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만 찾게 돼



유난히 익숙해져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기분인지 감지하고 있지 못했다. 카페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요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계속 우리가 있어서, 우리가 있어서, 하는 가사가 나왔다. 나는 처음 보는 카페에 처음 맛보는 음료를 마시며 처음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함 때문에,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 때문에 낯설지 않은 외로움이 들었다. 외로움은 느닷없거나 천천히 물처럼 차오르거나. 5월의 밤바다는 무척 차갑거나 아주 차갑거나.


여기서는 바다가 보인다. 바다를 매일 보는 나로서는 바다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바다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둘 중에 하나는 힘을 가지는 자가 된다. 바다가 나를 덜 사랑하게 되는 순간부터 바다는 나에게 힘을 행사한다. 더 사랑하는 나는 바다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온전한 사랑을 하는 쪽은 매달리는 내 쪽이다. 하지만 오늘 바다와 나는 이별을 한다. 온전하게 하는 사랑과도 이별을 한다. 그리고 나는 내일의 바다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내가 반도 먹지 않고 있으니 내 것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끄덕였다.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만드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그녀는 나처럼 끄덕이며 입을 오물 거렸다. 미도리가 한 말이야. 그녀는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다 듣고 있었다. 카페의 문 근처에는 화분이 있었고 화분에는 난이 자라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난을 키웠어요. 개와 고양이와 달리 아무런 표현을 못하기에 물을 주고 정성스레 보살폈는데 자꾸 썩는 거예요. 내내 속상했는데 난은 다른 꽃처럼 물을 위에서 뿌려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뿌리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야 위에서 썩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사람들도 먹는 음식이 다른데, 전부 다른 꽃들이 어째서 다 똑같이 물을 위에서 뿌려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전 너무 슬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손가락을 죽 펴서 손톱을 확인하는 듯 손가락 끝을 보았다.


이별이 이별이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익숙함이 내 삶에 깊게 들어와 있기 때문일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뭘 하면 안 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시간 속에 내 몸은 풍덩 빠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김광석의 노래가 떠올랐다. 이별에 익숙해져야 하겠지만 익숙해지는 것은 자의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이다.


시간이란 순수하여 모든 것을 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시간은 기억도 하얗게 만든다. 너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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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이 나왔다. 목감기다. 어제부터 목이 꺼끌꺼끌하더니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목이 콱 막히고 따끔거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어제 목감기 기미가 왔기에 구비해 둔 목감기 약을 하나 먹었다. 목감기 약을 먹었을 뿐인데 물에 몸이 잠기듯 잠이 계속 쏟아졌다. 앉아서 버티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병든 닭처럼 머리가 1초에 한 번씩 까닥. 잠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영혼이 잠에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오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오면서 약국에 들러 목감기 약을 새로 샀다. 약국은 한가했다. 그 약국은 늘 한가하다. 주위에 병원이나 내과가 없어서 들어가면 약사는 늘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약사는 나이가 있는 남자로 가운을 벗으면 약사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 약국의 손님은 항상 나뿐인가? 할 정도로 한가했다. 약국으로 가는 길은 늘 다니는 길에서 한 블록 떨어진 도로인데 일상에서 약간 벗어나는 기분이다.


마치 이런 봄날에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주말의 느낌이 들었다. 두꺼운 옷이 필요 없고, 그렇다고 반팔은 아직이다. 먼지와 봄꽃의 기운 때문에 주위가 부옇다. 눈을 감으면 헤엄을 쳐 그 먼 기억 속으로 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다니는 길목에 동네 목욕탕은 전부 사라졌다. 찍어 놓은 사진에서나 동네 목욕탕과 동네 이발소를 볼 수 있다.


또 기침이 나온다. 이번 목감기는 갑자기, 느닷없이 칼칼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나의 목을 감기가 잠식했다. 침을 삼키면 따끔한 그 느낌. 기침을 한 번 하면 머리가 띵 하여서 어떻게든 기침을 참아보려 하지만 기침을 참으면 참을수록 감기가 나를 미치도록 약 올리는 느낌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기침은 한 번만 나오지 않는다. 기침은 꼭 북수형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 기침을 여러 번 한다면 민폐가 되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코로나 전에는 목감기가(감기가 거의 잘 걸리지 않는데) 걸려도 약을 하나 먹으면 곧바로 목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어제는 약을 하루 분을 먹었다. 세 번을 먹고 하루가 지나 오늘이 되어서야 목이 가라앉았다. 목감기가 걸려 몽롱한 상태에서도 조깅을 해서일까. 잘 받던 약발도 이제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이런 게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5월의 시작이다. 이제 햇살이 바삭바삭해지기 시작하는 시기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조깅으로 흘린 땀을 식혀 주는 계절이다. 아침에 나오는데 몽롱하지만 아파트 놀이터에 비치는 햇살 사이에서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볕을 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약간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 한 기분이었다. 햇살이 휠체어를 탄 할머니에게 내려앉고 놀이터 주위의 나뭇가지가 만들어 낸 그림자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감기약 때문에 몽롱한 나의 상태 때문에 더 사진처럼 보였다. 눈으로 사진 같은 풍경을 한 번 담고 놀이터를 지나쳤다. 여긴 동해에 물려 있어서 그런지 저온 현상 때문에 그렇게 덥지 않다. 겉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 좋은 날이다.


며칠 전에는 라디오에서 어린이들의 봄 소풍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은 날은 봄 소풍 가기 좋은 날이다. 학교에 다 같이 모여 소풍 장소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는 그동안이 얼마나 즐거운가. 봄소풍은 가기 전날이 즐겁고, 갔다 와서 또 즐겁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렇다. 봄소풍을 갔다 온 날 저녁에는 김밥도 아직 있고 전날 받은 용돈이 남아서 마음 한쪽이 풍족했다. 친구들은 계속 놀자고 하고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일찍 들어와서 봄이불에 몸을 비비는 그 느낌이 좋아서 나가기 싫지만 친구들과 놀고 싶고. 햇살이 바싹해지는 오늘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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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의 외할머니와 깻잎으로 밥을 먹는 적은 없다. 아니 거의 없다. 한두 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에게 붙어서 지냈던 때가 어린이였을 때다. 어렴풋한 기억에 그때, 그 어린이 시절에 외할머니와 깻잎으로 밥을 한 번 먹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이 있다.


나는 4살인가 5살인가, 어린 시절에 집 안의 사정으로 인해 1년 정도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지내야 했다. 매일 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불고했을 때 나를 달래준 사람은 외할머니 밖에 없었다. 외삼촌, 외숙모, 사촌 형 누나들은 전부 무섭게 보였고 외할머니 품에서만 외로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시골이지만 낮에는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면 된다. 하지만 해가 달에게 하루를 반납하고 나면 외로워지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나이를 막론하고 찾아온다. 외로움이 밀려오면 나는 외롭다고 표현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 것인지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이는 그런 표현이 어렵다.


분명 외로운데 이게 외롭다는 감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괜히 투정을 부리게 되고 엄마가 보고 싶어 진다. 우는 밤이 매일 이어지면 외할머니는 나를 안고 어부야 어부야 노래를 불러주며 내일은 엄마 보러 가자며 나를 재웠다.

여름에는 외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밭일을 도왔다. 도왔다기보다는 외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깻잎을 뜯었다. 상추도 뜯고. 점심에는 잘 씻어서 상추와 깻잎으로 밥을 먹었다. 밭일을 하고 앉아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최고지만 어린이 입맛에 이런 것들은 별로였다.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깻잎무침을 꺼내서 밥을 싸서 한 입, 고기를 싸서 한 입 먹였다. 먹기 싫다고 징징 거렸지만 외할머니는 맛있다며 나를 먹였다.

성인이 되면 살이 많이 찌는 이유가 맛없는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 때 빼빼 마른 건 다 맛이 없고 편식이 심하기 때문이다. 깻잎 따위 어린이 입맛에는 당연하지만 맛이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깻잎만큼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싶다. 수육에 싸악 감싸서 먹는 깻잎의 맛은 정말 굿이다.


깻잎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먹는다고 하던데, 깻잎의 맛에 미쳐버린 외국인들의 영상이 유튜브에 많다.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외국 언론사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재채재가 되었다고 해서 망신이고, 그렇게 위상이 높던 케이팝 역시 코첼라 무대에서 라이브가 너무 엉망이라 국제적으로 망신이 되었다. 하지만 불닭볶음면부터 먹거리는 외국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 깻잎도 넣으면 좋을 것 같다.


단짠단짠이 맛있으니까 깻잎을 식빵 사이에 넣어서 먹는 맛도 좋을 거야. 오늘 그렇게 해 먹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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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픔과 비참함을 팔고 사는 걸 좋아한다. 타인의 슬픔을 보면서 안도하고,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타인이 드러내는 슬픔이 나에게 없어서 안도하고, 다른 사람의 비참함에 내가 닿지 않아서 즐거워한다. 즐거워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하여 클릭을 하거나 슈퍼쳇을 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면죄부를 준다.


한 유튜버는 나이도 많고 단칸방에서 힘들게 사는데, 당뇨를 오래 앓아서 인슐린을 처방받아서 맞으면서도 매일 라면에 막걸리와 맥주를 마신다. 사람들은 댓글에 그러지 말라고 하면 앞으로는 줄이겠다, 그러지 않겠다, 같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걸 좋아한다는 알고 있다. 그래서 라면과 막걸리를 끊지 못한다. 사실 본인이 라면과 막걸리를 좋아해서 그걸 먹을 때만큼은 아주 맛있게 먹는다.


끊을 수 없는 고리다. 나의 비참함이 돈이 된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 속에서 안도를 받고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너하고 달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비참함이 돈이 된다는 건 이상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 역시 잘 안다. 그게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는 게 문제다.


어금니 아빠로 유명한 이영학이 예로 그렇다. 대한민국의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비참함을 팔아먹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영학의 가족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장 악독하고 죄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다. 일반인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슬픔을 팔고, 비참함을 팔았다. 그러기 위해 아내를 성노예로 팔아먹고 죽음으로 내몰고, 딸까지 이용했다.


우리는 왜 기쁨보다 슬픔에 더 열광을 할까. 그리고 이렇게 관음화 된 타인의 슬픔을 보며 즐거워하는 건 언제부터일까. 궁금하다. 한 가족이 티브이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티브이에서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를 보여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광고와 광고 사이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의 아이들을 보여준다.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 저녁밥을 먹으며 그 장면을 본다. 그래서 그 장면을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듯이 보지 않는다. 기아에 허덕이는 영상 속의 아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간다. 그 누구도 그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밥숟가락을 놓고 안타까워하거나 폰을 열어서 후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비슷한 시간이 되면 기아에 허덕이는 영상이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나온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 매일 이어지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나라의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며 안도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쌓이다 보면 누군가는 지갑을 열지도 모른다. 타인의 슬픔을 사려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내가 타인의 슬픔에 동참하지 않아서 즐거운 마음과 저 사람보다 비참하지 않아서 안도하는 마음이 지갑을 열게 할지도 모른다.


수잔 손탁도 저녁밥을 먹으며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에 무감각한 우리들을 지적한 바 있다.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를 사고팔아야 어쩌면 마땅한 일이겠지만 나보다 행복한 타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즐거워하지 않는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몸에 꽂아가면서 짬뽕을 맛있게 먹고 막걸리를 마셔야 그게 돈이 된다는 걸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눈물의 여왕을 아주 재미있게 봤고 막을 내렸다. 눈물의 여왕이 재미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과 악이 분명해서 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선과 악이 모호한 것이 유행을 했다. 긴 세월, 10년 정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어벤져스 시리즈가 그랬다. 도대체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나쁜 편인지 분간이 모호했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선과 악이 구분이 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가 믿고 있었던 그동안의 선은 선이 아니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다수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존에 없었던 이야기라 사람들은 역시 열광했다. 내가 희생하고 죽으면 그만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다수를 위하는 것에서 오는 갈등과 고민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선과 악이 대립을 하고 악이 몰락하는 과정을 우리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해인에게 집착을 보이던 윤은성이 죽는 모습과 세상의 악 중의 악 모슬희의 몰락이 주는 쾌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런 모습은 주인공 두 사람, 백현우와 홍해인에게도 적용이 된다. 두 사람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만 보였다면 사람들에게 외면받았을지도 모른다. 홍해인의 악독한 모습이 바늘이 되어 백현우를 찔러도 백현우는 아파하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현우앓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갑부도 갈등이 심하구나. 이는 실제로도 그렇다. 재벌들의 가족 분쟁과 이혼, 그리고 자살 소식으로 우리는 그들의 슬픔을 보며 즐겁거나 안도한다. 부와 명예가 다가 아니구나. 민희진의 힙합 기자회견을 보면서 열광했던 것 역시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분쟁과 시기, 암투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저 즐겁다.


드라마 속 사람들의 비참함과 슬픔이 없었다면 드라마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과 비참함을 팔고 사는 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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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가장 먼저 알리는 곳은 골목이라고 생각해 ㅋㅋ 여기 보이는 골목은 지금은 전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거든. 이때에도 사진은 전부 아이폰4로 담은 거 같아.

골목의 틈으로 봄이 되면 어김없이 민들레가 올라오잖아. 녹색의 풀들이 겨울의 차갑고 딱딱함을 뚫고 올라와서 골목을 봄으로 바꾸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어서 신기했지.

민들레는 잡초지만, 잡초라서 튼튼하고 생명력이 고래힘줄 같아서 좋아 ㅋㅋ 우효도 민들레를 불렀잖아, 노란 꽃잎처럼 내 맘에 사뿐히 내려앉으라고 말이야, 민들레 같은 사랑은 질긴 것 같아.

나는 골목을 좋아해서 골목의 모습을 지금까지 엄청 담았거든. 대부분이 봄의 사진들이야. 나중에 신문사에 팔아먹을 거야 ㅋㅋ

골목에 봄이 오면 방향제 냄새가 나거든. 아지랑이 냄새라고 할까. 집집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가 봄에 잎을 올리면 허브처럼 향이 나거든. 목련에서 나는 향 같은 거 말이지.


근데 그런 방향제 향이 골목에서만 나더라고. 도로나 아파트 단지에서는 봄이 와도 나지 않아. 그래서 봄이 되면, 3, 4월에 골목을 다니면 그런 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신기했지.


새삼 느끼는 건데 아이폰4도 사진이 참 좋은 거 같아.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색감을 다 담아 내 거든.


봄의 골목은 따스함 정감 같은 게 있어. 뭐랄까 대문 같은 거 전부 열어 놓고 저녁에 아버지들 집에 오시면 된장찌개 끓이고 고등어 굽고 하는 냄새가 골목에 퍼지고 말이야.


요즘은 1인가구가 4인가구를 뛰어넘었잖아. 집에서 고등어 굽다가는 옆 집에서 소리 듣는 시대가 되어버렸네.

골목의 곳곳에 봄을 알리는 민들레와 초록초록한 잡초가 벽면에 그려 놓은 벽화와 어울렸지. 이 골목들이 전부 아파트로 바뀌어서 아쉽기는 해.


이렇게 골목을 지나가면서 사진을 담다가 방향제 향이 나면 그 자리에 서서 흠 하면서 향을 맡잖아, 그러면 기묘한 기시감에 사로 잡히거든.

초딩 때 봄소풍 갔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봄소풍은 원래 요즘에 가지 않았나.


요즘처럼 미세먼지 같은 건 없어서 봄소풍 가면 재미있었지, 뿌옇고 먼지 낀 시야가 아니라 맑고 청명하니까 놀기 좋았지.


김밥을 터져 있고 조금 상한 듯한 맛이 나고 사이다는 시원하지 않아서 밍밍한데 그래도 맛있었다 ㅋㅋ

봄날의 골목은 그야말로 생명이 느껴지는 것 같아. 벌레들도 많아지고 ㅋ 길고양이들도 따뜻한 곳으로 나와서 볕을 쬐고 있고.


겨울 동안 듣지 못했던 새소리도 들을 수 있거든, 그 소리가 봄의 골목을 시끄럽게도 하지만 잘 들으면 운율이 있어 새 따위가 말이야.

방송 같은 곳에서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골목을 볼 수 없지.


어제 조깅하면서 보니 아이들은 지금도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놀더라고, 그 어려운 밤양갱을 너무나 잘 부르데.


그리고 가방을 입구에 전부 던져 놓고 인생 네 컷 속에 들어가서 깔깔거리면서 시끄럽게 놀더라고. 장소가 바뀌었지 아이들은 아이들이지.

이런 봄날의 골목의 계단에 앉아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면 좋아, 교코부터 식스티나인, 코인로커 베이비는 정말 계단에 건방지게 앉아서 읽으면 좋은 거 같아.


아직 없어지지 않은 골목에서 독서모임해서 그늘에 앉아서 책 읽고 서로 이야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 ㅋㅋ


봄의 비는 땅에 떨어져 시가 되는 것 같아, 시는 골목에 내려와 풍경을 바꿔 놓지. 하지만 사람들은 골목에 떨어진 봄비에서 시를 느끼지 못해. 시는 가까이 있는데 못 보는 거지.


아름다움은 주위에 널려 있으니까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주위의 아름다움을 실컷 볼 수 있을 봐야 해. 왜냐하면 골목은 다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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