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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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함께하는 시간도 유한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추억을 함께한 때만이 서로를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제대로 사랑하는 법밖엔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추억을 쌓으려면, 혈육일지라도 관계를 단단히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관계는 서로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럴 때 인생은 더 깊고 숭고해진다. p.7 _ 프롤로그 "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며 정신없이 회전문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기분을 맛봤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책에 대한 전체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게 되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두권은 시집을 읽어보기로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시와 얽혀진, 그것도 오랜만에 읽게 되는 에세이를 마주하게 되어 내심 시도 읽고 편독하는 장르인 에세이도 읽게 되니 일석이조구나 계산했다. 다만 그것이 꼭 마음에 든다는 법은 없었다. 에세이는 개인의 내밀한 체험이나 생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세대적으로나 관점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와닿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 살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의견 차이를 다툼으로 끝내는 관계를 보면 서로를 더 이해하면 친해질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들 자존심이 철근같이 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존심도 양파 껍질처럼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깨지는 원인을 잠잠히 들여다보면, 거의가 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p.63 _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 "

 

 주로 딸과의 관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내용들도 발견한다. 의견 충돌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관계를 더 쉽게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먹으면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 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느껴진다. 세월에 따라 어느 정도 정립된 세계와 패턴이 타인으로 인해 유연해지기 힘든 것이다. 때문에 내가 남을 끊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끊어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시기에 읽었던 터라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저자가 딸을 낳으며 느끼게 되는 모성과 관련된 부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런지, 혹 '케빈에 대하여'나 '다섯째 아이'를 강렬하게 본 탓인지 좀 어색했다. 혼자 속으로 과연 모성이 모두에게 다 주어지는 것일까! 아이를 혼자 감당하기까지의 여건이 저자에게도 이리 어려운데 다른 처지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애초에 선택도 못하지만! 등등의 궁시렁을 삼켰다. 저자가 전달하는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소중함, 삶의 지탱이 되는 자식의 의미, 여자의 삶에 의지가 되는 딸의 존재 등등의 내용은 공익광고 같은 장점의 극대화와 정보 전달의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이 계획이 없다는 사람에게 '낳아봐, 니 자식 낳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느껴지는 난감함이랄까.

 

 거기에 책의 마무리는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끝을 맺는다. 갑작스럽게 애국심이 등장하며 마무리 된 탓에 이렇게 끝난 것이 맞나 의아했다. 출산장려와 모성애, 모국어와 전통문화로 이어지는 애국심까지 진짜 요즘 시기에 사회가 원하는 공익광고의 내용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쓴 내용이라면 이렇게 건-전할 수 있다고 이해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을 날 것으로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나와는 감성이 좀 다른가보네, 하고 읽다가도 어떤 부분은 '그래 우리 삶에는 이런 결이 있었지, 서로 무늬는 달라도 삶을 살면서 같은 결을 나이테처럼 쌓아가고 있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부분들이 반복되면서 이 책 괜찮네 혹은 나랑은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네 하는 마음이 정신없이 회전문처럼 오갔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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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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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들이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읽기에는 편한데 심적으로는 자꾸 속엣말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한두해 살다보니 책에 나오는 상황이나 감정들을 제법 겪어도 봤다. 그랬더니, 저자가 전하는 자신 스스로의 진정을 다한 조언이나 위로가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 친절한 응답을 두고, '아니, 그건 아니지'하고 고개부터 가로젓고 보는 것이다. 사실, 한때는 이 다정한 위로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에 거의 시초가 될 법한 '그 남자 그 여자' 라는 책이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랬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내 고집이 생길만큼 때가 탄 것인지, 쉽게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다면 그건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뜻일 겁니다. 이때 너무 가까운 채로 그대로 있다보면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게 될 거예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거리까지 떨어져봐요. 타인으로서의 거리까지 떨어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면, 곧 이별인거죠. - p17 이별의 완벽한 타이밍"

 

 거의 첫부분의 내용이다. 가장 첫번째 꼭지부터 생각에 생각이 꼬리물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결국 서로 다른 우주를 가진 타인이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타인의 거리에서 머물러야하고,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거리까지 떨어져서야 자신이 완성된다면/긍정한다면 이별이라니,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지만 너무 극단적 처방이 아닌가! 사실 남의 사랑문제에 있어 가장 쉬운 조언 중 하나가 "헤어져"일 것이다. 인터넷 고민 게시판에 올라오는 "헤어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들도 나 자신의 감정과 버무려지면 "그래도..." "하지만..." 하는 생각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때로 환멸이 나는 마당에 남을 사랑하는 일이 오죽하랴.

 

 이어지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 마!(p19)" 를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이나, 콘돔 안쓰려는 남친에 대한 고민,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개인의 성향 갈리는 문제들, 한때 유행했던 사랑의 유통기한 - 나때는 2년이었는데 여기엔 3년으로 나오는 그것에 대한 내용, 책에서는 '이별괴물'이라 표현한 안전이별에 관한 내용, 헤어졌는데 계속 눈물이 나요/힘들어요/돌아올까요 와 같은 질문 등등을 보면 이 책의 주 독자층이 십대에서 많게는 이십대 초반 정도까지 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냥 과감히 헤어져라 하는 조언도 있으니 그런 부분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사랑에 대한 크고 작은 고민과 조언들이 전부 여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질만한 조언이 실질적으로 나오지 않았던 점도 그렇다.

 

 책을 읽기 전에 띄지 뒷면에 있는 체크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를 믿는 것처럼, 일곱개의 항목에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는 자신을 꼽아보면서 이 책이 궁금해졌었다. 같은 음식을 자주 먹으면, 마음에 드는 음악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으면, 계획 없이 돈을 쓰면, 일을 미루다 막바지에 이르러 간신히 하면, 귀찮아, 졸려, 지겨워 라는 말을 자주 하면, 편한 사람에게 거칠게 말하면, 낯가림이 있으면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나만의 자리'를 찾아야 할 때일까! 난 원래 그런 사람으로 지내왔는데! 물론 씀씀이나 생활태도 같은 것들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저 항목들이 죽어가는 연애세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 안에 답이 없었다는게 함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너무 메마른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된다. 사랑에 무덤덤해지고, 혼자가 힘들지도 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이른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게 더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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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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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는 독특하다. 오래된 이의 고문을 옮겼다고 해서 다로 고루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여타의 소설보다 잘 읽힌다. 워낙 문장을 늘어지지 않도록 잘 옮겨놨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내용이 담백해서 읽기에 좋았다. 언뜻 제목을 봤을 때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에세이 책이 떠올랐다. 내심 왜 제목이 굳이 비슷하게 나왔을까 염려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장의 온도"를 읽으면서 제목이 비슷한 것이 마뜩치 않을 정도로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혹 그 에세이를 읽고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문장의 온도"를 읽어보길 권한다.

 

 "문장의 온도"안에 수록된 문장들을 이덕무의 문집에서 한정주씨가 꼽아 번역해서 옮긴 것이다. 옮겨진 문장들이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함께 표시해놓았기 때문에 확인하며 읽을 수 있다. 옮긴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1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고, 2 내 눈에 예쁜 것, 3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 4 세상에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 5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얼어붙은 세상을 녹인다, 6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 총 여섯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구분해놓았다. 때문에 관심사에 따라 어떤 부분은 단조롭게 읽히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깊이 공감하게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3번과 4번, 6번 단락을 읽을 때 가장 흥미로웠다. 3번과 4번 단락은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특히 3번 단락에서 '세상의 기이한 일들 (p104)', '자연의 다양성 (p113)', '평양의 싱크홀 (p115)' 같은 내용들은 읽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어 읽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4번 단락의 내용들은 지금과 가치관이 달라진 점이 있는지, 나의 생각과 입장은 어떤지 찬찬히 정리해보게 된다.

 

 6번 단락은 글과 책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뤄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그 중에서 '책을 빌렸다면 (p324)' 중 "무릇 서적이 있다면 비록 좋아하고 아낀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는 운장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랬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빌려준 책이 깨끗히 돌아오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임을 탓하는 동춘 선생의 일화가 함께 소개되어 새로운 관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예전 어느 면접 자리에서 받았던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거의 마지막 질문이었을텐데, 그동안 읽은 책이 몇 권 정도 되는 것 같으냔 질문이었다.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이 떠올라 애매하게 다섯 수레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답을 했더니, 한 수레에 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느냐고 또 물어왔었다.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았는데, 면접을 보고 난 다음에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계산법이 되었든, 지금의 추측이 되었든 아마 죽기 전에는 다섯 수레의 책을 다 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내용이 작위적이지 않고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책이다. 에세이같지 않으면서도 고문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세련됨이 보인다. 에세이 특유의 잠시간의 찰나, 센티멘털에 빠진 감상들에 대해 이리저리 늘어놓지 않았고 한문으로 점철된 숨막힘도 없다. 에세이 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읽을만한 내용이다. 속 안의 정갈함을 그대로 옮긴듯한 표지도 인상적이다. 날이 추우니,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덕무가 남겨놓은 "문장의 온도"를 가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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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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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자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기까지 하지 않던가. - p.31 7년 5개월 후 "

 

 더이상 미룰 수 없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날의 아침, 늘 틀어놓는 아침 뉴스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자화장실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둔기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을 접했다. 사회를 뒤흔든 '강남역'의 사건이 절로 떠오르는 뉴스였다. 묻지마 폭행이 의심되는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피해자를 스토킹하던 남성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여지도 함께 보도되었다. 이 뿐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은 피해자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아물지 못한 사건들 사이에서 '용서의 나라'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아우르며 다가온다.

 

 독특하게도 '용서의 나라'에서 톰과 토르디스의 관계는 종종 희생자와 치료사의 모습을 띈다. 그것이 독특하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강간 피해자인 토르디스가 그들 사이에서 치료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p.247) 그녀 역시 분노하고 좌절하고 상처입은 영혼으로 표현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톰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진 상처입고 후회 가득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토르디스 앞에서 섰다. 그리고 그것을 두 사람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표지에서 발견한 '성폭력 생존자'라는 표현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토르디스는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중의적인 의미로 생존해 낸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토르디스가 처음부터 용서를 시도하고, 상대방과 마주하길 결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평범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듯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를 가졌었음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로 표현한 바로 이 감정과 고통들은 피해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털어놓은 자책과 상처가 '공감'되어 다가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였던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나는 술 먹고 취했을 뿐만 아니라 '강간을 자초한'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 강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 내가 습득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조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시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톰의 어깨에 책임을 지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 p.104 "  우리는 옷가짐을 정숙하게 해야하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해야하고, 늦은 시간에 외진 곳에 있어선 안되고, 누군가 나를 성폭행하려 하면 무조건, 죽음의 위협에 맞서 강력히 저항해야만 한다. 어느 하나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성녀가 아니라 창녀의 위치로 전락하여 비난과 의심을 받게 된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가는 문제의식들 뿐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들이 날카로운 위트를 보인다는 점도 좋았다. 굉장히 솔직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신 내부의 변화를 세밀하게 공개했다. 여자의 삶과 인종에 대한 시각, 더불어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얻게 된 몸의 변화까지도 들어있다. 미경험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출산시 회음부절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며 (p.244) 토르디스의 솔직함에 조금 더 감화되었다. 처음 '용서의 나라' 를 읽으며 문체가 다소 장황하거나 극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해, 뒤로 지날수록 지나치게 많은 부분에 꼽아둔 표시들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토르디스가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에 대해 말하길 멈추지 않고, 거기에 그녀 자신이 서있는 또다른 위치까지도 의식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 택시에 올라타니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으로서 내가 누려온 부인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한 죄의식과 혐오감이 찾아들었다. - p.113 " 이런 부분인 것이다. 인종적인 문제까지도 서슴없이 화두에 올리길 주저않는 점이 독특했다. 그것이 그녀를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게 할지도 모름에도. 그리고 인종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점은 꽤 만족스러운 요소였다.

 

 "내가 막 침묵을 깨려는 순간 지저분한 스웨트셔츠 차림의 이 빠진 남자가 급히 다가오더니 동전을 구걸해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마음이 아팠다. 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남자는 포기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무릎 위에 보온 담요처럼 놓여 있는 내 기득권의 무게를 쳐다봤다. - p.77 "

 

 이 책이 누군가에게 깊은 감명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는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다만 다른 이들에게 어떤 강요나 섣부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에 정답은 없고, 수많은 자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맞는 해결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용서의 나라'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더 내밀한 어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읽는 내내 떠올랐던 짧은 시에 대해 함께 옮긴다. 출처는 ena ganguly라는 이름으로 업데이트 되는 한 SNS이고, 영어로 쓰여진 시를 한글로 옮긴 내용이다.

 

 "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진다 / 왜냐하면 / 우리는 내내 가르침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폭력을 부르는 미끼이며 / 우리의 입술은 유혹적이고 / 우리의 허벅지는 죄로 역하며 / 자라나는 우리의 굴곡은 아저씨들의 눈과 손을 낚는 덫이라고 / 우리는 이 한 가지 가르침을 받는다 / 남자들 앞에서 우리의 몸은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 / 우리는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를 배운다 / 몇 번이나 이 가르침들은 우리를 옭아매는데 / 남자아이들은 그저 아이로 남는다 - ena gangu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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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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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를 읽으며 낯선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타인의 일기장 안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저자인 김동영 작가는 처음 보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 전에 그 사람의 세상에 갑작스럽게 들어서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거리감있게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거리를 좁히려고 하는데, 막상 읽으면서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온 낯선 사람에게서 느끼는 부담을 떠올렸다. 혹시 저자의 다른 책을 먼저 만났다면 이런 느낌이 덜했을까. 에세이를 읽어본 적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색한 것일까.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감에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조각을 모으는 일 같다. 산책하듯 페이지마다 이리저리 흐트려놓은 타인의 조각들을 살펴보다 때로 마음에 드는 조각을 발견하거나, 나와 닮은 조각이 있다며 반가워하는 정도의 시간을 보낸다. 이 에세이는 때로 개인적으로 쓰던 블로그에 올려놨던 나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 날의 어떤 순간에 대해서, 혹은 좋아하는 무엇이나 싫었던 것에 대해 이래저래 적어놓았었다. 장문의 글이 세줄로 요약되길 바라는 흐름에서 블로그가 SNS로 대체되는 변화에서 점차 사용을 줄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몇 달 째 아무것도 쓰지 않고 방치해두었다. 어쩌면 과거의 누군가는 그곳에 남겨놓은 나의 조각을 보았으리라. 그랬다면 어땠을까 책을 읽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읽으면서 상실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면 좀 더 찬찬히 살폈다. 서열 1위였던 케루악에 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은 아니어도 꽤 따뜻하게 다가왔다. 볼품없고 약한, 슬퍼보이는 모습에 못내 손길이 갔다는 점도, 줄줄이 맞이한 모리씨와 오로라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앞발 펀치로 서열 정리를 끝냈다던 이야기도 아기자기했다. 그리고 그래도 먹어야지 하며 냉장고 앞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지나보낸 어머니와의 이별 이야기는 충분히 마음이 아팠다. 상실을 경험한 이후로 상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저자의 에피소드가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에 가라앉혀둔 두려움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상실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면서 어떻게든 지나보내야 하는 삶의 영속성 위에 있음을 새삼 의식하게 된다.

 

 아파서 절에 들어갔던 날들, 입원했던 병실에서 들었던 엄마를 찾는 치매 노인의 부름처럼 고통과 연민이 점철된 내용도 있고 여행을 떠나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담아놓은 내용들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단 의견에 잠깐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영어에 대한 과신이었고 오만이었다. 그러던 중 종현에 대한 부분이 나와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조금은 도드라지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인연이 닿았다는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가 맞겠지. 시기적으로 공교로웠을지, 아니면 나름의 추모를 위한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갑자기 맞닥뜨린 그의 등장에 약간의 의문과 애매함이 남았다.

 

 좀 더 감성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극히 일상적이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감성적이다. 제목이나 분위기,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인상이 감성적인 내용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게 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의 감성은 감성적이기 위한 감성을 드러내놓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감성적이다. 아, 뭔가 설명할수록 같은 단어만 반복되서 더 모를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개인적인 내용들이 많은데 또 이상하게도 내밀하진 않다. 자신을 드러냈지만 날 것을 드러내진 않은 느낌이다. 자신을 일정부분 가리고 포장하여 드러낸 것처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여지기 위함을 의식한 내용이라 느껴졌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적당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책이라 생각된다. 무엇이 되고, 되지 않고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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