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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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작품은 이번으로 두 번째 접한다. 그러나 카프카라는 이름은 내가 그의 작품을 몇 권이나 접했는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데, 아마도 그의 이름을 대할 기회가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아마 카프카는 현대문학에 있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작가일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에 대한 문헌이 그리도 난무하며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도 그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성'은 몽롱하다. '성'을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한 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닐까 싶었지만, 결국 카프카의 작품 전체의 분위기처럼 이 '성'이란 장소는 작품 내에서 정확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K'는 결국 '성'에 가지 못한 채 작품은 미완으로 끝이 나고 있다.

그렇다면 미완의 작품이 이다지도 유명세를 띠며 전세계적으로 문학인들에게 거론되는 이유는 뭘까(내가 이작품을 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에서의 격찬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성'의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결코 그 존재를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 몽롱함에 있지 않을까.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곳, 보여줄 듯 보여줄 듯 보이지 않는 곳- 그것이 바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을 카프카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이 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매우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시각안에서이며 '나'는 결코 '나' 이외의 무엇도 될 수가 없다. 많은 타인을 접하며 우리는 이 생을 살아가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나'이외의 무엇도 낯설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나' 또한 얼마나 미완성이 존재인가는 말할 나위도없다.

카프카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고, 'K'를 전혀 낯선 한 마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사실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K'의 유일한 목적인 '성'과 '클람'(이 목적성 역시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K'에게는 그것이 주 당면 과제로써 느껴질수밖에 없는)을 'K'는 번번히 자신의 성향으로 인해 놓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존재의 부당함, 절대성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무지와 노정을 우리는 엿보게 된다. 카프카의 '성'을 통해 나는 우리가 그토록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라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삶의 비현실성을 목도하게 되었고, 이에 경악하게 되었으며 서글프게도 자신이 '나' 이외의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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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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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써야 되니까 오히려 책이 잘 읽힌다 아니다 김영하 소설은 좀 재밌다 그래서 꽤 짧은 기간에 다 읽은 것 같다

아랑은 왜는 삼중주다 아랑전설과 현대 두 남녀의 이야기, 그리고 소설을 쓰는 것 -방식의 새로움은 사람을 잡아끌게 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소설 쓰는 행위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모반이고 그 모반은 매력적이다. 이 이야기는 어차피 허구다, 라고 밝히고 이 인물이 이럴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라고 밝히는 것. 결말은 어떻게 해볼까 하는 고민의 흔적을 소설로 나타내는 것.

김영하는 현대적이다. 그의 소설에는 여러 문화 장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 음악, 미술... 그러나 이것이 멋으로 남지는 않는다. 다른 요새 소설들은 빈번하게 문화를 차용하고 예술을 소설에 써먹는다. 그래서 세련된 척을 한다. 하지만 김영하는 세련된 척만 하지는 않는다. 그의 모던함은 소설형식을 바꾸고 그 매력을 모색한다. 나는 언제쯤 이런 소설 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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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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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세기말 블루스>

신현림의 시는 당차다. 신현림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돌려서 어렵게 포장하지 않는다. 또한 위악이나 위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하지도 않는다. 신현림은 분명한 여성이고 시인이지만 자신이 그 틀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단지 그녀는 시인으로 있고자 한다. 그밖에도 신현림은 이 세상에서 싸워나가야 할 많은 것들을 노려보고자 한다. 그것들과 거짓 화해하거나 굽히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으로써 가장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나가고자 하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나의 싸움」은 신현림 시집 전체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삶을 고통으로 느끼는 순간에 대해 신현림은 그 순간을 은폐하지 않는다. 그 순간을 까발리고 그 슬픔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를 담대하게 고민한다. 신현림의 이와 같은 대담함은 그녀의 시와 제목에 자주 노출되는 직설화법을 통해서 표출된다.

남자, 여자 여자는 도대체 뭐지?
여자에겐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안전한 곳이란 없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한접시 여자의 불안한 생수가 아니되고는
짓밟혀보지 않고는 모른다
-「안나 이야기」 中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나의 시」 中

이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시에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오백원 대학생」, 「나의 이십대」에서 보이는 그녀의 과거 회상 역시 그 솔직함을 담보로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솔직함을 통해 그녀가 시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나의 시」中

그녀의 인간적인 포부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이 춥고 무섭고 사랑이라는 것 역시 '조만간 망가지'게 될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그렇게 놓아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신현림의 시를 쓰게 하는 힘이며 그녀의 시를 살아있게 하는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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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눈
장석남 / 솔출판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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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의 시는 우리가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에 기울어져 있다. 아주 작고 여린 것들을 그는 결코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이와 같은 여린 것들을 대하는 그의 언어 역시 조심스럽다.

시집을 처음 열면 보이는 시, 「봉숭아를 심고」에서 그는 봉숭아를 심고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린'다. 또한 그의 귀에는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가 들린다.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장석남은 그 중에서도 작은 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를 본다. 코스모스를 통해서 그는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보는 것이다.
또한 그 빛이 완전히 사라져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곳을 떠돌고 흐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가볼 만한 곳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 아닌, '목련 꽃잎 속의, 벅찬 기쁨이랄까 허무랄까 하는 그 곳'이며 '그 희디흰 생의 부끄러움이랄까 아쉬움이랄까 하는 그곳'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식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핏 보이는 것들을 장석남은 시에서 오래도록 살아있게 만들고 있으며. 날아갔으나 아직 그의 눈에는 남아있는 여린 것들의 작은 숨결과 함께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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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세계사 시인선 15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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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은 자아와 자아가 뿌리내린 세계를 거부하는 몸짓의 극명한 표현이다. 시 「인큐베이터에서의 휴일」중 '왜 나는 부정하는 것만이 아름다울까'라는 구절은 이와 같은 시인의 인식을 집약하고 있다. 시인에게 현존하는 삶이란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시어 역시 부정적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시의 형식 역시 마지막 구절의 부정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이 있었던가? 절벽길/ 또 가야 한다면/ 삶의, 어디/ 사람이 별처럼 모여 반짝이는/ 마을 앞에 서게 될지, 글쎄/ 아니라 해도……', 「길」中

'멍든 곳을 훤히 드러낸 나무들 몸통은/ 어떤 힘으로 겨울을 버티는 걸까./ 어머니 이 손톱 끝을 좀 보세요, 아직도 가시에 찔린 자죽이 시퍼런걸요.', 「지리한 대화」中

시집에는 '삶'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삶은 생동감 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삶의 반대편인 죽음의 어둡고 축축한 이미지는 오히려 삶을 뒤덮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삶에 대한 부정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와 같은 징조를 시인의 곁에서 자주 발견한다.(어차피 시선의 주목은 생각을 따라가기 마련이므로)'검푸레한 곰팡이 냄새', '때 절은 벽지', '박쥐의 검은 옷' 등으로 대변되는 '삼촌'의 삶(「삼촌 편지」), 가는 곳곳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는 '오인환씨'(「외로운 한 증상」), '소주', '습관성 약물', '니켈에 도금된 육신' 등의 이미지로 제시되는 '윤씨'(「윤씨」등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시인의 부정성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실 노트」, 「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을 통해서 시인은 아이들에게 삶이란 혹은 사랑이란 쓸모없는 것이며 죽음을 위한 과정이며 전쟁과 같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은 지독한 부정은 어차피 시집 제목에서도 이미 예고된 바이지만 실제로 접하게 되면 읽는 이는 곤혹스럽다. 시인의 을씨년스러운 은유는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독자는 점차 몸 속에 약물을 투약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자신마저 축처지게 되고 이 삶의 어려운 부분들이 속속들이 일어서서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들이 세계를 부정할망정 자신의 의식은 명료한 곳에 놓아두는 반면, 이연주는 자신에 대한 부정이 세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원동력인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네거티브」와 같은 시들은 충격적인 양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시인 이연주는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출간한 바로 일 년 후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한 번쯤은 부정해본다. 그러나 쉽게 죽을 힘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이처럼 삶의 반대양상에 놓여서 우리를 괴롭힌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래서 영원한 매력을 품고 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주는 곳. 사실 죽음은 삶이 있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연주의 시집에서의 삶은 철저히 유린당한 것이기에 죽음의 언어가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구사될 수 있는 것 같다. 왜 그 삶이 유린당했는가, 왜 희망의 조각은 발견되지 않고 추억조차 더럽게만 느껴지는가, 아니 어떤 힘으로 그와 같은 부정을 지속해나가는가를 안다는 것은 사실 겁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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