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위일체 공동체
레오나르도 보프 지음, 김영선.김옥주 옮김 / 크리스천헤럴드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조차 진정한 연합을 보기 힘듭니다. 세상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오히려 차별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럴듯한 말은 많지만, 그것을 구현한 공동체를 만나기는 힘듭니다. 각자가 존중되면서도 진정한 하나 됨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힘이 분산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와 사회를 향한 가치를 우선하기보다 권력과 자본을 쫓아가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분투하는 공동체여야만 합니다.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세상의 가치로 지배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은 철저하게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이 책 『성삼위일체 공동체』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삼위일체와 사회』를 이 책에서 조금 더 쉬운 언어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급진적 이해가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교회에 만연한 성직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은 교회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를 낳습니다. 삼위일체 공동체는 지금의 교회 구조에 대해 건강하고도 적실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더불어 삼위일체 공동체는 그 교회 안의 하나 됨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다 참여적이고 대중적이며 가족적인 사회로의 발전에 이바지합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린 공동체,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도 연합적인 모델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닌 연합이심을 강조합니다. '셋'이 먼저이며, 세 위격들 간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삼위의 통일성을 표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고 살아있는 근간에 서로를 향한 움직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는 분투와 대립이 아니라 화합과 연합입니다. 신적인 삼위의 상호 침투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는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충만과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를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조화로움과 관계성 가운데 제시합니다. 명확한 용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많은 본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생명의 신비가 역사 안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교회로서 열정적인 믿음과 좌절이 없는 소망, 헌신된 사랑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책무를 지닙니다.


더하여 삼위일체의 본질인 연합은 모든 종류의 배제와 차별을 비판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참된 사랑과 섬김, 배려와 환대를 통해 이 사회에 만연한 죄악과 우상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 - 한 인문주의자의 성경 읽기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회 답지 못한 교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정의를 외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유익에 더 신경 씁니다. 절망 가운데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의 상태보다도 자신의 미래와 안위에 온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전달하기 위해 '말'하지만, 교회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말', 정제된 '말'로 상대방을 억압합니다.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정답 안으로 욱여넣으려 합니다.


역사학자인 최종원 교수는 이 책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를 통해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진단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가슴 아픈 애정의 도구입니다. 진심으로 현 상태를 바라보아야만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성직주의와 교권주의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여러 잡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교권주의와 성직주의를 극복해야만 교회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주장합니다. 여전히 교회의 경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교회 공동체를 나그네의 공동체라 명명합니다. 이는 힘을 가진 제국 안에 살아가지만 그에 속하지 않는 이중성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제국의 힘을 따라가기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한 영향력은 아주 자연스레 주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가 강조하지 못했던 방편들에 저자는 집중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은혜의 도구들을 재조명합니다. 침묵, 복종, 성찬, 거룩 등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 상황을 반영합니다. 듣지 않고, 멈추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며, 배타적인 교회의 모습 말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더불어'의 정신을 구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그네이지만, 우리보다 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타자를 향한 환대와 나눔은 교회 공동체가 다른 집단과 구별될 수 있는 가장 큰 시금석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에서 '이웃'을 향한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세상은 힘을 추구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라고 합니다. 더 올라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과 그분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다움입니다. 힘을 찬양하고 그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힘을 향해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망은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설계자들 - 이스라엘 민족의 비밀스러운 흔적
이스라엘 크놀 지음, 정예중 옮김 / PCKBOOKS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변하는 진리가 있을까요? 인생은 모호합니다. 학문의 세계는 치열합니다. 합리적이라고 여겨졌던 이론도, 보다 세밀하고 논리적인 주장 앞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 있다면, 기존의 논의들은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신앙과 학문의 긴장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흔히 성경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진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문자 자체의 오류가 없다'라는 말이라면 그 말은 참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랜 시간 기록되고 형성되어 왔기에 다양한 맥락과 환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에 관련된 부분은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의견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이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는 공통된 의견은 모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성경의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하며 근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주장이 공존합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 성서학과 석좌 교수인 이스라엘 크놀(Israel Knohl)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성서 신앙의 근원에 대해 기존의 성서학자와 고고학자들의 학설과는 다른 시각을 제안합니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고고학적 유물과 성서 기록에서의 불일치의 문제를 상기시킵니다.


저자는 최소주의(성서의 역사성을 최소로 인정하며 고고학 등과 같은 성서 외의 자료를 1차 자료로 보는 관점)와 거리를 두지만, 최대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과 문명의 형성이 복합적이고 다분화된 과정들의 산물임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와 일치합니다.


크놀은 고고학적 자료들을 면밀하고 주의 깊게 활용하면서도 성경의 말씀 또한 두루 살펴봅니다. 그는 성서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불일치와 모순이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역사적인 요소들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탄생과 성서 신앙의 배경이 되는 큰 전환점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전환되는 주전 13~12세기 사이에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시기에 중동 지역과 에게해 연안을 휩쓸었던 대대적 재난으로 인해, 거대한 왕국들과 도시들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공황 시대에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이 자신의 정착지를 떠나 유목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가정합니다. 여러 난민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 등을 간직한 채 이곳저곳으로 방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토착민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여러 전통이 결합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조각들이 모여 재탄생한 견고한 민족 공동체의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성서 신앙은 소수의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했습니다. 성서의 신앙은 진공상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학문의 긴장 가운데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저자의 치열한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분투는 비단 그때 당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사수하는 것은 급변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하신 하나님 - 모든 것을 나누시는 성부 하나님, 순종하며 내주시는 성자 하나님, 친밀함을 이루시는 성령 하나님
마이클 리브스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우리는 하나님을 떠올리면서 능력 많으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과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그분의 성품은 강하고, 정의로우시며, 틀림이 없으신 분입니다.


일면 옳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온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철학적인 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혼합되지 않지만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영원토록 삼위일체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함께 일하십니다.


종교개혁 신앙을 현대적 감각으로 소개하는 이 책 『선하신 하나님』의 저자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 그는 어느새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이 사라짐을 매우 안타까워합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임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저자는 교부와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신학을 바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성함을 설명합니다. 특히 우리는 저자를 통해 존 칼빈(John Calvin), 존 오웬(John Owen),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삼위일체론을 심도 있게 살펴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친밀함과 관계의 풍성함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근거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영원토록 지속된 충만한 관계는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창조와 통치 사역 이전에 아버지로 존재하셨습니다. 그 말은 아들을 사랑하는 관계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창조하시며, 아버지로서 통치하십니다. 풍성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성자이신 예수님은 사랑받는 자로서 존재합니다. 성자는 아버지의 생명과 존재를 받으십니다. 아버지의 정체성은 성자로부터 찾을 수 있으며, 아들의 정체성은 아버지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아버지의 영광과 충만함을 받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거하십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로 초대받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회복해야 할 열망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성령님을 통해 새롭게 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성하고도 친밀한 사귐은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그 사랑 한가운데로 초대하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홀로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흘러가게 하십니다. 서로 교제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나누도록 하십니다.


차고 넘치는 사랑은 자연스럽게 모든 만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성하고도 선하신 사랑은 참을 수 없는 기쁨의 교제를 흘려보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위엄은 사랑의 정의와 위엄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 안에 조화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
윌리엄 윌리몬 지음, 송동민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우리'를 위해 '너'를 멀리하는 시대입니다. 나와 많이 다르다는 판단이 들면, 우리는 재빨리 선을 긋습니다. 누군가에게 우리 또한 약자이지만, 또 다른 약자 앞에 한없이 매정해지는 우리입니다. 이웃이나 친구로 대하려는 마음보다 나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높은 장벽을 쌓는다는데에 있습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웃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혐오와 배제를 오히려 더욱 부추기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설교자들의 설교자로 불리는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이 책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를 통해,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타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의 문화를 질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극적인 사랑으로 타자인 우리를 아낌없이 포용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소수의 폭력적이며 비도덕인 행동을 우리는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막연한 오해와 거짓 정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불안은 타자를 온전한 모습으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타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는 그 명령보다 나의 안위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타자를 무시하며 거리를 둡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또한 타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끊임없는 악순환을 깨뜨리기 원하셨습니다. 복수의 연결고리를 부수셨습니다.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화목과 연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초기 교회에서의 복음 전파는 '타자'를 향했습니다.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짙은 선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로마인에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저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과감하게 질문합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까 물어봅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 두려워하는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손을 붙들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우 두렵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세워져 있는 많은 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나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계속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나'와 '우리'가 아닌 '너'를 먼저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