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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무슨 말을 ㅣ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가는 대로 해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대체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 가는 것을 어떻게 봐서, 그것을 따라 가라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은 시스템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시스템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적응 기제를 가진 동물. 현재는 휴대전화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텔레비전이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적응한 동물이 21세기적 인간이다. 처음엔 두 발로 서는 것에 적응하고, 불을 사용하는 법에 적응하였던, 시스템화된 인간들. 물론, 시스템에 적응하며 겪게 되는 불협화음이라는 게 있다. 당장, 어떤 것을 선택할 때마다 겪게 되는 갈등, 이 불협화음이 마음일까.
그렇다면 뇌와 마음,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마음이란, 낭만주의적 환상이 아닐까. 사실, 답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책을 읽다가 지루해져서 그만 읽고 싶어하는 것을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뇌가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알 수가 없다. 인간 관계에 가면 마음의 문제는ㅍ더욱 복잡해진다. 내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생각은 과연, 마음인가, 뇌가 갖게된 다른 시스템을 가진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적응 기제의 발현인가.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질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다. 우리는 사실 이 넓은 우주에서 정말 개미만한 별에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조차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점차 미지의 영역을 밝혀나가는 일, 미지(未知)에서 지(知)로 나아가는 일, 인류의 발전이란 이것이다. 마치 게임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과 시간을 탐사해 나가는 게 인류의 과제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우주의 끝, 시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 등등-게임은 끝이 날까.
SF소설은 미지의 영역을 배경으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아직 시스템화되지 않은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에 대한 반응-이것을 마음이라고 불러도 될까-을 상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터미네이터’ 같은 경우는 과연, 기계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생겨난다면, 이라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결국 사라 코너의 생이 인류의 생존 게임이 된다. 당연히 영화는 숨막힐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평범한 인류-즉, 당신-의 생존이 달려있으므로.
필립 K. 딕의 소설은 어떤 조건을 제시함에 있어서,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에 대한 적응 기제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도 못말리는 M'이나 ‘두 번째 변종’ 같은 단편의 경우, 시스템화된 기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못말린다’는 건, 기계는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를 수도 없다는 뜻이래요.
최후의 적,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패배당하기엔 너무나 우둔하고 무감각한 적. 차라리 짐승이 더 나으리라. 바위처럼 단단하고 아둔하고 아무런 자질도 갖고 있지 않는 적. 무너뜨릴 수 없는 결단력만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을 결단하고, 끈질기게 버틸 것을 결단했다.
그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끼에 뒤덮여,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다리는 M. 비바람을 맞고 부식되어 가다가 마침내는 한 인간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M은 바위이기를 그치고, 잽싸게 활동 상태가 되어, 너비 30센티 길이 60센티의 상자로 변한다. 특대형 크래커 상자 모양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기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인용한 문장은, 이 기계가 생존을 위한 적응을 시작할 경우의 무참한과 공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적응하는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 일에 대한 두려움. 결국, 이것은 기계의 문제만이 아니게 해석된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다면, 이라고 물어볼 수 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밖에 알지 못한다면.
필립 K. 딕은 이외에도 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기억이나, 욕망에 대한 것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등이 아마 이런 것들일 것이다. 가장 그래서 그의 소설은, 공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순수한 고통’ 속에서 헤맸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에 나오는 문장이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결코 쓰여질 수 없는 문장이다. 소설의 전체 내용도 물론 그렇다.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이런 인간은 어떤 욕망을 갖게 되는가. 인간은 한계지워질수록, 더욱 강해진다. 어떤 한계를 인식할 경우 이 한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겨난다. 이 소설의 그녀는 이러한 캐릭터이다. 과연 고통 받는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를 며칠 전에 영화로 봤다. 책은 아직 못 구해서 못 봤다. 나는 이 소설의 원제를 무지하게 좋아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안드로이드가 전기양의 꿈을 꾼다면, 안드로이드가 마음이 있다면, 인간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를 댈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안드로이드인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라는 기억이 제거된. 혹은 신의 장난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므로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적응해온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없다면, 이러한 상상은 공상으로 머무르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포 속에서 사는 나름대로의 경험이었지, 안 그래? 그게 바로 노예로 사는 방법이야.
나는 이 말보다 노예에 대해 더 잘 정의한 말을 알지 못한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이 정도의 투철한 연구는 있어야만, SF소설이 의미있는 게 아닐까. 결국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