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 감독, 베라 파미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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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이상 관람가 공포.


영화는 주변의 온갖 심령현상을 유발하는 인형인 애나벨을 하필 자신의 집 지하실에 둔 워렌 부부에게서 시작한다. 그런 집에 딸 아이를 혼자 두고(물론 보모인 메리가 함께 있긴 했지만) 1박 2일 일정을 떠난 부모.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한 딸 주디와 보모인 메리는 그럭저럭 시간을 잘 보내나 싶었지만, 메리의 친구 다니엘라가 등장하면서 모든 게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들어가지 말라는 지하실에 굳이 들어가서 온갖 것들을 다 만지고, 심지어 워렌 부분의 집 이곳저곳을 뒤지기까지 하던 짜증유발자 다니엘라의 활약(?)으로 결국 애나벨이 깨어난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이런저런 공포 장면이 이어지는데, 생각보다 그 정도가 덜하다. 우선은 애나밸이라는 인형 자체가 동양의(예를 들면 일본의) 인형에 비해 훨씬 투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던 데다가, 다른 공포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덜컥거리는 느낌이랄까. 이게 왜 15세 이상 관람가인지를 알 것 같은 느낌.





목적이 좋으면 다 좋은가?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터지게 만드는 다니엘라의 만행은, 알고 보니 자신이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심령 현상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워렌 부부의 집에 가면, 죽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쯤 되면 애가 좀 생각이 모자란 건가 싶은데, 영화 내내 수많은 사망플래그를 세웠는데도 끝까지 무사하다(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다). 심지어 영화 말미, 돌아온 워렌 부부는 다니엘라의 사정을 듣고는 그녀가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수를 써 주기까지 한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벌인 분별력 없는 행동이 일으킨 수많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채. 이것이 미국식 교육인 건가....





가장 위험한 건 부모.


근데 집에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이 잔뜩 있는데, 고작 지하실 문에 자물쇠 몇 개 달아놓는 걸로, 그리고 그 열쇠를 책상 아무 데나 던져 놓는 걸로 안심하고 떠나는 부모가 제일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보모를 구해 놓기는 했다지만, 저렇게 집 전체를 맡겨놔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태평함이 인상적이다.


뭐 하룻밤이야 무슨 큰일이 날까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지하실에 그런 물건들이 없는 평범한 가정 이야기고.... 애초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게 할 작정이 아니었나 싶은(그래야 영화가 되니) 허술한 설정에, 익히 예상되는 공포 시쿼스들.. 사실 영화를 보는 시간 내내 웃으면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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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지가 꽤 됐는데, 밀린 일이 많아 감상평을 남기지 못했다. 더 늦추다간 내용을 다 잊어버릴 듯해 간단하게라도 기억을 남긴다.


스타일리쉬한 무당.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무당 이화림 역으로 나온 김고은의 스타일이다. 통상 무당 하면 떠올리는 오방색 가득한 한복이 아니라, 해외 브랜드의 사치품 코트와 액세서리, 그리고 헬스장의 모습이다. 전체적인 느낌이 밝고 역동적이다. 무당에 대한 이미지가 이렇게 바뀌었나 싶은 장면. 물론 이화령은 돈을 밝히고, 이 때문에 조금 무리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 욕심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 이화림이 하는 일은 전형적인 무당의 일이긴 하다. 귀신을 달래고, 악귀를 쫓고 하는(이 영화에서는 퇴마사의 느낌이 강하다). 상대가 워낙 강해서 이화림 혼자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영화 속 파티의 홍일점으로 나름의 위치를 보여준다.

무당이 경쾌해지고, 소위 쿨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론 영화 속 설정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만큼 신앙의 영역에서 조차 눈에 보이는 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사실 이화림이라는 인물은 여느 무당들처럼 자신이 모시는 어떤 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하는 일들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철저하게 세속화 된 성직자다.





부자들의 신앙.


아마 지관으로 나온 최민식이 했던 대사로 기억한다. 미신이니 뭐니 해도 이 땅의 부자들에게 좋은 무덤을 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내용. 처음에 그 대사를 들었을 때 꽤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그럴까 싶으면서도, 뭐 대통령 후보가 방송토론회 자리에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나오고, 무슨 도사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는 뉴스를 보면 그리 허황된 설정도 아닌 것 같긴 하다.


결국 이런 태도는 자신이 가진 부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또, 그 부를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소위 풍수에 대한 미신을 낳고, 그런 일에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돈을 쓰기도 하는 법. 뭐 지들끼리 돈을 쓰던 말던 상관은 없는데, 종종 세금 같은 남의 돈으로 그짓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일제의 말뚝?


영화에서 언뜻,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 같은 걸 박았다는 에피소드가 지나간다. 사실 이건 일종의 도시전설로 실제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이런 내용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온간 만행을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 반감을 드러내는데, 이 과정이 조금 복잡하다. 우선 사건의 초반 무대였던 무덤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 가문의 것이었고, 중반 이후 등장한 최조보스는 일본 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전국시대 직후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큰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일제 강점기와 임진왜란을 직접 연결시키는 건 좀 무리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사실 그 빌런과의 대결에서도 무슨 특별한 기술 같은 나오지 않아서 보는 재미는 좀 덜했다. 여차저차 분위기는 살려냈는데, 대충 얻어걸린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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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정신 믿음의 글들 392
우치무라 간조 지음, 양현혜 옮김 / 홍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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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래 전 간략하게만 들어봤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딱 이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서 몇몇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사조쯤 되었던 인물. 이번 책은 그런 우치무라 간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도”는 흔히 말하는 새로운 사람을 교회로 초대하는 그런 작업이 아니라, 흔히 “교회 사역”이라고 하는 좀 더 큰 개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목회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문에 처음 여섯 개 장에서 말하는 “OO을 위한 전도”라는 부분은 목회자의 사역 동기에 관한 내용처럼 읽히기도 한다.





책 초반 저자는 무엇을 위해 교회 사역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그러면서 생계나 명예, 교회를 위한 사역은 그 동기로서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여기서 교회를 위한 사역이란, 정확히는 자신이 속해 있는 특정한 교단이나 교파를 위한 사역을 말한다). 차라리 교회 밖에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소득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나라를 위한 전도라는 장 초반, 저자는 애국심에 대한 굉장한 강조를 한다. 찾아보니 이건 저자의 특징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라는 두 개의 J가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그 주된 목표를 국가를 위함에 두는 종교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나라를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나라를 위해 교회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때에 비로소 전도는 세상을 유익하게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려, 자신의 뜻을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면, 전쟁과 핍박을 낳게 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장은 이어지는 6장의 “사람을 위한 전도”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 신념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보이는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드러나야만 한다는 지적이다.


책의 전반부가 목회의 동기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후반부는 목회자가 갖춰야 할 조건들에 관한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신체적으로도 적절한 조건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인데, 건강한 신체와 권위 있는 용모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물론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두통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못 외치는”(76) 상황에 대한 한탄은 공감이 된다. 사실 좀 더 중요한 건 마음의 건강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외에도 적절한 지적인 연마와 이를 실천에 옮기는 “실험과 훈련”이 또한 강조된다. “사람의 종교는 그의 경험 이상이 되지 못한다”(91)고 보았던, 그의 지적은 귀에 쏙 박힌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책상과 목양실 속 세상에만 갇혀 있는가.





한국 교회의 목회자 수급률은 진작 포화상태이다. 정식으로 교육부에서 인가된 신학교들만 해도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을 쏟아내고 있으니까. 다양한 이유로 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검증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쉽게 알 수는 없는 법인지라 무엇보다 자기 점검, 자기 확인이 중요할 텐데, 이 책이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오래 전 읽었던 김남준 목사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과 함께.)


물론 지금 사역을 이미 하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한 번쯤 도전을 줄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100년 전 글을 읽으면서도 오늘의 신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덕분에 우치무라 간조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처음에는 청일전쟁을 찬성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곧 자신이 국가의 세뇌에 빠져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반성을 했던 인물(반성이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갖출 수 없는 덕목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중 천황의 교육칙어에 고개를 숙이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결국 쫓겨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우리 곁엔 그처럼 비겁하지 않은 기독교인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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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사도신경 - 입술의 고백에서 삶의 신앙으로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송동민 옮김 / 죠이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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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등장한 신조 중 하나다. 신조란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지를 요약해 정리해 놓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 존중의 의미로 ‘경(經)’이라는 단어까지 붙었을 정도로 교회는 이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물론 이름에 담긴 것처럼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일부 전설에는 사도들이 한 문장씩 완성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복음의 핵심적 내용들을 모은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책은 맥그래스가 바로 그 사도신경을 설명해 놓은 책이다. 사도신경 전체를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한 주에 한 장씩 교회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각 장의 말미에는 관련 성경 구절과 함께 나눌 만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다. 맥그래스가 이런 책도 쓰는구나 싶은 느낌.





당연히 내용은 정통적인 신학에 기반하고 있다. 각각의 항목을 차근차근, 소개하며 설명한다. 다만 애초에 이 책이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위해 쓰인 책이라면 조금은 부드럽게, 그리고 쉽게 설명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맥그래스의 책이나 문장이 늘 그렇듯 쉽지만은 않으니까.


예를 들면 저자는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되는 데서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의 “공적인 성격”을 읽어낸다. 또, 그리스도의 승천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의 청원을 들으심을 암시”함을 유추해 낸다. 이런 개념들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 정도까지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교회에서 이 책을 사용하려면 먼저 리더가 충분히 소화를 하고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게 익숙한 독자라면, 익숙한 문장들 사이에서 깊은 통찰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면, 표지를 잘 만들었다. 영문으로 된 사도신경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몇 개를 골라 음각 대신 검은 잉크로 인쇄했다. 그리고 그 검은 잉크부분만 모아서 읽으면 I BELIEVE라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이 된다. 재미있는 포인트.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이 검은 잉크가 인쇄된 위치가 미세하게(한 1mm 정도?) 오른쪽으로 넘어가서 자세히 보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 각각 따로 두 번에 걸쳐 인쇄해야 하는 작업인지라, 정확히 맞추는 게 어렵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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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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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한 가게에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가 전시되어 있다. “에이에프”라고 불리는 로봇들은 주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드디어 햇볕이 잔뜩 내리쬐는 쇼윈도에 배치되어 가게 밖 풍경을 눈에 담고 있던 클라라는 조시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조시네 집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조시는 아팠다. 작품 속 정확히 어떤 병인지 묘사되지는 않지만,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클라라는 그런 조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자 했다. 그게 심지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기적이라니... 이 모순적인 상황.





시작은 클라라가 경외하는 태양에게 하는 기도였다. 마치 인간들이 신을 섬기듯, 클라라는 자신에게 힘을 주는(태양열을 이용해 작동하는 듯하다) 태양을 경배한다. 인공지능에게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작품 속에서도 이에 대한 질문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클라라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대답을 한다. 마음은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걸까.


클라라가 태양을 대하는 모습만 보면, 이미 마음과 비슷한 걸 갖고 있는 것만 같다. 클라라는 이미 프로그램 된 수준을 넘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숭배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클라라는 조시를 정말로 사랑했다. 단지 자신의 주인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다한다는 수준을 넘어 자기희생의 단계까지 이른다.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냐의 문제를 미뤄놓고, 우선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인공지능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작가는 이런 구성을 통해 인공지능과 기계에 대한 무엇이 아니라,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은근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제3자의 눈을 통해 조명할 때야 비로소 뭔가 보인달까.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클라라에게 이입하게 된다. 어린아이와 같은 경이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폼이 퍽 귀여우면서도, 군데군데 클라라가 기계임을 보여주는 설정들도 함께 등장하는데 그게 또 약간 짠하다.(이 모든 감정도 클라라를 단순한 기계 이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클라라는 조시가 남자친구인 릭과 함께 있을 때 창가의 단추의자에 앉아 (마치 가구에 불과한 것처럼) 밖을 쳐다보고 있고, 저녁이면 불 꺼진 주방에 남아 냉장고가 내는 “편안한” 웅웅거림을 들으며 그 옆에 서 있다.(좋은 묘사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면이 퍽 서글프다. 처음에는 조시와 같은 나이 또래였던 클라라였지만, 조시는 자라고 있었고 클라라는 제자리였다. 클라라는 언제와 같은 “마음”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건, 클라라의 그 “한결같음”이다. 단순히 어린 아이의 변덕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곤 하니까.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물건들’은 자라면서 점차 자리를 다른 것들에 내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클라라는 “물건”이었을까?


확실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다운 묘사력이 인상적이다. 생각해 보니 이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었던 영화 “네버 렛 미 고”도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몇 안 되는 추천 영화 중 하나다). 그렇다고 너무 난해하거나 그런 문장들도 아니니, 기회가 된다면 꼭 손에 들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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