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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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기 위해 막 집을 나섰을 때 아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의 친한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자식들이 임종도 지키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 자신 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별 앞에서 먼저 떠난 이는 삶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 남겨진 이들은 되돌릴 수도, 잊을 수도, 없던 일은 더더욱 될 수 없는 준비 없는 이별의 슬픔을 견디며 삶을 살아 갈 것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있다. 이우는 가장 소중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었고, 이삐 할미는 세 명의 아들을 바다에서 차례로 잃었다. 천국은 도서관일 거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믿는 정모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판도는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이들의 슬픔의 중심에는 상실과 결핍이 존재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터무니 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된다는 (p.130) 소설 속 정모의 말처럼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의 경험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든다. 하지만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 시키기 때문이다.

 

절벽 아래엔 동굴이 하나 있다. 만 번 또 만 번의 파도가 저 동굴을 만들었겠지. 넌 모르겠지만 내 안에 저만한 구멍이 있어. 내 몸보다 더 커. 휑하고 휑해서 나는 가끔 내가 없는 것 같아. 그 구멍이 언제 생겼는지. 너한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무리 네가 못 듣는다 해도. 구멍이 생긴 순간, 그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거든. (p. 136)

 

아직도 태이의 크레파스처럼 쨍한 파랑색 베스파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고, 바다에서 눈을 감으면 태이의 숨결이 묽은 콘크리트 반죽처럼 몸을 휘감는다는 이우의 고백처럼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진 눈부신 자연을, 지금 이 순간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한다.

 

먼 하늘에 별 몇 개가 가까스로 돋아났다. 저 별빛은 지푸라기로 변한 누군가가 놓쳐버린 행복의 순간일 수도 있고 스쳐갔으나 잡지 못한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지상의 음악일 수도. (p.194)

 

그들은 눈 앞에서 반짝이는 저 별이 누군가의 행복했던 과거 같기도 하고 어쩌면 미래에 들을 수 있을지 모를 지상의 음악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내 것은 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게 슬픔은 그들을 하나의 섬으로 만든다. 이우가 언급한 슬픔은 깎다 만 사과라는 시 구절처럼 그들 각자는 맑은 슬픔, 헛헛한 슬픔, 차가운 슬픔, 말간 슬픔 등을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각자가 겪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그들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그들은 삶의 흔적, 슬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

 

저기 섬과 섬 사이. 유난히 빛나는 한점. 거기 어디쯤 네가 있는 듯하다. (p. 105)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슬픔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슬픔의 따뜻함에 대해 긍정하고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함이라면 그 힘으로 당분간은 팔을 돌리며 달려갈 수 있지 않겠나 (p. 135)

 

소설 속 정모의 말처럼 그들은 소금꽃을 닮았다. 짜디짠 기운으로 제 슬픔을 절이다 못해 하얗게 엉겨드는섬을 떠났으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출발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친 삶의 흔적들과 슬픔을 간직한 채 섬에서 만난다.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했던 건 말 못하는 판도가 이우의 손바닥에 적었던 따스함, 시력을 잃어가는 정모를 위한 이우의 약속이었다.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 타인의 온기를 느낄수 있다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위로가 있을까?

 

그냥 소금이잖아!, 꽃이 별거냐. 징하게 모인 기운이 터져나오면 그게 꽃이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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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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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이는 이 소설의 홍보문구이다. 소설은 주인공 김지영씨의 이상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담당의사가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김지영씨는 "계집질 안 하고, 마누라 때리지 않은 게 어디냐고, 그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p. 26)하는 할머니와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p. 35) 어머니로부터 "여자는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해야한다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p. 68) 배우며 자랐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불행히도 김지영씨는 그 "아무나"에 속했다. 태어나면서 부여 받은 주민등록번호는 여성은 2번이었고, 초등학생 때의 학급번호도 남자부터였다. 남자부터 급식을 먹었고, 반장도 남자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학창시절 남성으로부터의 스토킹, 언어폭력은 그 자체의 고통과 더불어 사회 문화적 분위기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으로 이중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여성에게 가혹한 취업시장에서 홍보대행사에 어렵게 입사하여 악착같이 살아남지만, 아이를 가진 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다. 생활도, 일도, 꿈도, 심지어 자신까지 전부 포기하고 힘들게 아이를 키우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맘충'이라는 비난이었다. 그녀는 결국 그녀 주변의 여성들에게 빙의하는 이상증세를 보이게 된다.

 

 

인물, 사건, 배경 등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아니 평범함을 넘어 진부한 쪽에 가깝다. 이 소설은 82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김지영씨'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사건들을 겪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철저하게 평범하고 진부한 개별적 요소로 쌓아 올린 소설의 구성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을 빛나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김지영'이 아닌 '김지영씨'인 이유는 '김지영씨'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에코세대 여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통계자료와 기사들을 근거로 객관적으로 재현해낸 지극히 평범한 그녀의 평균적인 삶은 독자들에게 진부함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보편적 체험이자 삶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 보편적인 일상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지 깨닫게 해준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은 이유는 우리 주위에 보편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아픔과 상처를 겪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지영씨'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삶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또 공감하지 못하는 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씨의 담당의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좌절을 겪은 아내를 지켜보며 평범한 남자들은 결코 알지 못할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김지영씨의 삶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지만 그러한 그마저도 자신의 병원에서 일할 직원을 채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다.

 

 

 

"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올해 세상에 태어난 딸에 대한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경영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올해부터 남성육아휴직을 의무화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경영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 약속,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소설 속 김지영의 말을 일상에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작가는 저자의 말에서 소설 속 지원이 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과학자와 작가를 꿈꾸는 딸이 있음을 밝히며 딸이 살아갈 세상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될 것을 믿고 그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나도 아버지로서 갓 태어난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았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p.156)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회사에 남성 육아휴직을 신청하였다. 이는 물론 태어난 아이를 위해 앞으로 일정부분 여성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아내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또 다른 여성으로서 살아갈 내 딸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 조직 구성원들의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켜 육아휴직제도가 안정화되고 나아가 조직문화가 개선되는데 미약하나마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김지영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포스트 김지영들을 현재의 김지영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는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삶에 행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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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백승무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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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톨스토이의 3대 걸작이라고 하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다.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에서도 <부활>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일생과 작품세계는 <참회록> 출간 전후로 나눌 수 있다. 톨스토이는 그가 쓴 참회록에서 자신의 과오를 통렬하게 참회하고 도덕적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독자와 연구자들은 <참회록>의 출간을 톨스토이의 '회심'으로 간주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그가 집필한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하였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었을 뿐이라고 부정한 것이다.








나는 그의 3대 걸작 중 <안나 카레니나>를 <부활>보다 먼저 접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으로도 일컬어지는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과 같은 인생에 대한 통찰을 보고 감동한 기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 기대감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 자신이 3대 걸작 중 유일하게 인정한 작품은 과연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부활>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네흘류도프라는 귀족 청년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혼의 부활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타락과 향락에 젖은 상류층들의 삶과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는데, 작가 톨스토이는 이러한 주인공을 통해 당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지금이라도 농민이 되겠다고 나왔는데 이리 죽게 생겼으니, 죽는 순간이라도 농민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농민으로 죽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거냐?"였다고 한다. 이는 작가로서 민중에 관심을 둔 것을 넘어 죽어서라도 농민과 함께 하고픈 톨스토이의 진심이 잘 담겨 있는 말이며 소설 <부활>의 메시지와 상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활>은 한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통한 영혼의 고양이란 측면에서 가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 낸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즉 한편에는 부정과 향락에 젖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는 가난과 억압 속에 힘들게 삶을 영위하는 민중의 삶이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당대 현실의 모순을 그려 내고 있다. 작가의 세상과 인간을 꿰뚫어보는 통찰은 다음과 같은 소설 속 문장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재산을 뽐내는 부자는 결국 약탈자이고, 전력을 자랑하는 사령관은 결국 살인자이며, 권력을 과시하는 정치가는 결국 압제자가 아닌가?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생관이나 선과 악의 개념을 왜곡하는 이들의 행동은, 우리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왜곡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다, 우리 역시 그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1권 p. 234)



작가 톨스토이는 소설 <부활>에서 인간 영혼의 넓고 깊은 심리 분석과 예술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인간의 죄와 악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구현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작가는 민중보다 한발 앞서 가라. 그러나 한발은 민중 속에 딛고 있어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을 작품을 통해 반영하고, 또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려 한 거장의 면모를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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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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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경제학도로서 책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 무역이론에 이어 리카르도가 그 유명한 비교우위론을 제기한 이래로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이 리카르드의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신봉하며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에서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제조업 공장이 인건비가 적은 해외로 이전하면서 전통적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등 세계화의 폐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불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우 정치세력이 급부상하였다. 세계화의 아웃사이더가 된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불만이 정치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연구들을 살펴보면 한국과 유럽 등 자유무역으로 직접적 타격을 받은 노동 집약적 산업의 노동자와 농민의 피해는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자유무역을 지지했던 경제학자들도 이제는 세계화로 타격을 받는 계층이 바로 노동자이며, 이들의 저항이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일정부분 수긍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화로 피해를 보는 약자를 지원하는 사회안전망과 보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런 상황하에서 경제학 전공자로서 세계화와 경제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흥미로운 명제들을 제시하여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명제들이다. “세계화는 반드시 경제적 진보를 동반하는가? “, “과학기술은 세계화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세계화의 혜택은 다수 대중이 아닌 소수 특권층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세계화에 대한 논란 중 대표적인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세계화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가속화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생각하면 세계화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지구촌이라는 용어가 거론되던 80년대부터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프랜스포메이션이 언급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왔으며, 이에 따라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이러한 주장에 반박을 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세계화를 촉진시키는 요소는 분명하지만 다른 요소들을 압도하여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교한 기술적 인프라와 보급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산업혁명을 이끈 대영제국의 몰락 그리고 두 가지 버전의 세계화를 통해 냉전의 한 축을 구축했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등이 저자가 제시한 역사적 반증이다.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세계화를 결정 짓는 요인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치를 형성하고 경제를 구성하며 각 지역과 세계의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사상과 제도의 발전과 쇠퇴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선 잠깐 언급했지만 저자는 세계화와 국가간의 이해관계의 상충 문제도 제기한다. ,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불일치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세계화는 성장을 가져왔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이는 공정하고 안정적인 성장은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특정국가와 일부 소수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절대 다수의 이익을 배반하고 집합적인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 기반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국가 연합이나 국가 공동체도 등장하고 있으나, 이에 반하는 라이벌 공동체의 등장과 역사와 영토분쟁 등으로의 내부분열 문제 등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화도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간극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다. 통화정책은 언제나 국내외의 승자와 패자를 남기고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적 이익과 세계적 이익의 상충 문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문제일 수 있다. 국가차원에서 당연한 권리와 의무인 사회복지,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이 국경의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화에서는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소득 불평등이 감소하다가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피케티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세가지 차원으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세계화와 기술의 변화와 같은 구조적 변화의 차원, 둘째, 정부의 감세 정책과 노동조합의 약화와 같은 행위자 차원, 셋째, 정치 체제와 복지 체제 등 사회정치적 제도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조, 행위자, 제도 등의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상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별 국가들은 그 동안 추진해왔던 세계화에 동참해야 할지, 아니면 보다 이기적 접근을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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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백년손님 - 벼슬하지 못한 부마와 그 가문의 이야기
신채용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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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학문의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쓸 곳이 없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펼칠 곳이 없다. (학무소용, 재무소전)  



이는 조선왕실의 백년손님이자 왕의 사위인 부마를 표현하는 말이다. 작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식민사관으로 인해 광복 이후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선시대와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종식되지 않은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을 내게 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왜 작가는 부마에 주목하였을까? 이는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다. 부마는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생소한 존재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학부소용, 재무소전"의 한계를 지닌 부마라는 존재를 통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본다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물제도가 어느 정도 완미되는 성종 전까지는 부마들도 일반 관료처럼 높은 관직에 올라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장도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조정 내에 사림 세력이 등장하는 등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정착되어가자 부자의 정치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성종 이후부터 부자는 법에 따라 주어진 관직만 받아야 했으며, 일반 관료처럼 조정이 나가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됩니다 않았고, 과거 응시 또한 철저하게 제한 받았다. 이 같은 원칙이 세워지고 시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국가 기념으로 삼아 건국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명분과 의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왕의 가까운 인척인 사위가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분명 용납되지 못할 사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마 가운데에는 벼슬하지 못하는 슬픔을 극복하고 탁월한 서예가나 문사로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이 또한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인간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속세로부터 벗어나 자연에 은거하셔서 수기의 자세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자를 길러내 향촌 사회에 그 이념을 뿌리내리게 하는 은일지사였다.


부마는 왕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왕위를 물려 받을 세자에게는 자형이나 매부이고, 세손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존재이다. 이는 부마로 간택되었을 때 부마 당사자는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데 반해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은 왕실의 인척으로서 국왕의 근위 세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조선시대 정치 세력에 대한 연구가 전기에는 공신과 훈척, 사림파를 중심으로, 중기와 후기에는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등 각 붕당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왕실 관련 연구에서는 왕비나 후궁만을 주목했기 때문에 왕의 사위인 부자라는 존재와 그 세력은 간과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의 삶에서는 부마 자신을 비롯하여 그 아버지나 자손들이 정치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부마를 비롯한 그 가문의 정치적 역할과 의상은 조선시대 정치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부자는 왕의 최측근이지만 벼슬할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그 개인에 대한 자료는 소수를 제외하고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총 92명의 부마 가운데 정치 문화 부분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12명의 부마를 선택하여 그들을 개인별 열전의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에게 선택된 12명의 부마는 다음과 같다.


1.
태조 부마 흥안군 이제 : 개국공신의 운명
2.
문종 부마 영양위 정종 : 단종의 보호자
3.
성종 부마 풍원위 임숭재 : 연산군의 채홍사
4.
연산군 부마 능양위 구문경 : 폐지로 인한 이혼
5.
성종 부마 고원위 신항 : 뛰어난 문장가
6.
중종 부마 여성위 송인 : 문집을 남긴 문사
7.
선조 부마 해숭위 윤신지 : 장원급제 실력
8.
선조 부마 동양위 신익성 : 강직한 척화론자
9.
효종 부마 동평위 정재륜 : 숙종의 밀사
10.
현종 부마 해창위 오태주 : 중국에 알려진 명필
11.
영조 부마 금성위 박명원 : 박지원은 함께한 사행
12.
영조 부마 찬성의 황인점 : 정조 특명의 사행




부모는 왕의 사위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간택해준 왕에게 협조하면서 서구적인 자세를 튀하거나 왕의 악행을 부추기는 등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군주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룬 바와 같이 역사속 헤게모니 다툼으로 정치적 지향점과 운영방식이 변화하였을 때 부마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던 존재를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 느꼈다. 때로는 정치판의 한가운데에서 때로는 속세를 떠난 문인으로서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부마라는 존재가 궁금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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