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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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읽기 좋았다. 봄이 아니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남해금산이나 여름의 보다 좋게 느껴졌다. 편하게 읽혀서인가? 다시 훑어봐도 그렇지만은 않은 같다.

이전 시집의 시들이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그림자에 뒤채고 있었다면호랑가시나무의 기억 훨씬 말끔하면서도 때로 신선하게 비약했다. 깔끔한 허들 경기 선수처럼 때로 뛰어오르고 달리고 바라보며때로 비애에 젖고 때로 봄에 젖고 때로 생활에 젖고 때로 사랑에 젖는다.


부분의 '높은 나무 꽃들은 등을 세우고'라는 제목을 '파리 시편'보다는 뒤쪽 '천사의 ' 시편이 좋았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1

먼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실은 트럭 대가 큰길가에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을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데까지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있었던가

 

 

 

 

 

호랑가시나무

수고 5m 에 달하며 수피는 회백색이고 껍질눈이 발달하며 벗겨지지 않는다. 어긋나게 달리는 잎은 혁질로서 윤채가 나며 각이 진 부분은 결각 모양의 가시가 되어 돌출한다. 양면에 털이 없고 뒷면은 황록색을 띤다. 암수딴그루 또는 잡성화로 4~5월에 지난해 가지 잎겨드랑이에서 나오는 산형화서로 백록색의 꽃이 5~6개가 달린다. 암술머리는 4개로 갈라진다. 핵과인 열매는 9~10월에 붉게 익으며 겨우내 매달려 있고, 그 안에 4개의 씨가 들어있다.

원산지는 한국으로 전북 이남 해안의 산지에서 자라는 상록활엽소관목이다. 흔히 모감주나무 등과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추위에 약하며 유기물이 풍부한 비옥한 곳에서 잘 자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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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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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집은 비탈길 같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 번째 시집은 거의 수직 각도에 가까웠다. 이번 시집은 멀리 보기엔 경사가 완만해 보인다. 그러나 경사로를 걷는 이들에겐 여전히 비탈이다.) 어느 순간 경사는 아름답다. 말의 뒷다리에서 삶의 가엾음을 보고(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약속된 삼십 년에서 월부 책장사를 보고(격렬한 고통도 없이) 봄의 동네 풍경에서 목마와 머리 끄댕이 잡아채는 아이를 보는(다시 봄이 왔다), 유년 어느 동네의 골목 같은 시다. 골목의 사소한 마음들, 골목 거리에 대한 비열한 약속과 거기 묶인 비싸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에는 완연한 절망이고 희망인 마음들, 내일이고 모래인 마음들. 고통의 풍경에 익숙해져 면역의 시간이 다른 고통을 양산해내는 기묘한 시간의 기록.
 

   

 

내가 줄 쳐놓은 문장들을 바라보노라면 세상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젖가슴은 무덤을 닮았'고 술 먹고도 술 안 먹고도 헛소리를 하며(「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 '푸른 풀'은 '잦아들지 않는 푸른 경련'을 멈추지 않는다.(「푸른 풀이여」) 기억이란 여전히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고 있으며. 나는 여전히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자신을 헤'매는 삶을 산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외에 몇몇 문장들은 절실하게 현재형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았으며 그 뻑뻑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쳐도 '저리로 내달음은 급한 마음이 위험에 빠질까 두려움이고/ 이리로 내달음은 한번 와서 다시 못 갈까 두려움'(「누런 해 간다」)임도 안다. 절망할 틈 없이 살고 있으나 혹은 절망의 습관 속에 살고 있으나 '잔나비가 울 듯이 무언가/ 해 지기 전에 울고 있다'.

   

 

그러나 시의 경사로가 왜 이리 낯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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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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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시소 타기이다. 의미가 무거워지면 시가 맛이 없고 의미가 말소되면 읽을 수가 없다. 시는 그래서 음악 되기 이전의 승천 과정 같기도 하다.

안현미의 시는 시소 타기를 한다. 시소 타기를 하려면 계속 시소를 타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녀의 시는 의미라고 하기엔 무의미하고('나는 개의 가을과 개의 여름, 여덟 개의 아침을 지나왔습니다' 해독하기 어렵다) 무의미하다기엔 감각되는 어떤 울림을 지닌다.

시는 해소나 결말이 거의 없다. 단지 계속되는 길을 보여줄 뿐이다. 안현미의 시는 움직임도 능란하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맛이 있다.

때로 나쁜년 쓰네 싶기도 하고(요새 나는 질투의 대마왕이다) 어느 순간 청춘의 겹과 그녀의 언어가 겹쳐져 나는 페이지에 멈춰 손가락으로 추억의 어느 시공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그녀는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기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 거기에 문학적 감수성은 어떤 식으로 산화작용을 일으키게 되는가에 대해 그녀는 짚어낸다. <////>에서 보이는 인터넷 시대의 감각 양상이나 <해바라기 축제>에서 보여지는 다종의 문화적 코드가 집합돼(클림트, 고흐, 종교적 신화의 ) 현실과 문화적 코드 사이를 오가는 상상력, <post-아현동> 88만원 세대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옷핀으로 찔러놓은 듯한 독백은 따끔하고 유연하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처음만큼 맛이 신선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나의 감각 탓도 있을 .

 

 

 

 

 

'환타처럼 달콤하던 여름이여'(리라들)

'탕진해도 탕진해도 바닥나지 않는 가능성을 저주하는 밤이고'(어떤 섬의 가능성)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감했지만'(외롭고 웃긴-*최창근,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

'우리는 모두 노래들인지도 몰라/ // 우리는 모두 울음들인지도 몰라/ // 사나운 허무들과 싸우는 영혼들'(중얼거리는 나무)

'부표처럼 출렁이고 등대처럼 친절한 오후'(어떤 섬의 가능성)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와유)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을 받는 방법은 선택할 있다, 빅토르 프랑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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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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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명해졌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차치하고라도남해금산보다도 간명해졌다. , (), 당신, 그대 등의 어휘 속에서 '사랑'하거나 '서러워'하거나 '슬퍼' 뿐이다.

아픔을 통해서만 살아있음의 징조를 깨닫고(『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뒷면), 당신을 떠남으로써 당신을 사랑하는(『남해금산 뒷면) 역설은 시집 전체에서 생생하나 어조는 차분하고 정갈하다. 시집을 읽다 김소월이나 타고르를 떠올리기도 했다.

1990숨길 없는 노래」로 소월시문학상을 받을 발표한 수상 소감이라고 한다. 이후로 산문집에 실리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가 글판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지도 어언 십 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시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는 당신의 삶과 어떤 등식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받으면  이내 말문이 막히고,  내가 어떤 유의 대답을  하더라도

부분적인 진실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을 갖게 된다. 하기야  그러

할 때의 막막함, 무수히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할 수 없음이야말로 시에 대한

나의 애정의 가장 근접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매혹의 근거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객관화되었을  때이

다. 사랑의 객관화는 사랑의 박제화의 길목이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불

러일으키는 요인들을 넘어서 존재한다.

 

 

  어떤 근거로 시에 대한 나의 애정을 설명하든, 나의 애정이 시에 대해 어떤

개념적 형태를 부여하든, 나의 애정은 그것들에  앞서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에 집착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의 맹목성을  강조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여하한

합리성, 여하한 결정론을 뛰어넘는 사랑의 위력이  우리 삶의 동력이며  의미

이며 깊이라는 점에서이다. 나에게 시의 의미는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의미

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방법적· 구체적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시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방법적  이행

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

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시의 의미는 삶 앞에서  시가 스스로를 부

정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렇다면 '이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거창한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다시금 동어반복의 늪에 사로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나에게 삶이

란 주어진 현실적인 제약들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내가 살아내려

는 노력을 기울일 때 이 제약들은 나의 삶으로 의미화된다. 요컨대 삶은 삶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 노력의  주체는 구체적 현실에  자각적

으로 감응하는 '깨어 있는 의식'이다. 나는 그 의식을 '나'라고 부른다. '나'가

현실의 제약들에 피동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은 생래적으로 지금,이곳이 아

닌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문에 '나'는 현재의 상황을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이

곳이 아닌 세계에 대한 믿음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삶이란 지금, 이곳이 아닌

세계에 대한 믿음의 이행이다.

 

 

  늘상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삶이란  '집으

로 가는 길'이다. '나'의 '집'은 현실에서 찾아질 수 없다. 내가 '집'을 발견하

는 순간, 보다 정확히 말해 발견했다고 믿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  삶

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현실

에서 '집'을 찾는 노력들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한 포기는 '나' 자신의  존재

를 부정하는 일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찾아야 할 '집'

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그럼에도  현실에서 찾아야만  한

다는 믿음 사이의 모순 위에 존재한다. '나'가 그  모순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될 때 출세간(出世間)의 초월주의나 입세간(入世間)의 현실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 양쪽 극단에서 보자면, '나'의 삶은 '덜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덜떨어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 집으로 가는 길은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를 얽매는

현실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할 '집'을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삶은 '숨은 그림 찾기'이다. 삶은 '나'의 현실이 곧 '나'의 '집'이라는  불가능

의 등식을 꿈꾸는 행위이다. '꿈꾸기'는 삶의 고유한 호흡 방식이다. 삶은 불

가능을 호흡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현실의 제약과 맞싸우는 '나',  즉 깨어 있는  의식의

편에서 이야기해왔다. 의식과 현실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그러나 양자는 그

관계 속에서만 각기의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식의 편에서 볼 때, 현실

은 부정적 '현실'이다. 바꾸어 말해 현실은 진정한 '현실'의 부재로서 확인된

다. '현실'의 부재가 욕망을 낳고,  욕망이 상상을 낳고, 상상이 믿음을  낳고,

마음이 '현실'을 낳는다. 이와 같은 순환론적 폐쇄성은 다시 말해  의식과 현

실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의식을  우선시킨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하여

어둠, 불안, 절망 등은 높은 덕목으로  간주되는 반면, 원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 섭리, 자연 등은 고려의 여지 없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의식의  일방적인 승리는 결코  바람직한 혹은  자연

스러운 관계는 아니다. 좋은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고 변화되는 관

계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된 현실은 의식의 편에서 바라본 현실에 지나지 않

는다. 즉 현실은 의식을 제약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의 편에서

바라보자면 문제는 달라진다. 현실은  결코 의식의 제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의식의 편에서 바라본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실

은 의식의 눈이 간파하지 못하는 '세계'의 극히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다. 그 '세계'는 나의 깨어 있는 의식뿐만 아니라, 잠들어 있는 의식, 깨지도

잠들지도 않는 의식, 요컨대 나의 전부를 함축한다. 나의 깨어 있는  의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세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 갇혀 있음은  깨

어 있는 의식의 편에서 느끼는 것이지, '세계'의 편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편에서 보자면 그 갇혀 있음은 들어 있음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

도 세계는 '나'가 찾아 헤매던 '나'의 '집'이 된다. 이제 '세계'는 '숨은 그림'

이 아니라, '되찾은 그림'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한번 더 뒤집어 생각하면 '세계'가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은  나의

존재에 의해서이다. 즉 '세계'는 나에 의해 인지됨으로써만 '세계'로서 존재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세계'는 서로가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

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는 나에 의해 태어나고  나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나는 '세계'를 향해  다가감으로써 나의 '집'을 발견한다.  부분인

내가 전체인 '세계'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이야말로 이 관계의 종국이 될  것

이다. 확실히 이 행복한 관계는 앞서의 '나 - 현실'의 적대적 대립  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 - 현실'의  대립적 관계는 '나 - 세계'의  화

해적 관계를 위해 부정되고 극복되어야만 할 것인가.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이란 의식의 눈에 나타나  보

인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세계'를 향해  다가가기 위

해서는  현실이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계'와 만날, 현실의 대립항인  의식은 그것이 갈망하는 '집',  즉 '세

계'라는 '숨은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 - 세계'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나 - 현실'의 바탕 위에서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근자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사유는 대체로 '나 -

현실'의 관계에 집중되어왔다. 내가 나의 글쓰기를 '부패의 연구'라고 이름 지

었던 것도 그러한 문맥에서이다. 그런데 근래 나는 '나 - 세계'의 관계에 주목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나 - 세계'에  대한 관심이  '나 -

현실'의 관계의 전면적 부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는 부성적  현실

과의 갈등으로부터 모성적 세계와의 화해로의  이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요즈음  나는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 앞에  서 있다. '당신' 앞에

서 나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갖는다. 처음으로  나는 '당신'

이라는 '세계'와 연애한다. '당신'은 내가 찾아 헤매던 ' 숨은 그림'이고,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

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깊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단순함을 호도할까 두렵다. 나의 조바심이 '당신'의 깊이를 가려버릴

까 겁난다. 또한 나는 머지않아 '당신'에게서 '당신'이라는 이름까지 벗겨드려

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 이름은 내가 '당신'에게  드린 속박이므로,  '당신'은

자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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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미운 사람들에 관한 책 그림책 도서관 10
토니 모리슨.슬레이드 모리슨 지음, 파스칼 르메트르 그림, 노경실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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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빌려놓았다.  

어떤 10세 아동이 내게  

"우리 엄마는요 저한테 구몬 수학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래서 제가 구몬 수학 다 했는데 그러면 너 지금 대드는 거야 이래요. 다 해서 다 했다고 하는데 그게 대드는 거예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다른 10세 아동은  

싫어하는 것을 적어보자는 나의 말에 따라 친구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왜 걔가 싫냐고 묻자 

"얄미워요." 

라고 대답했다. 

"왜?" 

라고 다시 묻자  

머뭇거리고 삐죽거리다 말았다.  

결국 걔 얘기는 적지 않았다.  

 

어쨌든 두 10세 아동을 위해 책을 준비했으나 

두 10세 아동과 결별한 관계로 책은 보여주지 못했다. 

10세나 11세 아동들이 

가지세요 라고 준 두유를 한 시간 반 뒤 다시 그것을 슬그머니 만지며  

"저 이거 먹어도 돼요?' 

라고 묻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으므로 

아마 두 10세 아동과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몹시 얄미워져서 

다른 일을 하려다가도 이 책이 방구석에 뒹구는 것을 보면  

집중을 하지 못하고 만다.

 어쨌든 이 책의 가장 멋진 부분은 

 

 

 

 

이 부분인데 사진을 찍을 의욕이 자꾸 저하되어 대충 찍어 글씨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써보자면 

"얄미운 짓을 할 땐  

어른들도 아이 같이 보여요." 

"그렇다고 얄미운 짓을 하는 아이가 

어른처럼 보이는 건 아니에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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