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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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추리소설이다. 어렸을 때는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고 그래서 거의 처음 접하는 장르인 것처럼 읽은 추리소설.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여러 번 봤어도 소설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초반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생(?) 후까시를 언제까지 내가 받아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캐릭터를 내가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때 까지, 또한 이 소설의 뒷받침이 되는 1950년대 미국 문화에 익숙해지까지는 좀 읽기 불편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이나 인간을 만나는 과정이나 비슷한 건지 결국 점차로 그 인물에게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필립 말로우의 생 후까시에서 점점 매력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고 인물의 개연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립 탐정인 그가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치 사람과 친해지는 것처럼 소설의 캐릭터를 따라가면 된다. 이 인물이 대체 사건을 어떻게 풀어갈지. 사건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신용하던 한 지인이 살인자로 몰리게 되고, 자살한다. 필립 말로우는 그가 살인을 하지 않았으리라 믿기 때문에, 단순히 이 믿음에 근거해 그 사건을 뒤쫓으려 하고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 한 알코올 중독 소설가를 돌봐달라는 사건이 중첩되며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지금 이렇게 써보니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인물들이 등장하며 사건은 결코 간단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다른 사건들도 한 번 보고 들춰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스타일을 팔아먹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결국 그의 스타일을 다시금 음미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사건 도중에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엿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지도 자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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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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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내게는 사랑도 권력이다'라고 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장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사랑에 숨겨진 권력이라는 속성을 기나길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연애라는 달콤함으로 포장 뒤에는 감정과 성조차 관계의 권력에 힘을 미친다. '두 사람이 연애를 했다'는 말은 낭만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듯이 보이지만 그 낭만과 함께 인간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온갖 악력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야한 영화로만 겉포장된 '경마장 가는 길'은 알고 보면 연애의 권력적 속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영화는 거의 가미된 요소 없이 소설을 압축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진정 성인 영화인 셈이다. 성인이 아니면 결코 연애가 얼마나 추악한 자신의 나락의 보여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남자를 이용한 여자와-어쩌면 그녀의 처음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알 수 없다.-그녀에게 이용당한 남자가 복수(?)하는 방식은 몹시 교묘하교 야비하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결코 인간이 인간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평생 영혼의 음악 따윈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왜 우리는 이기적으로 욕망하고 질리고 서로를 할퀴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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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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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평생을 쫓겨온 사람이 쓴 기나긴 서사시이다. 환상으로 도배된 독백들이 피어나고 스러져간다.

나는 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살았는지가 궁금했다. 단지 문학계에 대한 도전이라기엔 너무나도 길고 집요했던 그의 음모. 그리고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의 거대한 울림의 배후가 궁금했다. 결론은 여전하다. 사랑은 과장법으로 생에 기생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그 법칙을 알고 있었고 그 법칙에 신물나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신물나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로 환원된다. 평생 나는 나를 알 수 있을 뿐이므로.

또한 어디에도 진짜 삶은 없다. 그러면서도 삶은 나의 유일한 증거물이다. 젠장맞을 일임에 분명하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느끼는 그때, 그 사람은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는 내게서 아주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와힐리어까지 배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와힐리어로 말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문맥과 아무런 관계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줄곧 찾고 있다. 동류 의식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나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소속된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는 문자들은 어떤 설명, 어떤 대답이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가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여기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해독되려고 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찌꺼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피노체트, CIA, 기업, 고통에 대한 증오를 경계하렴. 조심해야 해. 그런 증오를 품게 되면 소설을 쓰게 될 위험이 있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인간적일 뿐 아니라 역겨워지기까지 할 거야.”




내 시는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 없이 어떻게 시가 진실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부재不在의 기본인 것이다.




말들은 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은 말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쫓아낸다. 엄숙성과 공허와 가면을 빼앗기면 언어는 건강을 위협받는다. 그들의 싱싱한 두 뺨은 빛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건강한 상태를 겁낸다. 건강한 상태가 그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운명의 입장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이름이…… 가명인 셈이오.




‘그’가 거기 있었다. 어떤 사람, 어떤 정체성, 어떤 생명의 덫, 어떤 부재의 존재, 어떤 불구자, 어떤 기형적 존재, 어떤 절단된 신체가, 요컨대 ‘에밀 아자르’가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엾은 녀석, 인간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그는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해져갔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멋진 모습들로 무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명명할 수 없는 고통, 두려움 자체를 자각하지 못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절박성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름 없는 내 공포에다 합벅적인 대의를 부여해야 한다.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우리의 멋진 모습들이 내 공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내 공포는 명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다.




마침내 내 고통은 타당성을 갖게 되고 나는 이 세상에 편입된다. 우리가 잔인한 체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따금 자신이 부식되어 주변에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가루가 되어 스러져버릴 것 같은 상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침식되고 소모되고 내부에서부터 삭아버려 한 줄기 바람만 불어도 가루가 되어 날아가 없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르웨이의 한림원에서 노벨 평화상을 주기 위해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자 팔다리가 없는 사람, 요컨대 지금의 역사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분열증 환자치고 인간은 혐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례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런 정신분열적 상태가 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잃기 위해 도박을 했던 것 같다. 그로서는 비극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비극은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제한당한다는 이유에서 정직성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스무 살의 그는 내면의 부르짖음에 못 이겨 시를 쓴다. 하지만 마지막 절규는 줄곧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절규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 절규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중대한 과오는 그의 안에 갇혀 있었다.




시인이 되는 것 역시 사람들이 줄곧 시의 맛을 음미하기 때문에 시인으로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증세는 일상성과 익숙함이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이 도대체 나와 닮은 구석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였고 나 자신의 부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글을 쓰는 거지? 어째서 누군가는 부르는 거지?” 하고 실체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없는 질문은 무책임한 심리적 요소로 무장된 흉기를 든 손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요. 잘 숨겨야 할 것이 있다면 허무뿐이에요. 나는 아무도 타락시키고 싶지 않아요. 따라서 그 허무를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동안 문학에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단숨에 현실로 빠져나온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단다.




희화화된 존재들에겐 사랑이 허락되거든. 왜냐하면 그들에겐 과장하는 것이 허용되니까.




안녕, 완치된 아자르. 멋지게 위장하며 사시오. 그것이 인간이 따라야 할 법칙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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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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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좋은 책을 읽다가 덮으면 그 책에서 빛이 뻗어나가는 환상을 보곤 했다.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책에서는 성스러운 황금빛이 발하는 것을 나는 종종 경험하곤 했다. 활자들이 모여 소곤대는 소리가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는 다시 그 경험을 했다. 작고 네모지고 가방 속에 넣어 버리면 금방 감추어지는 한 권의 책, 그 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한 권의 책은 내가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더라도 실감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생생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이라는 개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얼마나 풍자적으로 그려놓았는가.


그것은 종종 당근과 채찍이라는 약간 묘한 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옛날에는 주로 나귀와 노새에게 적용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에게도 사용되었고 또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사 년 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머는 병이 찾아왔던 도시에 갑작스레 팔십삼 퍼센트라는 막대한 숫자의 인간들이 백지 투표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백지 투표를 했는가, 가 주요 질문이 될 것이다. 어떤 음모, 주술의 영향력으로 인한 집단 광기라는 뻔한 대답을 주제 사라마구는 넘어선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그들은 지겨워졌기 때문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 각처의 반응은 음모를 먼저 상상하고 대처한다. ‘모든 일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또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만의 독특한 반응 양식을 주제 사라마구는 압도적인 풍자의 정신으로 그린다.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적을 향한 공격은 수사, 수감, 거짓말 탐지기라는 인간만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는 거대한 장벽을 만든다.



그러나 이 집단과 정치에 대한 풍자는 갑자기 방향을 튼다.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명 사건은 하나이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혼자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사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왜 그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한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마 여자와 여자를 추적하던 경정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해도 사실이 되고 마는 법칙 속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의 음모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버릴 백색 투표 질병의 주범으로 낙인을 찍을 여자를 쫓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정은 여자를 쫓으며 겪던 도덕적인 혼란 속에서 어떤 문구를 기억해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그리고 경정에게 어울릴 경고는 그의 삶에 적중한다.


조심하시오, 당신의 혼란은 도덕적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도덕적 혼란은 불안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그 뒤에는 당신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소.


개인이 집단을 만들고 사회가 이룩되는 순간, 진실, 불안한 진실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진실에는 늘 불안이나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에요, 나는 지금 단순히 삶이 덧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작은 불꽃이라서 언제 꺼질지 몰라요,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나는 이 소설을 미국에 대한 풍자로 읽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듯 사건을 꾸미고 그 사건에 멋대로 대응하는 정치 세력이 가장 융성한 국가. 평화롭게 내버려두어도 될 많은 이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강요하고 마치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양 구는 미국의 방식은 이 소설 속 정치가-총리, 대통령, 내무장관- 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허구를 사실로 강요하는 이들의 방식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날카로운 풍자는 소설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 속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바보같이 세상이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렇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결국 바로 이곳, 지금,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


그 사람들이 찾아내든 못 찾아내든, 그 사람들이 옳다고 판명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옳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왔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란 모두가 똑같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화의 이야기꾼이 자신이 묘사한, 비록 여유작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묘사하고 있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는 아예, 아니 아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큰 벽에는 도시의 커다란 항공사진도 걸려 있으니 꼼꼼한 묘사로 한두 페이지를 채울 풍부한 기회가 있다. (중략)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장의 이마에 깊게 파인 불안한 주름들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이튿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시장과 운전사가 다시 만났을 때, 내일 본다는 것이 그 간단한 말과는 달리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암시를 하고 싶은 거요. 질문은 암시가 아닙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게 암시겠지요.


나는 멀리 갔을 뿐 아니라, 이미 도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누가 이렇게 완전히 죽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기가 사는 세상과 늘 전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요.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이런 말 뒤에 이어진 정적은 시간이라는 것이 시계, 그 생각하지 않는 기계와 느낄 줄 모르는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영혼도 없는 작은 기계가 말하는 시간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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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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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방식이 바로 살아온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기 전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가로 그의 전 존재는 함축되는 것이다.

각 철학자들의 죽음은 그래서 흥미롭다. 자신의 육성으로 삶의 가치와 지혜, 우주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이들의 죽음 속에는 생의 방식이 있다. 니체의 고독한 죽음과 베이컨과 윌리엄 제임스의 죽음에 대한 일화는 그래서 재밌다.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인데, 철학사를 훑기에는 이 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인용한 말은 각 철학자들의 철학의 핵심이라기보다는 내가 공감하거나 필요해 발췌해놓은 것이다.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철학 공부는 겉핥기는 즐겁지만 속으로 들어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머리에 쥐가 난다는 말이 이런 거군 싶다. 안타까운 일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가 바로 시작인 것 같다는 예감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지혜를 애구(愛求)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은 회의를 배울 때―특히 자신의 소중한 신념, 자신의 독단, 자신의 공리를 의심할 줄 알 때―시작된다.


모든 정치 형태는 기본 원칙의 과잉으로 멸망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민주정치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멸망한다. (중략) 민주정치의 결말은 참주정치(僭主政治) 또는 전제정치이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심리학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더 훌륭해지기까지는 어떠한 변화에 의해서도 본질적 변화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분명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잠들거나 병, 또는 정신착란에 걸려서 지력이 속박당해 있을 때, 참된, 또는 영감적인 직관에 도달한다. 예언자 또는 천재는 광인과 같다.


초등교육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


수학은 철학의 불가결한 서곡이고 최고의 형식이다.


정의는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일을 하는 것


사회에 있어서의 정의는 많은 유성이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면서 결합을 유지하는 조화로운 관계와 같다.


새로운 옷을 입더라도 진리는 항상 동일하다.

-플라톤


우리도 모두 인간의 가능성의 한갓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민감한 자는 주인이 되기도 어렵고 노예가 되기도 어려운 법이다.


“우리 인생의 극장에서는 신들과 천사들만이 관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사상은 대상의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사진이다.


어쩌면 철학의 대재건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조물주는 우리들에게 세계 전체와 맞먹을 만큼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을 주었다.


“중상을 입고 더운 피를 흘리면서도 상처를 입는 순간에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죽기를 바란다.”


그는 생명을 단념하지 않고 쾌활하게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썼다.


그는 유언장에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오만한 말을 남겨놓았다. “나는 나의 영혼을 신에게 유증한다. …… 내 몸은 아무도 모르게 묻을 것. 나의 이름은 후세와 외국에 전할 것.”


-베이컨


“때로는 나의 자연적 오성으로 거둬들인 수확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알게 되지만 나는 이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모으는 동안 나는 행복하며 탄식과 비애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참으로 선하고 또 그 선함을 전달할 수 있고 정신으로 하여금 그밖의 모든 것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지고의 행복을 누리는 능력의 발견 또는 획득이 가능한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중략)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은 고통이 생길 여지가 없는 쾌락에 의해 정신을 키워준다. 최대의 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많이 알면 알수록 자기 자신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더 잘 이해하고, 정신이 자기 자신의 세력 또는 힘을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더 잘 인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규칙을 만들어낼 것이다.”


사고는 욕망의 열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욕망은 사고의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최고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힘의 평등은 불안정 상태에 있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따라서 “불평등 속에서 평등을 구하는 자는 부조리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최초의 인간은 지혜를 완전히 알지 못했고 최후의 인간도 지혜를 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지혜에 담긴 사상은 바다보다 깊고 그 충고는 심연보다 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뾰족탑 끝에서 떨어지며 공중으로 떨어지는 것이 상쾌해서 ‘제발 이 상태가 계속됐으면’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다.”


“우리들은 둘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충심으로부터 확인한다.”(한 젊은이가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했을 때” 볼테르가 보낸 편지 내용 중)


천국이 파괴될 때, 비로소 지구는 정덩한 권리를 가질 것이다.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른다.


“확실성을 말하는 자는 허풍선이다.”


회의는 매우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한편 확실성은 가소로운 상태이다.


“최초의 성직자는 최초의 바보를 만난 최초의 사기꾼이었다.”


“신이 ‘무엇’이고 ‘왜’ 신이 현존하는 만물을 창조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너무 주제넘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나에게는 매우 주제넘은 일로 생각된다.”


-볼테르


철학에 있어서도 정치학처럼 두 점 사이의 최장 거리는 직선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절로 질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사고 자체가 정제 작용이기 때문에 질서를 갖게 된다.


물질이나 외계가 존재한다는 것 외외에는 우리는 물질이나 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도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에 알맞은 자가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가슴은 머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나름의 이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비사교성, 이 지지 않으려고 하는 질투심과 허영심, 이 소유와 권력에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자연에 감사하라……인간은 협조를 원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류에게 보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인간이 힘을 새롭게 발휘하고, 자연적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불화를 원한다.”


-칸트



“우리는 어떤 것을 욕구할 이유를 찾아냈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이유를 찾아낸다.”


기억은 ‘의지’의 하인이다.


“한번도 인생과 사물을 망상 또는 환상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철학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연의 참된 상징은 원(圓)이다. 원은 회귀의 도식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생의 기초적 자극이고 현실이며 쾌락은 고통의 소극적 유예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곤궁과 고뇌가 잠시 인간을 쉬게 하면 곧 ‘권태’가 다가와서 어쩔 수 없이 오락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또다시 고통이 생기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악 중의 어떤 것―예컨대 투쟁―은 삶의 본질적인 것이다.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유기체가 고등해지면 그럴수록 수난도 더 커지므로 인생은 악이다. 지식의 증대는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인식이 명석하고 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고통도 증대되는데, 인간에게서 최고도에 이르며, 인간의 경우 인식이 분명할수록, 곧 인간이 지성적일수록 고통도 크다. 천재는 가장 고뇌하는 법이다.”


인생은 전쟁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자연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투쟁, 경쟁, 갈등, 그리고 승리와 패배의 자멸적 교체를 본다. 모든 종은 ‘다른 종의 물질, 공간, 시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살려는 의지는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잡아먹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다. (중략) 인류도 가장 무서울 만큼 분명하게 이러한 갈등, 곧 의지의 자기 분열을 드러내며 우리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이리’임을 알게 된다.”



인생의 전경(全景)은 거의 생각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럽다. 인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에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목표 달성 이외에도 전과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 이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 때문에 모여 있는 고슴도치와 같아서 너무 가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비참해진다. 모든 일이 매우 이상하기만 하다.


“낙천주의는 인간의 표현할 길 없는 고뇌에 대한 통렬한 조소이다.”


“우리들의 노력, 분투, 투쟁의 보람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좋은 일은 덧없으며 세계는 결국 파산하며 인생은 손해 보는 장사이다.”


행복하려면 청년처럼 무지해야 한다.


경험이 정연한 지혜가 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에 두뇌와 육신은 시들기 시작한다.


죽음이 잠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양이가 가엾은 쥐를 놀리는 것과 같다.


“광기는 괴로워하는 본선, 곧 의지의 마지막 치료법이었다.”


마지막 피난처는 자살이다. (중략) 디오게네스는 호흡을 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살려는 의지에 대한 승리가 아닌가! (중략) 의지는 종을 통해 지속된다. 삶은 자살을 비웃고 죽음을 미소로 맞이한다. 자발적 죽음이 있을 때마다 무수한 비자발적 탄생이 있기 때문이다.


의지가 인식과 지성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한, 인생의 재난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은 의지를 정화한다.


천재는 의지 없는 인식의 최고 형태이다. 생명의 최하 형태는 전적으로 의식 없는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천재는 바로 가장 완전한 객관성, 다시 말하면 곧 정신의 객관적 경향이다. (중략) 순수한 인식주관으로서 세계를 밝은 눈으로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잠시 완전히 포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과학의 대상은 많은 특수를 포함한 보편이고 예술의 대상은 보편을 포함한 특수이다.


음악은 영원히 움직이고 노력하고 방황하는 의지, 마침내는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돌되돌아가는 의지를 보여준다.


언제 우리는 ‘의지’의 눈 앞에 도전장을 내던지고 감미로운 인생은 거짓말이며 최대의 은총은 죽음뿐이라고 말할 용기를 갖게 될 것인가?


염세주의자가 되려면 한가해야 한다. 활동적인 생활은 거의 언제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세계는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호레이스 월폴


30세가 넘으면 염세주의자가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


만년에 미쳤을 때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바그너의 초상을 알아보며 그는 ‘나는 이사람을 무척 사랑했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덕’의 배후에는 권력에의 은밀한 의지가 있다.


이성과 도덕은 이 열정의 손아귀에 든 무기이고 이 열정의 괴리이다.


“지옥은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천국이었다.”


“인간은 보다 착해져야 하는 동시에 보다 악해져야 한다.”


인류는 개선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개미가 살고 있는 광대한 언덕뿐이다.


“자기 시대의 도덕 체계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투쟁에는 반드시 복수가 뒤따를 것이다. ……안팎으로부터”-엘리스


“왜 인간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지를 아마도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인간만이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리스베트, 왜 울어? 우린 행복하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언젠가 그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창백한 얼굴이 밝아졌다. “아! 나도 몇 권의 좋은 책을 썼어.”라고 그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니체



우리는 공간적 개념으로 사고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유물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짙다.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창조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견해, 곧 기계론과 목적론을 극복해야 한다. 두 견해는 인간이 하는 일을 고찰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도달한 관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노력하는 것, 위로 위로 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것, ‘언제나 끊임없이 생산하는 우주적 충동’이다. 생명은 관성과 반대되고 우연과 반대되는 것이다. 생명이 스스로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저지하려는 물질이라는 저류, 다시 말하면 휴식과 휴지와 죽음을 지향하는 사물의 정체와 이완에 있어서, 생명은 각 단계에서 매체의 관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본능이나 기관이나 마찬가지이다. 본능은 정신의 도구인 것이다.


본능은 안정의 매체이고 지성은 모험적인 자유의 기관이다. 본능은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생명이다.


-베르그송


“예술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다. 심상은 상상력의 유일한 재산이다. 예술은 대상을 분류하지 않고 대상을 현실적 또는 상상적인 것으로 판별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예술은 대상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카


예술의 기적은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사상의 잉태에 있다.


-크로체


“태어났다는 것은 불사에 대한 흉조이다.”


“신화비평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노해서 신화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소지으며 시로 보는 것이다.”


조용히 공물을 받아들이는 한 명의 해적 두목(국가)이 경고나 제한없이 돈을 빼앗는 수백 명의 해적들보다 낫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생산하고 우리가 만들 물건에 압도당하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물건이 인간을 말[馬]로 삼아 타고 다닌다.”


“민중이라는 익명의 전제자보다 더 미운 전제자는 없다. 민중은 어디에나 파고들어 무슨 일이든 방해한다. 민중은 편재해 있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싹터오르는 새로움과 천재의 어린 가지를 모두 꺾어 버린다.”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훌륭한 철학에 따라 살아갈 용기만이 필요하다.


-산티아나



우주는 밀폐된 조화의 체계가 아니라 엇갈리는 흐름과 상반되는 목적의 싸움터이다.



온 인류의 눈물로도 영원한 계획서의 단 한 마디나마 씻어내지 못한다. 완성된 universe에서는 개성은 망상이다.(중략) 그러나 미완성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역할 중 몇 줄은 스스로 쓸 수 있고 우리들의 선택은 어느 정도 우리가 살게 될 미래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나 자신은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현존하는 경험의 최고의 형태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우리들과 우주 전체의 관계는 귀여운 개나 고양이와 인간 생활 전체의 관계와 같다고 믿는다. (중략) 우리들도 사물의 보다 포괄적인 생명에 대한 접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 종이에는 그의 마지막, 어쩌면 가장 특징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결론은 없다. 우리가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끌어냈는가? 말해둘 만한 예언도 없고 남길 만한 충고도 없다. 안녕.”


-윌리엄 제임스



“철학은 내세에 대한 꿈에 취해 버렸다.”


“환경에 대한 완전한 적응은 죽음을 의미한다.”

-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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