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영 옮김 / 나침반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전에는 인간의 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에게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도 영광이다.

 

 

   요약  。。。。。。。。                                

 

        예수님과 함께 한 12명의 제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몇 사람의 평범한 사람들. 지리적으로는 지중해의 가장 동편, 팔레스타인의 한 작은 동네. 기독교의 시작은 작았다. 그 때와 비교하자면, 오늘날 기독교는 확실히 엄청난 성장을 했다. 수억에 달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성장에는 부작용도 나타나기 마련.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호튼은 오늘날 미국 기독교,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한 분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호튼은 애초부터 미국은 ‘기독교적 정신’에 의해 세워진 국가가 아니었으며, 이는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대단히 인간적인 신앙의 모습들 - 이신론(Deism)과 같은 -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 등이 주도한 1차 대각성운동 등을 통해 잠시나마 바른 기독교의 모습이 확산되기도 했으나, 점차 인간적인 기독교로 전락해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실용주의적 접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단순한 자기의 존중을 위한 신앙, 감정에만 경도되는 신앙과 예배, 상대주의에 대한 맹신 등이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들이다.

 

        저자는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으면서도, 매우 실제적인 예들을 사용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심각한 질병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감상평 。。。。。。。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누구나 그랬겠지만, 여기에 지적되고 있는 문제는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기독교계도 미국에서 한 번 크게 떠들썩했던 것은 곧바로 수입해서 최신의 유행을 일으키는 것이 다반사가 아닌가. 사실 이미 이 책에서 지적되고 있는 상당수의 문제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개혁주의적인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각각의 문제들이 전제하고 있는 신학적인 오류들이 무엇인지를 잘 지적하고 있다. 또, 이렇게 잘 정리해 놓았기에, 독자는 현실의 문제의 본질을 혼동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집어내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수많은 유사 기독교 사상들이 나날이 영향을 넓혀가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지적은 있는데, 대안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안은 바른 기독교를 다시 세워나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부분은 큰 문제라고 할 수 없을 런지도 모른다.

 

 

        신학을 배우고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한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상황을 매우 잘 정리해 놓은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신학을 하지는 않더라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이상한 일들을 우려하고 이를 고쳐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다만 신학적 용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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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온 편지
시모어토핑 지음, 정회성 옮김 / 한문화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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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요약 ]

 

        중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젠슨. 그는 도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면서, 그 땅의 사람들, 건축물, 문화 등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점차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는 수많은 예술품과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심각한 타격은 중국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극한의 대립이었다.

 

        전쟁은 젠슨의 연구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중국을 떠나야 하는가 싶었던 젠슨에게 CIA 소속의 사람들이 접근해 온다. 그들은 젠슨의 중국거주를 도와주는 대신, 그가 정보부를 위해 모종의 일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들이 들춰내는 자신의 약점들을 듣고, 젠슨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즈음 젠슨이 알게 된 한 여성이 있었다. 릴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천진 대학교의 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다. 부패한 국민당 정권 대신, 중국의 개혁을 공언하고 있는 공산당이 집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릴리안. 그녀가 처음 젠슨을 만나게 된 것은 이 운동에 젠슨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지만, 어디 사람 일이라는 게 뜻대로만 되던가. 젠슨과 릴리안 모두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둘이 달콤한 사랑 놀음에만 빠져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공산당 소속의 인민해방군이 점차 베이징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국민당이 베이징을 사수하기 위해 저항을 한다면, 수 천 년의 문화재와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특명이 주어진다. 베이징을 공산당에게 양도하는 협정을 맺는 일이다. 졸지에 젠슨은 두 진영 사이에서 위험한 중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되어 버렸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내전 당시의 중국의 상황 가운데서, 베이징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젠슨. 과연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볼 것인가, 릴리안과의 사랑은 또 어떻게 될까.


 

 


[ 감상평 ]

 

        썩 유명한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해서 골랐는데, 알고 보니 동명의 다른 책이 있었다. ㅡㅡ;; 책을 다 읽고서야 알게 됐는데,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다 내 무지 탓이다.

 

        ‘혁명기의 중국, 혁명보다 강렬한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멋진 말이다. 하지만 과연 책의 내용이 부제에 상응할 정도의 무게감과 감동을 지니고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쳐줘서 부제의 전반부인 ‘혁명기의 중국’까지는 어느 정도 소설을 통해 드러냈는지 모르겠는데, 나머지 부분의 ‘혁명보다 강렬한 사랑’이라는 말은 말 뿐인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젠슨과 릴리안의 사랑 이야기는 그다지 큰 비중을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둘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접촉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거의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할 뿐이다. ‘사랑’이 ‘혁명’보다 앞서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가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사실묘사에는 충실했지만, 감정묘사나 이야기의 전반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다. 혁명도 사랑도 완성되지 못하는 모습. 하지만 작가는 그 부분에 대한 적절한 의미부여에도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적절한 감동도 주지 못하고 있다.

 

 


        인물의 성격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혁명을 이겨내는 사랑을 이루려면 적어도 상당한 결단력과 강력한 추진력, 판단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젠슨이나 릴리안이라는 인물 모두 이런 면에 있어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언뜻 개인의 주관은 강한 것 같지만, 중요한 순간이 오면 언제나 자신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강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지 않는가.

 


        역경을 이겨내는 아름다우면서고 강력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을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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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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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이야말로 구세주다.

적의 존재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역동적으로 살 수 있다.

적이 있음으로써 삶이라는 이 음울한 사건은 웅장한 서사시가 되는 것이다.

 

 

 

[ 요약 ]

 

        일본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일곱 살 때 중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한 벨기에 소녀의 이야기다. 이런 유랑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직업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 소설은 일곱 살짜리 소녀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중국 주재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 구역으로 이사를 온 소녀.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소녀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낀다. 남다른 관찰력과 깊은 사고를 좋아하는 소녀는 ‘공산주의 국가란 선풍기가 있는 나라’라는 독특한 고찰을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경색된 느낌과 경제적인 빈곤을 매우 잘 잡아낸 고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일곱 살짜리의 눈으로 본 공산주의 사회’와 같은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이는 아이일 뿐. 이야기는 외국인 거주 지역이라는 폐쇄된 지역에서 벌어진 아이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전쟁’이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독일인 아이들과 여타의 유럽지역 아이들로 구성된 ‘연합군’과의 ‘골목전쟁’이다. 소녀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독일인 아이들을 골탕 먹이고 괴롭힌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전쟁 말고도 또 하나의 전쟁이 소설에는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밀고 당기기’가 그것이다.

 

        두 건의 거대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일곱 살짜리 소녀의 이야기. 저자는 소녀의 눈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소녀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 감상평 ]

 

        책의 표지 바로 다음 장에 저자의 통통한 얼굴이 실려 있다. 책이 발행일이 1999년이라서 그런가? 최근에 나오는 책들에 실려 있는 갸름한 얼굴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화장기술, 혹은 촬영, 조작 기술의 발달인지, 아니면 대대적인 다이어트를 감안한 것인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아멜리 노통브가 쓴 책이 아닌가. 작가가 쓴 다른 책들에서 받은 ‘감동’이 어느 정도 이상이었기에, 저자의 이름만 보더라도 이제는 손이 가게 되어 버렸다.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은, 저자의 다른 소설인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라는 책과 유사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 세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본 일본 세계라는 주제였다면, 이 소설은 일곱 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이니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두 책은 비슷하다. 사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과 이어진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넘어가면 좀 다른 느낌이다. 앞의 책이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세 살짜리 꼬마가 바라본 세상의 경이로움이 주요 주제라면, 이 책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조금 더 성장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여전히 소녀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지만, 뭐 소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철저히 ‘나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가.

 

 

        작가가 비교적 초기에 쓴 이야기라서 그런지, 최근에 나온 책들과는 달리 왠지 풋풋한 느낌도 드는 책이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기에는 약간 어려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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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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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민심이라고? 너는 민심을 몰라.

런 고상한 행동만 하면, 로마는 수도원이 돼버려.

사람들은 한때는 감동도 하겠지만 금방 싫증이 나버릴 거야.”

 

 

 

 

[ 요약 ]

 

        르네상스로 알려진 시기의 종반부를 살았던 네 명의 교황에 관한 이야기다.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가 그들이다. 네 명의 인물은 언급된 순서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데, 각기 나머지의 교황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면들을 지니고 있다. 흔히 많은 교황들이 거의 무색무미의 재위 기간들을 보내다가 사라져버린데 반해, 이 네명의 교황들이 연이어 올랐던 이 시기는 좀 이례적이라고 하겠다.

 

         먼저 비오 2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교황이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십자군과는 무려 20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다. 시대는 물론 사람들도 변해버린 상태. 이미 민족국가의 개념은 거의 기정사실화가 된 그 시대에 과연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은 가능했을까.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수도사와의 대결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 체사레 보르자라는 ‘아들’(양자도 아니고 친아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지배를 꿈꿨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나미 여사는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사이에 오고갔던 서신 등을 근거로,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활함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율리우스 2세는 즉위 초부터 직접 전장터를 돌아다녔던 교황이었다. 물론 그의 개인적인 용명을 떨친 적은 없었지만(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제법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율리우스 2세의 공적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강대국들(주로 프랑스나 스페인, 독일 등의)의 ‘독’들을 또 다른 ‘독’과의 연합을 통해 물리쳐 낸 일이다. 그의 재위 기간 내에 적과 파트너들은 계속해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율리우스 2세의 연극에 배우로서 참여하는 듯 했지만, 결국 그가 죽기 직전 최후로 남겨진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좀 더 악화된 것 같은 이탈리아의 상태였다.

 

        마지막인 레오 10세는 시오노 나나미가 ‘마지막 귀족적인 교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세 사람의 교황의 재산(전임 교황인 율리우스 2세의 저축금, 자신의 재산, 다음 교황이 떠맡은 빚)을 탕진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통치를 하는 내내 물 쓰듯 돈을 낭비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신의 대리인’의 자리에 올랐던 시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시오노 나나미는 딱딱한 ‘설명’이 아니라 리드미컬한 ‘이야기’로 이 시기를 잘 포착해내고 있다.

 

[ 감상평 ]

         네 명의 개성 있는 교황들을 통해,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의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채 5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그것도 많은 내용을 담기에 ‘효율적’인 ‘설명’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인 ‘이야기’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저자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중요한 포인트들을 잡아냄으로써, 하나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구성해낸다는 쉽지 않은 작업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군데군데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강력한 반 종교적 사관이 엿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글의 시작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붓는다.


        ‘지나친 금욕은 흔히 광신의 온상이 된다. 금욕생활로 몸은 수척해지지만, 상상력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정의라고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은 모두 신의 계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 그 계시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한 인물의 평생의 작업을, 저자는 배고픔으로 인한 정신착란쯤으로 평가절하 해버린다. 그것도 저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세판단과 어긋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쯤 하면 슬슬 시오노 나나미의 강력한 반 종교적 성향에 인상부터 찌푸려진다. 저자가 쓴 20권이 넘는 책들을 직접 읽어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자의 종교분야에 관한 독선과 아집은 점점 완고해져만 가는 듯 하다.

 

 

        역시 역사란 단편적으로 알아서는 부족하다. 책을 읽기 전에 서로 다른 세 권의 책을 통해 이 책에 등장하는 교황들 중 세 명에 관해서는 이미 접해 봤었지만, 그들이 이런 식으로 연이어 교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들의 정책 사이에 나타나는 중심추의 독특함,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에 관한 지식은 이 책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었다. 용케도 흥미로운 시기를 잘 포착해 이야기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아니 때때로 조롱하고 경멸하는 사람이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시종일관 독설과 비난일색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비오 2세)만 빼고는 나머지 교황들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꼭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르네상스 시기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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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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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보다도 플렉트뤼드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단조롭고 게으르고 목적 없는 헛된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자신의 치열한 생활과 금기에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1. 요약

 

        19살짜리 아내가 남편을 죽여 버렸다. 그것도 임신 중에.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플렉트뤼드라는 중세식의 이름을 지어주고는 자살을 해버린 어린 엄마. 그리고 이모의 집에서 셋째 딸로 자라게 된 플렉트뤼드. 소설은 비극적으로 시작한다.

 

        자라면서 아름다운 외모와 평범하지 않은 기질로 주목을 받던 플렉트뤼드는, 그녀에게 매료된 이모이자 엄마의 적극적인 지지(어쩌면 애착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는)를 받아 강한 자의식과 함께 감정적인 기질을 키워나간다. 그런 그녀가 춤, 그것도 발레에 흥미를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 발레의 여주인공만큼 그녀의 강한 자의식과 격정적인 감정상태를 잘 드러내줄 만한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발레학교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얻고, 또 잃어버린 플렉트뤼드. 갑작스러운 사고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러는 동안 독자는 또 다른 갑작스러운 사고에 맞닥뜨리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2. 감상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는 거창한 부제가 딸려 있는 책이라 기대감을 가지고 뽑아들었다. 사실 이미 작가의 다른 책들을 보고 작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설사 다른 이름이 붙어 있더라도 당연히 뽑아들었을 책이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생각보다 책의 내용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책이, 독자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능수능란한 글솜씨를 자랑했던데 비하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스토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조로움 때문일 듯싶다. 주인공인 플렉트뤼드의 일상을 있는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적도, 어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부각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에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가 왜 등장하는지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참 실망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보여주는 ‘평균 이상’의 감정적인 격앙상태에 관한 묘사들을 잘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자신을 죽여버리다니. 당혹스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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