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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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렇게 쓰고 싶다

첫번째 이야기보다 다음 것들이 더 좋다

문장이 달랑 남는 게 아니라 짙은 그림자가 남는다.

자신의 개별적인 정체성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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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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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요새 생각한다.

우리의 발화 행위란 얼마나 마음 속의 진실을 담보할 수 있을까.

지금 말한 것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해도 그 이유는 언젠가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고 남는 것은

타인에게 남게 되는 말밖에 없다.

그 순간 진실은 나의 말이다. 내가 그 말을 했던 이유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가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감정은 모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나의 진실은 말로 남을 뿐이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잔혹한 전쟁이 훝고 간 뒤 쌍둥이의 삶을 쫓는다.

원래 3권 연작을 기획하고 작가가 작품을 쓴 것이 아니므로

1권과 2권 3권은 각각 다른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게다가 제목부터 거짓말이란 함의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조금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

책을 읽고 난 뒤 정리를 할 때에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머리 아플 필요가 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우선 간결한 문장은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고 1권의 두 쌍둥이의 엽기적인 행동들, 상황들은 재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이다.

우리의 상상은 얼마나 또 우리를 외롭게 하는가.

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외로운 세상을,

두 사람이 서로를, 어딘가에 있는 서로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빈 틈을 인생에서 목도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끔찍하도록 생을 외롭고 바람 불게, 허하게 만들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발화 행위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이끌고

훗날 남는 것은 공허함, 거짓을 말한 것은 누구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진실이 어디 있기나 했던가 하는 공허함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책이 텅 비었다는 공허함이 아니라, 나의 생도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 흘러가며

자꾸만 거짓을 되풀이하고 진실이 있는 곳을 잃었고 잃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어차피 진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텀빔이다.

슬프지만 진실로 이것만은 진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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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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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도 그렇지만 이전에도 이 좁은 땅덩이에서 사람들은 발목이 아픈 참새처럼 살았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오며 한 생각이다.


직장을 다니며 느낀 것도 모두 다 발목이 아픈 참새들처럼 산다는 것이었다고


이제는 결론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미움은 부질없고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신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땅에 발을 딛지만, 가끔 우연한 기쁨으로 인생이 황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땅에 서면 발목이 아픈...


 


만일 나에게 정치적인 어떤 주의를 택하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무정부주의를 택할 것 같다


원시시대로 돌아가 그저 배고프면 열매 따먹고 사는 생활은 괜찮지 않을까


사회에 나오며 세금에 시달려서 이런 결론을 얻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이익이 굳이 앞장서는 사회, 잘 포장된 말로 누군가를 꼬득이고


힘으로 제압하는 그런 자본주의의 욕망들, 게다가 그 욕망을 정의로 포장하는 그것이 지겨워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제국주의 시대 우리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길 무렵


멕시코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주권이 빼앗긴 시대의 설움을 약소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나 우리가 다짐해야할 바를 적은


소설은 아니다


아주 특이한 이력의 사람들의 이야기, 그 시대에 외국으로 그것도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도 아닌 멕시코라는


라틴 아메리카, 혁명이 자주 일어나는 아주 더운 나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는 매력적이다


막 근대로 들어설 무렵이라는 시대성과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특이한 상황 속에서


김영하는 멕시코로 이민 간 우리 나라 사람들 이야기를 썼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핍박받고 어렵게, 발목 아픈 참새들처럼 산다


에네켄을 수확하는 노동자로, 도시에서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는 군인으로,


밀림으로 장소는 옮겨가며


점차 죽음으로 향해가는


얼핏 체게바라가 생각났다가, 얼핏 라틴 아메리카 소설의 환상성이 생각났다가


그러는 것은 나의 무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장소의 광활함, 시대의 독특함은 소설의 스케일을 아주


커다랗게, 마치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 이야기처럼 만든다


그곳에서 사건을 겪는 인물들은 세 글자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지만


마치 다른 곳 같은,


소설만의 매력을 한껏 뿜으며


 


뭐가 뭔지 잘 몰라서 횡설수설이다


좀 더 공부하고 다시 생각해볼까


내가 과연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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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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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John Fowles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출판된 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책을 빌려다 놓고 읽지 않은 적도 있다.
김영하의 에세이에서 본 이 책에 대한 평이 꽤 괜찮아 처음 관심을 가졌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읽어야지 했던 상태였다.
김영하의 평에서 이 책의 주인공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최초의 진보적인 여성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진보적인 여성이란 말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관념, 정결함에 대한, 정직에 대한, 순수에 대한 모든 의무를 지우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 우드러프는 찰스를 꼬시기 위해 계략을 짜고 그대로 행동한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지는 건 거의 끝부분에 가서이다. 책은 대부분 찰스를 뒤쫓는 편이기 때문에.
시대는 186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도록 하려고 일부러 다른 남자와 잤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자란 아무래도 김영하의 소설에 등장해도 좋을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도 매력을 느꼈는지도.
나는 어느 정도 이 소설이 매력적인가 하면 어느 정도 그렇지 않기도 한
알 수 없는 상태랄까... 그렇다
우선 작가의 박식함, 책 뒷편의 설명에서 보자면 프랑스 누보로망 같은 작가의 의견 개입과 소설 형식의 해체 등등은 내가 보기에도 꽤 재밌었고 좋았다.
허나 마지막은 약간 맥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사라 우드러프는 결국 찰스의 애를 낳아 키우고 있으며 그가 결혼하자는 제의를 거부한다. 그에게 돌아갈 것도 거부한다. 단지 그녀는 순간적인 자신의 욕망, 남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었을 뿐이라는 태도 정도로...
나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여자는 애를 낳아야 하는가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 정도...
어쨌든 책을 너무 더디게 읽었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긴 하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들은 글을 쓸 때 나름대로 설정된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제1장에서 예견된 미래는 언제나 정확한 경로를 밟아 제13장에 이르러 실현될 것이라고. 그러나 소설가들은 저마다 다른 숱한 이유들 때문에 글을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애인들을 위해. 허영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즐거움 때문에. 목수들이 가구 만들기를 즐기듯, 술꾼들이 술을 즐기듯. 그 갖가지 사연들만 가지고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진실일 것이다. 모두의 진실은 아닐지라도. 우리들 소설가에게 공통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우리는 실재하는(또는 실재했던) 세계만큼 사실적인, 그러나 그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리 설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창조된 세계는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순수하게 창조된 세계는 그 창조자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계된 세계-그 형태와 구조를 평면도에 미리 드러낸 세계-는 이미 죽은 세계다. 우리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우리한테 반항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발상은 내가 아니라 찰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는 이제 자율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고 싶으면, 내가 신과 비슷한 입장에서 그를 위해 세워놓았던 모든 계획을 무시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는 찰스만이 아니라 티나와 사라, 심지어는 저 밉살스러운 풀트니 부인에게도 각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신에 대한 좋은 정의가 하나 있다-'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 나는 이 정의에 따라야 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하나의 신이다. 소설가는 창조하기 때문이다(가장 전위적인 현대소설조차도 작가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 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소설가가 이제는 더 이상 빅토리아 시대적 이미지, 즉 전지전능한 이미지를 지닌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가는 권위가 아니라 자유를 제일 원칙으로 삼는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가진 신이다. 

-오늘날 같으면 라디오와 텔레비전, 값싼 여행 따위로 메꿀 수도 있는 이 같은 거리감, 그 모든 심연들이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상대를 모르는 만큼 서로에게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개인적인 공기를 숨쉴 수 있었다. 단추를 한 번 누르거나 채널을 한 번 돌리면 전세계를 볼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은 이상했고, 때로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야릇함을 지니고 있었다. 인류에게는 더 많은 교류가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단자라서, 고립 상태에 있던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넓은 공간을 누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는 부러울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세계가 문자 그대로 너무 벅차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쓴다. 시인은 다만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쓸 뿐이다.

-오늘날 어떤 의사가 고전 음악을 알 수 있으며, 어떤 아마추어가 과학자와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두 사람의 세계는 전문성이라는 폭군이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들은 진보와 행복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생명의 대등함을 깨달았다. 진화는 완전함을 향한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수평적 이동이다. 시간은 중대한 오류였다. 존재에는 역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이고, 언제나 같은 악마적 기계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이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인간이 세운 그 화려한 장막들-역사, 종교, 의무, 사회적 지위-은 모두 환상, 아편에 중독되었을 때 보이는 환각에 불과하다.

-인생은 난해한 기계, 불길한 점성술, 태어났을 때 내려져 항소조차 할 수 없는 판결,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無)였다.

-행위는 날마다, 시간마다,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순간마다, 못은 어딘가에 박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석희 옮김, 프레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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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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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좋은 작품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일까
나는 이 소설의 비평을 보며 드디어 이 사실을 깨달았다
비평이 새로운 인식을 주는 순간은
어느 정도 경이롭달까, 그런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정이현의 책 뒤에 있는 비평을 읽으며 기분이 좋다

정이현 소설은 90년대 여성 소설의 한계를 넘어선 소설이라는 점이
바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성취물이다. 즉, 90년대적 감수성, 여성의 일탈, 불륜, 감상은 신경숙, 은희경 등의 작가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면모였다. 대부분 가정 안에서의 일탈을 꿈꿨고 그녀들은 바람을 피웠고 이 사회 체제를 답답해했지만 그 체제 안에 순응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독한 반항아조차 사회 속의 반항아였고 그 모습을 제시할 뿐 그에 대해 정치적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이현 소설은 정치적으로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현실을 분석한다
왜 여성은 순결을 지키는가
를 역으로 풀어내는 격이다
여러 남자를 만나도 절대 잠은 자지 않는,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누렇게 헤진 팬티를 입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여성이 순결을 지키려는 이유를 가르쳐줌으로써
정이현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일침을 가한다
그래야만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보루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
루이비똥, 뉴비틀로 대표되는 이 사회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

어느날 보니 사랑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뒤섞여 이런 모양새가 되어있습니다
정이현 소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돈과 섞여 이루는 코메디
순결을 증명할 무기는 간 데 없고, 남겨진 것은 루이비통 백이 가짜는 아닐 거라고 믿는 주인공, 그걸 사랑이라고 믿어야만 하는 주인공이다
과연 누가 우리를, 무엇이 우리를 이라는 답은 무효하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이기에
특별한 주체가 없이 이루어진 범죄이며, 이 사회의 모습이기에

정이현 소설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면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모습을 담는다
작품집의 다른 작품 '신식키친'은 뚱뚱한 여성의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다
할리퀸을 밤낮없이 읽으며 사랑을 꿈꾸지만 그녀는 결코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식욕을 통해
욕망의 다른 출구를 찾는다
더불어 날씬해져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를 보여주는
각가지 다이어트 비법(이건 나도 참 많이 듣던 것이다)
은 이 소설을 이 시대의 여성의 소설로 자리매김시킨다
끊임없이 다이어트해야만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사회, 이건 남자가 써낼 수 없는 여성의 소설인 것이다

정이현은 여성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에 순응하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해부함으로써
펼쳐낸다
다소 여성적인 시선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비평을 읽고 보니 그녀의 소설이 훨씬 뛰어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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