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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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8)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수많은 등장인물과 동식물, 사물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본 84편의 조각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360쪽 분량의 소설이 평균 4쪽 남짓의 독립된 챕터로 분리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본작 <태고의 시간들> 뿐만 아니라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방랑자들>도 각각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촘촘하게 엮어 하나의 장편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방식은 마치 작은 천을 이어붙여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패치 워크 (patch work)’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이러한 소설의 독특한 구성이 패치 워크 (patch work)’ 보다는 성좌(星座, Constellation)’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좌 즉,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 별자리가 정해진 이후 수천년의 시간 동안 거의 별자리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것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사실이 숨겨져 있다.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개별화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별들이 모여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은 미하우와 게노베파 부부, 이들의 자식인 미시아와 이지도르, 그리고 미시아의 딸 아델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니에비에스키 가족들과 이들의 이웃과 외지인들, 동식물과 사물, 망자와 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들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을 가진 이들 다양한 개체들의 개별적인 삶은 단선적인 스토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거대한 시간의 간극을 빈틈 없이 수놓아 결국 소설 전체를 구성하는 큰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치며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지 않은가?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다양한 개체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태고라는 무대는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소설도 태고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태고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하루면 족히 돌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평범한 시골 마을로 묘사된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태고의 위치와 폴란드어로 프라비에크(prawiek)’, 즉 아주 오래된, 원시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명은 태고가 담고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태고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면서 태초의 시간을 의미하는, 즉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정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시간들>20세기 폴란드라는 한정된 시공간을 조망하는 이유는 변화와 소멸을 반복하는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전쟁의 참혹함을 이성만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마술적 리얼리즘 (Magic realism)’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저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답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저자는 의식이 닿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을 다루고, 이성을 벗어나 세계의 심연에 도달한다. 신화적 방법론을 통해 반복되는 역사를 설명하고, 삶의 원형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역사가 비켜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환상을 통해 현실의 회색지대를 조망하여 진실을 보게 하는 것,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될 수 없었던 소수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건 문학이 담당해야할 중요한 역할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인간을 타자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동식물과 사물, 망자들의 시선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진실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과 세기로 빛을 비춘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 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52)

 

 

소설에서는 붉은 털을 가진 개 랄카를 통해 세상을 향한 동물의 시선을 투영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 그 끊임없는 변화의 시간들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 반면 동물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적용을 받는다. 동물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며 항상 현재를 살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309)

 

 

작품에는 식물의 시선도 등장한다. 보리수는 나무의 꿈에는 동물의 꿈과 달리 감정이 없고, 인간의 꿈과 달리 이미지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대자연 속 식물의 삶을 통해 삶의 원형의 회복을 꿈꾼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버섯균의 시간이다. 후손들은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개별적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버섯균의 삶은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온 인간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버섯균은 아이들을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버섯에게 생장 에너지와 홀씨를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버섯에게는 향기를,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태를 허락해준다.” (225)

 

 

망자들의 시간도 있다.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이다. 현실에서 조명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해왔던 전쟁과 학살의 현장을 저자는 망자의 시선을 통해 슬프고 아프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잊히고 찢겨진 삶에 위로를 건넨다.



영혼은 정말 많았다.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자심 새벽바람의 얆은 막 사이에서 이러저리 흔들리던 영혼들은 곧 끈을 놓친 풍선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204)

 

 

미시아의 그라인더처럼 사물들의 시간도 존재한다. 사물들은 자신에게 머물었던 손길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지금은 차갑게 식었지만 한때 절절하게 끓던 열기를 기억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카는 태고를 떠나며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천천히 돌린다. 이전세대의 어떤 순간에 명멸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머금고 있는 그 커피 그라인더는 그 감정의 온기를 다음세대에게 전할 것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

 

 

태고는 태초의 시작이자 결말이 되는 곳, 인간과 자연, 신을 포함한 모든 시간들이 흐르고 쌓이는 곳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태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며, 동시에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종국적으로 남게 되는 건 채울 수 없는 야망과 끝내 이루지 못한 꿈뿐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 이는 매초 무()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의미 없는 존재란 없음을,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빛을 내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마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흙의 무게를 이겨낸 후 땅 위로 몸을 내미는 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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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잭와일드 2019-11-23 16:28   좋아요 0 | URL
좋은 소설 덕분인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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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 어느 순간 내가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에 더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적이 있다. 한 권 한 권 그의 책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서가의 한 켠이 하루키의 책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소설보다 에세이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통해 일상의 빛났던 순간들,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자신의 취향,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독자에게 건넨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듯 그의 에세이는 마냥 즐겁고 유쾌한 에피소드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세상엔 실로 갖가지 함정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은밀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일 없이 매일 평온하게 살아가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며 삶의 아포리즘을 드러내기도 하고,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올라선 작가답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것이 불가능한,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는 비정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 또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작가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숙명을 비장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한지혜라는 작가는 그녀의 첫 단편집 <안녕, 레나>를 통해 접했다. ‘삐삐‘, ‘PC통신‘, ‘2002 월드컵등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사물과 사건들, ‘임대아파트‘, '완행열차‘, ‘목욕탕등 현실의 바닥에 묶인 삶의 고단함에 주목한 인상적인 단편집이었다. 우리가 잊고 지냈거나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 현실의 불안과 부조리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작가적 시선이 돋보였다.

 

 

그러니까 전부 진짜에요. 무엇을 쓰면 거짓말이 되지 않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 안의 진짜가 아니면 쓰지 않았어요.”


  

우연히 접한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다. 문학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이 곳, 우리를 울고 웃게 하고, 희망을 주기도, 절망케 하기도 하는 현실의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언급한 진짜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척 궁금했다. 그 후 그녀의 글을 접한 건 신문의 칼럼을 통해서였다. 삶과 문학을 경계 짓지 않는 그녀의 문학론은 일상의 현실을 파고드는 산문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음을 그때 느꼈다. 그래서 그 칼럼들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 반가웠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159)

 

 

영화 아메리칸 뷰티 (American Beauty)‘를 보면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 날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my life.)“라는 대사가 나온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기억과 삶의 관성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퇴보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 더 가깝지 않을까?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과거의 기억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이자 미래의 삶에 대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개인은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과거의 기억들을 탐구하는 역사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삶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각기 다른 시간과 빛이 누적되어 한 개인의 역사가 입체화된 한 장의 초상화에 가깝다. 사진이 인물의 순간적 속사(速寫)로 한순간의 단면을 담는 것이라면, 초상화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 속에서 일련의 특징, 감정, 생각을 가진 개인의 다양한 모습, 지금까지 한 번도 동시에 드러난 적 없었던 여러 부분을 깊이 있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며 초상화는 그림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대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작가적 시선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삶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시간성의 농축성이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을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사항들의 합성된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결과로서의 형태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것은 좀 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언급하였듯이 삶은 모든 꿈의 성취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원히 이기기만 하는 인간은 없고, 세상 그 어떤 잘난 천재도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실패한 꿈을 대하는 자세, 그 태도가 삶의 색깔을 결정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한지혜 작가의 매력은 읽고 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인을 섣불리 이해하려고 시도하거나, 세상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진실한 체험에 기반을 둔 담담한 위로를 건네는 것 등일 것이다.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한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과 온기를 나누며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진실과 정의, 인간 고유의 본성 속에서 자신만의 진짜를 탐구하며, 타인을 향해 작지만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묵묵히 내딛는 것뿐이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작가가 언급한 아주 사소한 진지함으로 태산 같은 막막함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을 느낀 기분이다.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보다 미더운 위로가 된다. 서가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또 한명의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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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15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빛났던 순간들,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자신의 취향,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독자에게 건넨다. 라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와요. 좋은글 고마워요

잭와일드 2019-11-15 09:3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ㅎㅎ

막강현짱 2019-11-15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에 더한 애정을 갖는 1인이라 글이 눈에 들어왔네요^^

잭와일드 2019-11-16 00:02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생각이시군요^^
 
클래식이 알고 싶다 : 낭만살롱 편 -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클래식이 알고 싶다
안인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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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알고 싶다는 누적 조회수 750만이라는 숫자가 증명하듯이 팟캐스트 음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클래식 콘텐츠이다. 20179월 첫 방송을 시작하여 2019년 현재 2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팟캐스트 방송과 동명의 책 <클래식이 알고싶다>가 출간되었다. ‘고독을 즐기고, ‘자유를 꿈꾸게 하는 책이라는 소프라노 조수미씨의 추천사와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낭만살롱편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낭만주의 시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중세 시대 기사들의 격정적인 사랑의 극단적인 감정들을 묘사한 이야기인 낭만(Roman)이 바로 낭만주의(Romanticism)예요. 열렬히 사랑하는 그 사람과 현실에서는 헤어졌으나, 꿈속에서나마 그리며 만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 19세기를 향유한 낭만주의는 또한 바로 지금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는 한 사랑하며, 그 사랑을 목놓아 부르고 또 그 사랑을 되찾으려는 몸부림. 이 사랑의 열병이 과연 이성과 지성으로 설명이 가능할까요?“ 6

 

저자가 <클래식이 알고 싶다>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는 첫 책의 주제를 낭만주의 시대로 선택한 이유는 현재의 우리네 삶과 가장 비슷한, 그래서 가장 쉽게 공감이 되는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흥과 환상, 자유로운 몽상과 뜨거운 열정들이 결합된, 그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시대와 음악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책의 주제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 작곡가들의 삶과 음악,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을 끌고 나가는 구성이다.

 

책은 방랑하는 봄 총각 슈베르트, 이별을 노래하는 피아노 시인 쇼팽, 사랑을 꿈꾸는 슈퍼스타 리스트, 꿈꾸는 환상 시인 슈만, 눈물의 로망스 건반여제 클라라, 영원한 사랑 가을남자 브람스 등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작곡가들의 음악을 그들의 삶과 연관지어 서술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위대한 예술가로서 남긴 음악 뒤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삶이었다. 소심한 성격으로 항상 사랑을 갈구했던 슈베르트, 선의의 경쟁을 통해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발전한 쇼팽과 리스트,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려 한 슈만과 그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쇼팽과 브람스, 슈만과 브람스가 사랑한 클라라에 이르기까지 낭만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들의 삶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하나의 큰 이야기로 다가왔다.





우리가 낭만주의 음악에 더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위대한 예술가들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 아닐까?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존경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베토벤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 반면, 베토벤의 휴계자라는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하고 탈피하고자 했던 브람스의 음악에서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꿈꿨던 슈만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작곡가와 평론가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고, 예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최고의 연주자를 칭하는 비루투오소 (virtuoso)로 불릴 정도로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리스트는 연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일순간 연주자로서의 생활에서 은퇴한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그들의 의도하고 계획했던바대로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음악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서도 위안을 얻는다.

 

클래식 입문서인 본 도서의 구성상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건 책 속에 작은 코너의 형식으로 아기자기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가 <클래식이 알고 싶다>를 더 알차게 읽는 법으로 책의 앞부분에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본문 속 QR 코드로 독서와 클래식 감상을 동시에 할 수 있고, 꼭 알아야 할 클래식 용어를 래알꼭알, 작곡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 깨알 정보들을 래알깨알의 코너 속 코너로 제공하고 있다. , 클래식 대화가 가능해지는 작곡가별 키워드를 제시하고, 저자 안인모가 특별 엄선한 작곡가별 플레이리스트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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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12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가락이 인상적이에요. ㅋㅋ 저는

잭와일드 2019-11-12 18:10   좋아요 1 | URL
부끄럽네요 ㅎㅎ;

아타락시아 2019-11-12 1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게 알라딘 굿즈이죠? 왠지 좋아 보이네요.

잭와일드 2019-11-12 18:21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받은 굿즈는 아닙니다 ㅎㅎ
 
야구하자, 이상훈 - 18.44미터의 약속
김태훈 지음 / 소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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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은 확실하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야구는 항상 내 삶과 함께였다. 출범 당시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정열을, 온 국민에겐 건전한 여가선용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한국프로야구는 내 삶 속에서 ''이었고, '정열'이었으며, '여가'였다. 어린 시절 야구는 내게 우정의 상징이었고, 학창시절에는 안식처이자 탈출구였다. 사회에 나가면서는 때로는 기쁨이었고, 때로는 위안이었다. 마치 "Always B with you (야구는 늘 여러분과 함께합니다)"라는 현재 한국프로야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내 삶 속에는 언제나 야구가 있었다.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You can't measure heart with a radar gun.)


메이저리그 통산 4,413이닝과 305승을 달성하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톰 글래빈이 남긴 유명한 야구 명언이다. 글래빈은 커리어 기간 동안 다승왕 5, 사이영상 2,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90년대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톰 글래빈의 백넘버 47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300승을 거둔 이 위대한 왼손 투수와 동일한 백넘버를 공유하는 투수가 일본 프로야구에도 있었다. 세이브 라이온즈의 레전드 쿠도 키미야스다. 통산 2241423세이브 평균 자책점 3.44를 기록하고, 11번의 일본시리즈 우승과 2번의 일본시리즈 MVP, 투수 유일의 양대리그 골든 글러브 수상한 이 대투수는 4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하며 야구에 대힌 열정을 불태웠다.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이승엽의 요미우리 시절 동료로 또, 이대호의 소프트뱅크 시절 감독으로 친숙하게 기억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 각각의 리그를 대표하는 이 두명의 선수와 동일한 백넘버를 공유했던 왼손투수가 한국프로야구에도 있었다. 이 세 명의 대투수는 왼손 투수, 47번이라는 백넘버, 자국의 야구리그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공통점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47번을 달았던 야구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던 선수의 이름은 본서 <야구하자, 이상훈>의 주인공이기도 한 LG 트윈스의 레전드, 야생마 이상훈이다. 이상훈은 선수생활 11년 중 6년 남짓의 기간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지만, 선발로서 두번의 다승왕과 한번의 승률왕,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마무리투수로서도 구원왕을 수상하며 보직을 가리지 않고 활약하였다. 야구팬들에게는 90년대 LG 트윈스 신바람 야구의 상징 (그는 LG의 마지막 우승인 94년 우승멤버이다, 벌써 어언 25년전 일이다 ㅜㅜ)으로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로 기억되고 있다.



2004년에 은퇴한 이상훈 선수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계기는 본서 <야구하자, 이상훈> 이전에 2018년 스포츠 투데이를 통해 연재된 <김태훈의 불꽃 ? LG의 야생마 이상훈전()>이었다. 이 칼럼은 스포츠팬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지나간 불꽃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 수많은 불꽃 중에서도 첫 번째 인물로 이상훈 선수가 선택된 이유는 그라운드의 야생마로 불리며 야구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훈 선수 그 자신이 불꽃같은 열정으로 야구와 인생을 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20회로 구성된 칼럼에서 항상 시작을 장식했던 문구가 아직도 기억난다.





불꽃 같은 존재는 어떤 면에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인생을 대신 살아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과 꿈을 짊어지고 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제사장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우리는 꿈을 이루어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끝내 좌절해 함께 슬퍼하기도 한다. 불꽃들 덕분에 인생의 마루와 골을 대신 체험하며 삶의 의미를 알아간다고 할까?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불꽃 인생들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그들의 순간들을 오롯이 '기억'하고 최소한의 '경의'를 표하는 게 아닐까?“ - 김태훈의 불꽃 중에서 -



김태훈 작가는 20회의 칼럼을 마치면서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아직 많으며 혹시 다른 매체를 통해 소개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 더 보강하겠다고 밝혔었다. 작가의 말처럼 20회 분량의 칼럼은 야생마 이상훈과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지만 그를 그리워하고 그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갈급하는 야구팬들에게 좀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야구하자, 이상훈>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예약판매 기간에 몇 권을 구매하여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한 이유는 과거 이상훈 선수와 공유한 추억과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 저자 김태훈의 칼럼 덕분이었다. 저자는 칼럼에서 한 약속대로 <야구하자, 이상훈>을 칼럼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내용을 보강해서 이번 책을 펴냈다.




사실 야구는 가장 대표적인 기록경기로서 야구의 역사는 숫자를 기반으로 한 기록과 분석, 수학과 통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야구의 이러한 특징은 야구팬은 모두 마약중독자다. 그들의 마약은 바로 통계다.”라는 야구명언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야구라는 종목이 숫자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스포츠라면 누가 결과가 뻔한 승부를 흥미를 가지고 볼까?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요기 베라의 전설적인 야구명언은 마치 인생과도 같은 야구의 드라마틱한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야구는 숫자와 우연, 그 두 시소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방랑자 같은 스포츠라는 것과 성적 예측의 불완전성이 야구를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라는 걸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야생마 이상훈이었다.


팬들은 감동을 원하지 기록은 원하지 않는다.” (311


이는 이상훈이 현역시절 자신의 수첩에 써놓은 문구라고 한다. 선발 20, 최다승, 최고 방어율, 최고 승률 같은 타이틀에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무엇 보다 팀이 승리하는 게 중요했고, 그 이전에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감동과 기록이 부딪히는 순간 그는 언제나 감동을 선택했다. 그는 개척자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그는 항상 낮은 자세로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국 현역 프로야구 선수로 일본 무대를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였다. 자유계약 선수 신분도 매니지먼트사가 없을 때 혼자 힘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야구하자. 18.44미터에 공을 던질 수 없는 그 날까지

 

일본과 미국을 거쳐 4년 반만에 한국에 복귀할 때 그가 팬들에게 남긴 진심이 담긴 메시지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잠재울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그라운드에서 야구로 보여주는 것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도,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도 오로지 야구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시절 그는 이러한 다짐을 여러차례 팬들에게 내비쳤고, 은퇴 이후에도 투수판과 홈플레이트의 거리를 의미하는 18.44미터는 그를 상징하는 문구로 그의 사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본서 <야구하자 이상훈>의 부제도 18.44미터의 약속이다.)




 

빨리 옛사랑은 추억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줄거예요. 첫사랑은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할 겁니다. - 다큐멘터리 <야생마의 로망스> -

 





서울은 LG, 승리는 트윈스!” LG 트윈스의 팬들은 옛사랑을 잊지 못한다. LG 트윈스는 팀 창단 첫해였던 1990년의 첫번째 우승과 1994년의 두번째 우승 모두 정규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를 직행하여 내리 4연승으로 시리즈 스코어 4연승으로 스윕 우승을 달성했다. 이 두번의 우승 경험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기에 그 후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승을 못하리라곤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추억은 추억으로서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지만, 새로운 사랑을 꿈꾸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며 위안을 얻는 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야구하자 이상훈>을 읽으며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났고, 새로운 사랑의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지만 진짜 감동은 기록 너머에 있다는 야구 격언처럼 선수와 팬 모두 진정으로 야구를 사랑하고 즐겼던 그 시절의 신바람이 다시 불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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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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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이별을 알리는 아내의 편지를 받은 주인공이 그 이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세상 속의 나,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제목처럼 짧은 편지긴 이별이라는 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인 짧은 편지는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따사롭긴 하지만 흐렸던 어느 아침 그들이 문밖으로 나서려고 할 때 '길을 떠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군요' 하고 이플란트가 말을 꺼냈다. 날씨도 여행하기에 적당한 듯했고, 하늘도 대지 위에 낮게 깔렸었으며, 주위의 사물들도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으니, 가고자 하는 길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될 것처럼 보였다.“ -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의 여행은 아내가 남긴 짧은 편지로부터 촉발된다. 하지만 는 여행하면서 아내의 행적 자체에만 연연하지 않는다. ‘는 낯선 곳의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에 주목하기도 하고, 예전에 잠깐 만났던 클레어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한다. 이렇게 떠나간 아내를 만나기 위한 애초의 여행 목적은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저자가 <안톤 라이저>의 문구를 인용한 것은 여행 목적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주위 풍경들이 짙은 어둠에 잠긴 흐린 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에 적합한 날은 아니다. 하지만 여행의 목적이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거나 누군가를 찾아 정처 없이 헤메이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환경과 조건은 그 목적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 여행은 타인을 향한 것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향한, ’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는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또한,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굴욕감을 느끼고,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가 여행을 하는 동안 읽는 두 권의 자전적 소설,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와 닮아 있다. 일정부분 객관화할수 있는 시공간의 개념들은 주관적 인식 과정을 거치며 개별화된 체험으로 기억된다. ‘는 기억속에 저장된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체험의 원형들을 불러내어 현재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되짚어 보고, 또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 그에 대한 변명들이 적절한 것인지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 후 클레어가 어린 딸 베네딕턴과 함께 하는 여행에 동행하게 되면서 는 조금씩 주위 풍경을,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노란색은 내면의 색이자 희망을 상징하는 색이다. 조지 캐틀린과 프레드릭 레밍턴의 그림에서 흐릿하고 창백한 하늘을 향해 안개 처럼 녹아 드는 노란색은 저 깊은 대지로부터 사람의 얼굴로 스며드는 내면의 색이다. 또한 노란색은 황금의 시절에 대한 추억,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연상시키는 색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흔히 노란색을 마주하고,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노란색을 감지한다. 그것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일수도, 컴컴한 수면 위를 비치는 달빛일수도, 유리잔 테두리에 꽃힌 작은 레몬 조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란색이추억과 희망의 계기는 되지 못하며, 극히 드문 일부분만이 변화의 계기로 작용한다. 마치 소설 속 의 실측백나무와의 교감 체험처럼 세상과의 일체감을 느끼며 가치를 발견하는 경험은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서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의 접근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일상의 노란색은 내면을 비추는 빛으로, 희망으로 떠오른다.

 


 





<녹색의 하인리히>에서 풍요로운 전원속에서 자라온 하인리히의 녹색이 상징하는 것은 나뭇잎 사이로 아침햇살이 내비치는 엷은 녹색 즉, 신비로운 자연의 녹색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성장하면서 자연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깨뜨리지 않고서는 단 한순간도 포개어질 수 없는 바위와 돌맹이처럼 한 그루의 나무가 의미가 담긴 풍경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그것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와 그것을 풍경으로 발현시키기 위한 노력과 인내가 요구된다. ‘녹색을 온전한 의미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연과 교감을 이루는 사건을 필요로하는 것이다. 그 변화의 계기는 우리가 익숙함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쉽게 지나치고 마는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빛깔의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그 희미한 노란색은 우리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금빛 찬란한 별이라는 음식점의 남성용 별실에서 식사했다.”<녹색의 하인리히>의 마지막 대목처럼 빛을 더하며 빛날 것이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절정은 와 유디트가 함께 존 포드 감독을 만나는 대목이다.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은 드디어 기쁨과 슬픔, 사랑과 상처로 점철된 한 때는 '우리'였던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서로를 상대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구속하고 그들의 곁을 맴돌던 과거의 기억에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이별을 위해 길고 먼 여정을 지나왔고, 그 여정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것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여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세상 속의 나, 내 안의 타자와 화해하고, 나를 벗어나 우리를 지향할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통찰은 서로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이별을 반복하며 살아온, 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위안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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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09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색이 내면을 향하는 색으로 묘사되는 군요. 요즘 가을 낙엽도 노란색이 가득한게 내면을 향하는 계절인가봐요. ^^

잭와일드 2019-11-09 18:19   좋아요 1 | URL
요즘 거리를 지나다보면 노란색의 은행잎들이 유독 눈에 띄더라구요. 가을은 내면을 향하는 계절인가봐요^^

1일 1잠 2019-11-09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더 생각도 많아지는걸까요...음...
근데 노란병아리를 보면 뽀송뽀송
해서 그런가...그냥 귀염귀염.. ^^

잭와일드 2019-11-09 23:15   좋아요 0 | URL
가을을 더 오래 즐길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20퍼센트 2019-12-05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노벨상은 토카르추크부터 읽고있는데 태고의시간..좋네요^^ 이작품도 도전해봐야겠습니다

잭와일드 2019-12-05 11:01   좋아요 1 | URL
어쩌면 쉽게 접하지 못했을 두 작가를 노벨상 덕분에 만나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byself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120퍼센트 2019-12-05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감사합니다 ㅋ 저는 블로그에 독후감을써요, ㅎ 독보적때문에 북플을 시작하게되었는데 이곳에도 멋진 이웃님들이 많으시더라고요^^ 반갑습니다

잭와일드 2019-12-05 17:29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멋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