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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우선은 적어보기로 하자. 약간은 혼돈스러우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빠져 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불편한 타협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aklc 장거리 가차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옆자리에 앉게 된 두 명의 여행자들 같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어야 하고, 예절이라는 관습을 지켜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아는 자신들의 사이를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예절바르고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고. 어쩌면 가끔씩은 유쾌하고 피상적인 잡담으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야 하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절제된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면서.
-오로지 나만이 시간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아주 작은 부스러기조차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일상적인 말에 주는 마법 같은 변화는 어떤 것일까? 사물에는 일종의 연금술이 있는데, 그것은 내 삶의 내적인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겨울 내내 바람 하나가 예루살렘의 소나무 꼭대기를 흔드는데 그 바람은 사라지면서 소나무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신은 낯선 사람이에요, 미카엘. 당신은 밤마다 내 곁에 누워 있지만 낯선 사람이에요.
-시간과 기억은 사소한 말들을 각별하게 봐준다. 특별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시간과 기억은 부드러운 황혼 빛으로 사소한 말들을 둘러싼다.
나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난간에 매달리는 것처럼 기억과 말에 매달린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은 얼마나 적은가.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잊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
-나는 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느 저주받은 곳에 숨어 있다 나와서 슬며시 기어들어와 나의 고요하고 푸른 아침을 망쳐놓는지를. 서류 정리하는 사무원처럼 나는 수많은 무너져가는 기억들을 분류한다. 모든 숫자를 긴 줄에 늘어놓는다. 어딘가에 심각한 실수가 숨어 있다. 이건 환상인가? 나는 어딘가에서 지독한 실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라디오는 노래를 멈췄다. 라디오는 갑자기 여러 도시에서 발발한 분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깜짝 놀란다. 여덟시. 시간은 결코 쉬지 않고 누구도 쉬게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음울한 똑같음. 나는 한 가지도 잊을 수가 없다. 차가운 시간의 손가락에 부스러기 하나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꿈을 만들어내는 힘들이 나에게 꿈과 실제를 나누는 선을 넘게 해준다. 그 서늘한 지배. 밝은 회색에서 어두운 회색으로 넓게 퍼져 있는 형상들의 작용.
-꿈이 산산조각나면 민감한 사람들은 구겨지는 것이 아니라 깨진다.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게 끔찍한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아버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끔찍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 잘만.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다음에는 야이르. 우리 모두가요. 인간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는 거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초안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다 거부되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지고는 새롭고 약간 발전된 개작으로 대체되는 거죠. 이 모든 게 다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정말 무의미한 농담이죠.
아주 개인적인 편견에 의해 뽑은 문장들이다. 어느 정도 동의하거나 깜짝 놀라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정도.
관계의 빈 공간을 끊임없이 집요하게 파고든다. 파헤치고 폐허를 만든다. 그 빈 공간에 망상과 꿈을 집어넣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찾아든다. 빈 공간 때문? 혹은 꿈 때문?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만일 한나가 미카엘과의 관계에 만족했다면? 그럴 수도 없지만, 불안의 공간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그래도 구멍은 남아서 차츰차츰 우리를 잠식한다.
마치 바람소리가 창을 두드리듯 무심히 두드릴 뿐, 지나쳐가듯, 그러나 간간히 계속되며.
음미할 필요가 있는 문장.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한나에게는 타인의 죽음조차 내면적인 사건이다. 내면적으로 그가 자신의 공간에서 소멸해가면 그것은 죽음과 다름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부재로 몰아넣는다.
슬프게도, …….
가끔은 마구 소리치고 싶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냥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렇게 하고 싶도록 만든다. 어디 나의 다른 곳,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내가 있어서일까? 시간 속에 점차 그런 나가 쌓여가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