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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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p18)"


 조금 성급할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볕은 이미 여름이었다. 최지은 작가의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 표지를 보면서 마냥 싱그러운 여름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수박, 수영장, 아이스크림, 친구들, 매미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을.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탓에 나뭇잎에 조금씩 박혀 빛나는 표지의 홀로그램을 일부러 이리저리 돌려보며 표지만 며칠을 봤다. 바람이 시원하고 커피가 맛있는 날, 좋아하는 간식을 옆에 두고 마치 피서처럼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었다. 


 세상에, 첫 이야기를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자란 아이' 경력 때문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간 모든 것들에 조금씩 약하다. 게다가 요즘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 때문인지 전보다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 눈물도 많아졌다. 다시 책을 펼쳐 읽으려니 마음이 괴로워 고통스러워 화가 났다.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다가 그냥 잠이나 자버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악몽을 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 부채, 의심, 불안, 불만, 두려움같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꿈이었다. 그것들이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에 깨고나서도 괴로운 꿈이었다.


 " 망가질까봐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가뜨리고, 무엇을 수선하고, 무엇을 다시 세우고, 무엇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알 것 같기 때문이다. (p75)"


 복잡한 속마음을 그대로 아는 것처럼 느리게 집어든 책에서 눈에 띈 문장이다. 내가 나에게 매몰되어 있던 동안 피하고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타인과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렇게 성숙하고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닐 수 있을까. 관계가 망가지고 나면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언제쯤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잘 고르고 고른 글들로 솔직하게 쓴 에세이인데 읽는 나에게 준비가 필요했던 책이다.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보다 애틋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더 보기 어렵다. 가끔 인터넷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인줄 알고 봤다가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만화가 있다. '틴틴팅클'이라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만화인데,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으면서 인물의 배경이 같지는 않지만 할머니와 애틋한 '콩물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틴틴이나 팅클이의 이야기보다 콩물이의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는데, 같은 시선으로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조금은 가볍게 나의 여름을 하나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 당신의 여름 과일이 궁금합니다 (p113)" 를 통해서 떠오른 일이다. 오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오이맛이 나는 과일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달거나 맛이 진하지 않은 과일 종류들이라고 해야될까. 참외나 수박, 토마토 같은 것들을 오래도록 먹지 않았는데 이들이 주로 여름을 대표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나에겐 여름 과일이 없었다. 여름에 남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모임 자리에 갔을 때 과일을 대접해온다면 늘 눈치를 보게 됐었다.


 그동안 편식이 심한 사람, 신기한 사람, 철이 덜 든 사람 보듯한 시선과 이건 진짜 맛있으니까 한번만 먹어보라고 억지로 권하는 사람들을 애써 차단하느라 여름과 과일이 더 싫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을 위해 일부러 토마토를 먹는 연습을 해오면서 작년엔 수박도 연습을 시작해 이제 토마토와 수박을 먹는데 성공했다. 남들이 보면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가 싶을 이야기지만 싫어하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서 얻어낸 성과라 매번 뿌듯하고 먹을때마다 새롭다. 그리고 여름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이해의 폭이 늘어나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기분이다.


 제멋대로 내 삶을 이어붙여가며 책을 읽은 탓에 "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신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긴 산책을 이어가야 했다. 첫 시집을 읽은 몇몇 독자들의 리뷰를 읽으며 마음이 쿵, 내려앉을 때도 있었다. (p167)" 는 부분을 읽으며 제풀에 찔리기도 했다. 처음 읽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고 했던 말들이 저자의 마음을 쿵, 내려앉히지 않길 바라면서 올해의 뜨거운 여름은 선명하고 싱그럽게 지나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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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이리 재미날 줄이야 - 아프리카 종단여행 260일
안정훈 지음 / 에이블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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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년 전 아프리카를 다녀오면서 십년 뒤에 꼭 다시 와야지, 생각했었다. 올해로 그 10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연말이 되어서야 그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구나. 아프리카의 여행기를 담은 책을 앞에 두고 나도 다녀왔었지 하고 생각하다 기억의 바닥에서 퍼올린 다짐이었다. 몰랐는데, 살다보니 잊혀지는 것들이 정말 있긴 했다. 물론 강렬했던 아프리카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다녀온지 10년이 됐다는 것은 헤아리다 잊어버렸다. 이쯤되면 세월의 흐름은 조금 몰라도 괜찮겠지 싶기도 했다.


 나의 아프리카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아프리카도 꽤나 이가 갈리는 여행지였다.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비포장도로에서 몇시간을 시달리거나, 경찰에게 돈을 뜯기거나, 비행기를 놓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려웠다. 이런 사건들이 없이도 녹록치 않은 여행지는 이후에 중국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넓게 펼쳐진 땅 위로 물들어가던 노을을 바라보며 사파리 관광차 옆을 지나는 동물들이 실제로 살아움직이는 땅이 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은 아프리카의 모든 단점을 다 잊게 만들었다. 


 '아프리카 이리 재미날줄이야'를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러 동물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진도 찍고 신기해했었는데, 빅파이브로 꼽아놓는 동물들이 있었다는 것도 그랬었나 싶고 기억에 새로웠다. 재밌었던 건 한페이지에 동물들 사진을 하나씩 채워넣은 마지막 칸에 서양인 가족의 모습(143)도 함께 담아놨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관광에는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서양인 가족의 모습도 함께 포함되듯이.


 가끔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이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평소에 보던 여행책들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라 재밌게 읽었다.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여행책을 주로 내는 세대보다 조금 달라 이런 여행도 있구나 하며 읽었다. 유명한 유튜버인 빠니보틀과 만난 얘기를 담으며 "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청춘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88) "고 잘라 표현하는 부분이 재밌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으로 글을 읽은 것 같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글을 재밌게 쓰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활기차게 여행을 다닐수가 있었는지, 솔직히 적지 않은 나이의 저자라 몇번이나 읽으며 감탄했다. 휴가로 짧은 여행만 다녀와도 집이 최고라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치곤 하는데 아프리카를 260일 동안 종단하다니, 대단하다. 물론 가끔은 저자도 늘어지는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낯선 곳에서 이발과 면도를 도전하기도 하고(238) 느려도 자신의 속도대로 여행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나도 나중에 이런 여행을 해야지 그 열정과 마음가짐을 긍정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아프리카가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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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아, 사슴아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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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안타깝게 생각하기로 진지함이 묻어져나오는 제목과 표지가 가벼움이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인 에세이 신간들 사이에서 그리 매력을 발산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가을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려 했는데 첫눈에 이 책이 마음에 들어차 좋아졌다. 문장이 정돈되어 있고 단어가 살아있다. 에세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글을 쓰는 작가의 것이라면 어떤 사소한 문장이라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우리의 취향이 삶의 여정을 지나면서 바뀌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전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젊을 때는 봄을 기다렸는데 지금은 어느 계절에나 그 나름의 매력에 감탄한다. (11)"


 본 내용의 가장 첫줄부터 깊은 공감을 했다. 몇년전부터 꾸준히 어느새 모든 계절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말하곤 했는데, 같은 생각을 성숙하고 아름답게 풀어낸 문장을 보고 좋은 책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때로 종교적인 이야기가 있어 우리 사이에 바람 하나 불어올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일품요리'를 차려낸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가까이 앉아 '사막아, 사슴아'를 읽었다.


 얼마 전 친구와 마주앉아 꼭 가보고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뜨거운 땅, 추운 바다, 빛나는 하늘을 이야기하다 별이 뿌려진 모래, 사막도 함께 꼽았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저자의 산문집 제목의 사막 역시 말 그대로 직접 찾아간 사막들을 뜻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어쩌면 평생 한 곳을 가보기도 어려운 사막을 여러 곳 다녀온 사진과 글을 보다보니 다시 한 번 여행에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기도 하고, '사막들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75)'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다. 


 이어지는 사슴아, 라는 부름은 한 강아지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은 길에서 고양이를 만날 것을 대비해 고양이용 먹이를 조금씩 챙겨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길에 고양이가 많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돌아다니는 개들도 몇 마리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도시에서 주인이 없는 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 뉴스에서 산이나 인적이 적은 곳에 버려진 개들이 들개화되어 돌아다녀 위험하다는 소식만 본 것 같다. 사슴이도 저자가 숲길에 버려진 유기견을 마주친 날의 이야기였다. 예전에 지인이 키우던 갈색 치와와를 보고 작은 사슴같다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읽고나니 사막과 강아지의- 동물의 맑고 순한 눈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볼 수 없는 투명한 풍경을 담고 있는 아득함, " 영원 같은 미지의 것을 갈망해 아스라해진 눈빛(101) ", " 순수한 비어 있음(108) " 같은 것들. 어떤 마주침은 순간보다 강렬하여 누군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하는데 아마 이 둘이 저자에게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겐 무엇이 몇번을 보아도 또 다시 찾게 되는 '멀어진 시원으로 회귀하는 비밀의 통로(108)'일까, 한동안 조용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일찍 끝나버린 가을이 어수선하여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면 '사막아, 사슴아'를 읽어보면 좋겠다. 조용히 내면으로 생각을 인도하는 무게와 온도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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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이영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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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이는 나다. (152) "


 단 한 줄로 한 쪽을 전부 채워낸 문장이 가장 인상깊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멍청이가 된 줄도 모르는 혹은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아쉬운 순간이 하나도 없이 완벽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서투르고 혹은 세련되지 못해서일지 모르지만 진심이었던 순간들에는 언제나 멍청했던 내 모습이 있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그런 멍청했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읽다보면 이상하게 공감된다.


 앞에 써둔 짧은 문구는 #17 멍청이 내용에 나온다. 거기엔 " 그 남자애가 그애를 향한 마음을 학원 남자애들 앞에서 드러냈을 때, 그는 그애에게 접근할 수 있는 독점적 자격을 학원 남자들로부터 얻은 셈이었다. 그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었고, 누구나 아는 그 룰을 어기는 것을 무리는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그애가 좋다'라는 단순 명쾌한 명분을 나는 그 완고한 룰 앞에서 내세우지 못했다.(156) "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친구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공표하고 나면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워지는 미묘한 마음과 분위기를 잘 드러내 그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라고, 싶은 작은 행동들이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던 때를 하나씩 솔직하게 보여준다. 보고도 알은 체 인사를 건네지 못했던 날, 어떤 말로 고백해야 할지 실없는 고민을 나누던 날, 속마음과는 다른 모난 말만 하던 날, 작은 친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날, 모른 척 속마음을 떠보고 싶던 날들이 그림과 글로 펼쳐진다. 조금 간지럽고, 손과 발도 한번씩 접었다 펴주고, 잊어버린 척 살았던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다 보면 순식간에 마지막 책장에 다다른다. 어쩌면 책을 읽는 시간보다 혼자서 속으로 되뇌이는 추억들이 더 오래도록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책의 가장 재밌는 부분은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작가의 말에 있다. " 좋아했던 소녀를 그리는 내게 "걔의 어떤 부분이 좋았어?"를 묻지 않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189) "라고 적혀있는 부분이었다. 이 도발적인 문제작을 그리는 동안 장난으로라도 저 질문을 하지 않은 데에 감탄과 웃음을, 또 기어코 소녀들을 그려낸 의지와 용기에 웃음을 보내며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과거들도 함께 다시 저편 어딘가로 덮어두기로 한다. 내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 모두 소년/소녀의 마음으로 내일은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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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 -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한 지붕 남남생활
신연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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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여서 어떤 선택이 가장 완벽한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선택은 불완전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선택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대해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책임지는 것에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30)"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80대 어머니와 함께하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비혼인에 대한 그릇된 발언을 꼬집어내는 비판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좀 당황했는데 잠시 생각해보고 이내 수긍했다. 적령기라 생각되는 시기부터 저자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자주, 또 반복적으로 전해져왔겠는가. 그나마 비혼과 1인 가구가 이정도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요즘에나 실례와 이해를 의식이나마 한다. 그러니 비혼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하하호호 말랑한 일화가 놓여져있을거란 예상이 엇나가도 어쩔 수 없다.


 " 지난번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 갔을 때, 엄마와 산책을 나갔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특별히 즐길 거리는 없어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집에 혼자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 저분에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125)"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나이 먹는 일이 가장 무서울 때가 새롭고 멋진 경험이 생기면 그게 젊은 사람들에게 어울려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다. 나 자신에게 제약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도 편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요즘 나잇값이라는 것에 고민할 때가 있는데 나이 먹은 만큼의 어른스러움과 걸맞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부딪히곤 한다. 저자가 탱고를 배우려고 했을때 나이제한이 있는 것을 보고 '물 흐리는 나이'가 되었다(124)고 했는데 차갑고 뾰족하게 찔러오는 표현이었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일까 한참동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중에 주변인들을 만나 한번씩 물어봐야지 마음 먹었다.


 저자가 여든이 넘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때문에 병간호라던지, 노후 돌봄의 주제가 나오는데 요즘 주변인들과 만나서도 적지 않게 나오는 얘기라 마음이 저절로 무거워지기도 했다. 전보다 병원에 방문할 일이 잦아지는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순례를 떠나는 것이 혹은 가끔 입원이라도 하는 일이 생기시면 병실을 찾아가며 챙기는 것이 그동안 좀처럼 무관심해지기 어려운 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당연히 자신이 챙길 몫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내 앞에 부모님의 노후가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나는 버거워져서, 문득 (늙은 나를 돌보아 줄 나와 같은)내가 없는 내 노후는 어떨까 염려도 해보곤한다.


 한 네번째 장에 들어서야 처음 기대했던 '엄마와 함께 사는' 일상적인 내용이 풀려나온다. 어떤 부분은 너무 똑같아서 웃고, 또 너무 똑같아서 피곤했다. 서로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의 이야기니 당연히 소소하게 감동적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부추전을 해놓고 기다렸는데 저녁밥을 먹고 왔다고 하자 '미리 말을 해주지'(145)하셨다는 날의 이야기는 괜히 더 마음이 쓰였다. 언젠가부터 우리 엄마도 내가 먹을 음식을 잔뜩 해두고는 마음대로 골라가며 담아가는 나에게 선택받지 못한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고 좋은지 홍보하신다. 선심쓰듯 그럼 조금 더 가져간다고 하면 신나서 가방에 담아주시니, 부추전을/반찬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이 생각나는 이야기였다. 


 공감도 하고 감동도 하고 대체로 웃으면서 때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며 그러나 즐겁게 읽었다. 에세이를 자주 읽지는 않는데 이렇게 가끔씩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만날 때면 더욱 반갑고 즐겁다. 비혼을 결심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하던데 조금 멀지만 가까운 미래의 혼자사는 삶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우리만의 리듬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엿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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