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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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가고 있다.

나 역시 지금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은 나를 스쳐 가는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지금 가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도 내가 당신 길을 가줄 수 없고, 당신이 내 길을 가줄 수는 없다.


‘우리’라는 말이 있다.

앞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라는 말은 한없이 공허해진다. 아무래도, 사람은 각자 한 대씩의 자전거만을 인생에 부여받아 그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공동체란 참,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수풀로 덮여 가기 힘든 길이 있는가 하면,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있다. 공동체의 법칙이란 아마 아스팔트 길을 닦는 것과 유사한 의미일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행인』은, ‘나’라는 존재와 ‘우리’라는 존재 사이에 덩어리진 어떤 분위기를 풀어낸다.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는 종종 가족 안에서 ‘우리’가 되고, 친구와 함께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우리’안에서도 늘 ‘나’인 채이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어느 공동체에든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갈등은 어떤 현실적 갈등 양식-언쟁, 몸싸움과 같은-을 갖지 않은 채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갈등이 현실화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이 번거로움 대신 어색함(‘나’가 ‘우리’가 되지 못해 속으로 아우성치는 꼴)을 잠시 참고 견딤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소설  『행인』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인물은 동생인 지로이지만, 지로는 주인공인 동시에 주인공이 아니다. 소설의 대부분이 그가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에 할애되지만, 이 소설이 소설로써 매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지로의 형 이치로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치로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학자 타입의, 자기 중심적 성격이 강한 인물로 지로에 의해 묘사된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보면, 이치로는 ‘나’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라는 공동체에 존재하는 어색함을 풀어내 표면화시키고 이를 분석해 완벽한 이해를 꾀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모순된 이 세계 자체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다. 사건은 특히, 지로와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한 분위기를 형이 풀어내려 함으로써 구체화된다. 어찌보면 소설 속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인 이치로는 세계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폭로하고, 표면화시킴으로써 해결을 꾀하려는 그의 방식은 곧 고독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에서 ‘우리’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치로는 늘 ‘나’인 채로 세계에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조차.

그러나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 이런 이치로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은 결미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이전까지 소설은, 어떤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중심을 둔다. ‘나’가 부딪치는 모든 인물은 그들끼리 형성한 ‘우리’속에서 삐그덕대지만, 결코 그 갈등을 표면화시키지 않는다. (첫 단락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따님’이 갈등을 표면화시킨다는 말은 형님의 해석이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은 미치거나 죽거나 종교를 택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형으로 인해 그 갈등은 집안에서 숨겨지지 않고 폭로당하고 모든 가족 구성원은 이를 못마땅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다. 지로, 부디 내가 믿을 수 있게 해다오.


인간은 당연히 타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 ‘우리’로 존재하는 시간은 섬광처럼 짧고 희미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삶을 위해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이 각자의 포기된 부분을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형은 이 공동체의 비논리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으로 해서 괴리를 겪는다. 이는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의 고백에 대한 친구 H의 감정으로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친구의 이 모순적인 고백을 통해, 문제가 형에서 인간 전체로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생을 살아내야 하는 피로와 생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적인 책무 사이에서, 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쓰기 시작하여,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글을 마치는 나를 묘하게 생각합니다. 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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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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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개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것과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인간적 삶의 묘사 속에서 극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삶의 풍부함과 또 이러한 풍부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소설가와 얘기꾼」(『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中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전투가 동시에 치러졌고, 내 몸뚱이는 넓은 싸움터에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다른 천사, 다른 충동, 다른 자아관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다른 외국 작가들에 비하자면, 폴 오스터는 우리나라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다. ‘열린책들’의 오밀조밀한 폴 오스터 선집은, 어쩌면, 읽고 싶다기보다는 서가에 소장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며 서점에 나란히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대체 폴 오스터가 누구길래 이렇게 많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거야

라고 묻는 사람은 이 책을 집어들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이들에게는, 그의 잘 알려진 소설책 한 권이, 폴 오스터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잘 읽히느냐에 답해줄 것이다. 문장 속에 스며있는 폴 오스터라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닮은 분위기는 그의 소설 속에서 더욱 잘 발산된다. 그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이 단정은 그러나, 내가 그의 소설책을 두, 세 권 읽었다는 가정을 뒷받침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은, 그의 희뿌연한 분위기의 소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에세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삶, 고독을 곁에 두고, 그 고독과 함께 의사소통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따르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때 ‘고독’은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폴 오스터의 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서 한국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까지 번역될 수 있었던 건 왜일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밥을 먹고 똥을 싸고 한 군데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으로써의 삶에 대해 폴 오스터는 말한다. -제목이 『빵굽는 타자기』가 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원제는 ‘Hand To Mouth’이다.

다시 말해, 성공이라는 것의 좌표는 불확실하지만, 실패에 대한 예감은 늘 뒤켠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그 자리, 우둔한 미련일지도 모를,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겪었던 모험담(?)이 이 책의 주내용이다. 이국 파리의 거리를 방황하고, 선원으로 근무하며, 물질을 축적하는 대신, 소설의 자산이 될지도 모를 인상을 쌓는 삶을 택한 노정이 담담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노정에는 엄청난 위험 부담이 전제된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이 결정되지 않으며, 딱히 정해진 어떤 노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기 자신만의 솔직하고 순수한 검열 이외에 다른 누구도 그에게 잘하고 있다, 혹은,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치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불안과 혼란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실패를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빈정조의 거만한 말투와 지적 과시의 태도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내가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었고, 그런 상을 제정한 진짜 속셈은 나 자신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뚤어진 응모 규정은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타격을 피하고, 돈을 분산 투자하여 위험을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게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나는 벌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은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그가 처음 1부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편집장으로 있던 앙드레 지드는 그의 작품을 다시 되돌려보냈다. 그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소설가가 좋은 작품을 세계에 내보낸다 해도, 그 성공 여부에 대해 당장 내려진 선고가 옳지는 않은 경우도 많다. 어떤 소설가가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경로란 우여곡절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요소(시대적 상황, 출판계의 정황 등등 사회적인 요소와 우연적인 요소 등등)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 소설가의 지독할 정도의 순수함은 당연히 수반되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 다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폴 오스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뉴욕 3부작』 같은 경우를 되돌아보면, 그 소설은 뭐라고 딱히 정의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돈 한 푼 없는 상황으로 자주 치닫게 되면서도, 직업을 갖는 평범한 삶 대신 은밀하게 고수한 무엇(이 역시 나의 언어적, 인식적 한계로는 뭐라고 딱히 해명할 수는 없다)일 것이다. 삶은 선택적 성격(살아간다는 자체가 죽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나 지금 당장 죽을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밖의 현재의 삶의 모든 제반 요소-시간을 돈으로 환원하고, 노동력으로 돈으로 환원하는 모든 행위)는 알고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선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H.L. 흄스에 대한 삽화는 이 책의 성격을 강렬하게 해준다. 단 두 권의 책을 출판한 뒤 세계와 융합하지 못한 소설가의 삶은 폴 오스터의 삶과 어떤 교집합을 갖지만, 전혀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H.L, 흄스의 방식-거리를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돈을 주며 그 돈을 얼른 없애라고 함으로써, 돈의 기호화를 폭로하는-은 폴 오스터가 추구하려는 삶을 극적으로 과장한 것처럼 보인다. H.L,흄스의 목적이 진실로 지구에 뿌리내린 자본주의를 뿌리뽑기 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지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은밀한 퍼포먼스-이 퍼포먼스는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내밀한, 개인적인 종류의 즐거움을 주지만 인류와 소통을 통해 이 즐거움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개인적 작업을 통해 인류와 소통하려 드는 소설의 양식과 비슷하다-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계획을 떠벌였는데,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행위라기보다 일종의 정신적 퍼포먼스였다. H.L. 흄스는 화성의 지령 센터에서 훈련을 받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의식의 얕은 여울에 좌초하여 약탈당하고 불타버린 작가였지만,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기력을 북돋우기 위해 이 광대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돈 덕분에 그는 다시 관객을 얻었다. 사람들이 구경하는 동안은 생기와 의욕이 솟아나, 혼자서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처럼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그는 어릿광대처럼 뽐내며 걸어다니고, 재주를 넘고, 불꽃 사이를 통과하고, 대포에서 튀어나가는 인간 탄환이 되었다. 짐작컨대 그는 그 순간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수필의 본래적 성격대로, 이밖에 여러 가지 일화가 나열된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폴 오스터라는 사람의 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그의 작업은 결코 여유로운 작업이 아닐 테지만.

뒤에 소개된 희곡 같은 경우는 그의 소설 『뉴욕 3부작』 중 하나를 희곡화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DVD의 디렉터스컷과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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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박상우 / 세계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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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는 생이 에고의 치열한 투쟁임을 고백한다. 모든 사랑의 이기적 속성(굳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이외에도 모든 행위가 동반하는 사랑의 감정까지를 포함하여)을 간파하는 이 시의 5, 6연에서 시인은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그 누구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중의적 비유로도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없는 삶, 그리고 그 암묵적인 삶의 한가운데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박상우의 소설 『블랙리포트: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는 ‘내’가 사막(111 통제구역~999통제구역)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횡단하여 사각지대라 불리는 통제 받지 않는 구역에 있는 ‘루시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지독히 단독적이며 내면적이다. 여러 명의 인물이 소설에 등장해 음성을 내뱉지만, 이는 ‘나’의 내면에 남겨진 음성, ‘나’에 의해 편집된 풍경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나’ 이외에 부피감을 갖추고 등장하는 인물은 오로지 나의 여정을 시작하게끔 해준 ‘루시아’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루시아는 나에 의해 설명될 뿐이다. 어느 날 사막을 건너 찾아온 루시아는 내게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나 버린다. (-거짓말이야.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럴 수도 있잖아.‘)‘나’는 그녀에 의해 사막을 인식하게 되고 사막을 통과해 통제당하지 않는, 그러나 일절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각지대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한때 루시아가 혁명을 꿈꾸며 떠났던 곳으로.


앞에서 인용한 황지우의 시와 박상우의 소설은 삶의 풍경을 사막으로 상징한다. 이는 자칫 달라 보일 수도 한다. 황지우의 시는 사막을 개인의 내면 풍경을 상징화하지만, 박상우는 섹스, 폭력, 환각, 종교적 이념 등으로 얼룩진 세계를 각각 특징에 따라 분류해 번호를 매겨 사막 통제구역으로 둔다. ‘나’는 이 황폐화되어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 세계를 사막으로 상징했을까. 단지 세계가 인간성을 상실해 가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나일 수 없게 하는 것과의 선명한 싸움.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며 언제나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내가 원해온 것은 오직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침해하는 외부와의 싸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음 흔들릴 때마다 툭, 툭, 귓전에서 마른 잎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던 시간들……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박상우의 상징은 세계의 황폐함 때문이기 보다는 내면의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막을 횡단하며 벌이는 투쟁은 철저하게 자아와 세계와의 투쟁인 것이다.


-그런 밤이 일생에 몇 번이나 더 되풀이되어져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으로 뒤바뀌어버리던 시절. 터무니없는 기다림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만 내가 내게 돌아와 그 거센 날갯짓을 잠재울 수 있을까. 그게 나와 나 사이에 가로질러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환상의 끝은 언제나 내 등뒤에 있었고, 돌아서서 내다보면 세상은 언제나 불모지대와 같은 황량함으로 턱없이 드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투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분열적 소설 공법을 선택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이 때문에 소설은 구체적인 갈등이 드러나지 않고 ‘시네마 파라다이스, 전광뉴스, 중앙정보통제국 체포지령’ 등등의 단편적인 세계를 드러내주는 삽화적 글들이 삽입된다. 이 글은 영화 광고 문구, 신문 기사를 첨부한 형식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하나의 풍경이며 ‘나’는 다름아닌 이 풍경, 다른 말로 하면 이 세계 전체와 갈등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에고의 사막을 횡단하기 위한 한 편의 서사시인 셈이다.


-죽어도 환절기의 서사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굳게굳게 맹세를 했다.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어, 마침내 내가 있던 자리에 나라는 욕망의 주체 대신,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하나의 기류가 형성될 때까지, 나를 치고, 나를 죽이고, 그리고 염두에 둔 나를 끝없이 없애야 하리라.



그러나 그의 서사시는 무법이 다른 문법의 창조가 되고 마는, 멸하지 않으면 결코 고독의 무게가 늘 인간을 짐지우는 세계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으며 끝이 난다.


-다가오는 것과 멀어져가는 것, 기억에 남는 것과 기억에서 소멸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투과시키는 장치로서의 몸이 우리에게는 필요할 뿐이었다. 첨삭도 불필요하고 수식이나 폄하도 또한 불필요한 것. 모든 것이 투사되고 투과되고,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동시에 투명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상태 - 그런 상태로 가는 길에 바로 우리들의 삶의 노정이란 게 던져져 있는 건 혹시 아닐까?


-내가 선택한 무법이 또 다른 문법의 창조였다는 사실. 삶이 끝나야 법이 풀린다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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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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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성스러운 봄」


인간은 물질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무늬는 물질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다. 육체라는 물질 안에 갇혀서 마음은 끝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물질들의 세계임에 동시에 마음들의 세계인 셈이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물질들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마음들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작품집 속 인물들이 경제 활동의 주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물질의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인간은 자본을 축적하고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랏빛 사진의 추억」의 ‘나’는 엑스레이 촬영 기사로써, 「호텔 유로, 1203」의 ‘나’는 라디오 방송 작가로써,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유선’은 도서관 사서로써, 「성스러운 봄」의 ‘나’는 보험외판원으로써, 「비소 여인」의 ‘나’는 개미퇴치 용역업체의 사장으로써,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의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화 각색 작가로써 소설 속에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각각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밑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의 직업은 그들에게 영혼을 고양시키는-마음의 세계를 동시에 살 수 있는- 밑바탕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부분 ‘영혼의 좌천’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엑스레이 촬영 기사 이전에 사진을 찍던 ‘나’나, 방송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의 주변’이라는 모임에 나가는 ‘나’ 등은 물질의 세계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직업을 택한 셈이다. 이 직업은 ‘영혼의 성숙’을 가져다주던 꿈에 비해 하잘 것 없이 느껴지지만 이들은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이 직업을 삶의 동반으로 삼는다.


쉬운 말로 하자면, 문제는 ‘돈’인 셈이다.

사실 현실에서 가장 문제시되기 쉬운 문제는, 돈이니, 정미경의 소설은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싸움은 돈 때문에 유발되고, 살인 등의 각종 범죄도 돈 때문에 저질러지기 일쑤인 것처럼.

그러나 정미경의 소설을 읽으며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는, 그녀의 문장에서 기인한다. 그녀의 문장은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마음들의 사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양한 그림들.

인간이라는 물질은 결코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을 통해 스스로 타올라 항성이 되어 빛을 내기도 한다. 존재의 환희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엔 보지 못하는 것이 거기 있었다.’

절정의 순간에 있을 때는 결코 자신이 지금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결코 반추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그 절정 속에서는 과거를 회상하지도 미래를 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음악이 그러하듯, 생은 절정 다음 하강을 예비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야 내가 어떤 음악이 들려오는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깨닫는 것이다.

작품집 속 주인공들은 절정에서 미끄러지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자신의 생이 늘 마음의 환희가 들려오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빛을 낼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친 인물들인 것이다. 이 깨달음은 앞에서 말했듯, 꿈만 먹고 살아갈 수 없는 물질적인 세계의 현실을 통해서, 사랑의 상실이라는 마음의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다. 영영 몰랐으면 좋겠는, 이 깨달음이 생을 관통하는 순간, 영혼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추락한다. 추락에 고통이 함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닙니다.’

라고 정미경은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작품집에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혹은 추락한 영혼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고통임을 인식하건 인식하지 않건 간에, 그들은 영혼의 좌천을 경험하고 물질의 세계에 안주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러므로 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

-「성스러운 봄」

열등감은 존재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그런데 고통은 늘 부끄러움을 동반한다니, 영혼의 좌천에 대한 죄값을 부끄러움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존재인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 더욱 쪼그라드는, ‘나’. 삶은 누추하기 이를 데 없고 ‘나’는 수수깡 같아지고 마는 것이다.

「호텔 유로, 1203」의 쪼그라드는 ‘나’는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물질을 탐한다.

'물질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이토록 즉각적이면서도 강렬하다.‘

그녀는 어떤 뜨거움을 원하지만, 이미 그녀의 타락한 영혼에 찾아들지 않는 뜨거움을 그녀는 물질적으로 충족하려 한다.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내 지상의 삶에 새겨진 남루함을 일시에 지워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 거기 살고 있다. 구시대의 인간들이 추상 명사라고 생각하는 것들. 추억이나 행복, 사랑의 슬픔 따위가 형상을 부여받고 색채가 덧입혀져 진열되어 있는 그 아케이드’

그러나 그녀는 이 아케이드에서 산 옷을 입고 나갈 곳도 없다. 단지 마음의 만족을 위해 물질을 탐하는 것이다. 그녀는 상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결코 우리에게 상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환멸을 알고 있는 그녀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이 역시 그녀의 추락을 자꾸만 가속화시키고 환멸을 불러일으킨다.(그녀는 소설 결말부에서 몸을 팔기로 결심한다)

맨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나가는 짓 따위는 영화 속에서 볼 때에나 근사할 뿐, 따라 했다간 찢긴 발바닥과 독한 신열과 상한 기관지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결국 그녀는 물질과 마음의 두 세계이나 한 세계인 이 곳을 살아가기가 벅차, 허덕이고 마는 것이다. 말로도 되지 않는 ‘고통’을 물질로 채워보려 애쓰는 것이다.

‘이토록 눈부신 타인들의 삶 속에서 나도 명성을 획득한 그 무엇인가를 희롱하고 싶어진 것뿐이다.’

는 이유로.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호텔 유로, 1203」의 ‘나’는 ‘항성처럼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추락에 중독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즉물적인 행복감’을 탐할 것이다.

정미경 소설은 이처럼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물질과 마음 사이를 방황한다.

‘환락의 거리에 내걸린, 현란한 불빛 속에 감추어진, 아무 색깔도 들어 있지 않은 멍텅구리 네온 같은 시들.’

이나마 그녀는 쓸 수밖에 없다.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을 말하고 싶으므로.

청각이나 촉각을 이용한 감각적인 문장과 외래어(‘스프링서머 시즌 제품은 겨울 끝머리부터 디스플레이되고 있었다.’)와 동시에 마음의 무늬를 그린 추상어들이 그녀 소설 속에서 혼재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추락의 고통조차 삶이다. 그녀의 소설은 추락하는 뜨거움이 발산하는 빛을 통해 존재의 경이를 드러낸다.  <성스러운 봄>은 이러한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다. 암에 걸린 딸이 죽고 난 뒤 오롯이 남은 경제적 부담을 떠안은 가장인 '나'는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의 고통스러운 생의 그림은 그러나 뜨겁게 아름답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 생, 그럼에도 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음, 그 슬픔을 감당해야함에 대한 그녀의 헌사는 봄에 핀 개나리처럼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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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키요 사르니엔토 1 대산세계문학총서 4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지음, 김현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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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소설하면 나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떠오른다. 얄팍한 지식밖에 갖지 못한 탓에 그렇다.

그래서 중남미 소설하면 환상적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최초의 중남미 소설이라면 멕시코인의 이 작품은 환상적 리얼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이란 자고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이란 그 마음 속을 살펴보고 연구하고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렇지 않고 대충 한 몫 잡아보려 하면 갖은 인생 역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기 자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옴 붙은 앵무새새끼라는 주인공의 별명이다)는 자신의 인생을 자식들에게 펼쳐 보인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한 상황이다

주인공이 태어나면서 어떤 교욱을 받았는가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받은 교육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그 교육의 헛점으로 인해 자신의 그릇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그 그릇된 가치관을 토대로 살아가다보니 갖은 수난을 겪는다는 게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는 성직자가 되려다 그만두고, 의사, 약사의 보조자, 재판관 서기의 보조자, 군인 장교의 보조자, 도적떼의 일원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풍자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의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비꼰다. 자기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다양한 직업 군상을 보여주기 위해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이다.

결국 페리키요는 회개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다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이 쓰여지던 당시 멕시코는 막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상황이었으며 그 이후 왕정, 공화정을 거치는 정치적, 사회적 변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정치적 상황은 다루어지지 않는다.(막강한 검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에 나온 여러 풍자 대상들이 현대에도 여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올바른 교욱을 하지 못하는 선생이 있고 아무 약이나 대충 파는 약사가 있고 제대로 된 치료는 못하고 돈만 밝히는 의사가 있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판사가 있으니 말이다.

 

아직도 우리는여전히  '어느 꾀돌이 망나니가 귀족입네, 능력 있네, 부자네, 쓸모있네 하며 우리를 속이려들면 우리는 속절없이 속아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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