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과 결은 본디 하나이나 그것은 두 힘 ‘함’과 ‘됨’이 엮이고 풀리는 마디(응집력)에서 생기므로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인 한 쌍으로 볼 수 있다. 힘으로 뭉뚱그리면 하나이지만, 함과 됨의 결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갈라서 보자면 둘이다. 음과 양, 원자와 공간, 유와 무, 전자와 양성자, 형상과 질료, 숨과 몸…… 무엇이라 부르든 아랑곳없이, 이것저것을 갈라서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의식에 비치는 누리의 모습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 P181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 무늬가 다르다. 무늬는 톨에 새겨진 결이다. 사람의 손가락 끝마디에 새겨진 지문이 저마다 다르듯이, 피나 머리칼에 새겨진 유전정보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듯이, 저마다 달리 생겨 먹은 산이들은 그 다름으로 말미암아 살 때와 데가 어느울타리 안에서만 주어진다.
‘함‘의 힘이 ‘됨‘의 힘보다 넘치는 곳에서는 결 고른 삶을 바라기 힘들다. 힘이 들어오면 거기에 맞서야 하고 맞서기 어려우면(힘겨우면) 고른 결이 흐트러진다. ‘힘이 든다‘는 말은 깊이 되새겨 보아야한다. - P182

"원자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 광자라고 부르는 빛의 입자를 방출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광자가 원래 원자 속에 들어 있다가 방출되는 것이냐?"
"아니요, 광자가 원래 있다가 방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광자는 어디에서 온 거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
나는 광자의 수는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운동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아버지께 설명드리려고 애썼지만 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것은 제가 지금 내고 있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소리가 제 몸 속에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런 점에서 나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남이냐 이야 뭐라 하건!》(리처드 파인만 글, 홍승우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에서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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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가득함(충만)은 삶의 꼴도 결도 아니다. 대칭은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제안에 있던 무언가를 뺀 나머지 모습이다. 좌우대칭은 그 가운데 가장 흔히 눈에 띄는 한 가지 모습일 뿐이다. 물리나 화학에서 나타나는 대칭은 어쩌다 그렇게 된 현상이지 스스로 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비의 두 날개로 나타나는 대칭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P149

0과 1 사이에 낀 것 치고 멈추는 것은 없다. 모두 흔들리고 끊임없이 흐른다. ‘수’도 바뀌고 물질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톨로 뭉치고 결을 이루어 풀리는 뭇 것들 모두가 움직인다. 살아 춤춘다. 수학 공식도 물리법칙도 함께 널뛴다. 어떤 눈금이 새겨진 잣대를 들이대도 그 잣대가 잴 수 있는 것은 수의 얼굴을 지닌, 법칙의 탈을쓴 나머지일 뿐이다. - P151

나는 <철학을 다시 쓴다》에서 동일률이 어디에서 어떻게 깨지는지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함과 됨으로 드러나는 힘은 우리 눈에 톨의 움직임으로 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눈보다는 귀가 조금 더 밝아서 결의 움직임을 받아들이지만, 그것도 어디에서 어디까지, 얼마에서 얼마까지라는 틈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느끼고(감각), 알 수 있는(지각) 것은 얼마나 적은가. 작아질수록 그리고 커질수록 사람의 헤아림에서 그만큼 벗어나는 앎의 테두리가 좁아진다. 미시세계(작은 것), 거시세계(큰 것)에서 드러나는 티끌 같은 조약돌 하나 집어 들고 그것을 앎의 모두인 것처럼 뽐내고, 자랑하고, 떠들어대고, 기리는 모습은 ‘알음알이 놀이‘(지적유희)와 진배없어 보인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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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 삶이란 무엇이냐?‘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자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소박하고도 끊임없는 호기심이 그이들의 연구 동기였다. 그 사람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난 속에서도 꾸준히 ‘형이상학적 꿈‘을 꾸어 왔다. 그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지도 않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대 첨단 과학자들은 스스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꿈꾸는 ‘기쁨의 형이상학‘ 대신에 ‘슬픔의 형이상학‘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다. - P127

크게 보아 지난 몇백 년 동안 과학계에는 세 차례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다. 뉴턴이 찾아낸 관성과 만유인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이다. 하나는 일상세계의 해석에서 또 하나는 거시세계의 해석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미시세계의 관찰에서 일어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물리 세계의 법칙들은 수학과 실험, 관찰의 ‘검증’을 거쳤다.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의 불일치다. 그 둘을 아울러 보려는 시도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불확정성원리와 불완전성정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물리학, 수학의 ‘작업가설’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플라톤주의와 원자론자들 이론의 통일? 글쎄, 어려울 게다. - P128

한 입으로 두 말뿐 아니라 여러 말을 할 수 있다. ‘다 비었다, 하나다, 마음이 모두 빚어냈다, 물질이다, 생명이다, 창조의 역사다, 진화의 역사다…………’ 이른바 화엄세계는 살아 있는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자나 아원자로 살아 있든, 부풀어 오르는 우주로 살아있든, 마침내 눈에 안 보이는 점으로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뻥‘ 터지든 살아 있는 놀이판이다. 그럴싸하게 꾸며 댈 수도 있다. 크게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본뜨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좀팽이 과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너나들이할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이다. 안 그런가?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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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낱말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우리의 느낌을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맞다‘는 말을 ‘합당하다’, ‘정당하다’로 바꾸어 쓰거나 ‘틀리다’는 말을 ‘오류다’, ‘착오다’로 바꾸는 것은 그 말의 쓰임이 우리 느낌에 닿지 않아서 겉돌게 하는 일이다. 내가 마구잡이로 밖에서 들여온 이른바 ‘학문용어’를 밑씻개로 씻어 낼 수도 없는 ‘똥구멍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그것이 우리 삶에 잇대어 있지도, 맞닿지도 않기 때문이다. - P97

‘이’는 한자어로 ‘현재‘를 나타낸다. ‘이’제, ‘이’곳, ‘이’ 사람처럼. ‘어‘는 한자어로 ‘과거‘(지난 적)를 가리킨다. ‘어제’처럼. 제주도 말에는 있다를 ‘이시다’로, 없다를 ‘어시다‘로 쓴 흔적이 있다. ‘이시다’는‘이▲다’, ‘어시다’는 ‘어▲다’로 말 줄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이 바뀌어 ‘잇다‘(있다), ‘엇다‘(없다)로 되었을 수 있다. - P98

‘안’과 ‘밖’이라는 말도 더 깊이 파헤치면 이렇다. ‘임’(있음)이 밖(박, 빛)에 드러난(들어 나온) 것이라면 ‘안임‘(아님)은 속에 감추어진 것, 숨은 것, 숨으로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임’이 빛이라면 ‘안임’은 그늘이다. 그것은 늘 있으나 안에, 속에 있다. (속은 〈단군신화〉에서 ‘쑥’으로 나타난다). 어제(과거)는 이제(현재)의 안으로, 속으로 들어가 이제가 아니면서 이제의 속살을 이룬다. 얼과 넋이 된다. 기억으로 바뀐다. 경상도 말에 ‘아니다‘라는 말뜻을 지닌 ‘언제예’, ‘어데예’라는 말 쓰임이 있다. ‘어데예‘는 지나간 자리, ‘언제예‘는 지나간 때를 말한다. 어제는 이제에 내침을 받으면서, 부정되면서 안으로 숨어든다. 우리가 ‘아니다‘(안이다, 이미 사라져 숨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 ‘안’에 들어 있다)라고 할 때 그 말은 단순 부정이나 아예 없앰이 아니다. 그것은 ‘뜻 밖‘이되 뜻이 안에서 생기는 ‘얼럭‘(얼과 넋)이라면 ‘밖‘에서 생기는 것이다. ‘안임‘은 안에 숨은 ‘임‘이다. - P99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마다 ‘왜’냐고 묻는 것은 나에게 ‘오는 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 알고자 하는 뜻에서다. ‘아‘는 ‘이제‘, ‘이곳‘, ‘이것‘ 밖에서 나에게 올 것인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귓결에, 코앞에, 눈앞에 오고 혀끝과 살갗에 닿을 때까지 알 수 없다. 겪어 보지 않은 세상은 모름의 틈새를 가득 채우는데, 그것을 우리는 머리 굴려서 알려고 든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우주의 역사이고, 생명의 진화이고, 인류 역사로 알려진 부스러기 지식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뭘 모른다는 것은 안다‘(뭘 모르는지 안다)는 말을 내뱉었다는데, 이것은 입 밖에 내뱉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참말이라고 볼 수 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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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선생님, 저도 선생님 책 보면서 ‘이게 뭔 소리여’ 하고 일아듣는 대목보다 못 알아듣겠는 곳이 더 많습니다…

속이 들었다. 속이 비었다. 속이 상한다. 속이 있다. 속이 없다. 속속들이 까발린다. 속이 뒤집힌다. 속앓이한다. 속알머리 (소갈머리) 없다. 속이 찼다. 속 보인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겉 낳았지 속 낳았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속에 든 게 없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속 뒤집어진다. 속셈………. - P67

시(?) 비슷한 글을 끄적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아름답다는 것

있을 것이 있을 데에 있을 때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데에 없을 때 없는 것.
있을 것은 빠진 것이고, 없는 것이고
채워져야 할 그 무엇,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것.
없을 것은 군더더기고 있는 것이고
없애야 할 것, 드러나 있되 거슬리는 것.
내가 감싸는 산티가 나를 빚어낸 산티가
그리움으로, 아쉬움으로, 아직은 없는 것으로
찾아 헤매는 것, 있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
내가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짓눌리고, 그 때문에
않고, 휘둘리고, 갇히고, 슬프고 화나는 것.
군더더기로 있지만 치우고, 부시고, 흩어 버려야 할 것.
내 안에 스민 산티가, 손발 묶인 산티가
사슬을 끊고, 꺾임과 찢김 속에서 벗어던지고자 하는 것. - P75

아직도 나는 책으로 묶인 박홍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즐겁다. 알아듣는 대목보다 못 알아듣겠는 곳이 더 많다. 아직 멀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게 뭔 소리여‘ 할 대목이 더 많이 남아 있겠지. 내 나이 그 선생님 돌아가실 때 나이에 머지않았는데도 그렇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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