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밀란 쿤데라 지음 / 청년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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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L'mmortalite


 



보름 전에 읽었는데, 간단하게 내용을 요약할 수가 없다. 책은 이미 도서관에 반납해버려 뒤적여 볼 수도 없게 되었다. 하긴, 책을 봐도 내용을 요약해내긴 힘들 것 같다. 괴테와 베토벤, 괴테 등등의 유명한 이들의 연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를 앞으로의 인류에게 지워지지 않게 하려 하던 한 여인의 이야기, 즉, ‘불멸’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여인의 이야기,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유명인이 되면 그 존재의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인류의 숫자만큼의 추문(?)을 낳는다. 무수한 속설과 구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 마디 반박도 할 수 없다. 그냥 그걸 다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물리적으로 존재는 사라져버렸지만. 그러한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이에 곁들여 자신의 존재와 육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여인과 그 여인과 정반대의 속성을 타고난(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싶어 미친 듯한,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살아있음이 증명된다고 믿는 것 같은) 동생, 그리고 여인의 남편(은 결국 동생의 남편이 된다) 이야기. 인간 존재의 속성과 관계가 얽히면 얼마나 복잡해지는가. 사실 사는 건 이보다 더 복잡할 텐데도 이 소설이 난해하달까 엄청난 사슬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밀란 쿤데라는 대단한 작가다. 현대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절대 현대를 바라보는 시각, 그 표면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성(?)이 우리에게 남기는 흔적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소설을 통해서.(아래 사진에 대해 인용한 문장 같은 경우) 이미지와 존재, 육체와 존재 사이의 선을 타고 넘나든다.

절대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소설.


『농담』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이라는 단편집을 볼 때도 확연히 느꼈지만, 밀란 쿤데라는 하고 싶은 말, 해야할 말, 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 의사는 결코 어떤 한 마디로 요약되는 문구가 아니라는 것(인간은 결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그 누구라도 그는 겹겹이 쌓이고 쌓인 존재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계선을 위태롭게 걷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쿤데라의 날카로움에 계속 계속, 끊임없이 경악하게 된다.


어쩌면, 두 자매(여인과 동생-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인간 안에 숨겨진 두 가지 성향일 수도 있다. 어떤 하나의 관념이 어떻게 인물로 태어나는가를 이 소설은 보여준다. 대체 관념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화할 수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불멸』은 인간의 내면, 감추고 싶은, 본능, 욕망과 그 욕망을 미적으로 (서살 그렇지 않을 지라도 본인에게는 그렇게 비치는) 이미지화하는 것을 메스로 해부하듯 보여준다. 이때 인간은, 추악하다기 보다는, 우스운 존재, 자신의 계산과는 전혀 달리 타인에게 해석되는 존재, 화살을 쐈으나(표적은 어떤 이미지, 화살은 행위), 대부분 표적을 비껴나간 발사를 하는 존재가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쿤데라의 소설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외따로이나 결국, 타인 속에서 파악되는, 몹시 모순적이고 불가해한, 인간만의(?) 방식이다.

 





-나는 그들을 증오할 수 없다. 나를 그들과 결합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았다.

-시의 천분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고독: 시선들의 감미로운 부재(不在).


-유일자의 눈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로 대체된 것이다. 삶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유일의 거대한 난교 파티로 탈바꿈했다.


-카메라가 고뇌에 빠져있는 당신을 촬영할 때 어디에 개인주의가 있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개인이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예요. 완전히 타인의 소유로 전락했다구요.

(중략)

사진 찍는 권리가 다른 모든 권리의 상위에 올랐지요. 요즘엔 그렇게 모든 것이, 정말 완전히 변해 버렸어요.


-서로 다른 두개의 얼굴을 닮은 사진을 나란히 놓으면 물론 당신은 그 두 얼굴의 서로 다른 점들을 모두 파악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 앞에 이백스물세 개나 되는 얼굴이 있으면 문득 당신은 그 얼굴들이 한 얼굴의 무수한 변이체에 불과하며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 모든 일들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확신에 젖어 있었으므로 도무지 그들의 전쟁을 괴로워한다거나 그들의 축제를 함께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우리에겐 가장 큰 미스테리인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이처럼 우리 모두를 알고 있다는 환상으로 속여넘긴다.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힘이 작동되며 힘은 첫 번째 표적에서 멈추지 않는다.


-음악: 영혼을 부풀리는 펌프기구. 이상팽창된 영혼들은 거대한 풍선들로 화하며 공연장 천장 아래로 떠다니며 끔찍한 혼잡 속에 서로 충돌한다.


-비존재의 관능


-인류와의 비연대성: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만이, 즉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만이 이 일탈로부터 그녀를 구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타인들의 운명이 그녀와 무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그 운명에 의존하며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까닭에 말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전생과 그들의 바캉스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느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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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6-02-03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지만 쿤데라는 참 글을 잘써요.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 저는.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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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이 책을 빌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아마 <화장>을 읽고 감동을 받았었고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읽었는지 말았는지 하고 다시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었다.

후배가 좋다고 소개를 해서 다시 읽어보니, 그 후배의 말마따나 좋은 소설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서로 전혀 다른 빛을 뿜어내며 다른 감상을 안겨주는. 그 중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소설은 하나도 없는.

나는 특히 전성태의 <존재의 숲>과 김승희의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을 좋게 읽었다. 전성태는 행간을 아는 작가가 아닐까 싶었고, 이런 소설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은 말이 넘치는 시대, 욕망이 넘치는 시대에 대한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이랄까, 그런 것들이 좋았다. 특히 마지막의 진흙이 허물어지는 느낌, 그렇다고 허무한 게 아니라 아스라이 깨어나는 꿈 같은 느낌이 좋았다.

이 정도만 써야겠다.




-오줌이 빠져나간 방광이 빈 들판처럼 느껴졌다.

김훈, <화장> 중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잘 말할 수 없다.


-사랑을 이룬다는 저 속된 말에 의지해서 인간이 희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보아도 숲에 온 것 같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해 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씨앗 한 개의 해안 표착은 무서운 인연이다.


-철새의 발바닥에 붙은 씨앗 한 개가 대륙을 건너가 새로운 숲을 이루기도 한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그는 절망을 부인하지도 않고 절망을 중언부언하지도 않았다.


-명량바다로 나가는 그의 마음은 칼에 시 한 줄을 새기는 그 단순성이다. 그리고 삶을 수식하지 않는 그 삼엄함이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 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김훈,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일 리가 0.4킬로미터니까 삼십 리는 별거 아니네. 하지만 그러나 그 시에선 가도 가도 온 천지에 비가 온다…… 이렇게 되는 것 아니야? 울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왕십리야.


-우리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흙파이잖아. 물기가 없어 버석버석하긴 하지만 울면 진흙이 흘러버려. 진흙이 마구 흘러내리면 우리는 자신을 잃게 되잖아. 굽자. 굽자. 또 굽자. 흘러내리려는 내 몸을 굽기 위해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거는 거야. 비 내리는 마음의 왕십리에서…… 진흙 파이를 굽기 위해. 구워야만 해. 구워야만 하지. 비 내리는 왕십리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창자 속의 회가 동하는 것처럼 우울이 발광하는 시간.

김승희,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

 

 

-캄캄한 삶을 밟아야겠지요. 그러면 말이 자연히 따르지 않겠소?

-자기 연민은 공연히 억지가 되기 십상이지. 그저 남 이야기나 재미나게 듣는 수밖에. 절실하면 남 얘기가 내 얘기가 되는 것 아니겠소?

-달밤에는 달빛 한 낱 한 낱이 옥수수 밭에 칼처럼 꽂혀서 밤새 나가 주울 것도 같았다.

-전성태, <존재의 숲>

 

-나는 그저 넓은 바깥에 쫓겨나 있을 뿐이다. 이토록 넓은 바깥에.


-삶과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표절하는 것 같다.

정미경,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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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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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를 쓰려고 읽었지만 결국 레포트는 이 책과 전혀 관계없이 쓰고 그냥 혼자 읽었었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놀라고 깨우치고 배우고 다시 생각하고, 그랬었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은 명기된 어떤 것을 넘어서, 다른 것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유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책이다.

두려움을 없애자고도 마음을 자유롭게 하자고도 문체는 태도라고도(각각의 저자들이 쓴 논문의 문체가 모두 달랐다) 생각했었다. 뇌와 마음에 대해 고민해봤고 결국 나는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값진 일이라는 결론을 얻었던가. 어쨌든 사유하는 즐거움을 알려줬었다.







-세계를 창조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지만 세계에 질서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마음이 어느 곳에든 ‘멈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이다.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세요. 숟가락은 없어요. 그러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인간은, “바라지 않기 보다는 無를 바랄 것”이다.


-허무주의는 본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주장이거나 다른 무엇을 향해 가는 준비 기간이다. 희망사항이라면, 부정이 긍정에게 자리를 내주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 위한 열쇠는, 모든 두려움을 놓아 보내는 것이다.


-메리는 난생 처음 장미를 보면서 무언가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계는 마음이라는 한계 안에 있으므로 마음은 세계의 구성 성분이 아니다. 마음은 세계성 The Worldliness of the World의 토대이자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스스로 그 토대에 의거할 수 없고 그 스스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세계에 대해 초월적인 특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사물’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물질적이지 않으면 의식은 사물이 아닌 것이 아닌가? 그저 우리는 무無를 제외하고는 사물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명사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환상 세계보다는 실재 세계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것이 환상 세계가 부도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매일 허구적인 것을 섭취하는 데 질려서 진짜로 생각되는 것, 그리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기분을 선호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의식 역시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사물을 드러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행위하는 것이다.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또한 그는 세계를, 사소한 문제에서 복잡한 사고에 이르는 모든 적대적인 힘들이 새로운 의식과 조직에 이르려고 분투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언제나, 모든 순간 그 장면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는 가상 시뮬레이션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불완전하거나 모순되게 만드는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모든 상징적인 매트릭스의 기능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를 달성하는 방법은 하나로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불완전하고 모순된 현실의 배후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음모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물론 곤란하다. 그러나 그것을 현대적인 대중 히스테리 현상으로 환원해서도 안된다.


-문제는 UFO 연구가들과 음모이론가들이 사회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집증적인 태도로 퇴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 현상 자체가 편집증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현실은 인류가 저항하게 마련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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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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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千五年 초가을에 받은 시집을 이제야 읽는다. 방은 따뜻하고 그래서 졸리운건가. 아니면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인가, 라디오에서는 낯익은, 낮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시집을 받은 날에는 장석남 선생님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읽고 있었다. 인사동이었고 막 해가 질 무렵, 이었다. 그때 나는 좀 천천히 걸었고, 좀 천천히, 살려 했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내게 천천히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듣는 말은 다를 테지만, 나는 이 시집 속에서 속됨과 속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어쩌면 그 속됨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을 듣는다. 일부러 젠 체 하며 사는 삶은 또 얼마나 가식적인지. ‘연애’라는 말처럼 가볍지만, 그 말 속의 가벼움을 쉬이 받아들이지는 않는, 그저 그 속의 설레임만을 받아들이는, 속됨, 같은 것을 나는 이 시집 속에서 봤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랑’은 흔한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이라서, 그 속은 조금 더 깊고, 그것은 속삭이듯 쌓이지만 결국 오랜 것을 찢고 만다. 그것은 ‘아무 데에나 있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절벽 위 ‘폭포’처럼 아찔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흉내내지 않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소란스러움을 소란스러움으로 둔 채로도, 소소한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싶어 나는 이 시집을 필사할지도 모르겠다.


시집 뒤에 실린 김연수의 평은 몹시 즐거웠다. 이 김연수가 소설가 김연수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즐거운 평이었다.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폭설

-山居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大寂의 이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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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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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도 메모를 해두지 않았더니 뭔가 쓰려니 참으로 막막하다. 처음에는 너무 특별한 척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건 쉽게 말하자면 ‘좋은 건 다 이놈의 집안에 있네’ 이런 식의 생각이다) 약간 거리감이 있었으나 읽을수록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건 참 재밌구나, 다시 생각했다.

클라라, 블랑카, 알바로 이어지는 한 가문의 여자들과 그녀들의 남성들, 에스테반 트루에바, 페드로 테르세로, 미겔 등등. 캐릭터만으로도 시대상을 훑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칠레의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이 이 인물들만으로도 그려지는 것이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당대의 보수주의의 최고 권력자에 해당하며 페드로 테르세로는 소작농의 아들로서 공산주의에 관한 노래를 불러 국민 가수가 되며 그 사상을 전파시키는 데 혁명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미겔은 무력 혁명을 꿈꾸는 진보주의 청년이므로.

그리고 이 소설이 환상적 사실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클라라라는 인물 한 명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을 관통하는 어머니로 등장함으로 해서, 소설의 분위기를 고유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다. 집에는 영혼들이 떠다니고 소설에는 생명력이 넘쳐나도록.

주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무지 집중해서 읽었는데, 뭔가를 쓰려니 어렵다. 좋은 소설이라 그런가. 캐릭터와 내가 이 작품을 왜 썼는가라는 단 한 줄의 이유만으로 내러티브가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라는 선생님의 말이 나지막이 떠오를 뿐이다.





블랑카는 여전히 페드로 테르세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라기 보다는 습관적으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문장, 몹시 좋다.



그리고 고통이 알바의 마음 속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고통에 저항하지 않고 마음을 느긋하게 갖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골고루 미쳐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치광이가 나오기 힘들지.”


-이런 문장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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