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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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는 늘 잠복해 있으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차로 그 문제들을 끌어내며 그 횟수가 많아지게 될 때, 그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당신의 문제를 떠올려 보자. 나의 문제? 그 문제가 무엇이건 원인을 소급해가다보면-이것은 오래된, 인간의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원인을 소급해가기, 대체 무엇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서인가 완전히 후벼파기 위해서인가?-결국 그 원인에 이르러,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개체 이전 상태에서 개체로 나를 이끈 어떤 힘에 대해, 그 힘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오랜 우울증을 정신분석으로 치료하려 들며 라깡과 관계 맺고 정신분석에 대해 글을 쓴 인물이다. 이 책에도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에 대해 사실 이름만 알 뿐 제대로 된 저서는 거의 읽지 않는 나는 이번에도 알튀세르가 자신의 아내를 교살한 뒤 면소 판결을 받고 죽은 자가 되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쓴 자서전을 읽었다. 철학서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글. 그의 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는 글을 읽은 셈이다. 늘 개론서만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인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글은 그의 우울증에 대해 정신분석을 받으며 스스로 정리하고 머리 속에서 굳어진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이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이 어떻게 스스로 안에서 통합되었는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문제 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알튀세르는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다. 결벽증에 걸린 어머니와 냉혹한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나 한 명의 철학자가 되기 까지, 끝내 자신이 교살하고 만 자신의 아내 엘렌느와의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주관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결국 나마저 스스로를 정신분석적으로 해부하려 든다. 어릴 때부터 나의 삶에 잠복해있던 환상, 나의 부모님과 나의 관계 등등이 어떻게 내게 영향 미쳤는가를 해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지금은 다시 내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는데, 이 책을 읽는 도중에는 흥미진진하게 살아나곤 한다,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듯이.

더불어 이 세계의 불완전함, 불완전한 두 인간이 만나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며-이 갈등은 그들의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 자식을 낳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완전히 노출시킨 채-여기서 공포가 생겨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에게 그 불완전함이 유전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이것은 또한 전혀 상반되는 태도를 길러내 그를 더욱 혼란에 빠져들게 한다- 그 갈등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여러 유명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견해이다. 그러나 사실 일천한 지식밖에 갖지 못한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의 말 안에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뭔가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그의 말을 좀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공부하자는 결론뿐.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애정도 알아볼 수 있다-이 역시 앞에서 지적한 한계 내에서이다-.







그 대신 “나는 용감하게 말할 것이다. 자, 여기 내가 행한 것, 내가 생각한 것, 그리고 지나온 나의 모습이 있노라”라고 한 그의 선언(루소의 『고백』의 서두)에 내가 솔직하게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이해했거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 더 이상 완전히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 버린 것”이 여기 있노라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는 뭔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를 떨게 만들며 내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운명을 영원히 결정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환각이 아니라 내 삶의 현실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환각은 삶이 된다.







지금 나는 지출과 위험이 없는, 즉 돌발사건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돌발사건과 지출(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지출: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은 삶 전체의 일부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그 궁극적 진리에서, 그리고 하이데거가 너무나 잘 표현했듯이 삶이라는 그 ‘사건’(Ereignis)에서, 즉 삶의 출현과 그 귀결에 있어서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내가 깨닫게 된 것 같다.







도대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나 과도한 나르시시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조금도 모자람이나 미련 없이 완벽하게 뭔가를 줄 수 있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는 행위 자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받아들여지고’, 전달 통로를 제대로 찾아냄으로써 그 대가로 가슴속 깊이 희구하던 상대방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말해 사랑받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환의 자유로운 ‘주체’와 ‘객체’가 되기 위해서는 뭐랄까 그 교환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준 것과 똑같은 선물, 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그 대가로(계산적인 유용성의 원리와는 정반대인 대가) 받고 싶을 경우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리고 명백히 자기 존재의 자유에 한계가 주어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는 것, 즉 ‘거세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기 존재의 총력을(스피노자를 생각하자) 단 한 부분도 잃지 않고, 또 착각이나 허공 속에서 자기 존재를 보상받을 필요도 없이, 그 총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그리고 우선 자아에 대한 통제, 다시 말하자면 ‘전체’로 파악되는 대상과 자신이 갖는 관계에 대한 통제, 이것이 바로 철학인데, 철학이란 “철학자 자신이 자아와 맺는 관계”(마르크스)일 뿐이며, 따라서 철학자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런데 ‘전체’는, 총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고, 즉 ‘전체’의 모든 요소와 모든 접합들을 반영하는 사고의 엄격함과 명확성 속에서만 진정으로 사고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한 그 유명한 말, “이제까지는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라는 말을 반박하면서 이미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 세계를 변형시키기 위해서건 그것을 역행시키기 위해서건, 아니면 위험하다고 판단된 변화의 위협으로부터 현존하는 형태로 이 세계를 보존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해서건 간에 세계사의 흐름에 개입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대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철학자가 어떤 주관적 책임을 느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짓누르는 듯한 책임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모두 실험적이라고 간주하는) 과학처럼 검증할 만한 어떤 장치나 실험방법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명제들을 결코 직접 검증해 볼 수도 없이 오직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명제들의 효과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언제나 그것들의 효과를 예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그 명제들을 임의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그 경향에 대해 그가 포착하거나 포착했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또 그 분야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체계의 명제들에 그것들을 대립시키면서 제기한다. 그러나 항상 뭔가를 예견해야 하고 또 언제나 자시느이 역사적 주관성을 직접 느끼기 때문에, 그는 ‘전체’에 대한 자신의 이해(理解)(각자에게 자신의 전체가 있는 것인가?)에 직면해서는 무척 외로우며, 또 사실 뭔가를 바꾸고자 하기 때문에 타인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새로운 명제를 제기하려고 나서게 될 때에는 더더욱 외로운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욕망, 극단적으로 말해 마침내 나 자신의 욕망을 갖고 싶다는 욕망(욕망을 갖고 싶은 것 역시 하나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직 형식적인 욕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적인 욕망이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체적 욕망이 없는 이런 형태를 하나의 진짜 욕망으로 간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비극이었는데 그 비극에서 나는 이렇게 승리자가, 하지만 사고 속에서, 순수한 사고 속에서만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순수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포착된 나의 욕망, 마침내 욕망의 부정이라는 형태에까지 이른 나의 욕망을 실현한 것이다.







의식적이건 혹은 무의식적인 모든 철학자들의 내적 동기들이 어떠하건 간에 글로 표현된 그의 철학은 하나의 객관적 현실이며, 이 세계에 대해 그것이 어떤 효과를 미쳤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것은 객관적 효과이며, 극단적으로 볼 때 그 효과란 다행스럽게도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내면세계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이란, 각자 자기 자신의 유아론(唯我論) 속에 갇혀 있는 세상의 모든 주체들의 순수한 내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철학자임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합시키기 위한 철학적 작업의 결과인 뜻밖의 철학적 발견들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계급에는 이 통합을 담당하는 직업 철학자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범주들이 과학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과학도, 수학 자체도 지배 이데올로기 밖에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합된 이데올로기로 성립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투쟁 밖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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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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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6년을 이 소설을 읽으며 보냈다. 그때 이 소설은 문학동네에 연재 중이었고 띄엄띄엄 계절별로 나오는 이 소설의 문장에 밑줄을 긋기도 했다. 소설에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등장하는 까닭에 전체를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우연이나 존재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의미있게 느껴졌으므로, 도서관에 가 연재분을 읽고 나면 다음 문학동네 계간지가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제목이 바뀐 채 한 권의 책으로 나온 소설을 다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산다. 지금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그것이 누군가 다른 이의 꿈이 전도된 것일지라도 어쨌든 삶의 틀 안에서 후회로, 추억으로 언젠가는 회고될 삶을 살고 있다- 문학은 그 삶에 대해 나직하게 들려주고자 한다. 존재의 경이에 대해 또한 존재의 외로움에 대해.

이 소설 역시 존재의 경이와 외로움을 좇아간다. 한 사람의 삶의 둘레를 뒤따르다 마주치게 되는 많은 인물들이 소설 안에 등장한다. ‘나’,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애인인 정민, 그녀의 삼촌, 독일에서 만난 외국인들(헬무트 베르크, 그녀의 아내 안나, 이길용이자 강시우의 삶을 산 사내, 그의 애인이었던 상희와 현재의 애인 레이, 또 그들의 가족들) 등, 거기에 더해 많은 철학자들(소설의 끝에 등장하는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여인과 벤야민과 친했던 극작가 브레히트)과 문학가들까지 많은 이름들이 소설 안에서 마주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지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이보다 더 스펙타클하지는 않다 하더라도(‘나’는 1991년의 숱한 죽음들이 삶의 거리를 가로막던 그 시대를 횡단하는 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타인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식하고 그러다가는 방북예비대표로 독일로 가게 된다)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게 된다. 잠시 내가 만났던 사람들, 또한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아득해지게 되는 것처럼. 삶의 이 무수한 만남들과 헤어짐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냐고 묻는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또한 기억 속에서는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만남은 영영 우리의 삶에 지문을 남기지 않겠느냐고 한다. 별들이 서로 지나가며 자장에 따라 영향을 주고 받듯이, 거대한 바다가 달과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조수의 흐름을 따르며 지구라는 별에 묶여 순리의 움직임을 다하듯 우리 역시 서로의 자장을 빛내며 흐르고 파도치며 빛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그 순간이 어떤 화인처럼 한 사람의 생을 묶어버리기도 하고 또 그곳에서 풀려나려 몇 번이고 다른 생을 살려 하며 겹쳐진 생의 물줄기가 몸 속을 흘러도 어쨌거나 자기 자신으로 삶을 지속하며 오직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그것이 기적이라고 이 소설은 들려준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주에서 정민과 나란히 누워 바라본 밤하늘처럼 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해 여름 헬무트 베르크에게 들은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며 번을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주는 건 우리가 따르고 싶어하는 논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이야기로서 엮어내는 삶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횡단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실은 그 사건들 각각에 무수히 다른 성격의 내가 있고 단지 돌이켜보며 그 안에서 그때와는 다른, 지금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다 하여도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고스란히 아픔, 슬픔, 외로움, 사랑을 모두 한 몸으로 겪어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 사람이 대단하기도 하다. 그 많은 사건을 온몸으로 치받아 내었다니.


언젠가 친구와 주고받았던 얘기인데, 지나가면 모든 순간은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고, 아주 누추하고 초라했던 순간들조차도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어느 학교 계단에 앉아 얘기했었다. 또 이 순간도 그리워지고 말 게 아니냐고. 허나 잡을 수 없는 세월에 대해 불평해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자꾸만 어딘가로 가고 있다. 한시도 운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없는 물체인 우리는, 세포들의 결합체인 우리는, 그 그리움의 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지독하게 고독한 한 개인이지만 그렇게 빛을 발하며 묶여 있었다고 생각하면 사는 일이 좀 더 아름다워진다. 소설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 있다.

한 편의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소설이 좀더 많은 이들에게 날개짓을 하게 된다면 아마 서로 폭력적으로 상처 주고 한 개인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개인들이 정치적이건 그렇지 않건 서로 자장을 주고 받는 세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이 종래에는 우리의 선조가 만난 것 때문이라는 것은 좀 실망스럽지만, 또 그 꼬리를 물고 물다 보면 이 지구가 이런 모양이 된 결정적인 이유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으며 이 우연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세상에 대해 조금은 안도하게 되기도 하므로. 정말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토록 홀로인 우리가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서 모든 만남과 우연이 실은 어떤 운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덜 외로워지기도 한다. 또한 아주 차분하게 이 운명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따라갈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도 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꾸며낸 우리들의 논리적이고자 하는 본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우리의 연약한 이 본성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약간 템포가 빠르고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갑작스레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버겁다. 작가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알겠으나 그것이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벤야민이나 브레히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만다. 장사를 하려고 물건들을 벌였다가 누군가의 호각 소리를 듣고 갑작스레 정리를 해버린 느낌이랄까,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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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 세계문학 12
J.D.샐린저 지음, 윤용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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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왜 코울필드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는지 공감을 했는지 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만다. 그래서 기록이란 걸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나도 이렇게 기록을 해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나는 이전에 종종 서울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며 노란 선을 따라 끝에서 끝까지 걷곤 했는데, 아마 그런 내 기분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때는 뭐 이 세상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려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뭔가, 그런 비슷한 류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세상에 정말 최악으로 나쁜 놈 같은 건 없는데도, 정말 저능아에 최악인 인간은 없지만 세상은 정말 최악이기 때문이다. 이번 삼성 사건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이 세상은 완전히 썩었다. 모두 영혼을 돈에 팔아 넘겼다. 모두 다 그래 버려서 이제는 사실 영혼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게 속 편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들 다들 좀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어딘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고, 그래서 그들을 욕하다가도 끝내는 쓸쓸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한없이 회전목마를 타는 동생을 보며 폭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이런 문장이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온다는  것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마. 그러면 모든 것이 그리워질 테니까.’ 하지만 이 번역본에는 그렇게 해석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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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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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철학자들 때문이었다. 학문의 암흑기라 불리는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하나 같이 신을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눈 가리고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아 하도 답답해, 대체 이 철학으로 만든 최상급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여 옛 기억에 의지해 빼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나의 미욱함을 느끼고 반성을 할 밖에. 대가가 쓴 추리소설이며 역사소설인 이 이야기 안에 사상은 또 얼마나 매끄럽게 녹아들어있는지…….

중세라는 천년 왕국 동안 이단을 매달아 화형대를 드높이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며 에코는 이야기 구조 속에 자신 나름의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곁들이고 있다. 기독교적인 것만을 탐하던 유럽의 중세가 내게는 동굴(태양)로 들어가려는 집단 아우성처럼 들렸다. 도착점은 하나인데 출발점이 전부 다르다보니 이 길로 가야 동굴이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저 길로 가야 동굴이 나온다는 사람도 있는 꼴이랄까. 그런데 실상 동굴은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이므로, 서로의 길이 잘못됐다고 싸울 수밖에.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한다.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때문에 강은 더 이상 제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즉, 강의 고유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 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主流)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 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 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를 태우는 불길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정체 모를 황홀, 여자와 함께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육체적인 결합에의 욕망, 약간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저 더할 나위 없는 부끄러움, 그리고 영원의 삶이라는 명분 아래 성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갔던 저 파멸에의 욕망 사이에 닮은 데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의미가 무궁한 사상(事象)을 단순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알 것도 같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巡行)의 표징이 된다.




사랑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 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정결함을 얻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성급함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善)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혜의 폭포를 영감에게 허락하시고도 한 가지를 더 허락하셨어. 그게 뭔고 하니, 세상에 대한 영감의 그 거지 같은 상상력이야. 이 세상의 그 잘난 체하는 진리의 해석자란, 오래 전에 배운 말이나 깍깍거리는 얼빠진 까마귀와 다를 바 없어!“


문득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이 성인은,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천사였다. 소년으로 변장한 천사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내려 성인을 곯려 주느라고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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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너무 오래 이 소설을 잡고 있었다. 놓지도 못하고 깊이 빠져들지도 못한 채로. 빠져들기엔 험버트 험버트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어지러웠고 놓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벨벳 코트를 입고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초연하고, 우아하고, 날씬한 사십 세의 병약자가, 자신의 사춘기 육체를 세포마다 땀구멍마다 알고 숭배했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그리고 조금은 지루하고,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사실―을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상스레 안경 쓴, 지친 잿빛 눈에서 우리들의 서툰 로맨스는 잠깐 떠올랐고 생각되었고, 그러고는 재미없는 파티처럼 치워졌다.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비 오는 날의 소풍처럼, 지루한 운동처럼, 어린 시절 주무르던 한 조각의 마른 진흙덩어리처럼.




추문의 뒷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한 사십 대 남자의 처연한 고백 앞에서 나는 잠시간 그를 동정하였다. 어린 소녀의 강간자인 한 남자를 동정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위대한 면이 있는 것일 게다. 소설이란 도덕을 뛰어넘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므로. 그러나, 사실 험버트 험버트(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는 것 같다)의 장광설, 풍광 묘사, 심리 묘사에 모두 감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의 이기적 속성을 반성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자신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모두 잃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과를 표하며. 그러나 그렇다하여도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의 극단적인 속성-결국 자신과 타인 모두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는-으로 사람은 상처입는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같은데,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가? 헌데 왜 그 방향은 종종 제멋대로인가?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퀼티는 사랑했었다. 대체 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으나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에 실패하고 결국 도취된 사냥꾼으로 머무르고 마는가? 아니,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모두 ‘도취된 사냥꾼’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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