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독하다. 현대인은 누구나 실존주의의 세례를 받는다. 실존주의뿐이 아니다. 모든 관념들이 현대인들과 함께한다. 샤르트르의 이 소설에서 나온 존재에 대한 관념은 이제 더 이상은 새롭지 않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이다. (다들 적당한 변주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도전이고 의식에 대한 혁명이었을 것이므로. 이제 어느 정도 적당히 고상해진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잡문을 통해, 블로그를 통해, 실존주의를 읊조린다. 그리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연명하는 삶을 좀 더 세련되게 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비슷하니까.

존재의 우연성, 시간의 막막함에 대한 이 서술들은 그러나 정말 뛰어나다. 계몽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 철학의 뒷언저리에서 나는 책장을 넘긴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 그것이 나에게 포섭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익숙한 것으로 대상을 포장한다. 이것은 애정일 수 있으며, 또한 관계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 대상을 묶어두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름을 붙이고 그 대상의 특징들을 제거해나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분류하려드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의 각 존재에 대한 관념, 존재를 여분으로 취급하는 관념은 오히려 아름답다(?). 물론 어느날 문득 괴물이 된 자연이라든가, 나무 뿌리의 폭력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미 낯익은 이미지이고 생각이지만, 모든 것을 여분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고 어려워하며 대해야 하고 그럴수밖에 없으며-사실 우리는 결코 대상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없다, 물건, 사람 등등, 다만 아는 체 하길 좋아한다- 어쩌면 이 태도만이 권력이라는 속성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허무주의자인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굳이 말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게 아니다. 나는 단지 질문과 반성이 많은 인간일 뿐이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니까, 허무주의 같은 그런 괴상하고 어이없는 관념들 속으로 한 인간을 집어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조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비웃기 위한 태도들.










p.66

나는 미래를 ‘본다’―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노파는 약간 절름거리면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멀어진다. 그 노파는 선다. 목도리에서 삐쭉 솟은 흰 머리칼을 잡아당긴다. 노파는 걷는다. 그 노파는 저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노파의 동작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노파는 쓸쓸한 거리를 전진한다. 커다란 남자 신발을 옮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파는 길모퉁이에 가까이 간다. 그 노파는 이미 검고 작은 헝겊 뭉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다. 조금 전에는 노파는 거기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퇴색하고 케케묵은 새로운 것이어서 절대로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없다. 노파는 길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돈다―영원의 시간 속을.




p.80

내 생각은 이렇다. 가장 평범한 사건이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한 인간,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또 그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p.81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이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소계(小計)를 낸다. 이를테면 나는 3년 간 여행을 했다. 부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말도 역시 없다. 여편네와 자식과 도시를 한꺼번에 떠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슷하다. 상하이도, 모스크바도, 알제리도, 2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같다. 때때로―드문 일이지만―사람은 결말을 짓는다. 어떤 여자에게 붙어먹다가 더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갯불과 같은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한다.




p.112

그 모험의 감정은 확실히 사건으로부터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증명됐다. 모험이란 차라리 순간순간이 서로 얽히는 그 방법에서 생긴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즉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즉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인도됨,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그런 식으로 인도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매 순간이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건에서 이 특징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관련된 것을 내용에 연관시켜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사람은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가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는 것 같고, 또 그 여자와 더불어 자기도 늙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모험의 감정이다.




128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182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이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은퇴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휴가 상태, 비활동 상태였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 스스로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서 명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無)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아무것도 없다’.




210 

각자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개인적이고 보잘것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223

나는 타협하려는 거짓 노력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결국 그는 나에게 조그마한 일, 즉 칭호를 받아들여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독서광은 우쭐할 것이다. 독서광은 곧 뒤따라와서 내 앞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은 모든 인간의 태도에 한꺼번에 융합되기 때문이다. 만약 정면에서 그것과 충돌한다면, 우리는 그 계략에 빠져버리고 만다. 휴머니즘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먹고 산다. 완고하고 시야가 좁은 사람들, 강도들은 휴머니즘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진다. 휴머니즘은 모든 폭력이나 과격 행위를 소화해서 그것으로 희고 거품이 나는 임파액을 만든다. 휴머니즘은 반주지주의, 마네스 교(敎), 신비주의, 염세주의, 또는 무정부주의나 자기본위주의 모두를 소화했다. 그것들은 휴머니즘에 있어서만 정당성이 증명될 수 있는 단계이며 불안전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미장트로프(인간을 싫어하는 사람, 몰리에르 희곡 중의 인물)도 인간이다. 따라서 휴머니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장트로프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미장트로프이다. 그는 자기의 증오를 조합할 수 있으며, 후에 인간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우선 인간을 증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사람이 나를 적분(積分)하는 것도, 나의붉은 피가 이 임파액의 짐승을 기름지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반휴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하는 어리석은 짓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그뿐이다.

독서광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230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왜 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토론에 휩쓸려들었을까? 왜 사람들은 여기에 있나? 왜 그들은 먹나?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떠나가고 싶다. 어디든지 정말 ‘나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이다.




p.239

나는 그들처럼 “바다가 푸르‘다’, 저기, 저 높은 곳에 있는 흰 점, 그것은 갈매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 갈매기가 ‘존재하는 갈매기’라는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여기 우리들 주위에, 그리고 우리들 내부에 있다. 그것은 즉 ‘우리’이다. 존재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존재에 손을 댈 수는 없다. 내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믿었을 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옳다. 나의 머리는 비어 있었다. 혹은 꼭 한 마디가 머릿속에 있었다. ‘이다’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까?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물은 무슨 장치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도구로서 쓸모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저항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을 스쳐 갔다. 만약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와서 사물의 성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로 부가되는 공허한 형체일 뿐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달라져버린 것이다. 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대낮처럼 분명했다. 존재가 갑자기 탈을 벗은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범주에 속하는 무해한 자기의 모습을 잃었다. 그것은 사물의 반죽 그 자체이며, 그 나무의 뿌리는 존재 안에서 반죽된 것이다. 또는 차라리 뿌리며, 공원의 울타리며, 의자며, 드문 잔디밭의 잔디며,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사물의 다양성, 그것들의 개성은 하나의 외관, 하나의 칠에 불과했다. 그 칠이 녹은 것이다. 괴상하고 연한 것의 무질서한 덩어리―헐벗은, 무섭고 추잡한 나체만이 남아 있었다.




p.241

희극적…… 아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중에 희극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파극 장면과 유사하다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동하는 유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지산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 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p.242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p.247

우연성은 가장이나 지워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공원, 이 도시, 그리고 나 자신도 무상이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면 그것을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하고, 모든 것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요전 날 저녁때 역부 회관에서처럼 말이다. ‘구토’이다. 그것이 그 더러운 자식들―‘코토 베르’나 다른 곳의 그 더러운 자식들―이 그들의 권리를 휘둘러 숨기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나 가엾은 거짓인가. 아무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무상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내부에서 ‘여분’이다. 즉 부정형하고 애매하고 한심하다.




p.253

허무한 나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은 광대무변 속을 떠돌아 존재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 허무는 존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 존재였으며, 수많은 다른 존재 다음에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더러우냐, 이 얼마나 더러우냐!”




p.292

나는 도시가 두렵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나갈 수는 없다. 만약 너무 멀리까지 모험을 해서 가면 ‘식물’의 권내(圈內)에 부딪친다. ‘식물’은 도시를 향해서 수킬로미터를 땅에서 기고 있다. 그것은 기다리고 있다. 도시가 죽을 때, 식물은 도시에 침입할 것이고, 돌에 기어올라가서 그것들을 조르고, 뒤지고, 그 기다란 검은 집게로 돌을 부술 것이다. 식물은 구멍들을 틀어막을 것이고, 도처에 초록빛 발을 늘어뜨릴 것이다. 도시가 살아있는 한, 그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도시의 입구에 있는 그 거창한 머리카락 아래 혼자서 침입해서는 안 된다. 그 머리카락이 물결치도록 아마도 보는 사람이 없는 채로 덜거덕거리게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도시에 적당히 몸을 둘 줄 알고, 짐승들이 그 구멍 속에서, 유기적인 부스러기의 퇴적 뒤에서 소화를 하고 잠자는 시간을 선택할 줄 안다면, 사람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덜 무서운 광석밖에 부딪치지 않는다.




p.293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p.294

나의 온 생활은 내 뒤에 있다. 나의 생활 전체를 본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형태와 그 느린 동작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 돈을 전부 빼앗아 간 한 판의 노름이었다. 그뿐이다. 내가 엄숙하게 부빌에 들어온 지 3년이 된다. 나는 첫 판에서 졌다. 두 번째 다시 걸었으나 역시 졌다. 나는 노름에서 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이 늘 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놈은 개자식들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나무들처럼, 물탕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련다.




p.296

그들은 태연하지만, 약간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은 약간 장식을 한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그들의 태연하고 안심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뒤집힌다.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대중 소설을 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만드는 엄청난 바보 짓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시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막막막 대자연이 스며들었다. 그 자연은 도처에 그들의 집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그들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다. 조용히 하고 있고, 그네들은 속이 자연으로 충만해서 자연을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이 그들의 외부에, 그들 도시에서 50킬로미터 밖에 자연이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자연을 ‘본다’. 그 자연, 그것을 ‘본다’…… 그 복종(服從)은 게으름이고, 자연에는 법칙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습관만이 있고, 자연은 습관을 내일이라도 바꿀 수가 있다.

무슨 일이 만약 생긴다면? 자연이 만약 갑자기 발딱거리기 시작한다면? 그때 그네들은 자연이 거기에 있고, 그들의 가슴이 삐거덕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둑, 그들의 성벽(城壁), 그들의 발전소, 그들의 용광로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언제든지, 아마 당장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전조가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아버지가 산책을 하다가 바람결에 붉은 걸레가 자기에게로 날아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 걸레가 아주 가까운 데까지 왔을 때, 그는 그것이 기다가 뛰다가 하면서 질질 끌려오는, 먼지가 묻은 한 조각의 고기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를 경련적으로 내뿜으면서 개천 속에서 뒹구는, 괴로운 고기 덩어리를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뺨을 보고 물을 것이다.

“그게 뭐냐? 종기냐?”

살이 약간 부어올라서 째지고 벌어지면, 어머니는 그 틈에서 제 3의 눈, 웃고 있는 눈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은 냇물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이 골풀을 만지듯 전신에 보드라운 마찰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옷이 살아있는 물건이 된 줄 알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입 속에서 긁적거리는 그 무엇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울에 가까이 가서 입을 벌린다. 그러면 혀는 살아 있는 커다란 지네가 될 것이고, 발을 꼬고, 그의 입천장을 깎아버릴 것이다. 그는 그것을 뱉어버리려고 할 테지만 지네는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서 손으로 그것을 뜯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것들이 나타나니 그것들에게는 새 이름을 부쳐주어야 할 것이다. 돌의 눈, 삼각형의 커다란 팔, 지팡이의 자국, 거미의 지느러미…… 같은 이름을 말이다. 그리고 훈훈한 자기 방의 침대 속에서 잠들어버린 사나이는 푸르스름한 땅 위에서, 숲이 엉클어진 음경(陰莖)의 삼림 속에서 벌거벗고 깨어날 것이다.




p.317

왜냐하면 의식은 여분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희박해지고, 분산하고, 가로등에 연한 갈색의 벽 곁에서, 또는 저기 저 저녁 연기 속에서 없어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절대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는다. 의식은 자기를 망각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식의 운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라, 시티 -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
케빈 브록마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국소설은 좋다. 하지만 번역소설은 싫다. 어딘가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좀 배워볼 생각을 해야할 텐데 게을러서 그렇지도 못하다. 늘 책을 읽고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투덜이처럼 굴 뿐이다.

소설은 리듬이다. 단어 배치를 통한 리듬, 문장의 길이를 통한 리듬. 그 리듬이 좋아야 한다. 근데 번역 소설을 읽는 동안은 어떤 소설을 읽어도 딱딱함은 기본 조건으로 따라붙는다. 어딘가 딱딱하다. 번역자가 번역하는 동안의 딱딱한 마음 같은 게 글자들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글자들에 영혼이나 음악 같은 게 깃든다고 믿는 부류다. 그런 믿음을 아무리 버리려 해도 그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로라, 시티 괜찮은 소설이다. 바이러스가 지구를 뒤덮어 지구의 남극에 남겨진 단 한 여자, 로라와 그녀의 기억 속의 사람들이 사는 죽음 이후의 도시 이야기가 교차하며 펼쳐진다. 하지만 지구에 남은 단 한 명이란 생각이 잘 들지는 않는다. 고독 같은 것을 잘 느낄 수가 없다. 때때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구에 남은 단 한 명의 고독이라면 마음을 후벼팔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다. 살려는 힘겨운 투쟁 같은 것에 대해 잠깐씩 생각해볼 수 있을까?

내가 죽으면 어떤 사람들이 시티를 이룰까 궁금하긴 하다.

시티 부분은 너무 영화스럽달까 하는 면들도 있다. 맹인 이야기나 루카 이야기 같은 경우 그렇다. 
 

-이 느낌은 어쩌면 소설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데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못」을 읽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읽었다. 그보다 오래 전 문예지에서「순정」을 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읽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읽는 것,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 내가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넉두리를 해보아도 마치 흙바닥에 하는 아이들 놀이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차마 뭐라 하고 싶지가 않다. 「봄빛」에 나온 뚜부를 두고 하는 두 노인의 대화나 「소멸」에 나온 대사 “내 새끼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재미난가?”/ “이” 이런 대화가 왜 고여드는지 설명하는 일은 힘겹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해본들 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집은. 전하려 해도 몇 마디 말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딱 이 이야기들 속에서만 전해질 수 있는 것들로.
 

나는 마음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다. 마음은 이기적이고 마음은 영악하고 마음은 순간적이므로. 그래서 마음 같은 것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소설이 마음을 다루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여태 그것을 몰랐을까. 그런데 이 소설집에는 내가 돌보려 하지 않았던 마음이 있다. 마음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영악하고 순간적이지만 그뿐은 아니다. 그 이외의 마음은 말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말이 되지 않아 소설을 쓰는 것인가 보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말이 되지 않는 마음을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인가 보다. 
 

「양갱」을 읽다가 엄마가 발을 감싸주던 게 생각났다. 집에 가면 발이 차가우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종종 엄마가 발을 감싸주곤 했다. 지금도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발이 차갑구나 라고 생각하며 새우처럼 웅크려 발을 이불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쓸쓸해진다. 정지아 선생님은 내가 꽁꽁 묶어둔 눈덩이 같은 것을 녹인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의 반응들을 다 눈덩이로 만들어서 뭉쳐두고 있었는데 그만 그 눈덩이가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것을 끝내 말로 하자면 쓸쓸함일까. 살아간다는 일의 쓸쓸함. 우리는 영원한 것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봄빛은 생떼난 아이처럼 천지사방 흩날리는 흙먼지를 오냐오냐 다독이고, 생명을 틔우기 위해 마른 흙을 풀썩풀석 들이받는 새싹의 여린 손을 오냐오냐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손길이 꼭 저렇게 보드라울 거라고 건우씨는 생각했다. 작은어머니의 눈물도 잊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끝순이 딸내미의 자지러지는 울음도 잊고, 안주머니의 통장도 까맣게 잊고, 건우씨는 봄빛에 우두커니 몸을 내맡겼다. 마당 한편에서는 키만 멀쑥하니 자란 채 꽃이나 아니나 서너 망울 피기도 전에 떨궈버린 지난여름의 봉숭아 몇그루를 거름 삼아 두툼한 떡잎이 젖이나 되는 양 봄빛을 쑥쑥 빨아먹고 있었다.' 

-<못> 중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angda 2009-01-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규석을 알았던 게 언제 일까?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보고 재미있어 했던 게 5년 전 즈음인 것 같다. 만화가 이런 사회 고발 역할을 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지금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는 잊고 지냈던 이름인데 웹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게 된 그 이름의 필모그래피에 어느새 만화책 몇 권이 더 따라붙어 있었다. 책 없기로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우리 학교 도서관에 있는 것만 해도 세 권이니 그 사이 쉼없이 작업을 했구나 싶어 부럽기도 했다.

최규석 만화의 최고의 장점은 단연 솔직함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향해 바로 달려들어가는, 치장 없는 솔직함. 그리고 아마도 그 솔직함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이 『대한민국 원주민』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과거를 꾸밈 없이 술술 풀어나가면서도 어떤 감정의 울림을 전하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부러웠다. 게다가 그가 그려낸 가족들의 현재 모습-마트를 하거나 학원 원장을 하는 누님들-은 어느 도시 여기저기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 사회의 부속품이나 원자로 취급되고, 나라는 주체 속에서 타인들이라는 존재가 점점 정체 불명으로 변해가는 요즘 시대여서인지 이런 부분이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원주민』 후기에 김혜리 기자가 말하기를 최규석은 궁상 맞지 않은 가난을 그려낸다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다. 가난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자기 연민이 최규석 만화에는 전면화되지 않는다. 긍정이나 부정을 넘어서 있는 삶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긍정이나 부정이란 판단보다 삶은 늘 한 발자국 앞서 있다. 자기 긍정이나 부정 전에 삶이라는 것은 거칠고 투박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인 채 영영 함께이므로.

대학 시절에는 제 2의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과 매일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보듬어 주고 결국 그것들이 상처나 붕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해주었고 그래서인지 이제와 가족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게 왠지 궁상맞은 짓 같기도 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최규석 만화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 그 삶의 뿌리를 더듬어 스케치하는 일이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었다.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규석만의 그림체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대화를 보았다. 요근래 스타일에 대한 말을 자주 들어 생각이 많았는데 최규석 만화를 보다 미학이라는 것은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타일은 겉모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직구를 던지는 것이 최규석의 스타일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레아스와 멜리쟝드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2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언뜻 보면 형의 아내를 탐하던 펠레아스, 잘못된 사랑에 빠진 멜리장드와 골로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희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서로간에 말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긴 했지만 정말 그들이 죽임을 당할만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골로가 없을 때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빛을 보고, 어둠 때문에 울고, 문 때문에 울었다는 것이 골로의 아들 니올의 말을 통해 드러나지만,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없고 그래서 골로 역시 화를 낸다.

이 희곡에서 거인의 외모를 갖춘 어른인 골로(1막 1장 ‘당신은 거인이세요?’)와 어린애 같은 펠레아스, 멜리장드(3막 1장 ‘어린애들 같아! 어린애들!), 실제 어린애인 니올은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어린애들의 세계와도 같은 멜리장드와 펠레아스의 세계를 골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세 인물들의 대립은 멜리장드의 긴 머리카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펠레아스가 멜리장드의 머리카락을 갈대에 묶으며 장난을 치듯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달리 골로는 그 머리카락을 잡고 휘두르며 힘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나간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손에 쥘 수 있는 진실을 원하는 골로는 깊은 심연으로 펠레아스를 데려가지만 펠레아스는 그 심연에서 단지 숨막혀 할 뿐이며, 그들이 원하는 행복 혹은 진실은 빛 속에 드러나는 어떤 것일 뿐이다. 골로는 결국 동생을 죽이고 아내마저 죽게 만든 채 결코 어린아이들이 보는 어떤 것을 볼 수 없는 남자로 남아 장님처럼 어둠 속에 남겨진다.

그러나 이 비극적 운명의 씨실을 엮어내는데 골로 역시 역할을 한다. 멜리장드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골로는 펠레아스와 함께 찾아올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반지를 잃어버린 대목에서도 멜리장드의 어린애다운 이해할 수 없는 습성을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는 반지를 가지고 연못 같은 데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물에 빠뜨린 뒤 골로에게는 다른 곳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실수한 뒤에는 이리저리 다른 핑계를 대듯. 또는 거추장스럽게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옮기고는 나중에는 딴청을 피우듯.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는 어둡고 맑은 하늘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머리가 하얗게 센 거지나 바닷가에서 굶어죽은 농부, 외양간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는 양들과 같은 대사 속에 드러나는 주변 상황을 통해 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간다.

마지막까지 애처롭게 진실을 갈구하던 골로에게 할아버지 아르켈이 ‘침묵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며 작품은 끝난다. 마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인지도 모른다는 듯이. 우리가 손에 쥐고자 하는 진실은 ‘다른 사람들처럼 신비로운 연약한 존재’인 우리들 앞에 머리카락까지 꼭꼭 숨기며 영영 숨바꼭질을 즐기는 심술궂은 녀석이므로.




대사: 이 애에게는 지금 침묵이 필요해… 자, 이리와… 끔찍한 일이야,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아이는 너무나 고요하고, 수줍어하고, 조용한 작은 존재였어… 다른 사람들처럼 신비로운 작고 연약한 존재였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