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위하여 몰트만 선집 7
위르겐 몰트만 지음, 김균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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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삼위일체론은 신학과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오히려 ‘삼위일체는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다.’라는 식으로만 회피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삼위일체론은 시종일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그 동안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며, 사회적이며 관계적인 삼위일체론을 주창한다. 그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표현되어지며, 역사 가운데 드러난 삼위일체론에 집중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 구조가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아닌 성서적 내러티브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새로운 신학 시리즈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친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과 새로운 ‘삼위일체론적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친교 속에서, 변화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상의 분리와 격리가 없이는 활동할 수 없는 실체와 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낡은 사고를 해체하고 싶었다.” 


Ⅱ. 본론

먼저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논의함에 있어 근대의 삼위일체론적 사고를 말하고 있다. 이는 경험으로 접근할 것인가,실천으로서 접근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 한계를 지닌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성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개방된 삼위일체의 사귐의 관계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와 역사 가운데서 삼위 일체 하나님을 인식하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몰트만은 그 동안의 철학적 사고에 의한 무감정의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 반대 급부로 다른 피조물과 같이 결핍 때문에 고난 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고난받으신다. 이는 열정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제한하시고 자신을 낮추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고 박해받는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며, 스스로 고난받으신다. 그 동안의 이 고난의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 다양한 의견차가 존재했다. 특히 교부들은 랍비와 바울의 이론을 따랐다. 고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고난과 죄가 인과론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난에 대한 경험은 죄에 대한 경험과 은혜에 대한 경험을 뛰어넘는다. 고난의 경험의 뿌리는 창조된 세계 자체의 제반 한계에 있다. 고난의 경험은 사실에 있어서 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을 훨씬 넘어서며 이 문제를 중정적인 문제로서 내버려둔다. 고난의 경험은 사랑의 경험만큼 넓다. 사랑에 있어서는 오직 “죄 없는” 고난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고난은 사랑만큼 넓으며, 사랑은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성장한다.


그 동안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능력이 많으신데 왜 이 땅에는 여전히 불의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가?’하는 질문이었다.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몰트만의 주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앞으로의 목회에 있어서도 고난은 계속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을 질문이었고, 던지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성경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적절하게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몰트만은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자유는 어떠한 자유인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서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는 그가 인간에게 제시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가 인간들을 자기 친구로 만드는 우정에 있다. 그의 자유는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사랑, 그의 개발성, 그의 응답에 있으며,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인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들을 중재하며, 이리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열어준다. 하나님은 그의 고난과 그의 희생과 그의 헌신과 그의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원한 자유를 증명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가슴벅찼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받기를 자처하신다. 


다음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역사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특히 십자가의 고난과 아들의 버림은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버림 받은 자들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아들을 버린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내어 준 자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아들을 내어 준다. … 그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의 적극적 수난, 의식적으로 시작한 고난의 길, 자신이 긍정한 죽음이었다.” 아들의 희생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형태는 어떠한가?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절대적 죽음에 내어 준다.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 아버지와 아들 공동의 희생제물은 버림 받은 상태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와 결합시켜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몰트만은 예수의 인간 되심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극적인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린 아들 안에서 ‘신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만난다. 하나님의 권능과 관련하여 그것은 하나의 제한을 의미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에서 힘이 있다. … 안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밖을 향한 해제라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의 비하 가운데에서 가장 크시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무력하심 가운데에서 가장 영광스럽다. 그는 자기의 성육신 가운데에서 ‘가장 신적이다.’” 그 동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비해서 성육신과 그의 삶은 많이 간과되었다. 이전에 빌립보서 2장이 설교본문 순서가 되었을 때가 있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신학교에 와서야 성육신에 대해서 어느정도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 풍성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몰트만의 설명은 아주 통괘하고, 풍부하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만든다. 


몰트만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 동안 둘을 구분하고 차이를 설명한 것에 비해서, 그는 이 둘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상호보완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통해 찬미를 올려드릴 수 밖에 없음을 말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케리그마 신학과 실천신학의 대상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찬미학적 신학의 내용이다. … 내재적 삼위일체가 찬양의 대상이라면,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경험의 총괄 개념을 뜻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인식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한다. 인식의 순서에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하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한다. … 기독교적 삼위일체론의 기본명제는 다음과 같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과 모순될 수 없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찬미의 진술들과 상응할 수 밖에 없다.”

 


Ⅲ. 결론

김균진은 그의 책에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요약한다. “1980년에 출판된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그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조직적으로 확립한다. 하나님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유일신론, 다신론, 범신론에서 기독교를 구별하는 기독교 고유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명상하며 홀로 계신 일자(一者)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상호 구별과 교통 속에 있는 사귐의 존재다. 세 신적 위격들은 각자의 고유성과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한 몸(일체)을 이룬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책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깊은 사귐 가운데 한 몸을 이룬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는 인간의 삶 가운데로 확장된다. 우리는 공동체적 교제 가운데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 해방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섬기며 낮아지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결코 추상적인 사변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구체적인 실제의 삶 가운데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다시금 그 사람을 전해주기 위해 우리를 내어주게 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여러 문제들 앞에서도 하나됨과 화목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들이 끊이지 않는다. 권력과 명예를 둘러싼 싸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오르내린다. 우리는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주제를 붙들고 논의하며 가르쳐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할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이해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우리의 교제는 사람의 사귐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신적 교제 가운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가운데 교회가 동참한다면, 교회는 선교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성도간의 교제만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 연약한 자, 해방이 필요한 곳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달려가게 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문제와 만물의 회복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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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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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붙잡아왔던 복음에 대한 좁은 이해를 뛰어넘는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복음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를 면밀하게 쫓아가면서도, 그 당시의 정황이나 그 저자와 독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톰라이트는 우리를 대신해서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이 작업을 해준다. 
그는 성경자체에서 해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각각의 성경 텍스트를 대하는 당시 독자들이 이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책을 적은 저자가 어떤 의미로 그 텍스트를 적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총체적 복음 이해해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절정, 그 이후에 주어진 성령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움이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이신칭의'의 교리는 성경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무한한 지지와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왔다.

톰라이트는 이 교리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면밀히 분석함으로 '이신칭의'를 감싸면서도 하나님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드러내는 복음 이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창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원대한 꿈과 끊임없는 사랑과 신실하심, 그것을 이루어내시는 능력 가운데 초대되는 것이다.

존파이퍼의 공격에 신학적인 응답으로 쓰여진 책이라 조금 어렵고 딱딱할 수 있겠지만, 그 풍성함과 총체성으로 인한 복음의 온전한 이해는 그러한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한다.

존파이퍼의 입장이든 톰라이트의 입장이든, 혹은 새로운 입장이든 이 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하심과 신실하심을 엿보기를 기대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결국에는 세상을 바로 잡으셔야 한다는 의미에서 세상을 ‘판단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의 한 가운데에, 정확히 이야기하면 언약을 성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으로 이 심판을 가져오셔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그의 부활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개시하셨으며,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인류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궁극적인 새 창조의 일부를 미리 가져와 조금이나마 새 창조의 땅 위를 걷고 새 창조의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하셨다. 이 심판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달설된 이 ‘판결‘은, 그와 함께 죽어 그와 함게 다시 일어난 사람들 모두에게 선언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의 죄가 더 이상의 그들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들을 부활의 기반 위에 굳게 서세 되며, 마침내 참다운 인류로서 자유롭게 살게 된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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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친밀감이 아니라 혁명을 내포한다. 단지 친근함만이 아니라 희망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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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란 무엇인가 - 공동체를 위한 보편적 지식인, 공공신학자의 소명 되찾기
케빈 J. 밴후저.오언 스트래헌 지음, 박세혁 옮김 / 포이에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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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이며, 또 다른 이유로는 성경이 아닌 현대 문화에서 가져온 지도자상(예를 들면, 경영자, 심리 치료사 등)에 사로잡혀 있어서일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현대사회에서 목회자와 신학자를 지속적으로 분리시키려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성서학과 조직신학, 실천신학의 분리와 무관하지 않다.


목회자는 영혼을 향해 애끓는 마음을 가진 목자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향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하고 보여줘야하는 소명을 가지는 신학자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며, 그들을 위해서 공적 광장에서 공적 첨탑으로서 증언하기 때문에 공공신학자다.


목회자는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고, 공동체를 대표하며, 공동체를 믿음으로 세워야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 현실 가운데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를 주의깊게 분별하여 지속적으로 선포해야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경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을 전해주어야한다.


목회자들이 대면하는 성도들은 현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 목회자들은 파악해야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대면으로 가능하며, 폭넓은 독서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인문학적 통찰은 인간심리와 사회구조적 문제 등을 분석하고 파악하며, 그 가운데 어떤 문제가 핵심인지에 대해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독서하고 사유하며 공부해야한다. 


모든 목회자들이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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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obilo7 2019-09-19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재의 목회자뿐 아니라 목회자가 되어야겠다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읽어보면 좋겠네요.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은 오늘도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과 빵을 구워놓고 피곤과 시장기에 지친 제자들을, 못난 제자들을 기다리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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