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체크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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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은 살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묻고 있는 희곡이다. 한 남자가 살인을 했을 때,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지만 그를 둘러싸며 원을 그린 사회가 원을 조금씩 좁히며 숨 막히게 함을, 그를 살인자로 양성해나감이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보이첵의 가난-너무 가난해서 의사의 실험 대상이 되어 완두콩만 먹어야 하는-과 더불어 그의 아내 마리가 죄악에 빠진 것도 돈 때문임이 마리가 악대장에게 받은 귀걸이를 팔 생각을 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이는 보이첵이 살인을 한 뒤 주점에서 하는 대사 “내가 누굴 죽인 것 같아? 내가 살인자야? 무엇을 쳐다보고 있지? 너희 자신들을 돌아봐라”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물질적 부가 한 인간의 인간성(도덕의 영역인 영혼에 대해서까지)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한 채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며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덕에 대해 설교하는(중대장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것은 얼마나 이중적이며 모순적인가. 누구나 조금만 예민한 인간-예민해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았으니 어리석은 지도 모르지만-은 이 세계의 비극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서 터무니없이 예민한 인간은 종종 정신이상으로 분류되며 실제 보이첵 역시 정신이상적 징후를 보인다.

또한 이 희곡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인간이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름을, 종교의 거짓된 속성(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왜 이다지도 모순되었다는 말인가, 왜 신은 가난한 인간을 거들떠 보지 않고 그대로 두는가-중대장과의 대화-, 이건 너무 하잖아! 라는 방식으로) 까발리고 있기도 하다.

희곡 마지막 부분에서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는 가장 순수한 동화의 세계에서조차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비극적 세계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세계에 희망이라 불리는 것들이 눈속임임을, 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혼자 엉엉 우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영원한 고독과 갈 데라곤 그 어디도 없는, 구원 없음임을 역설한다.


옛날 옛적 옛적에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주 불쌍한 어린 아이가 있었더란다. 세상에 만물이 다 죽고, 하나도 살아있는게 없었지. 만물이 다 죽었어. 해서 어린애는 밤낮으로 울며 다녔더란다. 세상엔 아무것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어. 그애는 하늘나라엘 올라가려고 했지. 달님이 아주 귀엽게 비춰주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달님한테로 가서 보니 달은 한쪽에 말라 썩은 나무였더란다. 그래 다음엔 해님에게로 갔데. 그런데 그건 아주 시들은 해바라기였다나. 이번엔 별님에게 갔지 뭐야. 그랬더니 그건 때까치가 들벗나무에 나뭇가지를 찍어다 놓은 것 같은 작은 황금파리들이었더란다. 그래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려고 하니 거긴 아주 뜨거운 용광로가 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는데 지금 까지도 혼자서 엉엉 울고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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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아침 - 제3회 문학.판 신인작가 장편소설 당선작
조하형 지음 / 열림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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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편의 환절기의 서사시를 읽은 셈이다.(문득 박상우의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가 떠올랐다) 계절이 바뀌듯 인류의 법칙이 바뀌는 시점에서 법칙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의 서사시.

환절기에는 서사시를 쓸 수밖에 없다. 지나간 계절에 대한 기억과 다가올 계절에 대한 예감이 뭉뚱그려져 신경을 교란시키고, 매일 잊기 위해서인지 기억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아쉬워하기 위해서인지 모를 꿈 속에서 두 계절이 만나며 여기를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강렬하게 침범하므로. 여기를 깎아내리고 지형도를 바꾸려 들기 때문에, 어떤 안간힘으로 서사시를 쓸 수밖에 없다. 애도이거나 예언으로서의 서사시는 늘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안타깝고 그러다 어느 순간 처절해질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 두 발을 버티고 선 여기가 분열하며 좁아져갈 때, 또한 이 좁아짐은 곧 확장과도 맞닿아 가므로, 미분과 적분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신경 교란의 시간을 기록하기.

소설은 환절기의 서사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과학적 상상력을 도입한다. 種이 바뀌는 시기. 조인이라 부르는 날개를 단 이들의 출현(이상의 ‘날자, 날자, 날자꾸나’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으로 인류가 신인류와 구인류로 나뉘게 된 뒤, 그 환절기에 대한 구인류라 부를 수 있는 몇몇 예민한 이들의 반응인 셈이다. (그런데 예민하지 못한 인간이 있을까. 예민하지 않을 수야 있지만, 예민하지 못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자기 보존 본능으로서.) 김철수라는 암벽 등반가와 그의 아내 이순희, 그들의 손자 벌레에 집중하는 자폐아 길동, 정신병원에서 닭을 날게 하려는 독고영감의 계획에 동참한 뒤 그곳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자기 혼자 계획에 착수하는 박영구, 그의 쌍둥이 동생 해탈보조상품을 팔고 이전엔 신비동물밀매업을 하던 박영자.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된(혹은 잊혀진) 자들이 사는 노인촌이 무대가 되어 소설은 나선형으로 회전하듯 서사를 돌려나간다.

여기에 음악(거문고, 가야금, 장구 등등의 북소리) 이론과 진화 이론, 그밖의 과학 이론, 자본의 무서운 획책 등등에 대한 논리가 더해지며 소설은 몸피를 불려나간다.

왜 하필 조인(鳥人)인가에 대해서는, ‘하지만 날아서 도달할 수 있는 하늘 같은 건 없다’, 혹은 ‘그러고보면, 비상(飛翔)은 죽음과 닮은 데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을 달성할 수는 있어도, 전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등등의 문장을 통해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이상으로 분류되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 공허감 같은 것. 그밖에 유전자 조합을 통한 희귀한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한 마리 코뿔소(어딘가 이오네스코가 떠오르는)의 노인촌 난입 사건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개체의 개체성과 종의 진화 사이의 논리를 ‘미친, 새로운 세계’의 정신병원 안에서 독고 영감과 박영구가 설파하며 닭 한 마리로 실험을 하고-날지 못하는 조류가 날게 될 때 새로운 태양이 뜬다- 김철수의 암벽 등반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가 다듬어진다. 이 사이사이 개입한 노인촌의 다른 인물들의 서사와 인문학적이거나 종교적인(박영자의 입을 통해 의사과학이며 의사종교라는 힐난을 입는) 논리들이 소설에 결합하며 소설은 벚꽃나무가 벚꽃잎 한 송이 한 송이를 피워내듯, 퐁퐁 다양한 상징과 상상력을 쏟아낸다. 이 서술 또한 과학 용어를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암벽 등반과 관련한 전문 용어들이 심리적 서술을 위해서도 쓰인다. 그러나 다 뽑아내보기엔 힘이 딸린다.

벌레와 아침, 곧 벌레가 있어야 벌레의 아침이 있을 수 있음, 매일 밤 죽고 깨어난 듯 아침이 오고, 그 희안한 단절과 더불어 이 우주의 벌레인 인간들, 실제로 위에서 바라보면 벌레와도 같이 꼬물꼬물 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엄청난 투쟁이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기도 한 현상, 미분, 다시 적분. 그 끝없는 법칙의 세계. 영원한 추락, 혹은 영원한 상승, 그러나 이조차 종의 법칙 안에서 벌어지며, 마무리되고.(2년전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보며 느꼈던 이상한 감정 ‘생명이 생겨났어’라고 환호성을 치다가 그만 그 벌레와 나 사이의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런 경험을 누구나 하나보다.) 벌레와 인간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 사이, 사이, 사이들, 단절과 연결, 개체와 개체, 종과 종. 그 사이의 리듬.




이 소설의 형식을 뒷부분 해설에서 보니 하이퍼텍스트적이라 하는데(요즘은 이런 고유 명사에 적응하는 일도 어렵다.) 각 짧은 장이 분절되어 있고, 링크된 번호로 넘어가 소설을 읽어도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읽다보니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어 그냥 죽 읽어나갔다. 나의 사고하는 방식은 이미 죽죽 읽어넘어가는 방식에 적응해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링크를 따라 가다보면 마치 나선형 회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며, 아무래도 이 소설 안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멀미 비슷한 것을 느껴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용을 봤을 때(절망을 넘어서어야만 새로운 세계가 온다는 이 상투적인 깨달음, 그러나 상투성의 부정을 다시 부정하기 등등의 자의식 측면에서도) 이 형식은 괜찮은 시도였다. 굳이 링크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벚꽃 나무에서 이 꽃잎을 한 장 한 장 따보고 싶어질 수도 있으며, 단절과 연결 사이의 매듭으로 보아도 어울린다. 어지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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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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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는 표범 여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하는 여자의 서글픈 이야기.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어찌보면 평범하고 식상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두 (생물학적) 남자의 대화 속에서 점점 색을 입고 궁금증을 자극한다. 천일야화에서처럼, 표범 여인은 진짜 표범으로 변해버리는 걸까, 궁금해지게 된다.

표범 여인 이야기가 끝난 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다른 궁금증이 도진다. 작품 제목은 왜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일까? 작품 말미에서 이 질문은 해소된다.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넌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이야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는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잡아들이기 때문.

그래도 왜 하필 거미일까?

몰리나와 발렌틴이란 두 (생물학적) 남성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한 명은 아동 성추행이라는 혐의로 잡힌 동성애자이고 한 명은 사회 혁명 운동을 하는 운동가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은 대화 속에서만 나타난다. 종종 방백과 비슷하게 이 책에서는 이탤릭체로 표시되어 한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거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있기도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두 사람은 마치 천일야화처럼 영화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몰리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발렌틴이다. 두 사람의 가족 관계나 그밖의 사회적 위치, 성격 등도 모두 중간 중간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두 사람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공간적으로 외부와는 거의 단절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만, 그날은 형량으로 따지자면 까마득하다. 그들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거미줄에 들어앉은 거미처럼.

이 작품의 중심은 서로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고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낭만적인 동성애자와 이성적인 혁명 운동가 사이의 교감. 그 사이에 끼인 것 끝나지 않는 영화.

그리고 다른 이야기의 축은 몰리나가 풀려나기 위해 발렌틴을 이용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몰리나라는 인물은 입체적으로 확대되고 그녀의 고뇌가 살을 입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비틀리며 확장된다. 발렌틴을 아프게 만들어 정보를 캐내려던 계획에서 몰리나는 오히려 죄책감 때문인지 정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지점에서 발렌틴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똥까지 치워주고 닦아주며) 발렌틴의 내면을 까발린다(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싫어서 몰리나의 도움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는 것).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두철미한 자기 보호 의식 같은 것.

작품 말미에서 보고서를 통해 몰리나는 결국 그 관계 속에 빠져들어 출소한 뒤 발렌틴의 첩자 역할을 하려다 감시당하고 그만 살해당하고 만다는 게 드러난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말했던 자신의 이상형인 웨이터를 만나려고 약속을 잡았다가 실패한 뒤에도 몰리나가 적극적으로 그 웨이터를 만나러 가지 않는 부분에서 몰리나의 심리가 설명된다.

발렌틴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뒤 모르핀을 맞고 몰리나가 해준 여러 영화들의 장면 속에 놓인 채 죽어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미줄을 치고 있었으며 그 거미줄의 거미이자 먹이가 된다.




사회의 소수자이자 가장 반대편일지도 모를 동성애자와 혁명 운동가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는 주석으로 달린 여러 성 이론 문헌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착취를 사회화한 것이라는 이 논문을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이 아주 가까운 사회적 입장에 서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에 가까운 혁명적 인물이며 자신들이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는 약간 다른 문제이다(우리의 생활이 그렇듯). 몰리나는 발렌틴이 부탁해야 할만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상을 내면화 모델로 삼고 있으며(착취의 기본 구조를 깨뜨리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유지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구성 인자로서) 발레틴은 의식적으로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그가 옛날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가 그 여자친구 이름을 작품 말미까지 부르는 데서 나타나듯).




소설은 서사를 기본으로 삼는 장르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 진행 방식이다. 그러나 『거미 여인의 키스』는 소설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을 기본 구조로 삼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며 두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과 같다. 시간은 서로를 통해서만 흐르며 따라서 그 흐름은 완전히 주관적일 뿐이다. 다른 어떤 지표도 없이. 따라서 서로에게 고인 시간 속에 있는 두 사람 이야기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방식에 가깝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들의 면면 속에 두 인물이 녹아있고 주제가 녹아있기도 하다. 더불어 주석들도 적극적으로 이 방식에 개입한다.




몰리나가 소장에게 마지막 면담에서 음식을 부탁하는 몇 마디 말은 그 어떤 몰리나의 감정에 대한 기나긴 설명보다 더 애절하고 서글프다. 그녀가 놓인 아이러니한 상황과 더불어. 이 소설의 전체 방식이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의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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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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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이 이 고난의 근원인 것이다. 바다는 우리의 사고에 대한 일종의 증폭 장치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타자를 마주치는 순간, 인간(혹은 존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날카롭게 경계점을 설정해낸다. 차이점을 대두시키고 그 차이점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척 할 때도 있지만, 사실 인간은 우리가 최고등 생물이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려 애쓴다. 꼭 종의 문제가 아니라 개체의 문제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데-쉽게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운전을 그리 오래 하지 않았지만 저 놈보다 내가 몇 배는 낫다고 다른 택시 기사가 좀만 실수를 해도 말하곤 한다-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합리화하며 인간은 생명을 유지시켜 나간다. 동물이 되어보지 않아서 동물도 구차하게 살기 위해 자기 존재의 합리화라는 기능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통상 미쳤다고 부르는 이들조차 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노력한다, 내가 옳아, 내가 맞아, 이를 발설하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인간 존재의 끔찍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 합리화에 있는 게 아닐까. 오욕의 역사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능력.

지금으로서 나의 이해 수준이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솔라리스』는 이런 인간 종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우리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고 하며.

불안 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자. 그 불안 리스트는 그동안 잊고자 했던 자신의 치사함과 언행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본성을 까발릴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처음엔 한두 개, 그러다가 적을 수록 배가될 것이다. 그 중 무엇이 치명적일지는 자기자신조차 모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이라는 철저한 장벽이 한 겹 두텁게 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가장 치명적인 기억을 지워내며 생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다. 동물의 지독한 자기보존 본능으로서.

솔라리스의 캘빈에게는 지독한 기억으로 사랑하던 아내-자신의 실수인지 잔혹함 때문인지 우연인지 모를 일 때문에 자살한-가 나타난다. 물질적으로 그녀가 죽기 전 열아홉 살의 모습을 복원한 채로. 스테이션 안의 또다른 인물인 사토리우스에게는 밀짚모자가, 죽은 기바리안에게는 덩치 큰 흑인 여자가 찾아온다. -밀짚모자가 치명적으로 느껴지려면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토리우스의 허세스러운 성격과 맞는 상관물인 듯 하긴 하지만- 스노우에게는 누가 찾아왔는지 모르며, 이들의 치명적인 과거, 이들이 그 방문자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을 아무런 틈도 없는 스테이션에 들여보낸 것은 누구일까? 소설 초반부부터 그것이 행성 솔라리스의 유일한 생명체 바다라는 것은 드러난다. 2장에서 솔라리스의 젤리 같은 느낌이 나는 바다에 대한 여러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열되며 이 바다가 생명체 혹은 지성체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자는 로켓으로 발사해 보내도 다시 돌아오며, 자신을 기억하는 상대방의 기억이 투사된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자신의 목적-방문한 이를 따라다니려 한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괴력이 발휘되고 자신도 왜 그렇게 행동한지 논리적으로 혹은 합리성을 가장해서 설명할 줄 모르며, 죽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이 방문자의 표본을 들여다본 결과 그 궁극 요소는 미세한 소립자로 인간의 궁극적 요소를 이루는 원자보다 훨씬 작은 뉴트리노(중성미자)이며 탁월한 재생 기능이 있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들을 여기에 보낸 걸까? 헐리우드 서사에 익숙해진 결과, 당연히 이 스테이션 내에 자체 교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왜 이다지도 복잡하게 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 막막함이 시작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괴롭히는 이유는 무언가. 사실 소설도 이 질문을 도입하고 바라볼 때부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한 지성체(?)는 인간들이 납득할 만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목적 없이 어떤 학습의 단계로서 이 방문자를 보낸다.

이전에 솔라리스의 바다를 탐사하던 중 한 명이 실종되었고 이 인간을 통해 인간의 시스템 체계를 빠르게 학습한 바다는 거대한 아이를 만들어 인형을 다루듯 인간의 여러 동작을 만들어보고는(베르통이라는 탐사원의 임상기록에서 나타난다. 그의 임상기록은 위원회에서 정신착란으로 취급받는다) 인간의 무의식에 투사된 어떤 기억까지도 물질화시킬 수 있는-먹거나 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좀 더 성능이 좋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8장에서 솔라리스의 바다가 의태 능력으로 반경 8~9마일 내의 것을 모방해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여기에 대칭이 어쩌고 비대칭이 어쩌고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상태가 좋지 않아 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넘겼다- 지워내고 있음이 나타나며 이 바다의 능력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솔라리스는 자연은 모방하지 않고 기계만 모방한다. 기제라는 솔라리스학 연구자는 ‘완전한 성숙을 위한 과정’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방문자는 기계와 같은 존재일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 시스템 상에서 몇몇이 인간과 다르지만, 그 방문자 중 한 명인 레아는 점점 자아에 대한 의식을 쌓아가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급기야 캘빈에게 “그러면 당신은 여기 있는 사람이 그녀(죽은 부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앚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스스로 소멸을 택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지? 과역 그녀의 소멸을 도운 스노우는 자살 방조인가, 아닌가? 저 정도로 자아에 대한 개념이 완벽하며 자살할 수 있는 생물체를 과연 인간이 아니라 해야 할까. 인간은 이기적으로 종족 보존을 위해 그 경계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지만(물론 각종 말들이 있긴 하나 완벽히 믿을 수는 없는) 자기 종에 대한 경계를 친다. 자신보다 우월해도 안 되고 하등해서도 안 된다.

레야의 소멸 뒤로 힘들어하던 캘빈은 스노우와 이야기 도중 ‘불완전한 신’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스노우는 이 의견이 또 다른 솔라리스에 대한 가설-쌓이고 쌓이며 결국은 구원을 위해 손을 내미는-이라고 말한다. ‘속죄나 구원의 목적이 아닌, 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며 ‘차츰 성장해가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 신’이며 ‘물질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스노우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인간과는 다른.

솔라리스를 떠나려던 캘빈은 솔라리스와 직접 촉각적으로 접촉한 뒤 솔라리스에 남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 채 소설이 끝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아주 미약한 희망을 남긴 채.

이것은 혁명에 대한 희망인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사회주의 체제의 소설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맑스의 혁명적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솔라리스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며칠 전에 읽은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의 질문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다른 행성을 탐험하는 과학소설 형식을 빌려 하고 있는가 하면-실제로 꿈에서 만난 기바리안과의 대화에서 이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니. 너(기바리안)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렇지만 그 사실을 너는 몰라.”/ “그럼 자네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 존재론적 질문을 개체뿐 아니라 종의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 지점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과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극대와 극소의 영역에서, 수천, 수백만의 변화가 마치 수학적인 대위법에 의해 연결된 음악의 악보처럼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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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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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이 소설을 읽긴 했다. 5년쯤 전 인것 같다. 재밌게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세세한 내용은 거의 잊었다. 그저 용감하고 정의에 대한 강렬한 신념과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이 드라라큘라 백작과 맞서는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의례 그렇듯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은데 어째서 브램 스토커라는 이름은 이다지도 공포 문학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그 이유를 확인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의 기록과 몇몇 잡지, 전보 등을 발췌한 이 소설의 형식이 엄청난 흡입력으로 나를 문장 속으로 끌어들였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소설을 읽는 속도가 따라붙어 금세 페이지가 넘어갔다. 조너선 하커가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갇히는 초반의 기록 뒤로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 루시에 대한 이야기, 루시와 관계된 이들이 어떻게 이 사건과 관계를 맺게 되는가에서 개연성이 점점 분명해지며 각각의 인물들의 일기-특히 환자 랜필드에 대한 수어드 박사의 기록-는 그 관계망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갔다.

특히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드라큘라>를 보고나자 이 소설의 형식이 얼마나 적합한가 다시금 감탄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에도-어쩌면 더더욱 그래서인지도 모르지만, 원작에 매이다 보니- 영화는 사건 전개가 훨씬 시시하게 느껴지고 특히 10년 전 영화라 그런지 촌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100년 전 소설임에도 이 소설은 별로 시시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독특함은 각각의 내면을 기록하는 일기 형식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공포는 결국 개인적 영역에서 동심원을 그린다. 또한 많은 것이 변한다 해도 인간의 내면은 별로 변하지 않는 면이 있으므로. 공포를 느끼는 방식이라든지 공포에서 헤어나는 방식이라든지 하는 면에서 말이다. 물론 소설도 숭고미를 끌어들이며 주인공들이 이 사건에 접근하는 것이 좀 과하다 싶긴 했지만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너선 하커가 전반부 드라큘라 성에서 겪은 일들에서 헤어나오는 방식-그가 겁이 났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퇴행을 겪은 것은 그 사건 자체의 괴기스러움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겪은 일을 스스로 현실인가 의심하는 데서 나타난다-이나 소설 후반부에서 그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 있음에도- 그들 중 한 명인 미나 하커는 드라큘라의 희생자가 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들 각각도 엄청난 피로를 느낄 것임에도- 하루가 지나자 그 일들을 꿈처럼 느낀다거나 하는 대목이 충분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말하자면 사건을 느끼는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의 밀도가 과장돼 있거나 작가의 억지나 강요가 아니다. 대단히 사실적이다. 물론 풍광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빛난다. 마치 그 지역을 여행하는 듯한 묘사가 소설의 호흡을 일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점점 사건 속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드라큘라는 무엇일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 생과 사라는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갈구? 이 소설뿐 아니라『뱀파이어 걸작선』에서도 꿈은 드라큘라와 희생자를 매개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꿈이라……. 억압된 것이 돌아오며, 끊임없이 못 이룬 것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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