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수영 시집 이후 아주 오랜만에 펴든 시집이다. 내게는 요즈음 나온 시집이라는 게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이다. 한동안 시집을 놓고 살았다. 놓고 싶지 않았는데, 요즘 시집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성찬이라는 편견이 책을 선택하는 나의 기준 한 켠에 자리잡았다.


더 깊어지기 위해, 뿌리 곳곳에 햇빛이 흡수되듯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시의 리듬과 고요함, 더불어 알 수 없는 어떤, 이 세계의 음모를 파헤쳐보게 되는 시각이랄까 그런 것들에 광합성하고 싶은데 요즘 시를 읽어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달까. 아주 짧은 소견일 뿐이지만 사실 그랬다. 시는 ‘몇 억년이 지나도 암호로 남아버릴 이 시간’에 대한 유일한 시각(視覺)이다. 언어가 품고 있는 암호의 성질, 언어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리듬, 음악성의 미(美)가 깊이있는 울림으로 공명해야만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자궁’-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열’, ‘죽음’, ‘서러움’, ‘꿈’, ‘외로움’,‘사랑’-부터 ‘바람이 다니는 아주 먼 곳’-‘우주’, ‘이역’, ‘방랑’, 다시 ‘꿈’, ‘사랑’, ‘죽음’-까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훑어간다. 관악기를 불기 위해 숨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음이 되어 나오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의 깊이있는 언어는 세계를 연주한다.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형에 관한 얘기’라는 그의 시집 초반의 선언은 결국 ‘너’와 ‘나’ 모두의 기형적인 내면에 대한 폭로이며 사유가 시작된 그의 내면을 따라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안내문이 된다. 그리고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비정하고 성스러운 이 세계’에 대한 ‘울음’을 ‘간직’한 것이 그의 시라고 말한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문득 이 세계의 기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들려온 방송 목소리의 낯설음과 낯익음 사이, 그 짧은 찰나에 지나쳐간 두 배반되는 느낌,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의 다리를 벌리 폼, 사람들의 각자 다르게 바랜 구두를 바라보며 이 생의 낯설음과 불편함을 깨우치고 마는 것이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바라본 세계는 당혹스럽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그 당혹스러움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동감한다. 거짓을 말하느니 시를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온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일, ‘바람의 피를 마시며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일이 바로 시를 읽는 일이다. 간만에 깨닫는다.

 혼자 있는 날 집에 앉아 중얼중얼 소리내어 읽어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또 하나는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를 권하지 못한 것. 물론 보다 근본적인 회한은 이런 사소한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전생애보다도 우선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이제까지 겹겹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안일에 대한 바람을 후회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내가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단순한 생존 혹은 더욱 편안한 생활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의미는 진실하고 참된 인간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깨우친다. 복잡한 세계에 대해서 더 이상 투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겹겹이 반성한다. 투정과 이기주의, 이유없는 분노, 나태에 대해서.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다. 작가가 아니라 변호사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회를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면 멋진 것이니까. 어떤 장벽 앞에서도 그 장벽을 장벽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의지와 실천 정신을 배우고 싶다. 그가 승소한 다양한 사건들-권양 성고문 사건, 망원동 보상 사건 등-이 당시의 사회적인 벽을 무너뜨리는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그만큼 진실하게 그 사건에 다가서고 기초부터 튼실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안일한 태도는 결코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 그 사건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의식과 맞서야한다는 것. 어떤 자리에 있건, 어떤 직업을 갖건 그와 같은 철두철미한 정신으로 살아야겠다.

또한 끊임없는 겸손의 자세.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위대한 책을 쓴 뒤에도 주변인에게까지도 끝내 자신이 그 책을 썼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깊이를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 어떤 결정 앞에서 흔들릴 때, 안일 혹은 물질이 유혹의 손길을 뻗칠 때는 늘 이 책을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가는 대로 해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대체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 가는 것을 어떻게 봐서, 그것을 따라 가라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은 시스템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시스템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적응 기제를 가진 동물. 현재는 휴대전화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텔레비전이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적응한 동물이 21세기적 인간이다. 처음엔 두 발로 서는 것에 적응하고, 불을 사용하는 법에 적응하였던, 시스템화된 인간들. 물론, 시스템에 적응하며 겪게 되는 불협화음이라는 게 있다. 당장, 어떤 것을 선택할 때마다 겪게 되는 갈등, 이 불협화음이 마음일까.

그렇다면 뇌와 마음,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마음이란, 낭만주의적 환상이 아닐까. 사실, 답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책을 읽다가 지루해져서 그만 읽고 싶어하는 것을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뇌가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알 수가 없다. 인간 관계에 가면 마음의 문제는ㅍ더욱 복잡해진다. 내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생각은 과연, 마음인가, 뇌가 갖게된 다른 시스템을 가진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적응 기제의 발현인가.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질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다. 우리는 사실 이 넓은 우주에서 정말 개미만한 별에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조차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점차 미지의 영역을 밝혀나가는 일, 미지(未知)에서 지(知)로 나아가는 일, 인류의 발전이란 이것이다. 마치 게임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과 시간을 탐사해 나가는 게 인류의 과제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우주의 끝, 시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 등등-게임은 끝이 날까.


SF소설은 미지의 영역을 배경으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아직 시스템화되지 않은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에 대한 반응-이것을 마음이라고 불러도 될까-을 상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터미네이터’ 같은 경우는 과연, 기계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생겨난다면, 이라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결국 사라 코너의 생이 인류의 생존 게임이 된다. 당연히 영화는 숨막힐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평범한 인류-즉, 당신-의 생존이 달려있으므로.


필립 K. 딕의 소설은 어떤 조건을 제시함에 있어서,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에 대한 적응 기제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도 못말리는 M'이나 ‘두 번째 변종’ 같은 단편의 경우, 시스템화된 기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못말린다’는 건, 기계는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를 수도 없다는 뜻이래요.



최후의 적,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패배당하기엔 너무나 우둔하고 무감각한 적. 차라리 짐승이 더 나으리라. 바위처럼 단단하고 아둔하고 아무런 자질도 갖고 있지 않는 적. 무너뜨릴 수 없는 결단력만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을 결단하고, 끈질기게 버틸 것을 결단했다.


그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끼에 뒤덮여,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다리는 M. 비바람을 맞고 부식되어 가다가 마침내는 한 인간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M은 바위이기를 그치고, 잽싸게 활동 상태가 되어, 너비 30센티 길이 60센티의 상자로 변한다. 특대형 크래커 상자 모양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기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인용한 문장은, 이 기계가 생존을 위한 적응을 시작할 경우의 무참한과 공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적응하는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 일에 대한 두려움. 결국, 이것은 기계의 문제만이 아니게 해석된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다면, 이라고 물어볼 수 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밖에 알지 못한다면.


필립 K. 딕은 이외에도 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기억이나, 욕망에 대한 것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등이 아마 이런 것들일 것이다. 가장 그래서 그의 소설은, 공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순수한 고통’ 속에서 헤맸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에 나오는 문장이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결코 쓰여질 수 없는 문장이다. 소설의 전체 내용도 물론 그렇다.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이런 인간은 어떤 욕망을 갖게 되는가. 인간은 한계지워질수록, 더욱 강해진다. 어떤 한계를 인식할 경우 이 한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겨난다. 이 소설의 그녀는 이러한 캐릭터이다. 과연 고통 받는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를 며칠 전에 영화로 봤다. 책은 아직 못 구해서 못 봤다. 나는 이 소설의 원제를 무지하게 좋아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안드로이드가 전기양의 꿈을 꾼다면, 안드로이드가 마음이 있다면, 인간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를 댈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안드로이드인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라는 기억이 제거된. 혹은 신의 장난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므로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적응해온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없다면, 이러한 상상은 공상으로 머무르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포 속에서 사는 나름대로의 경험이었지, 안 그래? 그게 바로 노예로 사는 방법이야.


나는 이 말보다 노예에 대해 더 잘 정의한 말을 알지 못한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이 정도의 투철한 연구는 있어야만, SF소설이 의미있는 게 아닐까. 결국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곱 개의 영등포시장 사람들 이야기

이전에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연극화한 작품을 보고 꽤 감동을 받았었다. 살아간다는 일의 생생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 역시 살아간다는 일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해관계가 뒤얽힌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멋지지도 쿨하지도 감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또 어떤 형용사로도 다 말해지지 않는

인간사를 그려낸다

소설을 보며 감히, 가장 한국적인 문화는 시장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가난해서 삶이 아니라 생활을 사는 듯 하지만

그 속에 가장 익숙한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은 그 익숙한 정서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소설적인 어떤 장치로서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그것

 

나는 꼬맹이의 등에 등껍질처럼 달라붙어 있는 어린이집의 가방을 바라보며, 사랑 뒤에 그저 한 마리 슬픈 동물이 되어 떠도는 저 아이의 엄마, 0번 아줌마를 떠올린다.

-<까라마조프가(家)의 딸들> 中



엄마가 버텨온 세월이 거기, 당신의 무릎 안쪽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가난 앞에 주먹질 한번 할 수 없었던 세월의 막막함이 거기 한줌의 응어리가 되어 박혀 있었다. 스스로 한 마리 우매한 소가 되어 그저 묵묵히 현재만을 일궈야 했던 늙은 어미의 무르팍엔 열매 대신 염증이 맺혔고 어미는 자신이 꽃 피워낸 그 흉한 꽃이 못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른 무릎을 감싸쥐었다.

-<엄마의 무릎>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
 

 

인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종에 대해서, 어쩌다 이 지구에 인류가 뿌리내려 지금까지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나도 인류인데, 왜 이렇게 인류란 말은 멀고 아득할까

박민규의 『핑퐁』은 이런 느낌에 대한 길고 긴 답장 같다


인류는 당신을 깜빡했어요

그렇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그냥 계속 그렇게 살면 되요

이런 건 아니라는 거다.


정말 탁구를 치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써브에 당신이 스매시를 날려주고 그렇게 이어진다면, 아 물론 언젠가는 경기가 끝날 테지만, 그래도 먼 훗날 그때는 참 행복했다고,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란다. 알겠니?

해도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헬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 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가장 늦게 시기를 잡는다면,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맹수처럼 서로 물고 뜯으며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건 엑스파일로 묻어두게 하는 게 세상사다.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게 엑스파일이 된 마당에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다. 어서 누군가에게 프레젠테이션할만한 아이디어를 찾아내야 하고, 어서 누군가에게 책잡히지 않을 만큼 살아내야 한다. 늘 우위에 서기 위해 협박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면 긴장해야 한다. 그게 시스템 탓인지, 인간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헷갈리기만 한다. 어차피, 시스템도 인간이 고안해낸 거지만. 이렇게 된 게 필연인지 우연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거리 어딘가에 처박혀 최소(정말 죽어도 최소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하루 여덟 시간을 노동하고 1/7, 2/7 정도의 휴식 비슷한 것을 취하려 전전긍긍하며 사는 게 아주 당연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도 헷갈린다.

헷갈려도, 아무리 헷갈려도,

공평한 시간은, 그렇다면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알아 보세요,

이런 걸 잘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지, 주변의 눈총이나 사회경제적 구조가 허락하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 속 ‘의견’이라는 말은 눈물겹다. ‘의견’이라는 건 어느 순간부터 필요치 않은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못은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개성이나 의견 같은 것도 알고 보면 남이 만들어낸 걸 따라가는 건데, 그걸 잘 몰랐던 것뿐인 인물이다. 내 ‘의견’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실은 대부분, 하라는 대로 하고, 해온 대로 한다. 주변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그 시스템에 익숙했지만, 못은 세계가 깜빡했기 때문인지 그 시스템을 익히지 못해 왕따를 당한 셈이다. 그러던 못이 탁구를 만나 '의견'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견은 바뀔 수 있지만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에 충격을 느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너무 많다. 뭐든 너무 많다. 그래서 나의 개성이나 나의 취향 같은 건 대단히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 그런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인터넷 속을 떠도는 무수한 정보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기분, 누군가 1분쯤 눈길을 주다가 휙 다른 정보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금방 잊혀지고 마는 그런 게 되어버린 기분. 그런 의미에서, 못과 모아이가 ‘마흔한명’ 속에서, ‘육백삼십칠명’ 속에서, ‘천구백십사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 중 한 명이라는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중학생이라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니라, 현대성의 체감일 것이다. 너무 일찍, 그것을 체감해버린 것이다. 도덕 책에 나오는 ‘자아 존중’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아찔한 막막함을 배워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는 뭔가에 집중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잠깐만 집중해 있다가, 깜빡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곳에 온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낯익음이라든가 친숙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모두 다른 ‘정보’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다가 잠깐 눈을 돌렸는데, 돌아갈 길을 잃은 미아 같은 기분. 현대성이라는 말조차 지루한 게 되어버린 지금, 못과 모아이는 이 현대성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비단 못과 모아이뿐 아니라, 핼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쿨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하다- 대체 'Celebration'을 부르는 ‘Cool And The Gang'처럼 즐거울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인가 고민한다.

현대성에 대한 강박 속에 아이들은 ‘탁구’를 친다. 둥근 공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탁구’는 이들에겐 최초의 정신적 몰입을 선사한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탁구’는 세계의 집약이다. 세끄라탱의 말에 따르자면, 인류는 끊임없는 듀스포인트의 연속인 것이다.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연속. 어머니가 기린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도, 세계가 냉장고에 보드라운 카스테라로 담겨 있다는 환상도 꿈꿀 수 없는, 어떤 향수나 그리움을 가질 기회도 얻지 못한 이들 세대가 꿈꿀 수 있는 건 ‘세계의 집약’ 앞에 서게 되는 일뿐이다.

세계가 탁구로 집약된다는 환상은 아마 이 세계에서 ‘음모론’이라는 단어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라고 말하고 살기엔, 너무 억울해서 대체 그 놈의 저 너머에 도대체 어떤 진실이 사냐고 물으면,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시작이었다고, 그저 핑퐁 핑퐁 탁구를 치는 일이었노라고 그런 대답이 들려오는 세계, 먹이만 주면 째깍째깍 공을 치는 새나 쥐보다는 인간이 우월한 세계, 적어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참 좋겠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구타당하는 것이 체화된 유일한 시스템인, 반사적이고 습관적으로 치수라는 같은 인간을 겁내는 한 존재를 통해 박민규는 ‘말하자면, 다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해보려 애쓰는 것이다. 




혹은, 저 너머에 혼자 사는 진실이 탁구로 집약되지 않는다 해도,

어느날 문득,

지금 이 세계를 유지하시겠습니까 묻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래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한 발작 더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다면 참 좋겠다. 그냥 알고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문득 약속 장소에서 만났더니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민규의 소설은 소설 이 시작되기 전 참 많은 말을 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