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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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마다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겠지만, 김기택의 시집은 유난히도 그 개성이 돋보인다. 김기택의 시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시들과는 다르게 차갑고 무뚝뚝하다. 또한 여리다. 이와 같은 상충되는 표현은 김기택의 시가 아니면 쉽게 어울릴 수 없는 개성이 된다. 김기택 시의 정밀묘사와 같은 세부에 대한 언어를 통한 접근은 그의 시를 차갑게 한다. 메스를 드리댄 듯한, 감정이 절제된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세부에 대한 묘사는 또한 시인의 귀가 작은 것을 향해 열려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시집 속에서는 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한 시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동원한 것이다.

'문고리는 다시 즐거운 소리를 내며 녹이 슬기 시작하고 깎아내버린 사과 껍질에서는 당분이 썩는 소리가 야금야금 들리기 시작한다.'(「먼지의 음악」중)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고요하다는 것」중)

이처럼 김기택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운동을 멈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운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고요하다는 것」을 조금 더 인용해보자면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라고 시인은 말한다.

김기택의 눈은 마치 현미경처럼 사물을 꿰뚫으려 한다. 이와 같은 사물에 대한 치밀한 접근 역시 눈여겨볼 사항이다. 대부분의 서정시들이 인간의 정신에 더 깊이 있게 천착하려 하는데 반해 김기택은 사물, 육체를 통해 인간과 현상을 관찰한다. 이와 같은 관찰이 겉핥기 식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Ⅰ」에서 아이는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이다. 아이는 마른 몸으로 자신의 머리통과 같은 '텅 빈 그릇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김기택은 그 안타까운 풍경 속으로 접근해가는 언어조차 사물을 택함으로 해서 차갑고 무뚝뚝하게 자신의 감각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이와 같은 특징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의 절제된 감정이 이러한 표현과 어우러져 이룩하는 표정 때문이다. 버스에서 졸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 「졸음」에서 마지막 행을 주목해보자.

'버스 바닥에 굴러가는 슬픈 무게 한 덩어리'

무게가 되었다 머리가 되는 졸고있는 사람의 동작에서 시인은 조심스럽게 '슬프다'는 시인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지금까지의 무뚝뚝하던 그의 시는 이 순간 묵직한 언어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적 표출은 「병」에서 조금 더 나타나는데 시에서 '마음'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이다. 실재하는 것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시인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 역시 몸, 육체에 병이 난 상태에서(약해진) 이다. 이처럼 약하고 여린 것을 시인은 자꾸만 주목한다. 작은 것들이 얼마나 묵직한가를 시인은 끊임없이 주목하고 그것을 더 작게 축소함으로 해서 시인은 어지러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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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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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은 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시도하는가, 는 장정일의 시를 이해하는데 좋은 질문이 된다. 시의 서두에서 그는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햄버거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된다. 물론 중간중간 작가의 위트가 넘치는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은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 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이다.

이 마지막 연을 통해 우리는 장정일이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하게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장정일 시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문학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그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 장정일 시의 문법은 꽤나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현 문화를 비판한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서두의 ‘물렁물렁한 것들’이란 이러한 문화적 코드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특정 상표라던가 특정 인물을 지칭해 그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데 ‘엘비스, 리바이스, 캔트, 셀렘, 맥도날드’ 등등을 들 수 있다.(「,공기 가운에 들려 올려진 남자」, 「엘비스를 듣는 미국인」, 「낙인」, 「하숙」, 「신식 키친」, 「아빠」) 미국 문화에 종속된 우리의 문화와 그곳에서 노출되는 성적인 코드를 장정일은 그 특유의 재치로 이야기한다. 그의 어법은 다소 과격하고(‘영어를 못하는 무식한 제 3세계/ 젊은이들이여’, ‘양키들은 잔인하구나!’, ‘아빠 아빠 아무에게나 펠라티오를 시키는 버릇 없고 건방진 후레자식!’) 전면적으로 대상을 공격한다. 굳이 미국 문화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는 장정일의 시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이다.(「백화점 왕국」, 「전파 나무 나무전파」, 「구매자」)

결국 각 개인에게 시적인 것은 모두 다른 것이 된다.(그렇기에 이 세상엔 그리도 많은 시인과 그리도 많은 시가 존재하는 것일 테지만) 어떤 것에 대해 예리한 촉수를 갖는가는 결국 개인의 문제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앞부분 시들은 장정일의 촉수가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에 반응한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석유를 사러」와 같은 시들을 읽으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인간의 ‘야윈 슬픔’에 주목하고 그 슬픔과 피로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존재하는 안식과 평화를 꿈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는 그의 시집의 주요 경향이 되지 않는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시가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촉수는 현실적인 것들에 발을 뻗는다.

현실적인 것, 바로 옆에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러한 현상의 부조리함. 「아파트 묘지」에서 화자는 한 여자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따라가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은 단절 현상은 옆집에 사는 여자와 나만의 것이 아니다.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남자」와 「실비아 플라스에 빠진 여자」 두 편의 시는 같이 살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문화에 빠져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지 못 한다. 이러한 현상은 독자에게 쓰디쓴 웃음을 준다. 이 쓰디쓴 웃음은 장정일 시집을 읽는 동안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국립극장 초대권 하나 붙어있지 않’지만 어디서 이와 같은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만날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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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일기 세계사 시인선 50
유하 지음 / 세계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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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는 시란 무엇인가, 란 물음을 자주 갖는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이 하나로 존재한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질문하게 되고,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함에 절망하는 것도 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를 생각해볼 뿐이다. 유하의 시는 나의 이러한 태도에 힌트 혹은 실마리가 되어준다. 시는 신성한 것이다, 라고 나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내게 틀을 제공했는데, 이 틀은 어디까지나 수정 가능한 것이었다. 신성하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하의 시에서 보여지는 문화와 시의 공존 가능성이 시의 신성함을 해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렇지는 않다. 결국 시라는 것 역시 일종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둔 공간이라 할 때, 유하는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인이다.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 속에서 시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유하는 『무림일기』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해답을 시의 양태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유하에게 시는 비판의 장소이기도 하다. 자신조차 쉽게 흡수하고 있는 문화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의미를 유하는 시에서 밝혀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시집 중 무림일기와 영화 사회학이라는 제목 하에 쓰여진 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무협지를 통해 유하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잘못된 문화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칼날이 꼭 바깥으로만 드리워지는 것은 아니다. 유하는 이와 같은 비판을 서슴없이 시를 쓰는 자신에게까지 적용한다.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세상아, 놀자」, 「돌아온 외팔이」와 같은 시들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시쓰기에 대한 질문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적이 외부 세계로만 뻗어나가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한다.

그러나 나는 시가 인생의 잠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잠언의 형태를 띠지 않은 잠언으로 시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유하의 시는 하나의 실마리는 될 수 있을망정, 거기에서 머물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시는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 키위 울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나는 그 문 앞에도 당도하지 못했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일종의 무책임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의 가능성의 모색이 한편으로는 방법론에 좌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여러 편의 시에서 드러나는 그의 비판적 문화 읽기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재밌는 중얼거림으로 그치고 만다. 중도를 지키는 어려움에 대한 철학자의 말은 시에도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을 유하의 시는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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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수상록 범우문고 52
몽테뉴 지음, 손석린 옮김 / 범우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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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꿈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 부터 자주 이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이런 식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며 다시 이 말을 떠올리게 됐다. 몽테뉴는 확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며, 이전에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지만 그의 그러한 글들이 그의 신념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몽테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이 가끔은 너무 확고해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되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있어 솔직함으로 해서 면죄부를 받는다. 즉, 자신에 대해 솔직할 것을 그는 신념으로 삼는다.

또한 자신을 측정해보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의 약함을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세계에도 지배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인간들은 약자보다는 강자가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하려 한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이와 같은 내면의 진실을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공자는 70이 되면 마음의 뜻에 따라도 거스르는 바가 없다고 했는데,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며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물론 공자의 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몽테뉴는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몽테뉴 스스로도 이 수상록이 자기모순의 결함을 안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잡다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건들과 미확정의 상상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반되는 상상의 기록부이다’)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이 중 많은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되고 책을 읽는 중간중간 연필로 줄을 긋게 되기도 했다.

그의 글은 마치 산책을 하는 자의 느린 보폭 같다. 천천히 자신을 돌보기 위한 명상에 잠기는 자의 발걸음 같은 맛이 있다. 여유로운 정신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여유로운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나름의 상황이 주어져야 하겠지만, 그의 수상록을 통해 여유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여유로운 정신을 갖고 싶어지게 한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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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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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성복 시집을 펴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가 아름다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그의 언어에 있다. 그의 언어를 따르는 상상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혀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언어들이 그의 시를 따르다 보면 긴밀한 심리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과 그의 기억 속에 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자연적인 것들의 대응은 그의 시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속도를 따르다 보면 모순된 인간 조건 속에서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집 뒷면에 적힌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시적 화두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픔은 일상 속에서 무뎌지고 시인은 그 무뎌짐 속에 존재하는 망각의 징조를 통해 오히려 일상성을 뭉갠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여러 공간 속의 일상이 과격한 어조로 그려진다. 그와 같은 견디지 못할 일상 속에서 시인 자신조차 망각의 한 지점에 서있다는 것이 또한 그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은 재생임과 동시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아픔이 된다(' 그해 가늘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이와 같은 자기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이성복의 시는 힘겹게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이성복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가족 이야기이다. 여러 편의 시에서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주요 화두가 된다.('금촌 가는 길', '꽃 피는 아버지', '어떤 싸움의 기록', '家族風景' 등)

특히 '아버지'는 그의 시에서 쓰러지는 존재, 가장이지만 유약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인물이다.('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그밖에도 엄마나 누이, 형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 가족구조는 어딘가 어긋나있고 비틀려있으며 시인은 그와 같은 부패된 가족구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성복 시는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라는 그의 시 구절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와 같은 상상력의 발걸음인 동시에 부정의 발걸음이다.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를 꿈꾸는 것과 동시에 그는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가기를 꿈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 쓰기이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이와 같은 구절은 그의 시 쓰기가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그에게 시는 단 하나의 희망이요 살아있음의 경보이다. 아름다움을 꿈꿀 수 있는 자유이고 아픈 것들을 포용하려는 손짓이다. 그래서 이성복의 시는 아름답다. 그의 시는 추한 것들을 아름답게 덮어준다. 추한 것들, 아픈 것들이 꾸는 꿈을 이성복의 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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