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여자들
설재인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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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이상문학상상작품집상작을 보고 다음으로 . 훨씬 재밌다. 엄마가 동성애자인 이야기. 떠나버 엄마 여자친구를 찾아 엄마골을 들고 동남아로 이야기. 담담하게, 그린다. 모 인생을 긍정한다. 그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며.

 

 

번째 이야기 동남아국에서 꼬치구이 팔던 여자생을 들려주는 도마뱀과, 도마뱀은 그녀가 한국으로집와 아이 낳으라는 종용 속에 겪은생을 이야기해주고 나 그녀를롭힌 시어머니 손녀일 있다며, 이야기가 끝난다.

 

번째 이야기에서 울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며, 교사가 되자, 신붓감 일순위가 되어 매 직장 술자리를 돌다 지하철에서 잠이 들고, 20 지하선도를 그리 남자친구를올리는 이야기. 어떤 고달, 아주 이해되 고달, 이 수도 저 수도 없이 속으로 흘러가 부조리하지 어쩔 없이 그곳에 적응하고자 술을 마시고 마음과 상관 없는건에합한 연애를 하다 어느, 술에 취해 지하철에서 들다 깨어난….

과거 같아 울었다. 같지는 않지만 내가 짊어진 무게 짊어진 사람의 이야기라…

여전히 짐은 그대로인데 편해져, 어찌 해야 모르겠는 상황에 어쩌면 길을 갔더라면 생각하다가도 그러 힘들었을 거야 하며…목은.

 

설익은설도 있는데, 내게 ‘지구울이면’이나 ‘내가 만든 여자들’, ‘삼백칠십오 년의벤더, 그리고 남아프리카 원산지의 크크크’랬다. ‘바지 봉지’도딘가 울리지만 백퍼센트는. 삼교리까지전거 타고 숭아밭에서 편씩 읽었다. 850 정도 행나무 정자에서도 읽었다. 앞으로 낮에는 좋으니 들고 나가 벤치 하나마다 챕터씩 읽고 생각이다. 그래도 읽게 같은 있다.


어떤행이나 만남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가성으로서 남성중심 사회 부조리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해내 엽기적인, 그러나 속시원 방식들을 그려내며 현실에서는 것들을설에서는능하게 같은 있다. 그 같은 존에 내가 읽던 소설가들 점이기도 하다. 진주 책방에서 일하, 말에 따르자 현역처럼 읽는다는 병진이가 추천해설인데, 역시 병진이 싶다.

 

이야기 상정하고 끝까지끌어간다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소설적이라는 틀에 갇혀 어떤 것을 놓친 아닐까. 그게 뭐냐면… 절실함 같은 . 그런가 하면  어디 쓰는지도 모르겠는 에너지를 쏟다 보면 화가 나는 사실. 그동안의 실패의 좌절감 같은 후끈 밀려드는 것도 사실. 감정이 나를 추동시키지 않는데, 사람은 그런 좌절감따위 개나 줘버려라며 때로 수다스럽게 그러나 절박하게 한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응어리를 풀어내고 말겠다는 그런 의욕이랄까, 실제로 작가의 말에서도 자신의 글쓰기는 토로이고 치유이고 반성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에너지가 글을 읽게 한다.

 

특히 '회송' 읽으며 엉엉 울고 나서 삼교리 막국수에 자전거 타고 가서 읽고, 집에 와서 읽고, 오늘 노브랜드로 달걀이랑 초고추장 사러 3km 정도 걸어갔다가 중간에 신리천에서도 읽고, 집에서 읽었다. 그전까지는 이렇게 열심히 읽지는 않았는데. 그랬다.


혹시 책방 들여놓아야지.



20210219

 

그렇게 병을 딸 수록 속에 있는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당연히 기쁘고 재미있는 이야기보단, 슬프고 화나는 이야기들이, 물결치며 테이블 주위를 흘렀다.
- P182

집에 같이 가자. 언니가 데려다줄게. 집에 가자. 산책하는 것처럼 천천히, 같이 가자. - P195

자기 자신의 안에서 첫 번째 아이, 두 번째 아이, 세 번째 아이……를 수없이 분할해 재조립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모습을. 수완의 안에서 내내 울고 있던 또 다른 수완을 끄집어내 그 아이의 세계를 만들게 하는 일을. 그 아이가 자신이 주인공인 세계를 걸으며 난생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고 스스로의 자취를 관찰하게 하는 일을.
- P242

수완이 조립해 다시 만든 수완들이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서로 싸우고 화해하며 응어리를 풀었다. 수완은 그렇게 자신의 내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얼렀다. 글을 쓸 때마다 하나 두 개의 수완이 명치 근처를 꽉 막고 있던 울음덩이를 토해 내곤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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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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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앞의 챕터를 읽으면 책을 끝까지 읽을지 말지를 정하게 된다. 끝까지 읽을 마음이 없는데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끝까지 읽어야지 하는 결심(?) 드는 책은 계속 잡고 있게 된다. 오랜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누구 생일인 사람이 있으면 사줄까 싶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정도는 써야는 아닐까, 그래야 글을 쓴다고 있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깊이 있는 사유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글을 좋다고 표시해두었다.

 

내가 보지 않던 , 보려고 했더라면 당연히 있었던 것들을 응시하고 보임 뒤의 이치 속에서 '' 자리를 되돌아보는. 책을 읽다 며칠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이가 든다고 알게 되거나 깨닫는 아니라, 있는 것은 나이가 들기 전에도 있고 영영 보는 것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보지 못하는 아닐까. 바람의 흐름, 식물의 겨울, 관성 자연의 이치는 나이와 상관 없이, 있거나 보지 못하거나 여서, 그것을 보면 도를 통한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달라이 라마도 떠오르고… 그랬다. 예술이란,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무는 그 씨앗을 바람에 실어서 멀리까지 날려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한곳에 붙박여 사는 식물의 한계를 넘어 바람처럼 멀리 여행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씨앗은 수신인이 적히지 않은 편지처럼 어디론가 날아가서 바람이 멈추는 곳에, 가장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나무들은 정물이 아니다. 시간의 리듬이 다를 뿐 그들도 우리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불시에 찾아와서 어린 잎사귀들을 떨게 하고 때로는 가지를 흔들어 꺾는 광포한 바람에 자신을 꼼짝없이 내맡기는 동안 나무는 그 바람을 타고 바람처럼 움직이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바람이 되는 법
- P23

오늘 아침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이 바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바람이 되는 법, 바람처럼 나타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물들을 쓰다듬고, 멈춰있는 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법, 그리고 때때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다시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바람이 되는 법 - P24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한순간의 소리를 1분, 한 시간, 하루 또는 1년으로 늘려놓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본다. 소리의 총량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유리잔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하필이면 깨지는 유리잔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삶은 이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사건의 과정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기억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연장된 사건의 미세한 파편들로 이루어진 안개 속에 있다. 예감은 어긋나고, 하나의 사건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안다.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유리잔
- P51

그러나 우리가 삶이라는 사건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장된 시간 때문이다. 수만 분의 1초로 분할된 느린 화면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유리잔처럼 순식간에 부서져버릴 것이다. -유리잔
- P52

바위는 웬만해선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은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다. 바위는 머물기를 원하고, 물은 흘러가기를 원한다. 바위도 물도 지금의 상태가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우리는 사물의 관성이라고 부른다. 관성 뒤에는 중력이 있다. 사물을 관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중력을 설득해야 하고, 사물이 갖고 있는 질량이나 운동량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흐르는 물을 막으려면 거대한 콘크리트댐이 필요하고, 바위를 옮기려면 바위보다 훨씬 더 무거운 크레인이 필요하다. -관성
- P59

일상의 사소한 습관도,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대의 흐름도 바위와 물처럼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 세계를 그 관성으로부터 떼어내 올미고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그 일의 성패는 우리에게 그 관성을 능가하는 더 큰 힘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나를 지배하는 관성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들어앉은 타성과 편견의 바위들을 끌어내고, 익숙한 방향으로만 흐르려는 생각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힘이 나에게 있는가. -관성
- P59

식물은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안다. 헤어져야 만난다는 것, 버려야 얻는다는 것,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겨울이 오기 전에 정든 잎들을 남김없이 떨어뜨려야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눈부시게 피어난 꽃잎들을 한순간 바람에 날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빛나는 날들에는 끝이 있다. 작은 풀 한 포기도 이것을 알고 있다. 미련과 회한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는 우리 인간보다 낫다. -씨앗 - P87

늦은 봄날, 비어 있던 땅을 갈아 자갈을 걷어내고 씨앗을 뿌렸다. 꽃씨 속에는 그 꽃의 전생이, 저 아득한 지질학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이 들어 있다. 씨앗의 기억은 단단한 껍질 속에 나 있는 어둡고 비좁은 터널을 통해 미래로 잠입한다. 멀리 가기 위해서 식물은 모래알처럼 작고 하찮은 광물의 모습을 취한다. 어디선가 다른 햇살과 바람 속에서 다시 꽃피우기를 기약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떤 곳,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향해, 수천, 수만 분의 일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실어 보내는 저 무모한 낙관주의자들을 보라. 굽힐 줄 모르는 저 희망의 화신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라. -씨앗 - P87

뒷마당의 키 작은 꽃나무들은 겨우내 무엇을 하는가.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과 붉은 꽃으로 한껏 제 모습을 뽐내던 영산홍과 철쭉이 몇 달째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정지 화면으로 창밖에 멈춰 서 있다. 아침에 박새 몇 마리가 다녀가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천천히 제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밖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그것들은 바짝 마른 잔가지들을 사방으로 뻗친 채 잠을 자는지 꿈을 꾸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꽃나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온갖 풀벌레와 잡초들도 같은 모습으로 이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식물의 시간
- P91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가여워할 수 있을까. 그 작은 것들이 하나같이 무자비한 자연과 맞서 바위처럼 묵묵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안달복달하는가. 매 순간의 공허를 뭔가로 채워 넣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의 조바심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가소롭게 비칠까. 혼자 있어서 외롭다느니 우울하다느니 삶이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푸념조차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그렇게 내 속에 숨어 있는 식물의 시간을 깨우는 새해가 되기를 겨울나무들 앞에서 소망해본다. -식물의 시간 - P91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에 응답하듯 진은영 시인은 "내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이여 /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사라져버린 모음들 / 손을 담그기 전에 흘러가버린 강물이여"라고 쓰고 있다. 둘은 다르지만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시인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의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을 호명하는 사람이다. 다루는 재료가 다를 뿐 미술가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것을 다른것들로부터 구별하고, 그것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그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들 속에 섞이고 강물처럼 흘러가버릴 경우가 예상된다는 뜻이다. -이름에 대하여 - P101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그 이름으로 부르는 대상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잊으면 다 잊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면 과거를 기억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저 해보는 일이 아니다. 이름은 현재에 묶여 있는 수인인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탈주하게 한다. 지금 여기 부재하는 것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안 보이는 나라‘를 보이게 한다.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주어진 의무와 필요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이름에 대하여
- P102

그러나 이름은 영원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원래 가리켰던 대상을 불러낼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이름을 버려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을 부르려면 그 이름 없는 것들에게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예술가란 죽은 이름들, 낡고 더럽혀진 이름들을 지우고 아직 이름이 없는 것들, 새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것들의 이름을 새로 쓰는 사람이다. 예술가로서 이름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이름들을 부르느냐가, 그 호명이 한낱 잡담과 소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름에 대하여
- P103

나는 연필 끝을 통해 전해지는 켄트지의 촉감과 그것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거기서 허용되는 자유, 그 위에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일 수 있고, 마냥 멈춰 있을 수 있고, 또 언제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딱딱한 A4 용지에 볼펜으로 쫓기듯 써내려가는 공문서 같은 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가 거기 있다. - P178

실용과 경제의 이름으로 노인과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려는 비정한 정치에 단호히 반대하는 엄숙하고도 격정적인 설교에 이어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학자들, 집 안에 홀로 고립된 사람들이 차례로 호명되며 그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뜻밖에도 그 목록 속에 ‘예술가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 예술가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곳에 예술가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내가 그 기도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길이 되는 예술을 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술의 이름으로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P201

밤새 퍼붓던 비가 새벽녘에 그쳤다. 건너편 산자락은 아직 낮은 구름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젖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을 새들은 부산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어제 내리는 앞으로 여러 날 동안 그렇게 골짜기를 흘러내려갈 것이다. 비가 오는 시간이 있고, 비가 가는 시간이 있다. 바위와 모래 틈 사이에 머무는 물방울들의 시간, 그 시차가 숲을 만들고 풀벌레를 키우고 새들을 먹여 살린다. 빗물이 곧바로 강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순환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나무와 풀과 들짐승들이 자란다.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어제 내린 비 - P243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물방울이 겪는 숱한 우여곡절의 시간, 뜻밖의 급류와 흙탕물의 시간, 얼음처럼 차갑고 어두운 지하수의 시간, 누군가의 땀과 뜨거운 눈물이 되는 시간을, 우리도 빗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 내린 비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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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신서 114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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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엇인지 시대 분야를 훑어가며 찬찬히명한다. 학자의, 교수질에엇이 중요하며엇이 악덕(실천가로서 반박할 없는생들 앞에서 정치적장을 한다거나 가치 강요할 )인지명하는데, 정이 흥미진진하다.

 

 


물론 착상이 작업을 대신하지는 못 합니다. 또 작업도 착상을 대신하거나 착상을 억지로 불러낼 수는 없는데, 이것은 열정이 착상을 불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둘, 즉 열정과 작업이-특히 그 둘이 합쳐져서-착상을 유인해 냅니다. - P35

그러나 학문의 영역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람은 분명히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과업의 흥행으로서 무대에 함께 나타나는 사람, 체험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한 <전문가>와는 다른 어떤 존재이기를 증명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는 어디에서나 천한 인상을 주며, 또 그렇게 묻는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오직 과업에만 내적으로 몰두하는 자는, 이를 통해 그 자신이 헌신하는 과업의 정점에 오르고, 또 이 과업의 진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은 예술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P39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개개인은 이러한 완성된 예술품의 의의를 각각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완성>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 역시 <완성>된 작품에 의해 <추월당했다>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학문에서는 자기가 연구한 것이 10년, 20년, 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돼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며 더 나아가 학문연구의 목표입니다. 학문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그 밖의 모든 문화요소들의 경우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 이 운명과 목표에 예속되고 내맡겨져 있습니다. 학문과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학문에 헌신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 P41

<<국가론>>에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정열적 열광은 따지기 보면 그 당시 모든 과학적 인식의 중대한 수단 중의 하나, 즉 개념이라는 순간의 의미가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 체험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듯 보였습니다. 진, 선, 또는 용기나 영혼-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것들의 진정한 존재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 말입니다. 진정한 존재의 파악은 다시금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올바르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인식하고 또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는 듯이 보였습니다. - P48

레오나르도와 같은 예술분야의 실험자들과 음악분야의 개혁자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예술에 도달하는 길을 의미하였는데, 그 길은 그들에게는 동시에 진정한 자연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술이 과학의 지위로까지 높아져야 마땅하다는 것, 동시에 무엇보다도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보나 그의 삶의 내용으로 보나 학자의 지위로 격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레오나르도의 스케치북에도 깔린 야심입니다. - P51

그렇다면 학문의 성과는 아래와 같은 사람, 즉 실증적 사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실천적 입장만을 중요한 사람에게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한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유능한 교수라면,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의 가치입장의 정당화에는 불리한 사실들-즉, 학생의 당파적 견해에 비추어볼 때 학생 자신에게 불리한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 P65

왜냐하면 시대의 운명을 진지하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약함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 P70

우리 학자들은 여러분들에게 명료성을 얻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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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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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

목소리는 외로운 걸까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숨겨둔 말이 있고

말들이 문득 튀어나오고

그래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돼기도 한다.

삶처럼.

선생님 소설 제일 좋아서, 앞으로도 선생님 소설을 계속 보기로 했다.

 

이전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나는 어디까지 나인지

바라보다 보면 전염되는 것들 속에서 번지고 번지고…

경계가 모호해지고 말고

나른하게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낙천성 연습도슷하게, 세상의 부조리에 대응하다 죽어간 아버지, 그런데 정말 그게 아버지일까 나일까… 없이

 

 

 

연곡캠핑장에서는 '양구에는 돼지머리' 보았다. 쓸쓸하고 처연해져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남은 것들에 대한 소설이다. 잠시 연애 비슷하던 것을 하던 여성의 상갓집에 가고, 그리고 쓸쓸하고 처연해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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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아름다움 -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열한 갈래의 길 통섭원 총서 3
김병종 외 지음 / 이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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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을 강의하는 최재천 선생님은 뭐하시는 분이지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알고 보니 분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분이 아는 분들이 글인데, 그러니까 기획자인 건데, 그래도 좋다. 그래서 챕터별로 화장실에서 보기 좋겠다 해서 화장실에 뒀다가, 갖다줘야 때인데, 김혜순 선생님의 글이 좋아서 이것만 보고 갖다줘야지 하고 놔두고 있다.

 

지금 나오는 노래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도망와서 읽기 좋은 글이다. 나는 지금 도망와있거든. 짐을 싸들고 도망왔고, 거기 책도 몇백권인가 있고 읽은 책도 많은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고 있는 거다. 여기 가장 좋은 변명은 누가 읽을 책을 사느냐는 유명 작가님의 말인가… 어쨌든 . 어떤 책에는 영혼이 조금 깃들어 있고, 나는 그런 책을 좋아한다. 영혼이 뭔데 물으면 나도 대답을 수는 없겠지만, 그게 보일 , ㄱㄴㄷㄹ ㅏㅑㅓㅕ 조합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책이 좋다. 내가 여기 도망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혼을 돌보고 싶어서. 책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 각각의 영혼들이. 그래서 계속 읽고 있다.


20210504

80퍼센트의 슬픔과 20퍼센트의 대책 없는 약동. 이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건용 - P27

부처님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다 부처라고 한다. 다만, 우리는 부처가 아니기에 삶의 아주 작은 순간에만 그 눈을 갖게 되는가 싶다. 세속의 관성에서 깨어난 그 짧은 순간에 본 그것을 나는 애써 붙들고, 그것을 음악(또는 시 혹은 다른 무엇)으로 그려 이 일상의 공간에 남겨보려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모범답안 같은 것은 없다. 타고나는 것일까? 혹은 연습해서 얻는 것일까? 그보다는 좀 더 다른 차원의 ‘느닷없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용 - P29

나는 시인은 귀로 시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말이 그친 곳에서 씁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두 귀로 말 아닌 말을 씁니다. 귀가 하는 말, 그것이 시입니다. 시는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어서 신음, 한숨, 노래, 비명과 비슷합니다. 이형관도 비슷합니다. 김수현의 시론으로 하면 기침, 가래, 침과 비슷합니다. 시인은 귀로 들어온 것을 구축해서 귀로 씁니다.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는 이미지를 실제의 내 귀로는 들을 수도 없는 ‘귀말’로 씁니다.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의 사후를 씁니다. 시인은 마치 번개 뒤의 천둥처럼 번개 속에서 천둥을 씁니다. 이런 것 때문에 플라톤이 시인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데아를 두 번씩이나 모방해서 겨우 하는 짓이 다른 세계, 아무것도 아닌 세계, 부재의 세계를 읊어대는 자들. 그러니 추방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귀로 두 번 걸렀으니 얼마나 국가에 위해한 말이었을까요? -김혜순

- P92

귀는 눈에 비해 그저 구멍입니다. ‘오늘 나는 이 구멍으로 무엇을 들었나. 오늘 내 귀에 들어온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소리가 내 팔이 되었나. 내 머리가 되었나. 내 꿈이 되었나. 아니면 저 들판이 되었나. 저 파도가 되었나. 그러나 이 두 구멍은 나선형으로 구부러진 채 수동적으로 ‘있었을 뿐’입니다. ‘너와 내가 말하고 있을 때 귀는 무엇하고 있었나.’ 그러면 귀가 대답합니다. ‘나에게 붙어서 나 아닌 것인 것처럼, 침묵처럼 가만히 있었지.’ 나는 또 질문합니다. ‘너와 내가 마주 서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들었나. 그때 누가 와서 말했나.’ 그러면 귀가 대답합니다. ‘우리 사이의 침묵처럼 귀가 와서 말했지.’-김혜순 - P93

귀는 어두운 방입니다. 과거의 우물입니다. 구멍입니다. 내가 이승의 마지막에 도착하는 구덩이의 현현입니다. 귀로 말한다는 말은 내 구멍을 뒤집어 영혼으로 말하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귓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어두움이 차 있을 뿐. 노자의 ‘현, 곡, 빈’처럼 그저 비어 있을 뿐, 그저 깊을 뿐입니다. 이 깊고 텅 빈 것에 대한 내밀한 몰입이 귀가 하는 말, 시 쓰기입니다. 귀는 어머니의 자궁 속의 산도처럼 나선 달팽이형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시는 그 깊은 것, 안으로 무한한 것이 말을 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서는 더 집중되고, 감정은 더 짙어지고, 이미지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합니다. 그것이 공기 중에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몸이 반응하게 됩니다. -김혜순 - P95

시인에게 귀는 몸의 축소판이자, 몸 자체입니다. 시인은 귓구멍처럼 텅 빈 자이지만, 귀처럼 열려 있는 자입니다. 귀의 말은 그것이 퍼지고 공명하는 하나의 파장, 하나의 움직임, 공기 중에 퍼뜨린 생멸의 밀도입니다. 그러기에 한의학에서는 귀에는 우리의 발바닥이나 손바닥처럼 신체 전체의 혈 자리가 모여 있다고도 합니다. -김혜순 - P95

귀는 코와 입처럼 하나가 아니라 들입니다. 입이 둘이라면 두 개의 입이 떠드는 말을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눈과 귀는 왼쪽과 오른쪽의 공간적, 시간적 불일치로 입체를 감각합니다. 귀는 맥박 치듯 진동으로 듣고, 진동으로 말합니다. 그리하여 귓속에는 3차원적 소리의 건축이 들어섭니다. 그 건축을 따라 귓속 서방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오솔길을 지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꽃밭이 나옵니다. 꽃나무가 흔들리고, 부엌 문이 열리면서 엄마가 나오고, 장지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기침을 하며 내다보는 옛집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기와지붕에 내리비치는 햇살과 바람, 저녁의 빛깔이 돋아나옵니다. 귀는 부피를 듣느라 두 개입니다. 안팎이 있고, 칸칸이 방이 있는 집, 그 따스한 건축물 속에 귀는 태아처럼 벌거벗은 채 맥박 치는 나를 안치하고 있습니다. 귓속에는 은밀한 익사체처럼 3차원의 내가 숨어 있고, 내 속에는 귀가 또 열려 있습니다. -김혜순 - P96

눈은 눈꺼풀이 있어 자의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김혜순 - P96

귀는 태아처럼 생겼습니다. 태아로 태어나 태아로 죽는 기관. 오죽하면 태아 가르강튀아가 정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귀에서 탄생한다고 했겠습니까. 태아는 물속에 잠긴 고래처럼 듣습니다. 나는 나의 쌍생아를 두 손으로 덮어옵니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참 시끄러웠습니다. 살수차가 한 대 지나가자, 유람선이 붕붕 기적을 울리고, 그리고 출근 전동차가 힘겹게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의 뱃속은 몇 개의 전동차가 엇갈려 지나가는 철로 같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번도 쉬지 않는 엄마의 맥박은 소리로 만든 나의 둥우리였을 것입니다. 나는 귀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 소리들을 오로지 듣고 또 들었을 것입니다. 몸 전체가 하나의 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의 그 소리들이 심장을 하나 만들었을 것입니다. 쿵쿵 울리는 소리의 근원을 말입니다. 나의 첫 태동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팔에서 뻗어 나와 갈라져 각각 이름이 다른 손가락 열 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김혜순
- P97

시인의 귀는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그렇게 ‘있습니다.’ 토끼 굴속의 아기 토끼처럼 그렇게 ‘있습니다.’ 깊은 바위 속의 물고기처럼 그렇게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도 언어도 아닌 침묵과 같은 자신의 정체를 듣고 ‘있습니다.’ 언어에 의미가 붙기 전, 그 박동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리를 듣고 있지만, 난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김혜순
- P97

고래의 노래는 귀로 들리지 않고, 몸을 진동시키면 들려옵니다. 고래의 노래는 귀의. 노래처럼 몸으로 직접 옵니다. 뼛속으로 직접 옵니다. 폭풍처럼, 번개처럼, 죽음처럼. 그 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면 두 손이 모아집니다. 태아처럼. 눈이 감기고 몸이 웅크려집니다. 태아처럼 자폐아는 사람보다 고래와 더 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습니다. - P98

마음은 귀입니다. 귀처럼 고요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귀는 마음처럼 존재가 아니라 경험이며, 실체가 아니라 요체입니다. 나는 지금 ‘귀’라고 불리는 존재, 실체에서 ‘귀로 쓴다’라고 말해지는 어떤 경험을, 그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귀처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어진 파이프입니다. 이 마음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우리의 곁에서 ‘소리’라 불리는 것이, 공기 분자를 흔드는 사건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동이 일어납니다. 소리의 파동은 물결처럼 흔들려 고막을 진동시킵니다. 몸속의 가장 작은 뼈들로 보이지도 않는 털들이 수초처럼 귓속 어두운 곳에서 흔들립니다. 파이프 속은 텅 비었지만 그것이 울리면서 요체인 마음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텅빈 파이프로 소릿결이 몰려들어라 귀의 수면을 진동시키지 눈, 코, 입, 귀 같은 여러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내 얼굴, 그 가면에 표정이 떠돕니다.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립니다. -김혜순 - P98

내 목소리가 내 얼굴과 가슴의 리듬에 반응해 시시각각 음색을 달리합니다. 이 발화의 순간들이 있기에, 그 소리가 순간적으로 사라지기에 ‘귀’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혜순 - P98

귀, 검은 구멍은 일평생 들어온 소리를 내부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몸을 흔들던 진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부르던 노래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진동이 마음이 됩니다. 마음이 말을 하는 순간,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소리가 올라옵니다. 귀가 연주를 시작합니다. 시인이 그것을 받아 적습니다. 시는 마음의 리드미컬한 연주를, 음악을 받아 적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시는 귀가 연주하는 음악에 실려 떠오릅니다. 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감각했다 마음이 종이를 두드립니다. 검은 글씨가 리드미컬한 언어 속에서 행진합니다. 의미를 짓뭉개고 전진해야 이미지가 박동합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좋을, 박동하는 언어가 펄떡입니다. 들리는 생각이 그림을 그립니다. -김혜순
- P98

귀는 눈보다 코보다 입술보다 ‘빚어졌다’고 말하기 좋습니다. 귀는 꼭 손으로 빚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귀만은 아주 오래도록 이곳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져버린 없는 세상을 들을 것 같습니다. -김혜순
- P99

귀의 부속 기관들은 매우 작습니다. 귓속에 들어있는 뼈들은 인간을 만들고 남은 뼈들을 주워다가, 장인의 골방에서 세공했을 법한 작은 것들입니다. 그 작은 것이 크고 깊은 곳을 향합니다. 그 작은 주머니 속에 집채보다 큰 소리가 깃듭니다. 약한 것 속에 엄청난 소리들이 깃듭니다. 속삭이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 꽃이 시대는 소리, 먼 곳에서 눈꺼풀을 닫는 소리, 붉은 소리, 푸른 소리 같은 그 작은 기미가 우주의 세밀화를 우리 앞에 현현하게 됩니다. -김혜순
- P99

귀는 견디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귀 안으로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습니다. 거기 그 머나먼 내부의 여러 갈래 길들 속에 메아리의 집이 있습니다. 거기로 스며들어간 소리들이 혈거인들처럼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귓바퀴를 울리며 쏟아져 나갈 날을, 메아리가 돌아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혜순
- P106

귀로 글쓰기는 ‘당신의 없음’ 속에서 시작됩니다. 귀는 항상 사후에 ‘씁니다.’ 내가 지금 목련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목련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움이 목련을 쓰게 합니다. 나는 목련을 노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련을 다시 불러내려는 귀의 애타는 목마름, 그 깊은 구멍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귀는 목련과 나 사이, 그 사이, 목련의 신기루, 그 나라를 운행합니다. -김혜순
- P106

내 목소리가 죽고, 내면의 소리마저 죽고, 잡음마저 사라져 침묵이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해야 했기에 침묵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입을 열면 지금, 여기, 나에 있고, 침묵하면 지금, 여기, 나를 떠나 멀리 가기에, 그렇게 깊어져가기에 침묵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김혜순
- P107

나 떠난 세상에 귀 하나가 떨어져 내가 살던 세상을,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귀는 축적이 아니라 삭제의 기관입니다. 귀는 침묵의 입술, 그 귀가 입을 열어 말하면 세상은 침묵의 파동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므로 귀로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뒷면, 관념의 뒤편, 목소리와 잡음이 사라져버린 그 뒷면으로 말한다와 유사한 말일 것입니다. 마치 외계인과 만났을 때처럼, 입 없이 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김혜순
- P107

귀는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귀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는 없지만, 귀를 가지고 세상에 쓸모 있는 일을 할 순 없지만 귀는 여기 있습니다. 여기 우주로 열린 커다란 귀가 하나 있습니다. 그 귓속에 들려오는 언어 뒤편의 세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언어 뒤편의 세상은 내 귀의 어두운 구멍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접속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 귀로 소음을 내고 있는 삼라만상의 그 무상함을 말해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헤치고 나온 그 태초, 용암이 흘러 다니던 그 태초의 별의 세상을 말해봅니다. 그 광활을 말해봅니다. 세상 이전의 고독한 침묵을 맞이해봅니다. 이름 거창한 것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아봅니다. 내 이명과 난청으로 망가진 귀를 솜처럼 둘러싼 이 침묵, 망가진 귀가 찾은 사물들의 침묵과 저 먼 곳의 굉음, 그 선율들의 시작을, 그 선율이 지은 무언의 음악적 건축을 순간적으로 현현해봅니다.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지금, 여기 불현듯 현현해옵니다. -김혜순 - P108

그럴 때 내 귀는 혼돈 이후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다 들어온 침묵처럼 그저 텅 비어 온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김혜순 - P108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없다. 변화하는 것만이 진실로 아름답고, 변화해야 생기를 얻을 수 있다.
-김현자 - P123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슬퍼 몸부림칠 때, 그것이 곧 춤이다. 기쁨에 겨워 뛰며 서로 껴안을 때, 그것이 춤이다. 삶과 춤은 결코 둘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냥 아름다워서만 되는 것은 아니라 진정성과 참됨과 진실함이 깃들어야 하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행복으로 다가갈 때,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이런 마음자리가 없으면 그건 춤이라 할 수 없다.
-김현자 - P127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할 때, 합의된 혹은 안정화된 정답이란 그렇게 쉽게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계에서 오관을 통해 감지되는 대칭성은 꽃이 벌을 모으고, 미인이 남자들을 이끄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자연계의 그 밑바닥에선 편향된, 즉 대칭성이 깨진 상태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정두수 - P143

루이스 칸은 이렇게 대답했다.
"건물의 벽에 햇살이 드리우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집이 항상 새로운 경이에 가득 차 있음을 압니다. 매일매일 빛의 질에 따라 한날의 푸른빛은 그날만큼 푸른빛이며, 다음 날의 푸른빛은 또 다른 날의 푸른빛입니다. 아무것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의 질료를 가진 전깃불은 단지 하나의 느낌만을 당신에게 줄 것이지만, 햇빛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집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시간의 순간순간만큼이나 그때그때의 새로운 분위기를 가질 것입니다. 이 집이 건물로 남아 있을 날까지 매일매일의 날들은 다른 날과는 다른 새로운 날이 될 것입니다.
-민현식 - P184

조선의 선비들이 만든 공간에 주목해봐. 그들은 공간을 비워두었다. 이렇게 비움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 공간의 성격을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 공간은 가치 중립적이다. 단지, 점유되기를, 햇빛과 바람과 어우러지길 기다리는 공간이다. 이 ‘비움’은 이렇게 설명된다.
-민현식 - P186

"여기서 의도하는 비어 있음은 상실과 외로움의 골이 깊은 허무, 배고픔의 고통이 아니라 고요함, 명료함, 투명성이다. 비어 있음은 소리 없이 반향을 일으키며, 충만해지려는 잠재력으로 완성을 향해 열려 있다. 비어 있음은 순간(시간), 장소, 상황의 사이에 존재한다. 비어 있음은 징검다리의 돌과 돌 사이와 같지만, 우리는 사뿐히 건널 수 있다. 음표 사이의 침묵과도 같으나 우리는 레가토로 부드럽게 연주할 수 있다. 비어 있음은 흔들리는 시계추가 정점에 도달해 멈춤 아닌 멈춤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민현식 - P186

아무래도 조금 모자라는 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닐까, 땅의 아픈 곳, 그것을 고치려는 시도가 자생풍수의 기본 사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정감 뒤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 뭔가 부족한 것을 채워가려는 정성, 뭐, 이런 연민의 정이 뒤에 깔린 게 아니냐, 감춰져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창조 - P204

거대하면 거룩하고 작으면 아름답다. 크면 숭고이고, 작아야 눈부시다. 작은 것들이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바람결에 흔들릴 때 사람의 마음도 흔들린다. 그때 빛이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액센트를 만든다. 그 광채가 숭고와 신화보다 순간의 눈부심을 만들고, 그 눈부심을 우주의 미소다.
-배병우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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