각주 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이었으리라.

 

주석 하나하나까지 알차게 읽어야 소화가능한 고전, 

후주체제에서 각주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
흔히 시(詩)는 문학예술의 꽃이라고 하는데, 24권 분량의 『일리아스』는 시 중에서도 서사시(敍事詩)에 해당한다. 창작은 말할 것도 없고, 운문이기에 시 번역은 흔히 반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그리스인들에게 처음 복잡한 신(神)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두 사람은 헬라스 인들(그리스인들)에게 신을 선물해주었다고 말한다.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헬라스 인들을 위해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신들 사이에 직책과 활동 영역을 배분하고, 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제2권 53장)”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서사시의 두 거장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 신화를 체계화하면서 경쟁했다. 그런데 신들과 영웅들의 세계가 처음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인류사의 사건인데, 서사시라는 형식에 담았으니 우리말 번역은 오랫동안 무거운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시 장르라는 점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가중(加重)되었다. 또한 희랍어 문장구성은 곧잘 한문 문장의 구성과 비교되는데, 번역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번역을 할 수 있어 매번 난해한 공정일 수밖에 없다고. 내용을 오롯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시를 시로 번역해야 하니 더욱 어렵다. 더구나 구술 형식으로 전달되던 것들이 글자로 고정된 것이라, 구어체로 다듬어진 유려함을 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천병희 선생이 한 한 인터뷰에서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고 했겠는가.

 

시라는 장르로 펼친 복잡다단한 신(神)들의 세계,

구술로 다듬어진 유려함 재현 결코 쉽지 않아
세월이 흘러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의 시기를 살아가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 고전을 최초로 쓰인 그 언어로 읽을 수 없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천병희를 이을 ‘청출어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이런 까닭에 한 작품이라도 더 기왕이면 번역이 쉽지 않은 작품을 선택하여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는 천병희 선생의 초조(焦燥)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는 번역이 잘 되었다는 영역이나 독역으로 『일리아스』를 읽어도(지난한 번역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리아스』를 다듬고 또 다듬어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에 이르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뜻이다.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 걷기라면,

우리말 번역 읽기는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또한 3차 수정판 발행은, 그동안 ‘높은 문턱’으로만 알았던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꾸준한 독서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양 철학의 삼태성으로 불리는 세 사람도 평생 동안 호메로스의 독자로 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말과 글을 남겼다. 어렵다는 플라톤의 대화편 거의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고전번역가 천병희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다듬어낸 『일리아스』 개정판을 만나는 마음은 각별하다. 더 이상 책 후반부의 후주 등을 떼어내 별도로 제본하여 『일리아스』를 읽지 않아도 된다. 양장본의 책을 휴대하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주지만, 무엇보다 무거워서 분책(分冊)하여 읽기도 하였다. 읽고 또 읽을수록 숱하게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과 배경이 익숙해질수록 새로운 맛을 주는 『일리아스』 거듭 읽기는 명품 뮤지컬을 '보고 또 보아도' 그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아니 거듭 읽어도 매번 새로운 감동을 주는 『일리아스』 읽는 즐거움이 명품 뮤지컬에서도 발견된다고 해야겠다.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는데, 천병희 표 원전고전을 읽는 소회는 예외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운 지난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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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신화집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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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이나 문자를 수단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또는 체계가 언어(言語)다. 언어는 그 수단에 따라 음성과 문자로 나뉘는데, 음성언어가 말이고 문자언어가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팔십 평생을 살았는데 현존하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서양 대학의 시초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 운영한 이가 어찌 글에만 의지했겠는가? 다만, 본인 저작이 분명한 26~28편의 대화편이 고스란히 전해짐으로써, 교수나 총장 플라톤보다는 저자 혹은 작가 플라톤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글에 생전의 소크라테스 님 '말씀'을 오롯이 살려놓고 있다. 최후 저작인 『법률』과 후기 대화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대화편들의 주인공이시다. 어느 드라마 작가의 작품(드라마)에는 어느 어느 배우가 반드시 등장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제자 플라톤의 글에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들

‘플라톤 신화집’이란 제호를 보고 첫 번째로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호의 단어들을 인수분해하면 ‘플라톤 + 신화 + 집[모음]'이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남긴 업적이 위대하여 그야말로 ‘신화적’이란 건가? 그렇다면 ‘플라톤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플라톤이 창조한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라는 것인데, 플라톤의 수집한 신화라는 의미와 플라톤이 지은 신화, 두 의미 모두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두 종류의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 플라톤 신화집이란다. 신화(神話)를 신(神)들의 이야기(話)라고만 한정할 것은 아니지만, 신화가 창작이 가능한 그런 대상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단히 불경(不敬)스런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니 로마 신화니 단군신화니 하는 것도 맨 처음에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이 있으리라. 신화를 한 사람의 창작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믿음으로써 ‘신적인’ 존재의 존재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확신-확고의 단계를 거쳐 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 다만, 그러한 신들의 이야기를 지은 작가가 분명하지 않기에 지음(作)의 결과라는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신화(神話)를 창작한다고? 신화적인 작가 플라톤?

그러므로,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신화는, 신령(神靈)스럽고 신기(神技)한 그리고 신묘(神妙)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흔히 신화는 곧 신들의 이야기라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이 처음 쓰일 때부터 myth의 번역어 신화는 순정한 의미의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 신화집에는 9개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려 뽑은 11개의 신화가 (에피소드 모음 형식으로) 모여 있다. 1)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2)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그러나 중대한) 진리, 3)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경험으로 터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야기들의 진실성은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오리지널’ 신화에서 답변을 위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 처음부터 넓은 의미의 신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일명 ‘신통기’)를 참고하면, 그리스 창조 신화에는 주목해야 할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서사 조직의 논리가 억압, 반역, 거세(去勢)의 반복이라는 것.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선행 세대를 거세한다. ‘낮’과 ‘빛’은 ‘밤’과 ‘어둠’을 반역하고 그들을 거세하거나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야 빛이 들어설 수 있고 밤을 몰아내야 낮이 올 수 있다. ‘카오스’(‘혼돈’으로 명명하기 이전의 그냥 카오스)가 땅, 어둠, 밤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는 태초의 사건들, 이들을 살피면 “어둠과 밤의 관계(유사성)는 그 다음 세대인 빛과 낮의 관계(유사성)와 같고, 어둠/밤 빛/낮의 두 쌍은 서로 반대쌍의 관계에 있다. … 거세와 추방은 후속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쟁취이다”(도정일, <문학동네> 1998년 봄호 중) 곧 가시적인 있음을 근거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정할 수 있다. 이 말을 플라톤의 신화(설정)에 도입하자. 가시적인 세계의 가능한 이야기가 있으므로, 비가시적인 세계의 불가능(해 보이는)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된다. 가지(可知)적인 것이 ‘있음’으로 불가지(不可知)적인 ‘없음(있을 수 없는)’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가시의 가능한 세계 있어, 비가시의 불가능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어

어쨌거나 플라톤은 기존 신화들을 수집하고, 약간씩 이야기를 뒤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화(myth)’의 개념을 넓게 잡음으로써 불경(不敬)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봐도 될까? 그렇다면 몇몇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취해서 신적인,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얘기했노라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필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스승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不敬)다. 좀 가혹하지 않나? 당시 아테네에서의 불경죄란 우리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그런 죄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플라톤은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함으로써,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이었음을 ‘변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더라도 고지식한 이들에게는 그런 말들을 시쳇말로 ‘구라’로, 그를 구라에 능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인데, 작가 플라톤이 주인공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역할로는 '쫌' 그렇다.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임을 ‘변호’

'플라톤 신화집'의 신화에는 우화(寓話), 전설(傳說), 신탁(神託) 등의 설정을 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유형들이 있다. 하나하나 살피는 재미가 어렵지만 쏠쏠하다. 다만, 신화의 첫 대목에서 비록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만 신뢰도 향상을 위해, 출처를 언급하는 대목들은 이들 신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이런 신화들을 수집하고, 뒤틀고, 창작했는지 그 목적을 가늠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523a-527a)에서 가져온 ‘혼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 말마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자네는 아마 이 이야기를 설화[mythos]로 여기겠지만, 나는 실화[logos]로 여긴다네. 나는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향연> 201d-212c ‘에로스의 탄생’ 중)
‘이제는 사람들 말마따나’, '옛날 옛적에'처럼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와 같은 관행적인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전에 마티네이아 여신 디오티마한테서 들은 에로스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그녀는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도 해박했는데, 한번은 아테나이인들로 하여금 미리 제물을 바치게 하여 역병(疫病)의 내습을 10년 동안이나 늦출 수 있었지. 바로 그녀가 나에게도 사랑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네."
주석에 따르면 ‘디오티마’는 실재했다기보다는 플라톤의 작명이다. ‘만티네이아(mantineia)’는 동(東) 아르카디아 지방의 도시로, 'mantis'('예언자' '예언녀')와 발음이 비슷하다. 신의 권위를 빌릴 뿐만 아니라, 가공의 이름을 실제 지명까지 참고하여 끼워 넣는다?!

 

<파이드로스>(258e-259d)에서 들려주는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당대에 플라톤이 집필할 무렵에 이솝 우화가 널리 읽히고 있었다. 초반부의 한 대목이다.
"무사 여신들이 태어나면서 노래가 나타나자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노래의 즐거움에 미쳐서 먹고 마시고는 일도 잊어버리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대. 훗날 이들에게서 매미 족속이 생겨났다, 무사 여신들은 매미들이 일단 태어나면 먹을 필요 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노래만 하게 해주었대. 이게 무사 여신들이 매미에게 준 선물일세."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 플라톤 다른 대화편에서 이솝우화 언급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님,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 이야기가 몹시 이상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일찍이 일곱 현인 중에서 가장 현명한 솔론이 말했듯이 틀림없는 실화예요.”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 중 <티마이오스> 20d-c)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종숙으로 훗날 ‘30인 독재’를 주도하지만 8개월가량의 집권 후 처형되된다. 플라톤이 정치 입문의 뜻을 접는 계기 가운데 하나다. 또한 플라톤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나이의 ‘전설적인’(추앙의 의미다) 입법가 솔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는 크리티아스., (플라톤은) 신뢰도 제고를 위해 역사적 인물인 조상까지 동원한다. 이어지는 <크리티아스>(의 다음 대목도 흥미롭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들 바깥쪽에 살던 사람들과 안쪽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이후로 기록에 따라면 9천 년쯤 경과했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전쟁을 소상히 언급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 한쪽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나이가 지휘했고, 다른 쪽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했대요."(<크리티아스>108e)

 

대화편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추구한 ‘이상국가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아틀라티스 섬 관련 전설의 출처다. 아쉽게도 미완성 상태라, 아틀란티스에 대해 더 알려면, <티마이오스>도 읽어야 한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2/김석희 옮김)에는 물 속에 가라않은 아틀란티스 섬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해저 2만리』의 시간적 배경은 1866년쯤이다. 플라톤 신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어지는 다음 “옛날 옛적에 신들은 대지 전체를 추첨을 통해 자기들끼리 영역별로 나누어 가졌고, 그 때문에 다투지는 않았어요.(<티마이오스>109b)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역시 신화이지만, 이런 이야기와는 달리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여신이 앗티케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신들이, 설마 신들이 그럴 리 없다.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몰랐겠느냐, 다툼으로 차지하려고 했겠느냐, 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심하는 이야기까지 대화편에 담는다. 이렇듯 플라톤은 자신이 빚어내는 작품(신화)의 완성도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흔들기도 한다.

 

자신이 빚어내는 신화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뒤틀기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는 전설 속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을 모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 거기에는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로 포함된다 하니 기대된다.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쬐끔 맛보는 것이 아쉬웠다면, 신간에서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이렇게 창조한 이야기(신화)들을 무엇에 썼을까? 문답에서 대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 곧 교육 효과를 극대화를 위한 장치인 건 분명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는 것은 좀 매정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문학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이야기들을 가려서 모아놓은 ‘플라톤 신화집’ 덕분에 확보되는 것은 아닐까? 희랍어로 쓰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읽은 로마인 오비디우스는 신화를 일종의 ‘변신’으로 해석하여 책를 다룬 책,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집 『변신 이야기』를 라틴어로 썼다. 플라톤 대화편들의 문학성을 재조명하고, 플라톤을 작가로 읽는 단초가 역시 책을 다룬 책인 『플라톤 신화집』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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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5-05-22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명시(名詩)의 9할은 30세 미만의 시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절반이 25세 미만의 시인인 것이다.˝ -H.L.멩컨 <偏見>
˝얼마간의 광기가 엇으면 시인이 되지 못한다.˝ -M.T.키케로
 
공연의 탄생 - 대한민국 제1호 예술경영 CEO의 자전적 에세이
이종덕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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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탄생 **주년 기념' 공연이나 출판물들의 부제는 적지 않지만 '  ~의 탄생'이란 말을 쉽게 쓸 수 있는 책이 많지 않다. ('홍길동'이라 한 것은 아무 이름이나 인명을 특정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다. 가령 '*철수'이름도 철수와 영희를 교과서에서 보았듯 막 사용해도 될 것 같은데, 실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법적으로 '걸면 걸리는' 것이 현재의 법현실이란다) 

1872년 출간된 독일의 사상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첫 저작 이름은 <비극의 탄생>이다. 한국미술사학계의 원로로서 생의 막바지에 중요한 결실을 이뤄내고 있는 강우방 선생의 역작 이름은 <한국미술의 탄생>(2007년)이다. 선언적이며 과격한 언사로도 주모를 받았던 니체의 책 이름답다. 그런데, 후자 강우방 선생의 책 제목은, 반어법적인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어, 그가 개척한 '조형해석학(일명 靈氣論)'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제호다. 기존의 틀이 잘못되었음을 전제로 가능한 제호이기 때문이다.

 

이종덕의 자전적 에세이 <공연의 탄생>의 경우, 제호가 가진 의미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책을 쓴 필자의 인생, 필자의 삶이 대한민국 공연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2014년 기준으로 나이 80세. 이종덕 선생은 지금도 현역 예술공연장 CEO다. 하도 이름이 많이 바뀌어 좀 그렇지만-문광부이다가 문체부이다가 정권마다 오락가락하는 부처의 이름이라- 문공부의 주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훗날에 준 공무원 신분으로도 의 우리나라 주요 공연장의 CEO로, 예술공연계의 개혁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그의 공연예술인생 50년을 담은 책이 <공연의 탄생>이다.

(그리스비극전집, 희극전집, 최근의 <메난드로스 희극> 등 연극의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원전번역서를 낸 출판사, 뮤지컬 관련 전문서들을 펴낸 숲 출판사에서 나올만한 책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공연의 탄생>은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이 실제 내용상의 제호라고 할 것이고, 이런 정리를 이해하면 이 책의 가치를 간파할 수 있다. 공연예술 CEO라고 하지만, 우리나의 공연예술의 역사, 그 시작이 얼마나 미미했고, 오늘날 얼마나 '창대'해졌는지,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른거렸다. 그렇고 그런 자서전 류의 형식을 벗어났다. 80세에도 현직 공연장 CEO(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사장)을 맡고 있는 기획력이 돋보인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아이템을 제시하고,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작년 12월에는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의 '문화 아이콘'으로 살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팔순잔치를 겸한 출판기념회(<생명이 자본이다>)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듬해인 2014년 1월 21일에는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의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팔순 잔치를 겸한 행사로 자신이 한때 CEO였던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이었다. 연극, 뮤지컬, 무용, 클래식, 영화계 '별'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수 있는 사람의 출판기념회였다. 한 달 사이 진행된 두 원로들의 출판기념회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세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 청춘은 60부터라는 말이 나온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것은 '바람'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공연예술계의 무대 위에 서거나 그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전공 분야의 노장으로부터 노하우를 얻기 위해, 노년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잡기 위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인생은 무대고, 무대는 그에게는 인생이다. '인생이 나그네 길'인 것도 맞고,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과 오늘 대한민국 공연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관련 분야의 길 위에서 선 이들은 그가 자신의 또렷한 이정표임확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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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 단 한 권의 소크라테스전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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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은 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여덟아홉 살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생각이란다. 까칠한 사람이란 느낌이 먼저 드는 이 철학자의,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철학적 성찰이다.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첫문장이기도 하다. 평전은 이어진다.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비트겐타인이 이런 고민을 할 즈음은 세기말(그는 1889년생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대부분은 그로부터 100년 후, 20세기와 작별하고 21세기의 새로움을 영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99년, 한 세기가 막 시작되던 즈음의 아테나이 법정,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 

 

자신을 유죄로, 곧이어 사형까지 선고한 배심원들과 시민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소크라테스 자신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이 쓴 거의 대부분의 대화편에, 크세노폰의 몇몇 저작에 '환생하여' 대화를 이끄는 단골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그의 말은 무수히 많고, 그의 행보는 늘 분주하다. 그나마 한마디 한마디가 짧다는 점은 대단한 미덕이다. 여가가 있는 삶이 왜 좋은가를 역설하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한가해보이는 않은 듯하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사람, 실속이 없는 사람, 옛말에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던가! 그는 철학적 담론, 대화를 너무 사랑한 '가난한' 사람이었다.

 

글머리 인용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고민한 '진실'은 소크라테스에게라면 어떤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까? 앎, 정의, 좋음, 우애, 절제, 용기... 떠오르는 단어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특유의 문답식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리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왜 이롭다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이로울 수 없다. 그라면 단박에 그러나 차근차근 상대방의 숨통을 조이는 악동의 모습을 연출하여 곧 입증했으리라.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이 별 것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르기아스>에서 열변을 토하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피해를 당하는 것이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낫다. 피해를 입히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 가장 불행한데, 그보다 한 단계 덜 불행한 사람이 피해를 입히고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양심, 마음의 평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사학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 편에 서서 불의를 덮고 죄를 덮어주는 역할, 곧 '환심을 사는 아첨'이며, 영혼을 파는 장사일 뿐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는(정확한 인용은 아님), 소크라테스다운 모습 그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제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논의를 진행했을까? 진위를 가리는 일은 녹록지 않다. 플라톤의 글을 통해 생전의 소크라테스가 쏟아낸 것이 유력한 말속에 담긴 진리와 진실을 추수해야 하는 후학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다. 잘 맞는 옷처럼 '인문학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황광우의 신간, <<사랑하라>>를 읽었다. 잘 빚어낸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 <  ~전> 한 편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을 그의 소크라테스 해석과 해설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속을 거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상의 쌍생아인, 스승 소크라테스와 제자 플라톤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소크라테스가 없었다면 저 위대한 플라톤 사상이 탄생할 수 없었겠지만,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없었다면 저 심오한 소크라테스 사랑 역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215면)

 

플라톤의 저작으로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 속을 헤매기의 되풀이다. 대화편들이 집필된 시점이 그렇고,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시점 추정도 끊임없는 논란 속에 있다. 어디까지가 스승의 사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청출어람' 플라톤의 사상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대화편들을 하나하나 읽는 동안 안개가 조금 걷힌다 싶다가도, 아, 이것부터 읽고 이것을 읽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그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저자도 서문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듯, 희랍고전 원전번역서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는 것. 박종현, 천병희 선생, 정암학당 학자들의 노고가 있어, 어쩌면 '단 하나뿐인 소크라테스 전'의 출간이 가능했으리라.

서양 고전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전들이 문자로 고정된 오랜 역사를 가진 덕분에 혹은 그랬기 때문에, 하나의 저작,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서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이 있고, 곧 선행독서는 필수이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다는 것이, 그 위험을 몰랐기에 과감히 떠날 수 있는 모험이 되는 것처럼,

 

'지혜-사랑'(필라-소피아)이 우리가 읽히 알고 있는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은 곧 지혜를 사랑하기, 그의 영원한 연인은 철학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철학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라'에 생략된 말은 지혜를 사랑하라, 곧 '철학하라'라고 할 수 있다. 황광우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열정의 본질은 ‘사랑’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발견하는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육체적 사랑은 마치 땅을 임차한 농부의 사랑과 같다. 이런 농부의 관심은 땅을 돌보는 데 있지 않고, 농작물의 소출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 땅의 지력이 황폐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영혼을 향한 사랑은 다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아끼는 이는 토지를 소유한 농부와 같다. 농부는 땅을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 경우 세월이 흐를수록 땅의 힘이 좋아지고 농작물이 잘 자라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도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이 책 142면 재인용, 원전은 <<크세노폰의 향연, 경영론>>73면)

 

그래서일까, 저자 황광우는 "플라토닉 사랑의 원조"는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였다고 진단한다(141면). [모든 리뷰, 특히 북리뷰에도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있음을 잘 알지만, 붓가는대로(자판 두드려지는 대로?) 소감과 와 닿는 구절을 빌미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1950년 에릭 R. 도즈가 쓴 <<그리스인과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다. 그리스의 양대 서사시, 3대 비극작가의 비극들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와 <역사>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등의 역사 등을 두루 섭렵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십수 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날처럼 감회가 새로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비이성적인 것'들을 탐색하는 주제에 충실한 책이지만, 그동안 고전들을 읽었기에 술술 '읽히는' 남다른 즐거움을 준다.


황광우의 <<사랑하라>>의 경우, 그동안 소크라테스와 만나기 위해 '플라톤'이란 이름의 안개속에 머물거나 헤맨 기억이 있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줄 것인데, 그것은 안개가 걷힐 때의 개운함, 쾨청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쾌청한 기분은 안갯속을 헤매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 그러나, <<철학콘서트>>1,2,3의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문장의 안내자답게,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가는 초보독자에게는,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책이 <<사랑하라>>이다.

 

<후일담>#1. 사무실이 입주한 빌딩은 개인 소유가 아니다. 층마다 칸마다 주인이 따로라는 점에서는 오피스텔과을 떠올리면 되는데, 일반 사무실들의 소유자가 저마다 다른 뿐이다. 그리고 극소수이나 주인이 입주한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사무실 주인이 임대를 내준 경우이다. 무슨 일이 생길까? 날마다 치워야 하는 쓰레기 양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공유공간은 모두의 것이면서 그곳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라, 늘 청소와 관리 상태가 부실할 수밖에. 주인이 한 사람이라면, 관리비를 좀 올리더라도, 미화원을 고용하는 등 청결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라야 건물과 공간의 가치가 높아지고..

#2. 요즘 생활협동조합이 전가의 보도인 양, 한때 사회적 기업 타령을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리위주인 주식회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협동조합형 기업에 있음을 안다. 그러나, 모두가 주인이면서 모두가 주인이 아닌, 앞서 인용한 임차한 농부의 땅처럼 척박해질 수 있음을, 그러므로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함을 떠올리게 된다.

#3. 욕체적인 사랑도 사랑이고 정신적인 사랑도 사랑이다. 사랑이 어디 무 조각처럼 분명하게 갈리던가? 이 사랑도 하고 저 사랑도 하라, 중요한 것은 우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믿나요? 라는 물음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사실이 그러하므롤, '사랑하라'라고 톤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은 하는 것, 사랑하는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것, 일단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이는 고전읽기에도 오롯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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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3-11-0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빠서, 다시 들러 오탈자를 잡아야 할듯, 그댄 이 댓글도 없겠지요.

oren 2013-11-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meroad님의 글을 읽으니 평생 소크라테스를 가장 훌륭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던 몽테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쓴 여러 대목들이 두루 떠오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한 청년이 철학자 파나이티오스에게, 현자도 사랑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 보자, "현자는 치워 두라. 그러나 자네와 나는 현자가 아니니까, 우리를 타인의 노예로 만들고, 자신을 경멸하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마음 뒤집히는 강렬한 일에는 걸려들지 말자"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의 충격을 지탱할 수 없는 심령에게는, 그 자체로 격정을 일으키는 일에 몸을 맡길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진실이며, 예지와 연애는 병행할 수 없다고 한 아게실라오스의 말을 압도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헛되고 부적절하고 수치스럽고 옳지 못한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둔중한 육체와 정신을 잠 깨워 주기에 적당하고 건전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내가 의사라면, 나와 같은 기질과 조건을 가진 인물에게는 나이가 지긋하기까지 생기를 돋우고 정력을 일으키며 늙음에 잡히는 일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다른 어느 처방보다도 이 처방전을 적어 줄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 주변에 머무르는 동안, 맥박이 아직 뛰는 동안,

처음으로 흰 머리칼 겨우 생기며
노령(老齡)은 아직 강건하고 몸을 가눌 수 있는 동안
운명의 여신 라케시스에게 뽑을 실이 남아 있는 동안
아직도 내가 다리를 쓰며 지팡이를 쓰지 않아도 좋을 동안, (주베날리스)

우리는 이런 따위의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정열로 초대받고 애무받을 필요가 있다. 사랑은 저 현명한 아나크레온에게 젊음과 정력과 쾌활성을 얼마나 돌려 준 것인가를 보라.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나보다도 훨씬 더 늙어서 사랑의 대상을 두고 말했다. "내 어깨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내 머리를 그의 머리에 가까이 하며, 우리가 같이 책을 들여다보노라니, 거짓말 아니라, 내 어깨는 무슨 짐승이 무는 듯 찌르르하더니, 그 뒤 닷새 동안을 두고 근질거리며, 나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어깨를 접촉한 것만으로도, 나이 탓에 식어 쇠약해져 가는 심령을 덥게 하다니! 그리고 인간 심령 중의 제1의 심령을 개혁해 주다니, 그럼 왜 못할까?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무것도 되려거나 닮으려고 하지 않았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timeroad 2013-11-0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편제인가요, 그 후속편인가요, 살구꽃이 흩날리는 날, 구성지게 창을 쏟아내는 젊은 여인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그 할배. 이른 살에 세상을 뜨는 쏘 선생에게는 아직 젖먹이 아들이 있었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댓글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니 좀 이상한 시대네요?

timeroad 2014-03-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장흥에 다녀왔는데, 위 영화는 <천년학>이었더군요.
 
뮤지컬 블라블라블라 -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
박돈규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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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타이어를 갈았다. 마모가 심한 상태였다. 정비사는 리프트로 차체를 들어 올리고 헌 타이어 4개를 뺐다. 3~4년을 길에서 곧추선 채 하중을 견디며 달려온 바퀴가 처음으로 땅에 드러누웠다."

평범한 일상 에세이와도 같은 구절로 글은 시작된다. 그러나 사태를 담아낸 문장을 촘촘히 뜯어보면 예사롭지 않다. 3~4년을 줄곧 서 있던 바퀴가 비로소 누워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눈보라가 되거나/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올해 참 오랜 만에 발간된 시집 <와온바다>에 수록된 곽재구의 <나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다. 나무는 평생을 서서 살아왔으니 얼마나 고단했을까? 죽어서 통나무가 되어야 비로소 안식의 시간을 갖는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 그러므로 당신도 만사를 잊고 나무처럼 나무 곁에 누워보라고 시인은 권유한다.


"잘려나간 발톱처럼 낯설고 측은했다. 매끈한 새 타이어를 끼우고 정비소를 돌아 나오는데 산더미로 쌓인 폐타이어들이 보였다. 길의 끝이 무덤이다."

첫 인용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수만 킬로미터를 달렸을 타이어들의 길 위에서의 시간들, 그 길의 끝이 무덤이란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뮤지컬 캣츠는 정반대다. 무덤에서 길을 낸다."라고 받아침으로써, 그가 사랑한 뮤지컬 20편 가운데 하나인 <캣츠_왕의 익살, 광대의 기품>이라는 공연리뷰가 시작된다. 폐타이어는 뮤지컬 <캣츠>의 무대의 중요한 소품이면서 고양이들의 광장의 중심에 있다.


지은이 박돈규는 한 편의 뮤지컬을 소개하기 위해, 그 작품으로부터 선사받은 감동의 시간들을 스케치하기 위해 소소한 일상에서 소스를 끄집어낸다. 자나깨나 뮤지컬 생각을 하고 뮤지컬 공연에 빠져들고, 그럼에도 일간지 공연전문기자로서 매체가 요구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고(苦)을 달게 받아들이는 필자, 스스로가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나를 중독시킨 뮤지컬에 대한 고백이다."라고 털어놓았는데, 그의 중독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를 무심코 뽑아낸 인용부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서문에서 그가 '사랑한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 곧 러브스토리를 엮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뮤지컬 담당 기자는 직업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취향을 드러낼 수도 없고 완전히 숨길 수도 없다. 기사와 나 사이의 긴장이다."

밥(노동)을 위해 써야 하므로 쓰고, 보아야 하므로 보는 공연은 때론 고역일 수 있다. 노동이 그 자체로 즐거움을 수 없는 것은 신문기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시시푸스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삶, 해서 삶에 질리고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노동이 밥벌이 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필자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을 때, 편견을 내려놓을 때, 감상이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뮤지컬'은 어쩌면 꼭 봐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알고보면 뮤지컬 담당기자(직업)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고 있어야 한다. 뮤지컬이라는 문화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관객 사이에 있어야 한다. 다만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하자면 뮤지컬은 작품소개(기사)시에 '스포일러성' 기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자세히 기사에서 다룬다고 해서, 사전에 읽은 관객들이 받는 감동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좋은 작품은 설렁 그것이 영화라고 해도 '스토리가 사전에 알려진다고 해서 감동이 반감되는 경우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무엇과 무엇 사이 또는 경계에 선 그는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중독된 애호가기에 괴롭다. 생각과 느낌 모두를 자신의 기사에 담아내지 못하는 것, 형식(틀, 프레임)에 갇힌 내용은 갑갑하였으리라.


앞서 소개한 시집에서 또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이 없는 날>에서 시인은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 아픔을 노래한다. "생각한다/봄과 겨울 사이에/무슨 계절의 숨소리가 스며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싫어하는 것 사이에",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걱정한다. "또 무슨/ 병은 깊은지" 짠한 마음을 토로한다.  

이처럼 이 책 지은이는 뮤지컬 전문기자와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 병이 깊어지는 것을 감지하면서 살아야 했다. 급기야 '형식'(기사)에게 반기를 든 그는 그간 일로써 썼고 쌓인 뮤지컬의 리뷰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리모델링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뮤지컬 블라블라블라>다.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아버지로서 딸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꺼내고, 국내외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급기야 그가 사랑하는 뮤지컬과 뮤지컬을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기행수필로 질적 변화를 꾀하고, 그것은 성공적이다. 하여 <박돈규의 뮤지컬 오뒷세이아>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기행수필집이 되고, 독자들은 부담없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이란 부제에서 '사랑한'은 '사랑하는'이 되어야 한다.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질리기는 커녕 앞선 관람 때에는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는데도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들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뮤지컬이고, 중독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감동을 끌어내는 보편적인 법칙에 충실하면서 무대장치로, 노래로, 소소한 화제를 만들어내는 등 관객들을 현혹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투자된 비용이 적지 않다. 해서 뮤지컬은 철저하게 '쇼 비지니스'이면서 '공연예술의 꽃'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신일 때라야 그들의 꿈꾸는 지속가능한 공연이 가능하다. 


한 편의 시집에서 참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9년 만인가, 오랜 만에 나온 곽재구의 시집에서, <사랑이 없는 날>이 내게는 그런 시였다. 특히,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도, 남과 북 사이도 아니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이에 비하면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는 꽃잔치에 불과한 사족일 뿐이었다. 피아노학원과 세탁소 사이까지는 그렇고 그럴지만, 구체적인 상호(商號)에서 우리네 삶의 일상이 묻어있어서는 아니겠는가. 20개의 뮤지컬을 만나 사랑한 이야기에는 상자 기사 형식으로 뮤지컬 공연을 둘러싼 소중한 정보들이 양념처럼 겯들어져 있다. 역시 뮤지컬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그가 만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니아로서의 궁금증을 풀어헤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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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2-12-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재적소에, 한 편의 뮤지컬마다 국내 시인들의 시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감칠맛이 나게하는데, 나의 리뷰도 그와 같이 써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