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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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고서 늘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잊지 말지어다. -부처 
(책 중 인용)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인간의 질감이란 것이 세계와 어떻게 접촉하는가를 보여준다.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교차하고 대립하는가, 그럼으로써 한 인간의 내면의 순간이 표정에서 재현되었다 사라져 버리고 그럼에도 그의 영혼의 어떤 겹은 고유한 초월의 속성 속으로 깃들게 된다는 것을 그의 사진은 시사한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은 이런 지점에 있어서 일종의 시사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 후반부에는 그의 데생과 그림이 몇 작품 소개되지만 나는 그의 그림에 깊은 호감을 느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란 존재는 인간이란 존재의 질감,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존재의 성질―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모든 생명체의 속성일 테지만 그것이 가장 잘 구현되는 경우는 인간이지 않을까―,을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을 둘러싼 삼차원의 영역 어딘가에서 종종 푹푹 빠져 허우적대며 어딘가를 움푹 패이게 하고 휘게 하는 곡선을 그리며 차원을 넘나드는 그 인간의 비밀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존재의 질감에 대한 통찰이 화가를 화가이게 하고 사진을 좋은 사진이게 한다. 존재의 이런 위태로운 성질이 이차원의 평면에서 구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서 인간이 그려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물 속에서의 성교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 사진은 인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려내는 완만한 곡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가를 잘 드러내는 사진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진에서조차 직선의 세계 속 인간의 곡선은 두드러진다. 그 곡선의 자그마한 세계는 직선의 세계를 균열시키고 인간 세계의 어떤 비합리성을 폭로한다. 이 비합리성은 우연이 결코 아니며 논리도 아닌 영역, 앞에서 장 클레로가 표현에 따르면 ‘카이로스’라 할 수 있는 그 영역을 재현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그저 절묘한 짜맞춤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이 느낌을 좀 더 속되게 표현한다면―이 표현은 당연히 나의 느낌을 비껴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이 세계에 인간보다 더 거대한 어떤 존재가 개입해있는 듯한 그런 순간적인 의심과도 닮아있다. 이 느낌은 경외라기보다는 아이러니에 가깝고 어떤 유희와도 닮아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말은 늘 모자라게 된다. 우리는 이런 느낌에 대해 명시적으로 혹은 설명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해지는 순간 방금과 같이 타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의 순간이 종종 스쳐지나감을 목격한 뒤 우리는 뒤돌아보며 이 순간에 대해 이리저리 이미 비물질이 되어버린 기억 속을 되돌이켜보는데 물론 그에 대한 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이런 절대성에 대한 느낌의 포착이다. 그의 사진을 대면하는 순간, 주변이 중심 속으로 빠져들며 일으키는 모순과 대립, 합치의 순간적 반짝임이 견고한 한 장의 사진과 바라보는 자 사이에서 무수히 점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인간을 대할 때 그렇듯.

 

 

 

 

 

 

 

 


 

카르티에­브레송에게, 역사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것이었고 또 전쟁을 겪은 체험이 그가 어떻게 역사를 폭로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대단히 폭넓은 설명이 된다. 벌어졌던 그대로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초조감이, 역사가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던 때에 그가 있었던 그곳으로 향하도록 그를 자극했다. 이는 바로 그가 매일 저녁, 그가 낮에 찍었던 이미지들에 긴 설명문을 붙이도록 했던 바로 그 역사이다. 이런 설명문은 단순히 그의 직업의 일부는 아니다. 그것들은 그의 작업이 무시했던 차원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다시 찾는 시간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런 설명에 사진 그 자체에 못지 않는 열정을 쏟았다고 회상한다. 이 열정 ―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소통하려는 열정 ― 은 저널리스트에게 딸린 업부와 관례적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확연히 독립된 예술가에게 예비되었던 열정이다.


거리에서의 도전의 경우는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삶을 재창조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는 공방의 미술이자, 스튜디오와 살롱의 미술이었다. 바로 그것을 거리로 옮겨놓았고, 뒤이어 세계 전체 속으로 옮겨놓았던 이가 바로 카르티에-브레송이다. 순수하게 스타일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결코 파리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30년대 초의 마술을 전광석화처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파리와 프랑스와 유럽을 떠나 있었다. 세계를 눈앞에 두고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열정적 욕망이야말로 애당초 그의 사진 활동의 추진력이었다. 역사에 대한 도전은 한순간 그에게 새로운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구상하고 능숙하게 다룬 수법은 이 청춘의 모험기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피터 갤러시, 「그간의 모든 것」 中



세계의 특별한 모습을, 어떤 얼굴 표정과 어떤 풍경의 전개를 포착하기 위해서, 조준경을 통해서 겨누고 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구성되는 그토록 단순해 보이는 몸짓, 그토록 쉽고 거의 기계적으로 보이는 이 몸짓은 사실상 고대의 세계의 것들이었던 하나의 철학, 하나의 도덕, 하나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 그 몸짓은 그 속에 고대 철학의 가장 알차고, 풍부하며, 눈부신 개념들 가운데 하나를 숨긴다. 그 몸짓은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리스의 비극도, 플라톤도, 파르테논 신전도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런 지적 양상들을 최살려낸다.


그의 작은 라이카 사진기로 무장한 이 사진가는, 문명의 여명기에 종종 유일한 감수성과 대수와 미학에 대한 어떤 희귀한 개념들에 이끌려, 오늘날 우리 지식의 바로 그 기초들을 쌓았던, 작은 칠판과 필기구로서만 무장한 사상가가 다시 살아난 듯하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렇게 썼다.


“한 장의 사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의 의미작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설명하는, 시각적으로 통찰된 형태의 엄격한 조직이, 동시 발생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일종의 운행 규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 결정적 순간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제때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와 동시대인들, 즉 우리들이 분명히 합의한 도덕적 사회적 운행 규칙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는 마치 연주에 앞서 조율되는 악기처럼, 누구보다도 시간에 맞춘다는 일이다. 결국 그것은, 사물의 아름다움과, 크기(또는 균형)를 그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것들을 포착하는 “카이로스”와 결합시키는 심미적 규칙이다. 그것은 플루타르코스가 「모랄리아」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반복한다. 즉,


“모든 작품에서,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란 비례와 조화의 체계를 통해서 하나의 유일한 카이로스에 이르는 일군의 숫자들이 빚어내느 것과 같다.”


사진가의 순간적 시각에서, “카이로스”는 지속 속에서 때맞춰 도달하듯이 공간 속에서 목표를 이루는 사건으로, 그 정확하고 전격적인 순간 속에서 펼쳐진다. 거기에서 세계라는 화면은 즉각적으로 닫혀지기 직전에, 살짝 열리고, 찢기고, 틈을 벌리는 듯하다. 상당히 종교적 의미를 끌어들이자면, 이는 “순조로운” 순간, 다시 말해서 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그 “프로-피티우스”라는 단어의 조합 속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것을 예견하는 그 어떤 약동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바로 그곳에 도달하는 몸짓이다. 즉 날개가 달린 몸짓이다. 호메로스는 그의 시에서, 어떤 언어가 정확할 경우, 즉 말이 잘 들어맞고 급소를 겨냥하고 있을 때, 종종 화살처럼 “깃이 달린 말”이라든가 “날개 달린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진가는, 그가 새를 새장에서 빠져나와 날아가게 할 때, 이와 같은 도약에 참여하고 또 예견한다. 깜작거리는 그의 눈길은 호메로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향해서 곧장 날아간다. 그것들은 가볍고 재빠르며 창공을 날아오르고 민첩하다. 민첩하다는 것은 “짓궂다”는 말이다. 이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어릿광대 같고, 장난꾸러기 같은, 20세기의 소년 기자 같은 면모이고, 때때로 완벽한 신사의 거동을 취하면서도 상당히 오락가락하는 유령의 면모이다. 그가 무엄한 것에 대한 취미와 또 우연한 만남과 경이로운 것에 대한 취미를 즐기는 초현실주의자들을 좋아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을 기웃거릴 수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좋아하는 것에서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진다. 왜냐하면 “카이로스”는 “로고스”와 맞서기 때문이다. 카이로스가 고귀한 지속을 깨뜨릴 때에, 그것은 그만큼 “투케”와 대립한다. “투케”는 우연이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우연의 정반대이다. 그것은 옳은 결정이고, 당연히 그래야 할, 그렇게 알맞은 바로 거기에서 내려지는 결정이다. “카이로스”는 필요성의 편이지, 우연의 편이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미의 반열에, “칼로스”의 좌화의 “극치”의 반열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고대인들 사이에서, 부분들 사이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키며 또 전체와 부분과의 조화를 가리킨다. “카이로스”, 이 결정적 지점은, 하나의 균형점이다. 그것은 현살들의 질서를 흔들어놓게 되는 우연의 간섭과는 무관하다.


카르티에-브레송과 그의 초현실주의 친구들 사이를 가르는 선이 시작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 사진가의 데뷔 시절은, 종종 초현실주의의 그늘 속에 또 이른바 “대물 렌즈”의 우연한 마술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친구이자,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 속에서 성장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종종 “투케”, 즉 우연을 그의 임상 진단술의 기본 수단으로 삼는다. 그는 그것을 “사실계와의 만남”으로 보았다. 이는 향락우너칙에 따른 기호들의 끝없는 반복과 회귀를 가키린다. 그러나 이것은 앙드레 브르통에 따르면, 마술과는 거의 무관할 것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내가 보기에 그가 사건을 예견할 정도로 사건의 주인인 만큼, 결코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맡겨둔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현상 ― 태양, 그림자, 섬광, 잎새와 군중의 움직임 ―을 다스린 예술가이다. “카이로스”는 지배권이다.


사진가는 이렇게, 외양의 지속적 움직임 속에, 또 끊임없이 늘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연속되는 산더미 같은 사건들 속에서 곀코 ‘방심’한다든가 ‘무사태평’에 빠지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는 보초와 같은 상태로 서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무관하다 또는 “나와는 상관 없다”라는 뜻으로 그 의미를 즐겨 비아냥거리는 이 “무사태평”이라는 용어는 현대어로 이렇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동시대인들의 막연한 무심함을 의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가는 거의 모든 순간에 세계에 몰두하며, 결코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이 멈추게 된다면, 세계가 무너져버릴 지도 모른다며 기도문 통이 절대 멈추지 않고 돌아가도록 감시하는, 오리엔트 지방의 독실한 신자들과 비슷하다. 사진가는 세계의 모습을 감시하는 사람이고, 또 사진기 속의 두루마리 음화통은 바로 그의 기도문 통이다. 그는 이렇게 외양의 심리요법사이다. 그는 그것들을 보살피고 구원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눈앞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건들이 물리계의 질서 속에서 일정한 조화에 따라 우리 눈앞에 배치됨과 동시에 그 사건들이 논리적 세계의 질서 속에서 의미를 취하는 그런 순간을 포착할 줄 알기 때문이다. “로고스”와 “코스모스”가 서로 교차될 때, 세계의 질서가 어떤 의미작용을 흘리게 되는 그 순간, 또 어떤 계기가 우러나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것, 그것이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짧고 강렬한 순간인데, 그곳에서는 세계가 다시금 역류와 혼돈에 빠지기에 앞서, 그 정지상태에 있으며,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기에 앞서 균형을 이루고, 또 그곳에서는 한 무더기 형태 속에서 하나의 형식이 표출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가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세계를 지키는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재고 평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무릎을 살짝 굽혀 원근을 수정하고, 고개를 불과 몇 밀리미터 돌려서 선들의 조화로운 일치를 끌어낸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직 사진기의 속도에 따라서만 되는 일이고, 또 우리는 ‘예술’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사냥꾼 또는 의사, 웅변가, 도공도 “테크네”라고 하는, 다시 말해서 실용적 기술 같은 것으로서의 그들의 예수렝,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과학의 추상적 규칙들 ― 예컨대 과학적 원근법의 규칙들이라든가 또는 아카데미풍의 채색법 ― 등을 응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진가들 또한 사진기를 다루면서, 현실을 겨누고 또 촬영 순간을 결정하면서, 사진의 어떤 과학을 사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산만하게 우리의 눈을 끄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세심하게 주목하기까지, 흐름에 몸을 맡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현실의 혼동 속에서, 보편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무능을 폭로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인간과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은, 또 예컨대 그 어떤 인간의 일도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모든 예술이나 그밖의 분야에서도, 어떤 경우와 어떤 시간에 대해서나 유효한 절대성을 적절히 배려하지 않는다.”


외양의 이러한 줄기찬 이탈 앞에서, 또 어떤 “예술”의 준거에 요구되는 것과 관련된 이러한 불가능성 속에서, 절대가 아니라 상대의 인간이자 실체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의 인간으로서, 사진가가 일종의 전과학적 지식, 이른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반사적 속도로 움직이는” 잠재의식적 인식에 의지하며, 또 사실계의 소용돌이에 그토록 휩쓸려, 마치 격랑 위의 작은 쪽배 같은 것에 실린 것 또한 아득한 옛날의 “카이로스”의 것이다.


이 수은의 작용에 의한 지성의 형식, 또는 해석학적으로 말해서, 사실상 궁수의 기술에 속하며, 목표를 향해서 팽팽히 긴장된, 전력을 다해서 주저없이 당기는 자의 기술에 속하는 이러한 형식은 사물의 불안정하게 떠도는 동태에 꾸준히 유연하게 적응해야 하고 또 문한히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분석했던 침입 효과, 로고스의 규칙을 깨게 하는 카이로스의 감수성의 분발은, 또한 카르티에-브레송, 즉 상거래의 신이었도 또한 도둑의 신이기도 했던 이 가벼운 발걸음의 헤르메스가, 그토록 정확하게 “경범죄”라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온종일 긴장한 채, 길에서 현행범과도 같은 사진을 즉석에 붙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위법적이며 외양의 도둑인 사진가는 또한 판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식의 보편적 규칙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하나의 사실에 부딪치기 때문이고 또 어떤 보편적 지식이라는 것은 사실과 외견상 접촉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진가라는 탁월한 사실의 인간은, 여전기 기자보다 더 훌륭하게, 무한하게 미묘한 이러한 지식 ― 융거는 “까다로운 사냥”이라고 말했다 ― 에 기대기 때문이다. 즉 곤충학자들뿐만 아니라, 사냥과 전투와 항해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합리적 지식이나 박학학 로고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이 적정 순간의 본능적 인식 말이다. 도공, 항해사, 마부와 마찬가지로, 사진가도 특이한 직감과 교활한 지성에 따르는 일이 있다 ―고고학자 장 피에르 베르낭이, 상당한 근거로서, 논리학과 아카데미 예술로 환원시킬 수 없는, 세계의 다형적이고 오직 움직이는 사실에 응용될 수 있을 뿐인, “카이로스”와 닮은 것이라고 한 “메티스” 말이다.


사진가의 눈은, 의사나 사냥꾼의 눈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세계의 무한히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위험이나 행운의 특이한 변화를 파악한다. 그는 법칙에 바하는 특수성의 인간이고 또 바로 그것을 통해서 보편성에 승리르 거둔다. 그는 현실의 중복된 요인들 속에서 적정 순간 ―카이로스 ―을 인지하며,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는 의미를 배출한다. 카이로스는 예견과 정확성의 기술이자, 진단과 치료의 기술이다. 사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떨쳐버리게 한다 ―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에게 현실을 감내하게 하고 또 심지어 그 무게를 사랑하게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 속에서 두 가지 지속이 부딪치는 지점을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지점에서 과거의 성숙과 다가올 위기의 출현이 교차된다. 그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가장 위대한 솜씨로 또는 가장 올바르게, 판결하는 사람이다. 시간을 둘로 가르는 셔터 위의 그의 손가락은, 저울대 꼭지점의 엄정함을 지닌다.


진주 목걸이에서 빛의 낱알들의 무게를 재는 베르메르의 “저울질하는 여인”처럼 세계를 저울질하면서, 사진기라는 저울로 무장한 이 판사는 또한 이 경우, 사실상 국가 원수의 시해와 같이, 다가올 것을 순식간에 예견하고 알아맞히는 점쟁이이기도 하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말한다. “사진 언어라는 사고의 지름길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판단하는 지름길의 위대한 힘이 있고, 또 이는 엄청난 책임을 의미한다”라고.


인간의 동질적 시간이 아니다. 거기에는 높낮이가 있다. 그것은 지체되기도 하고 가속이 붙기도 한다. 그것은 성숙의 시간인가 하면 해체의 시간이다. 때때로 드물기는 하지만, 부동성의 시간 또는 재앙의 시간이 있다. 시간은 살아 움직인다. 이는 반복되는 시간과 또 동일한 대상들만을 찍어내는 기계의 시간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은 기다리고, 기대하고, 찾는다. 이는 단순한 제품이 아닌 작품의 시간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시간의 내밀한 지식에 속하는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그 괴기스런 모조품의 편이라기보다는 흐뭇한 기억인 므네모시네 편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로스”는 예견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며, 또 에상할 수 있는 것을 본다. 의사도, 사람들이 “만성적”이라고 하듯이, 어떤 환자를 보기에 앞서 시간과 관련된 일이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반복되지는 않는다. 사진가, 예술가는 그 점을 입증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기억력이 붙어 있는 한, 결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솜씨는 제도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만성적 세계에 속한다. 즉 그는 시간의 주인이다. 바로 여기에서 카르티에-브레송 특유의, 시간성을 공간성으로 되돌려놓는 대기 현상에 대한 감수성이 비롯된다. 즉 이는 어떤 순간의 “카이로스”이고, 그가 한낮의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취한 시간의 “카이로스”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의 가장 아름다운 몇몇 사진들은 인도에서 한낮에 구름들이 떠오른 것들이고, 플랑드르에서는 초저녁 어스름이다. 나는 그가 보나르를 굉장히 좋아했으리라는 점을 이해한다.


발끝으로 가볍게 바람처럼 걸어서 사진을 찍는 그와, 손바닥에 가려진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진기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가 저 유명한 리시포스의 “카이로스”의 입상을 닮았다고 해서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포시이디포스가 지었던 경구 속에 묘사되고 있고, 또 “카이로스”와 행인 한 사람 사이에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되찾게 되는 그런 “카이로스” 말이다.


“당신 대체 누구요? ―세계의 주인인 카이로스올시다. ― 왜 발끝으로 걷는 거요? ― 쉬지 않고 달리려구요. ― 뒤발꿈치에 돋친 작은 날개는 뭐요? ― 바람처럼 날려구요. ― 왜 오른손에 면도날을 쥐고 있는 거요? 어떤 칼날보다 더 예리하고 재빠른 게 바로 나, 카이로스라는 것을 보여주려구요.”


장 클레로, 「“카이로스”: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에서 적정 순간의 개념」 中

-배울 점이 많아 아주 길지만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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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 모방론
요한 요아힘 빈켈만 지음, 민주식 옮김 / 이론과실천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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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는 그리스․로마 미술에 대한 모방을 통해 완전한 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조이다. 이때 완전한 미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통일성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예술 작품-특히 조각-이 자연을 모방함에 있어서 흩어져 있는 자연의 대상 그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인간을 포함하여-의 부분들을 집합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우아하게 균형을 갖추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각의 옷주름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같은 정도로 굽은 부분에 똑같은 주름이 잡힌 경우에도 주름이 전체로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고귀한 인상을 주며 하나의 물결에서 또 다른 물결이 나오는 물결 무늬의 부드러운 곡선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인물의 연령대에 맞는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5막 구성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 통일성은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며,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감정적 분출이나 격한 표현은 내면에서 용해되어 외부로의 표출이 자제된 상태이다. 빈켈만은 이를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옷주름 이외에도 표정과 육체의 표현, 자세 등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따르는 것이 ‘완전한 미와 결합’하는 길이며 ‘숭고의 형식’을 발견하는 길이다. 이는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뒤로 미루어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절제야말로 예술가의 제일 덕목인 셈이다.

또한 고전주의는 소재의 선택을 중시한다. 예술가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해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적으로 표현해야 하며 이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당대의 역사적 소재보다 우의적인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더욱 적합하다. 또한 이 소재가 적절한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다할 때에만 빛을 발할 수 있다.

고전주의의 몇몇 덕목은 우리 시대에 협소한 범위 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통일성의 원리는 소설에서 여전히 존중받는다. 작가가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을 억지로 그려낸 경우 그 인물은 어딘가 인형 같은 느낌이 든다. 인물이 인형 같은데 소설이 생생할 리 없다. 이에 반해 유기적인 흐름 안에서 인물이 생동감 넘치는 경우 소설은 매력을 발산한다. 전혀 그런 전사(前事)가 없었는데 갑작스레 변화하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생경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전부터 어떤 기미나 복선이 절제된 채 암시된 경우에만 인물의 변화는 설득력을 얻는다. 이 복선이 너무 강하면 촌스럽고 너무 옅어 보이지도 않으면 비약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또한 인물의 말과 인물의 체험의 일치-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등의 설정-,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현대 소설 작법에서 전형으로 자리잡아 통용되고 있다.

 

 

 

 




p.31 10 주 이런 사실은 조각의 목적이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데 있으며 각각의 경우에 순수한 미적 쾌락 역시 종교적 체험을 위한 수단이었던 그리스 조각의 전반적인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p.30 11 오직 오성에 새겨진 상(像)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의 일종의 이상적인 미를 발견한다.




p.35 13 주 신을 숭배하는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자신들도 신처럼 희거나 붉고 또 신처럼 민첩하고 유연하게 움직임으로써 신들의 마음에 들기를 원했다. -중략- “신 앞에 맹세코 말하건대 나는 머리에 왕관을 쓰는 것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기를 더 바라노라.” 이것이 그들이 살던 세계사의 한 시대에서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형태로 여겨졌던 것이다.


p.48 40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그리스 조상에서는 같은 정도로 굽은 부분에 똑같은 주름이 잡힌 경우에도 주름이 전체로서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고귀한 인상을 주며 하나의 물결에서 또 다른 물결이 나오는 물결 무늬의 부드러운 곡선을 볼 수 있다. -중략- 그 피부는 결코 근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육체처럼 이상하거나 육체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뚜렷한 주름을 만들지 않는다.




p.50 42 전체 구조의 통일, 부분들의 고귀한 결합, 꽉차 있으면서도 한도를 넘지 않는 절제가 있었다




p.52 46 그리스 조상의 미는 자연의 미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p.52 47 상이한 개개 대상을 관찰하여 그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전체로 만드는 것

47 주석 빈켈만에게 이상의 예술이란 자연 속에 있는 단일 부분들의 발견의 예술이며 조화로운 전체로의 결합의 예술이다




p.54 49 나는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모방함으로써 우리들이 훨씬 빨리 현명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모방을 통하여 우리들은 분산되어 있는 전체 자연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고, 또 가장 완전한 자연을 대담하면서도 현명하게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은 인간적인 미와 신적인 미 양자의 최고의 한계를 규정해 주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 있게 사고하고 구상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p.54 50 이러한 토대에서 예술가의 손과 감각이 그리스 미의 규칙을 따라 작업할 때 그는 비로소 안전하게 자연의 모방으로 인도될 것이다. 고대 자연에서의 전체와 완전성의 개념은 분산된 우리들의 자연에 대한 개념을 순화하고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예술가는 그들의 미를 발견함으로써 완전한 미와 결합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는 숭고한 형식의 도움으로 그는 스스로가 하나의 규칙이 될 것이다.




p.56 그리하여 그의 예술이 의복의 묘사에서처럼 대리석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푸생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예술가, 특히 화가는 자연의 모방에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말했듯이 “항상 다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은 결코 그들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며 그 자신이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술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74 79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 표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항상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낸다.




p.76 84 그러나 영혼은 통일의 상태, 평온의 상태로 나타날 때 더욱 위대하고 고귀하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평온함 속에서도 활동적이며 고요하면서도 냉담하거나 게으르지 않은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 다른 영혼에게는 속하지 않는 그 자신에게만 고유한 특징을 통하여 나타나야만 한다.




p.130 177 모든 예술은 이중의 최종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술은 사람을 기쁘게 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p.130 178 예술가가 스스로 선택했거나 다른 사람이 부여했거나 간에 시적인 제재나 시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제재를 가진다면, 예술가는 자기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어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약탈한 불이 그의 내부에서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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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사나이 (구) 문지 스펙트럼 20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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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논문 「Unheimliche'」(우리 나라에 ‘섬뜩함’ 혹은 ‘두려운 낯설음’으로 번역됨)를 통해 알게 된 소설이다. 「모래 사나이」 외에도 「적막한 집」과 「장자 상속」이라는 두 편의 소설이 소개되어 있다. 낭만주의와 공포의 결합(낭만주의의 연약하고 인간의 불확실함에 대한 편애가 불러들일 수 있는 요소)이라 할 수 있지만 21세기에 19세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가 차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태는 여타의 예술 작품에서 훨씬 더 충격적이고 생생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과 실제 사이, 죽음과 생(生) 사이, 무생물과 생물 사이에 놓인 간극에 대해 호프만의 이 작품집이 탐구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거울, 눈동자, 자동 인형, 유년의 공포 같은 소재가 자주 차용되는데 19세기에 이미 호프만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공포를 줄 수 있는지 관습이 아니라 직관과 경험(?)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적막한 집」에서 거울은 화자가 미친 여자를 보게 되는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는데 이 거울에 대해 화자가 한 이야기는 분신의 개념과 들어맞는다.

‘그러다 문득 그 형상이 거울의 안개에 둘러싸여 가려진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다가 그 괴로운 상태는 결국 완전한 무감각 상태가 되어 끝나고 늘 가슴속 깊이 사무치는 허탈감을 남겼지.’

내 안에 숨겨진 광기 어린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과연 어디부터 인간이고 어디부터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일까. 경계가 있기는 한 것일까. 그 경계는 어디인가. 이에 대한 탐구라는 측면에서 호프만의 소설은 의미있다. 허나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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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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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써진 스포츠 소설은 뭘까 라는 궁금증 때문에 읽었다. 이전에 신문에서 본 광고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펼쳐든 것이다.

스포츠 소설 답게 엄청난 흡입력이 있다. 야구 만화를 본 사람은 그 흡입력의 정체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속한 팀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대부분 예측할 수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그라운드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자기도 모르게 그 경기 당사자가 되고 마는 심리라고 할까. 『야구 감독』은 철저하게 이 심리를 이용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구라는 경기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의 야구 소설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는 정반대의 야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박민규의 소설이 완벽하게 정치적인 이야기라면-왜 야구는 즐길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승부해야 하는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인가, 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육체를 조각 내도록 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 소설을 이루고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 소설은 야구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게임이라고 박민규의 소설의 정 반대편 논리를 이야기한다. ‘게임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다’-이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야구 감독 히로오카의 논리이고 그의 간단명료하고 깔끔하고 스마트한 이상적인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이 캐릭터 안에서 모든 것은 이야기된다. 의례 스포츠 만화가 그렇듯 이 소설은 한 명의 캐릭터가 한 팀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이야기한다. 그 캐릭터가 선수가 아니라 감독일 뿐이다. 왜냐하면 야구는 팀 플레이이고 팀을 지휘하는 사람은 감독이고 야구는 공격이 아니라 수비, 팀 내 모든 선수가 자기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의 매력을 끌어내 소설로 완성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스포츠의 매력에서 끝난다. 그 시간 안에 마인드, 의지가 얼마나 발휘되느냐에 따라 경기가 결정되듯 히로오카로 명명되는 승리에 대한 투지와 정열이 팀 내에서 얼마나 발휘되느냐에 따라 엔젤스(히로오카가 이끄는 꼴찌 팀)은 이기거나 진다. 그들은 드라마틱하게 최하위 팀에서 최상위 팀으로 발돋움하고 선수 각자는 진정한 야구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인간적이지 않다. 모든 캐릭터는 일면적이고 단지 야구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조리는 단지 야구라는 스포츠에 종속되어 있다. 사회의 부조리, 현대성의 부조리는 어디에도 없다. 문장조차 이 법칙을 끝까지 지킨다. 어떤 소설은 자기 선을 적절히 지키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그 법칙을 따라 흡입력을 발산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딱 거기까지이다. 경기가 끝나면 삶이 기다리지만, 그 삶을 돌보지는 않는다. 만약 그래도 그 삶을 찾아야 한다면, 소설을 덮고 당신 일상으로 돌아가 히로오카처럼 깔끔한 마음으로 전심전력으로 세계에 임하라, 그러면 부조리라는 장벽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정도?
아, 하지만 다시는 이 사람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야구장이 가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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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만세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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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런 소설을 쓰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자면, 언어로 꿈꾸기를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처녀작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희뿌연 베일에 가리워진 그 꿈과 같은 세계를 베일을 한 겹 한 겹 어루만지듯 보여줬다면 『시간의 지배자』에서 그는 온갖 물건들, 모순으로 가득 찬 물체들-조각난, 이미 쓸모없는-로 이루어진 한 왕국을 그렸다. 그리고 『지옥 만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철 장수로 기계를 해체하는 母子의 이야기가 그 내용에 걸맞게 해체된(?) 문체로 그려진다.




온갖 환상적인 물건들, 도금한 은, 금, 온갖 종류의 부품, 램프, 열쇠, 또는 시계들!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찌그러져 쌓여 있는 거야.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을 다시 해체하며 벌어 먹고 사는 가족, 母子가 그것을 해체하면 아버지는 트럭에 그것들을 싣고 머나먼 곳으로 가 판다. 일주일 내내 운전을 하고 운전을 쉬는 동안 창녀인 롤라 베티나를 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동료를 통해 말한다. 이 소설의 초반은 『시간의 지배자』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들이 현대를 살고 아들을 낳았다면, 왕국의 지배자인 힘이 센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리고 어머니와 둘만 남은 조슬랭 시마르의 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딱딱하고 차갑게 날이 선 금속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조슬랭은 밤이면 연극을 하는 극장에서 생활하고 그 극장의 여배우 마엘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이다. 그가 마엘을 만나는 부분이나 그밖의 인물들-마엘의 부모, 파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서술은 대부분 완전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니, 문장의 흐름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문장 속에서 현대는 해체되고 모자이크된, 일인칭으로 가득 찬, 이해할 수 없는 곳인 셈이랄까. 분명 서사가 존재하지만 엄청난 리듬으로 이어지는 그 서사는 이리저리 찢겨있고 틈이 있으며 부서진 고철 덩어리들처럼 차갑고, 어긋난 채이다. 의도적으로 문장과 이야기가 찢겨 있으므로 그것을 애써 이어붙이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부드러움과 차가움을 이어 붙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온갖 인간들, 특히 창녀, 고물상, 란제리집 종업원 같은 프롤레타리아(소설에 직접 언급된다)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어쩐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가면의 생』을 이어붙인 것도 같다. 늙은 창녀를 아껴주는 포주가 되겠다던 모모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들이 살던 엘리베이터가 없던 아파트에 조슬랭과 마틸드가 함께 살고 있어도 될 것 같고 가면의 생의 번잡하고 따로 뚝뚝 떨어진 채 아귀다툼하는 이야기들, 문장의 향연이 떠오른다. 어쩌면 같은 프랑스 소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로맹 가리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향을 내뿜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자판을 치는 시대에만 탄생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결코 손으로는 펜을 굴려서는 이런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가면의 생』과 이 소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인가.

그러나 정말 이것이 지옥일까? 누구에게나 각자의 지옥이 존재하니까. 그런 면에서 이 완벽한 일인칭은 지옥일 수 있겠구나.

 

 

 

 

 

 

 



 쇠붙이와 씨름을 벌이는 생살. 나는 꿈의 기계장치에 대고 곡괭이질을 해댄다.




길은 텅 비어 있다. 위험은 차를 멈출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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