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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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저자의 전작 그림 속 경제학에 소개된 <전함 테메레르>와 관련된 내용을 보며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예술이 일상이고 글쓰기가 직업인 저자 문소영의 신작에세이다. 전작들이 명화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통찰을 전문가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면, 이번 에세이에서는 저자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자유분방하다. 미술을 포함하여 영화, 음악 등 예술 전반과 사회, 경제, 정치, 철학 등 광대한 주제들을 개인적 성향 및 취향을 드러내며 다소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으로 게으르게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42편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룬 <메멘토 모리에서 카르페 디엠으로>였다




신은 존재할까? 영혼이란 무엇이고, 사후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지만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아직 인류가 탐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생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삶은 한번뿐이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 주어지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삶은 소중한 것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메멘토 모리카르페 디엠이 어떻게 절묘한 한 쌍을 이루는지 프란츠 할스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해골을 든 청년과 꽃을 든 처녀는 누구나 언젠가 맞게 될 죽음을 일깨우고 있다. 싱그러운 젊음이 해골로 변하고, 오늘 미소 짓는 꽃이 내일은 지듯이 삶은 유한한다는 것을 유념하고, 오늘의 이 시간을 잘 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의 순간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늦게 핀 대가를 꿈꾸며, 프랭크 매코트의 서늘하고 무거운 조언에 귀기울이라는 저자의 충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이다.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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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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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라 불리는 미스터리 추리문학의 거장이다. 그는 미스터리 문학의 원형을 만들어낸 에드거 앨런 포라는 대작가의 이름을 스스로 짊어지고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그 이름의 무게를 극복하고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와 인물을 통해 미스터리 추리 장르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이 현재의 미스터리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장르문학의 가치를 드높인 그의 빛나는 창작물과 평론들, 또 추리소설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일본추리작가협회를 설립하고 추리문학상을 제정한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도가와 란포 상>은 저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도 이를 통해 데뷔했을 정도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자 일본 추리 소설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많지 않아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는데, 이번에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로 표제작인 <도플갱어의 섬>을 포함한 4편의 란포의 소설이 한 권으로 출간되어 무척 반가웠다.






4편의 소설들은 란포가 왜 거장으로 불리는지 느낄 수 있는, 그의 미스터리 스타일을 대표하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4편의 소설 모두 독자에게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와 어떤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지 빠짐없이 공개하는 한편, 탐정이 이 완벽해 보이는 범죄의 빈틈을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도서(倒叙)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4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물론 란포가 만들어낸 동양 최초의 사립 탐정 캐릭터 아케치 고고로. 일본 추리만화의 쌍벽을 이루는 <명탐정 코난>모리 고고로에도가와 코난’, <소년 탐정 김정일>아케치 경감아케치 고고로가 있었기에 존재가 가능했다. 이 캐릭터들은 란포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걷는 후세의 작가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이자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작가 에도가와 란포코난 도일이 결합된 <명탐정 코난>의 캐릭터 에도가와 코난은 장르문학에서의 에도가와 란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단편집의 포문을 여는 <심리 실험>은 일본의 도서(倒叙) 미스터리 원조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가난한 대학생이 부유한 노파를 살해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이 소설은 언어 연상 테스트의 형태로 행해지는 심리 실험과 범죄 심리를 이용한 아케치 고고로의 추리가 빛나는 작품이다. 가장 좋은 추리는 심리적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것이라는 아케치 고고로의 대사처럼 인간 내면의 심리를 이용한 추리를 전개한다는 점이 물적 증거를 기반으로 트릭 해결에만 집중하는 여타의 미스터리물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지붕 속 산책자>는 에도가와 란포의 몽상가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초기 대표작이다. 지루하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의 삶 속에서 회의하고 방황하는 염세적 인물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하숙집 지붕으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밤의 세계와 범죄의 유혹에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란포는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자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나의 관심은 오직 진실을 아는 것이라는 아케치 고고로의 말처럼 이상과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시대적인 고뇌를 다뤘기 때문이 아닐까?



<도플갱어의 섬>에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대자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어 자연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히토미 히로스케가 등장한다. 그는 항상 자신만의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지만, 현실의 그는 두 평 남짓한 지저분한 하숙방을 전전할 뿐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이상향을 구현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유토피아 (Utopia)’'없는(ou-)''장소(toppos)'의 합성어인 것처럼 엽기적인 범죄를 통해서 이룩한 이상향은 그가 내딛는 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그를 파국으로 안내한다.



<검은 도마뱀>은 란포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걸출한 여도둑 미도리카와 부인이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호적수로 등장하여 지혜를 겨룬다. 미도리카와 부인은 범죄를 예고하고,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표정을 즐기고, 싱그러운 젊음을 박제하여 수집하는 등 편집증적 광기를 지닌 괴도(怪盜, phantom thief)로 묘사된다. 작품 전체에 걸쳐 어두운 심연에 자리 잡은 인간의 추악하고 비뚤어진 욕망, 광기가 번뜩이는 몽환적인 세계가 연출되지만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빠져드는 건 인간의 본성 그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은 아케치 고고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다.



란포의 위대함은 그가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자기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즐길 수 있게 한 것이 란포의 진정한 업적이다. 일본에 란포라는 작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 온다 리쿠 -



에도가와 란포가 추리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를 확립한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 ‘아케치 고고로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든 것, 범죄 심리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그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작품집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학적 추리로 대표되는 현실과 이성의 세계와 이에 대비되는 그로스테크한 욕망과 서리얼 (Surreal)한 환상의 세계가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유려한 문체로 표현한 부분이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꾸 문득 두세 시간 전의 격정이 되살아났다. 그의 전 애인 사키코가 목이 졸리면서 이 사이로 혀를 내밀고 입가에 주르르 피를 흘리며 소처럼 큰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얼굴과 허공을 할퀴는 듯한 단말마의 손가락 다섯 개가 거대한 환상이 되어 그를 위협했다.” (P. 253)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흥분, 공포로 점철된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과 애인을 교살하는 과정을 소처럼 큰 눈허공을 할퀴는 단말마의 손가락 다섯 개로 이미지화시킨 표현을 보며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반짝거리는 눈물방울이 남자의 하얀 몸을 감싸며 일그러져 빛나는 것 같았다.” (P. 397)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감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란포는 위트와 유머도 잊지 않는다. <검은 도마뱀>에서 아케치 고고로는 여도둑의 트릭에 대해 이번 발상 같은 경우는 완전히 옛날이야기예요. 어느 소설가의 작품에 <인간의자>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 역시 악인이 의자 안에 숨어서 장난을 치는 이야기인데, 그 소설가의 황당무계한 공상을 검은 도마뱀은 감쪽 같이 실행해 보인 겁니다.” (P. 337) 라고 말한다. 란포 자신을 어느 소설가로 언급하면서, 자신이 작품에서 선보인 트릭을 올드하고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에서는 시대적 이질감을 크게 느낄 수 없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건 작품에 가끔 등장하는 시대상과 현대과학에 비해 다소 낙후된 당시의 기술력을 마주할 때뿐이다. 그의 소설들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그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란포의 도서(倒叙) 미스터리는 한 세기 이전에 있었던, 이미 확정되어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우리 삶을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들 자신도 <지붕 속 산책자>의 사부로처럼 이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내면에 들끊는 욕망들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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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영재로 바라보면 영재가 된다 - 상위 0.3%로 키운 엄마의 교육법
신재은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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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아이는 각기 특별하게 태어나며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눈으로 그 특별함을 발견하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내 아이를 영재로 바라보면 영자가 된다 의 저자 신재은의 말처럼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 깊숙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부모라면 아이들에게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도 부모가 아닐까?

 

책을 보면 정우 군도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자란 것은 아니었다. 학원도 보내고 이런저런 사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결국 엄마가 어떻게 교육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교육에 대한 플랜을 다시 수립하게 된 케이스다. 특히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열정적인 엄마와 노력파 아들은 효과적인 학습법과 학습 환경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과정을 통해 학습의 기초인 독서에 재미 붙이는 법을 비롯해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하는 법, 공부환경을 조성하는 법 등의 나름의 노하우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모든 아이는 특별하게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아이의 숨겨진 영재성을 발견하는 교육철학과 그러한 저자의 디테일한 교육법 및 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정우 군이 고려대 영재교육원에 합격하고 상위 0.3% 영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도 이러한 엄마의 교육철학에 따라 아이가 학습의 즐거움 그 자체에 목적을 두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특별하다. 그리고 내 아이의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라나게 해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기 입으로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랑의 눈으로 관찰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31)

 

나는 아이의 능력에 미리 한계를 긋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 엄마의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더 큰 꿈을 꾸고 더 많은 기회를 만나게 하려면 내가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사랑과 관심으로 내 아이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재능을 발견해주는 거다. (P. 241)

 

한국에서 자녀교육에 성공하기 위한 3대 요소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속설이 있다. 어쩌면 한국의 사()교육이 성공하지 못하고 사()교육으로 전락하는 건 자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 때문 아닐까? 가망 없는 아이는 없고 가망 없다고 보는 편견과 가망 없게 만드는 교육제도가 더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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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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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은 초등학교 6학년생 소녀 다나카 하나미의 이야기를 다룬 연작 단편소설집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책을 선택하는 것이 좀 망설여졌었다. 모녀간의 따스한 감정이 묻어나는 제목과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한 감동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만 봤을 때는 딸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자연스레 관심이 갔었다. 하지만 일본 문학의 미래를 책임질 작가’, ‘가능성이 끝이 없는 작가’, ‘최연소 천재 작가등 화려한 수식어로 대변되는 작가가 14세의 중학생이고, 소설도 초등학생인 화자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과연 작가의 시선과 호흡을 따라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을 바꿔 책을 선택한 건 추천사 덕분이었다. ‘성숙한 중학생이 아닌 작가의 눈을 지닌 한 명의 표현자’, ‘작가라는 일에 나이는 상관없다.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쓰는지가 전부다.’ 등 기성 작가들의 추천사를 보며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사실 성인 작가가 아이의 시선을 통해 인생에 대한 체험적 진리를 표현한 책은 기존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생생한 필치라는 문예지 다빈치의 표현처럼 어린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보면서, 또 힘든 일상 속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원망보다는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 가졌던 의구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5편의 단편 중 마지막 단편 <안녕, 다나카>를 제외하고 모든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하나미의 캐릭터였다.



엄마는 꽃도 있고 열매도 있는 명()과 실()을 겸비한 인생을 살라는 바람을 담아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미다. 그런데 이건 남이 묻거나 학교에서 이름의 뜻을 조사해 오라는 숙제를 냈을 때를 위한 공식적인 에피소드이고, 사실은 죽은 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겠는가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P. 71)



하나미라는 이름에는 그늘이 드리워진 엄마의 과거와 딸은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동시에 담겨 있다. 엄마는 죽은 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겠는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하나미에게 어쨌든 살아 있으라는 소리야라고 대답한다 (P. 72)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의미의 이 말 속에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꿋꿋이 살아나가고자 하는 엄마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엄마의 삶에 대한 자세가 가장 잘 표현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슬플 때는 배가 고프면 더 슬퍼져. 괴로워지지. 그럴 때는 밥을 먹어.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 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P. 266)



부모나 형제자매도 친척과 남편도 없이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외롭게 버티며 살아온 엄마는 어떻게 이런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엄마의 삶의 태도는 딸 하나미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아무리 절망적이고 최악의 상황이라도 그 사람 나름의 희망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비록 바늘 끝처럼 보잘것없는 희망이라도, 희미한 빛이라도, 환상이라도, 그게 있으면 어떻게든 매달려서 살 수 있어. (P. 131)



하나미는 자신 보다 확연히 나은 처지의 친구를 보며 너무나 먼,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질투의 대상도 아니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P.194) 아이스크림 막대기의 당첨이라는 문구 그 이상의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면서도 뭐 없는 것 보단 낫지.‘ 라며 툭툭 털고 일어나는 긍정적 삶의 자세를 가졌다. (P. 140)



모녀가 직면한 현실은 결코 달콤하지 않고, 한 끼에 담긴 에너지로 그 다음의 한 끼까지 견뎌야할 정도로 절박하다. 이러한 절박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말하며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모녀의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특히 어린 하나미가 주위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 시절에서 흐뭇함이나 향수를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삶을 안쓰러워하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P. 82) 빨리 돈을 버는 어른이 되어 엄마를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고, 그때가 오면 오늘을 떠올리고 웃을 것이라고 다짐을 하는 소녀는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쩜, 꽃도 있네.” 엄마가 말해서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복숭아꽃과 열매가 있었다. 꽃도 열매도 있다. 엄마.” 나는 빛을 잡으려는 듯이 가지로 손을 뻗었다. (P. 167)



그리스어 '없는(ou-)''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 유토피아 (Utopia)’ 처럼 대부분의 이상향들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곳이거나 천국처럼 죽어서나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하나미가 꿈꾸는 이상향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친근한 모습이다. 그곳은 각종 금은보화가 넘실거리는 엘도라도도 축복 받은 이들만 살 수 있는 엘리시움도 아니다. 하나미가 꿈꾸는 이상향은 꽃잎이 아름답게 흩날리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소탈하고 평범한 곳이다. 지극히 현실적임에도 이상향이라고 부를수 밖에 없는 상황이 무겁고 슬프게 다가온다.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거나 그런 게 어디 있어. 엄마는 앞으로도 내 엄마인걸.P. 279



복숭아꽃의 꽃말은 희망용서이다. 하나미가 꽃도 열매도, 명분뿐만 아니라 실리도 함께 있는 그 곳에 엄마와 함께 꼭 도달했으면 한다. 그곳에서 손을 뻗어 희망의 빛을 꼭 움켜쥐었으면 좋겠다.



책을 덮고 잠시 표지를 바라보았다. 미소 띤 얼굴로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와 이러한 엄마를 향해 손을 내미는 딸 하나미가 있었다. 표지를 벗겨 뒤집으니 새로운 표지가 나왔다. 복숭아 열매와 꽃 사이에서 하나미와 엄마가 각각 케이크와 홍차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소설에서 겐토가 하나미에게 선물한 케이크와 엄마가 게키야스당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홍차이리라. 그들만의 이상향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녀를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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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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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Classic Cloud) 시리즈는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00인이 문학, 미술, 철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삶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을 정리한 기행집이다. 거장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면밀하게 되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리즈의 기획에서 개발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거장의 삶과 작품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쌓은 평론가, 작가, 학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한 거장의 삶을 깊이 파고드는 '책으로 하는 여행'이라는 컨셉은 거장의 작품에 매료된 사람들은 물론 문학기행 등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과 반대로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현재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까지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내가 클래식 클라우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 아르테 (arte) 부스에 전시된 시리즈를 보면서였다. 197월 현재는 문학 4(1 세익스피어, 4 페소아, 5 헤밍웨이, 10 가와바타 야스나리), 철학 2(2 니체, 9 아리스토텔레스), 미술 2(3 클림트, 8 뭉크), 음악 2(5 푸치니, 7 모차르트) 등 시리즈 중 10권이 출간 완료되었지만, 그 당시 전시된 도서는 시리즈 중 1, 2, 3권인 셰익스피어, 니체, 클림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의 선택은 클래식 클라우드의 첫 시작을 알리는 1권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거장을 논하는 시리즈의 상징적인 1권을 차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또한 향후 시리즈의 성공을 가늠해보는데 있어서도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를 세계 최고의 작가로 올려놓은 최초의 찬사이다. 그 시대의 모든 작품 목록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6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거의 다 살아남았다. 그럴 만큼 그는 당대에 이미 최고의 작가로 대접받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상업적 압박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에도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영국의 대문호였지만, “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햄릿의 대사 등 문학으로서, 또 영화와 연극으로서 현시대에도 영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 그는 여전히 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눈부신 그의 작품에 비해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의외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엄청난 유명세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과연 실존 인물이었는지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작품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독자들은 작가에 대한 정보를 갈급하지만, 그에 대한 사료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영국, 소란스러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있는 영국 스트랫퍼드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가 소개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400여 년 동안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가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5%의 사실과 95%의 억측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빈약한 몇 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영국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태어나 앤 해서웨이와 가정을 꾸렸고, 이후 가족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배우 겸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청년 시절인 1585년부터 1592년 사이 7~8년간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완전한 공백기로 불린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여러 설을 모두 부정하며 사실 기반으로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1부에 거론된 작품으로는 <리어왕>, <헨리 6>, <멕베스> 등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저자의 작품에 대한 분석이었다. 리어왕이 나이가 들어 왕위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면서 세 공주의 효심을 테스트한다는 <리어왕> 스토리의 이면에는 당시 브리튼에 존재했던 은퇴 노인들의 문제가 있었다는 분석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브리튼에서는 은퇴한 노인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인들은 굴욕에 직면하고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리어가 딸들의 사랑을 시험한 데에는 그런 노년에 대한 불안도 한 가닥 스며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노년에 대비했지만 피하고 싶었던 일들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2'파리에서 빈까지, 영원과 사랑을 향한 발걸음'에는 프랑스에서부터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인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삶의 행적이 이어지는 각각의 장소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과 함께 여행지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프랑스로 가는 길에서 <헨리 5>, 파리에서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의 주인공 헬렌을 떠올린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는 햄릿에 대해 생각하고, 덴마크로 이어지는 여행길에서 햄릿의 뒤를 쫓아 그의 왕궁이 있던 덴마크 크론보르 성으로 향한다.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 하우스에서는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를 언급하며, 괴테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소개하고 있다.

  


3'지중해, 끝없는 이야기의 바다'에선 이탈리아, 그리스 등 유럽 각국이 배경이 된 작품들이 등장한다. 여행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베니스에서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질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오셀로>, 베로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불꽃 같은 사랑을, 파도바에서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떠올릴 수 있다. 저자는 로마에서 <줄리어스 시저><페리클레스>를 추억하고, 그리스로 이동해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실수 연발>, <한여름밤의 꿈>, <아테네의 티몬>을 소개한다.

  


클래식 클라우드의 <셰익스피어>를 읽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보낸 여름휴가가 생각났다. 첫 여름휴가로 내가 구상했던 건 학부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벌교와 순천 일대를 여행하는 남도 문학기행이었다. 지금은 태백산맥문학관을 필두로 소설의 주요 무대에 해당하는 장소들이 문학기행길로 잘 정비가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소설의 독자들이 알음알음으로 찾아야 할 정도로 소설의 배경이 된 주요 장소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홀로 문학기행을 하며 물론 얻은 것도 많았지만, 문학기행을 효율적인 동선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이끌어줄 누군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클래식 클라우드와 인연을 맺었지만, 이후 후속작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온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거장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전문적인 큐레이션 서비스를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시리즈의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물론 앞으로 출간이 기대되는 작품들이 더 많이 있다. 정여울 작가가 소개하는 <헤르만 헤세>와 이다혜 작가가 소개하는 <코난 도일>은 개인적으로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책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장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찾아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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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7-10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료가 부족한게 참 미스터리에요.ㅠ 가끔 슬프기도 합니다.이다혜 작가의 코넌 도일은 저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잭와일드 2019-07-10 11:01   좋아요 1 | URL
네 자신의 삶 마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어떻게 보면 정말 슬픈 일이죠 ㅜㅜ 이다혜 작가의 코난 도일은 정말 기대되지 않나요? ㅎㅎ

골든보이 2019-07-10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장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전문적인 큐레이션 서비스를 받는 느낌’이라는 대목이 공감이 가네요.

잭와일드 2019-07-10 18:58   좋아요 0 | URL
기획이 참 좋은 시리즈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