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왜 이런 좋은 책에 마이리뷰가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사서 읽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태도의 문제라고 다시금 생각한다.

살아가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지켜나가는 일이나

소설을 쓰는 일이나 다 그렇게 태도란 건 정말 중요하다.

재밌는 얘기나 신기한 소재 이런 것보다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일즈맨의 죽음 범우희곡선 1
아더 밀러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서 밀러는 정말 대단한 희곡작가라고 혼자 느끼면서 읽었다. 과제 때문에 이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된 건데, 그때보다 내가 더 커서인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더 꼼꼼해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이 이랬구나, 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이전엔 세일즈맨과 샐러리맨이 헷갈렸는데, 이제 알고 보니 주인공 윌리가 세일즈맨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한 단서이다. 그가 아들 비프에게 전하는 삶의 방식은 곧 자신의 세일즈맨이라는 직업 세계에서 지켜야하는 규율이며, 그것을 전부로 여길 수밖에 없는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생 인간을 옭아매는 직업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한계 짓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 희곡의 내용이며 슬픔과 측은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윌리가 비프에게 강요한 삶의 방식은 윌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만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틀렸음을, 이웃과 비교해 느끼게 된다. 또한 윌 리가 어쩔 수 없이 혹은 어쩌다보니 선택한 불륜의 현장을 비프가 목격함으로 해서 부자지간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윌리가 불륜을 한 것이 그의 직업 때문이라 정확히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일견 그런 대사들이 나오곤 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은 끊임없이 모든 인물을 구속하는 단서가 된다.

아서 밀러는, 이 작품에서 역시, 어떤 정보를 전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지점을 택한다.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노출하거나, 정보 노출이 너무 갑작스럽다거나 작위적일 경우, 독자는 흥미를 잃게 된다. 아서 밀러는 하나씩 하나씩 미끼를 던지듯 정보를 주고, 그 정보를 하나하나 맞춰가다보면 어떤 거대한 감정과 맞닥들이게 되는 게 이 희곡의 묘미이다. 이러한 느낌은 ‘시련’에서도 똑같이 맛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련을 읽고 나서도 혼자 밤에 박수를 쳤고, 이 작품을 읽을 때도 우와 라는 탄성을 몇 번이고 내뱉었다.




작가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씀에 있어서 자신은 이 연극에서 비극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대로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범우사판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레이몬드 카버, 라는 이름은 내게는 참 낯익다. 대부분 그런가. 대부분이 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레이몬드 카버가 내게는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접하는 대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책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진짜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 정말 망각은 한 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건 좀 끔찍하다. 책을 읽었는지 말았는지 혼돈되는 순간이 오고, 결국 내 손에 모든 것을 쥘 수 없음을 알아채게 되고 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읽어서 생생한 그대로의 느낌은 아니다. 그 뒤로 몇 권의 책에 손을 대고 있는 통에, 학교 벤치에 누워서 이 책을 보던,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꽤나 날씨가 좋은 오전 시간이었던지라, 살아있다는 생생함을 아주 오랜만에 얻은 순간이었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떠올리게끔 한다. 어느 집이나 냉장고는 돌아가고 있고,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성에를 제거하거나 냉장고가 고장나서 수리할 때 빼고 냉장고는 쉬임없이 활동 중이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처럼. 그런데 냉장고 소리를 매일 매순간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 소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건, 인기척이 없는 밤 시간, 대부분의 소리들이 휴식을 취하는 무렵 뿐이다. 부우웅, 냉장고 소리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그러다가 잠에 빠져들면 그는 다시 자신만의 외로운 발화행위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발화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몹시 쓸쓸한 일이지만 어찌 보면 쓸쓸할 것도 없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어쩌다 아무 의식도 없이 냉장고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의 기분과도 비슷한, 어떤 밀려드는 감정을 갖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의 잘 짜여진 무엇이 결국 그 틈을 드러내는 순간, 딱 한 단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결코 붙잡을 수도 없는, 다시 플레시백해서 볼 수도 없는 그 순간을, 미묘하고 혼돈스러운 그 순간을 묘사한다. 정말 인생은 냉장고보다 더 불쌍한 것도 같다. 냉장고는 잠시 성에라도 제거할 때 쉬지만 우리는 잠시 붙잡아두고 싶은 어느 한 순간도 결코 붙잡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비디오의 장면을 스크랩해서 붙여두고, 다시 보고, 그것을 간직할 수 없다. 잠시도 시간은 또 우리는 우리를 가만두지 못 한다.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실은 그 순간은 잠깐이다. 단지 기억의 괴롭힘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고통 받고 홀로 느끼고 홀로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숨기려하면 충분히 자신만의 고통을 숨길 수 있는 영원한 타자의 세상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떠나지 못한 채로. 내게 어떤 무서운 일, 이상한 일이 닥쳤다 한들 그것이 나 혼자 있는 순간에 일어난다면 그 일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논리란 인생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여러 단편들 중 첫 번째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과 「블랙 버드 파이」는 그런 의미에서 몹시 인상 깊은 작품들이었다. 이외에도 모든 단편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보고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의문의 순간조차 이미 지나버렸다.

결국 좋은 소설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생이 무언지 알려주고 단편이라는 이유로 버스 창밖 풍경처럼 지나가버리는 소설들이다. 이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평생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쉼없이 흘러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젠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만한 어떤 일이 벌어질 때까지 모든 것을 그냥 덮어놓고 지내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어제의 나, 아니 5분 전의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한 채 말하고 행동할 테지만, 정작 나 자신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 中



어쨌거나, 나는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이왕이면 이 말을 당신 수첩에 적어놓는 게 좋을 거예요. 경험을 통해서 그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으니까요.

-「친밀」 中



만약 내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나는 아내가 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내가 떠나버린 것은 잘 된 일이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영원히 끝장이다. 어느 골목 한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이상,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글씨체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물론 그게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편지에 쓰여진 내용이 현실로 나타난 다음이지 않은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편지 자체가 아니라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었다. 아니, 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는 누구의 필체인가 하는 문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훨씬 더’라는 말은 아주 미묘한 일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아내를 잃는 것은 역사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말과 안개처럼,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나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역사가 나를 떠나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나는 ‘역사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혹은 역사는 이제 나 없이 굴러갈 거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아내가 나에게 다른 편지를 보내 오거나, 혹은 일기를 쓰는 친구에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지 않는 한, 이러한 의문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누군가 이 시절을 돌아보며 기록과 자료와 장광설과 침묵과 풍자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이란 가련한 인간의 역사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역사에 작별을 고하고 있는 셈이다. 안녕, 내 사랑.

「블랙 버드 파이」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는 경악의 순간이다. 우리의 삶은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흐르고 있지만 인식은 삶을 따라붙지 못한다. 그래서 인식 속에서 삶은 스타카토 노래처럼, 어느 순간에만 점이 똑똑 찍혀, 그 순간만 빛이 나고, 대부분은 점차로 망각 속으로 뒷걸음질쳐 간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눈을 똑바로 뜨고 돌아보면 그것은 우리의 평소 인식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빚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하며, 어떤 계보가 있지도 않으며, 정말 그림으로 아무리 그려보아도 그릴 수 없는 것,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는 다른 곳에 점을 찍는다. 우리가 보통 애써 논리를 맞추려 한다면, 시는 논리가 맞추어지지 않는 곳에 점을 똑똑 찍어, 생을 노래한다. 그 논리에 맞지 않음을 빛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나를 놀래키는가, 시는 그 놀람의 순간에 쓰여진다.

황지우 선생님 시는 시가 세상에 대한 경악의 발화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이라는 경악,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감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경악, 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이라는 시는 송일환씨의 몇 백 원 짜리로 구성된 하루와 신문에 나온 몇 천만 원 짜리 물질을 대비한다. 어떻게 한 인간은 몇 백 원으로 전전긍긍하는데 또 누구는 몇 천만 원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가. 내가 ‘손 한 번 못 대’도 ‘잘 가’버리는 세월에 대한 탄식(「活路를 찾아서」) 역시 성장이 주는 고통스러운 경악이 아니겠는가. 나의 꿈과도 내 마음과도 의도와도 다른, 삶이라는.

다시 이 시집을 읽으며, 과연 이 시집을 80년대라는 억압의 이미지를 지우고 읽는 게 가능할까라는 물음을 몇 번이고 갖는다. 아직도 삶은 우리를 억압하며 낯설기만 한데도, 나는 그런 물음을 갖은 채 답을 얻지는 못 했다.

시적인 게 뭐냐는 질문에 대한 선적인 것이 아닐까, 라는 황지우 선생님의 다른 시집에 실린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해본다. 시적인 순간, 시적인 지점, 시적인 것.

이미 너무 시와 멀어져버려서(변명일 테지만) 정확히 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저 시적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고 읽는다면 내게는 요새 시보다는 덜 어렴풋하게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고, 그런 말을 할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1
황지우 지음 / 민음사 / 1985년 10월
평점 :
절판


아는 것은 독이다.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한다. 알고 있으므로 어느 한 쪽을 택하지만 맹목이 되지 못하고 믿음이 되지 못한, 적진을 적이라고만은 규정할 수 없는, 모순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적전(敵前)에서 뒤돌아보는 제스처를 취한다. 어물쩡한 자신을 탓하지만 결코 온전한 미음을 바치지는 못한다.(원하는 만큼은)

그는 때때로 가족 때문에(식구를 인질로 인식하는 <잠든 식구들을 보며>) 때때로 본인이 가짜 같음에 놀라고(<박쥐>) 적이 결코 보이지 않음에 경악하며(<닭장>), 생의 물질적 편안함(곧 성인이 되면 취하고 향해야만 하는) 과 현실의 모순, 그 사이를 갈등한다.

이 갈등 자체가 시이다.

황지우 시인이 사랑한 건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이념보다 더 사랑한 건 시라고, 그가 자신을 모두 내맡기는 것이 시이므로.

 

두번째 읽는다.

이전에 했던 표시들을 다시 본다. 시가 좋아서 체크하려고 보니 이미 이전에 체크해놓은 시였다. 취향의 문제일테지만, 별로 변하지는 않았나보다.

그의 시속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든다. 어느날 갑자기, 달빛이 절에서 사라지는 순간처럼, 갑작스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