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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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千五年 초가을에 받은 시집을 이제야 읽는다. 방은 따뜻하고 그래서 졸리운건가. 아니면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인가, 라디오에서는 낯익은, 낮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시집을 받은 날에는 장석남 선생님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읽고 있었다. 인사동이었고 막 해가 질 무렵, 이었다. 그때 나는 좀 천천히 걸었고, 좀 천천히, 살려 했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내게 천천히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듣는 말은 다를 테지만, 나는 이 시집 속에서 속됨과 속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어쩌면 그 속됨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을 듣는다. 일부러 젠 체 하며 사는 삶은 또 얼마나 가식적인지. ‘연애’라는 말처럼 가볍지만, 그 말 속의 가벼움을 쉬이 받아들이지는 않는, 그저 그 속의 설레임만을 받아들이는, 속됨, 같은 것을 나는 이 시집 속에서 봤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랑’은 흔한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이라서, 그 속은 조금 더 깊고, 그것은 속삭이듯 쌓이지만 결국 오랜 것을 찢고 만다. 그것은 ‘아무 데에나 있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절벽 위 ‘폭포’처럼 아찔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흉내내지 않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소란스러움을 소란스러움으로 둔 채로도, 소소한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싶어 나는 이 시집을 필사할지도 모르겠다.


시집 뒤에 실린 김연수의 평은 몹시 즐거웠다. 이 김연수가 소설가 김연수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즐거운 평이었다.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폭설

-山居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大寂의 이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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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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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도 메모를 해두지 않았더니 뭔가 쓰려니 참으로 막막하다. 처음에는 너무 특별한 척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건 쉽게 말하자면 ‘좋은 건 다 이놈의 집안에 있네’ 이런 식의 생각이다) 약간 거리감이 있었으나 읽을수록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건 참 재밌구나, 다시 생각했다.

클라라, 블랑카, 알바로 이어지는 한 가문의 여자들과 그녀들의 남성들, 에스테반 트루에바, 페드로 테르세로, 미겔 등등. 캐릭터만으로도 시대상을 훑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칠레의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이 이 인물들만으로도 그려지는 것이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당대의 보수주의의 최고 권력자에 해당하며 페드로 테르세로는 소작농의 아들로서 공산주의에 관한 노래를 불러 국민 가수가 되며 그 사상을 전파시키는 데 혁명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미겔은 무력 혁명을 꿈꾸는 진보주의 청년이므로.

그리고 이 소설이 환상적 사실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클라라라는 인물 한 명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을 관통하는 어머니로 등장함으로 해서, 소설의 분위기를 고유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다. 집에는 영혼들이 떠다니고 소설에는 생명력이 넘쳐나도록.

주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무지 집중해서 읽었는데, 뭔가를 쓰려니 어렵다. 좋은 소설이라 그런가. 캐릭터와 내가 이 작품을 왜 썼는가라는 단 한 줄의 이유만으로 내러티브가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라는 선생님의 말이 나지막이 떠오를 뿐이다.





블랑카는 여전히 페드로 테르세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라기 보다는 습관적으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문장, 몹시 좋다.



그리고 고통이 알바의 마음 속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고통에 저항하지 않고 마음을 느긋하게 갖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골고루 미쳐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치광이가 나오기 힘들지.”


-이런 문장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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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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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나는 지금 약간 혼돈스러운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것(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전에 읽었던 ‘나의 미카엘’의 문장들을 보고 이 책을 언제 읽었느냐는 것, 그때도 똑같은 느낌들이었냐는 것.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보고 『나의 미카엘』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전에 그 책을 읽고 써놓은 글을 봤다. 『나의 미카엘』이 내게 준 단 하나의 문장은 ‘나는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 이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의미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손 사이로 새어나가는 걸. 그 문장을 읽었던 시절에도 나는 그것을 알았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의 미카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진실은 아주 내밀한 두 사람 사이에도 존재하지 않고,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어쩌다가 살다 보면 누군가는 만나고 아주 가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둘은 영 둘이라서, 공허가 찾아온다는 것.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빠져 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

-나의 미카엘에 나온 문장은 이렇다.



진실 같은 건,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를 것 이라고, 우리가 믿고 표면화시킨 것들은 어쩌면 이다지도 허황된 것이냐고, 나는 김연수의 소설을 읽으며, 그 말들이 너무 슬펐지만, 어쩔 수 없이, 슬프다는 것 자체가 내 스스로가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김연수를 다른 작가들을 대하는 것과는 좀 다른 눈으로 본다. 이전에 김연수의 『스무살』이란 창작집을 몹시 좋게 봤기 때문이다. 『스무살』은 내 생애 몇 안 되게 자발적으로 두 번 본 책이었다. 비평을 한 번 써보고 싶을 만큼 좋았는데, 왜 좋았는지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도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30년을 같이 산 부부가 헤어지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냐고, 이유라면 모든 것이 이유라고.

허망하다는 느낌은 왜 드는 것일까, 우리가 믿는 건 진실이 아니에요, 하면 왜 허망해지는 걸까, 어쩌면 우주에 단면이라는 게 있어서 어느 장난꾸러기가 우주를 정말 아무 뜻 없이 그저 심심해서 절단하면, ‘메롱’이라고 써있을지 어찌 안담.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은 끝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건 허망한 걸까.

종일 인용을 해댄다.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농담을 모르면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말도 안 되는 진실을 믿고서 행동하면, 도덕을 뛰어넘고 말지만, 사실 그건 생의 농담을 모르는 행위일 뿐이라고, 해석해본다.

나는 김연수의 약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전 창작집보다는 이 작품집이 훨씬 좋다.



지난 일들을 이해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억들을 샅샅이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은 거의 없다.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모든 역사란 일어날 만하니까 일어난 일들의 연속체를 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단 어떤 일이 일어나면 저마다 반드시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는 증명서가 자동적으로 첨부된다. 아무리 봐도 그 증명서를 찾을 수 없는,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자신의 진실과 일어난 일의 진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자도 아닌데 부자의 세계를 어찌 안담. 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세상을 어떻게 그린담. 가진 꿈이 없는데 꿈을 어떻게 판담……. 거짓말은, 들통나게 마련인데.’



그 어떤 빠르기가 지시돼 있건 그게 빠르다거나 늦다거나 하는 게 느껴질 수 없을 때, 최고의 연주라고 생각해. 그건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했어. 그게 실수라는 걸 납득하기 위해서. 내 유리잔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그런데도 잘 되지 않더라. 그랬던 것 뿐이야. 그 사람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따져볼 겨를이 없었을 뿐이야.”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놓인 역사가와 같다. 하찮은 사실들은 어쩔 수 없이 엄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띠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이렇게 한낮 속에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느낌 숨어 있어라’라는게 무슨 뜻이냐면, 백주의 작열하는 햇살 속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 편린의 진실도 건질 수 없다는 것이외다.



-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비망록이 씌어지는 곳은 그 사람의 마음속이니 사랑하고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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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희곡집 1 공연예술신서 29
윤영선 지음 / 평민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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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영선 선생님이 좋다. 선생님은 정말 정말 멋있다. 선생님이 얘기하는 걸 보거나 듣고 있으면, 그가 솔직하고 꾸밈 없고 지식인의 허위랄까 그런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 열정적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정말 뭔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걸 바라거나 원하지도 않고 그냥 하는 사람,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대의 예술에 획을 긋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좋아하면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다. 윤영선 선생님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아, 내가 이걸 하는 게 좋으니까 하는 거구나, 그런.

사실 희곡집은 많이 읽지도 않았고 희곡이란 내게는 좀 멀게 느껴지는 글의 종류다. 희곡은 대부분이 대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극화 시켜야만 빛을 발한다는 특성, 말도 잘 못하고 행동은 더욱 잘 못하는 내게는 희곡이란 정말 멀디 먼 장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희곡이 매력적인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말을 한다 해서 그게 진실이라거나 거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그 공허한 말의 울림들이 만들어내는 향연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도 같다. 가끔 들려오는 진실한 외침들이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윤영선 선생님 작품도 꼭 윤영선 선생님 같다. 처음 두 작품은 약간은 어지럽기도 한데, 마음 속의 세계를 다루는 까닭이다.

이미 읽은 지가 오래되서 메모가 되어 있는 것만 써보자면, ‘G코드의 탈출’ 같은 경우는 남녀 한쌍이 모텔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그들은 오래전에 사랑한 사이이고 지금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화하고 과거를 나누고 현재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영영 혼자인 삶이라, 서로 아무리 가까워져도 결코 만져지지 않는, 그저 짐작할 수만 있는 어떤 곳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연극 배우인듯한 남자는 결국 자살한다. 대화가 끊기고 이어지는 틈이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내 뱃속에 든 새앙쥐’는 치매가 든 노인(‘G코드의 탈출’의 주인공의 어머니라 짐작됨, 둘째 부인)의 독백이다. 그 노인은 자신의 치매 행동의 이유를 생쥐에게 돌린다. 그게 참 귀엽다. 뱃속에 생쥐가 들어서 그 생쥐가 자꾸만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걸 주라고 한다고, 가끔 그 생쥐가 똥, 오줌을 싼다고, 그 생쥐가 심심할까봐 자기가 혼자 중얼거리는 거라고, 하는 그런 노인의 말이 참 선하게 느껴진다.

‘파티’는 시골 동네의 기이한 형태의 집으로 이사온 부부가 겪는 하룻밤의 이야기다. 밤에 갑자기 찾아온다는 이장의 전화 뒤에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 부부에게 행하는 폭력 아닌 폭력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연극적인 효과 때문인지 결국 이들은 후반부에 진짜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종종, 그런 기분일 때가 있다. 싫다고 거부하거나 그를 나쁘다고 부정하면 내가 나쁘고 쪼잔한 사람이 되지만, 좋다고 하거나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상대편이 도를 지나쳐 점차 내 기분이 상하는 어떤 인생의 덫 같은 거랄까,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잘 그려낸 작품인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이사 축하차 온다는 데 거부하자니 처음 이사온 동네에 미안하고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행동이 어딘가 미심쩍은, 그리고 점차 그들은 도를 넘어서지만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엔 이미 처음부터 받아들인 내가 바보가 되는 상황, 그런 상황은 인생에 종종 오는데, 그땐 정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화가 나도 꾹꾹 참고 평정심만을 갖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잘 다루고 있다.

그 외에 작품도 다 좋다.

윤영선 선생님 작품 ‘여행’이 곧 대학로에서 막이 오르는데, 안 봤지만 분명 좋으리라 생각하므로 보러 갔으면 한다.




난 나를 비우고 또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비워버리고 싶은 거야. 그리고 나서 널 사랑하고 싶어. 내가 절망하는 것은 비워버릴 수 없는 나를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야.

-‘G코드의 탈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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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 2012-06-2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041000

em 2014-02-2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으네요ㅎ..:)
 
죄와 벌 -상 혜원세계문학 3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혜원출판사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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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을 이전에 보다 만 게 2년 쯤 전인 것 같다. 그때 지하철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왠지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문학소녀나 문학처녀쯤으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아주머니들이 유난히 정겹게 말을 걸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을 전부 읽지 못하고 말았다. 뭐 주변 재반 사정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후 결국 학교 과제 때문에 다시 읽게 된 ‘죄와 벌’. 사실 아직까지 ‘죄와 벌’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해도 좋을 일이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아직까지’ 죄와 벌을 안 읽었냐고 타박하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간단히 말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알기 때문이다. 요새 나오는 소설들은 인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들은 판에 박히고 사건들은 논리적이며 우연과 감정은 지나치게 튀어서 보기에 어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모든 인물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소냐라는 인물과 스비드리가이로프, 라스꼴리니코프 등의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유형화시켜 배치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인물 안에 존재하는 숱한 당위성들은 그들은 선인, 악인 이전의 인간으로 보이게끔 한다. 거기에 이 소설의 위대성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스꼴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자백하고 어느 정도의 참회에 이르는 현상이 아니라 그와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 속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는 라스꼴리니코프의 범죄 과정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단순하게 사람을 죽이자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전당포 노파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그녀는 이와 같은 존재이므로 죽어 마땅하다는 그 생각을 라스꼴리니코프조차도 수없이 추악함과 현실감과 영웅 의식 속에서 되짚으며 자신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살인 행위가 더없이 더럽고 추잡한 것인가 하면 때로는 자신의 초인이론에 맞는 실험대이고 때로는 가족 부양 능력조차 없는 자기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로 몇 번이고 전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하나의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여러 잣대에 대고 판단하려 하지만 결코 몽매를 헤치고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것 역시 그의 악마성이 이루어낸 결과라기보다는 조금은 운명 같기도 한 실패와 우연이 겹쳐지며 벌어진다. 현상이 동반하는 우연과, 그 우연까지 인간이 짊어지는 인생이라는 것,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쓴 사람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고 그걸 잘 표현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라스꼴리니코프는 범죄를 저질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마치 한 인간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살인 이유를 ‘견딜 수 없음’으로 생각해보았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목적어를 포함하는 동사이다. 무엇을 견딜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스꼴리니코프는 여러 가지 것을 견딜 수 없는 인물이라고 나는 대답하고 싶다. 인간은 참 다양한 성향이 있다. 개중 어떤 사람은 참을성이 넘치고 현실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알거나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표상하고 그 위치를 넘어서기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현실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아파하거나 남들보다 더 힘들어하거나 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페째르스부르크라는 도시가 안고 있는 남루함과 비인간성,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 남 일이라고 여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멜라도프라는 남들은 모두 비웃는 인물과 술을 마시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결국 그의 삶 속에서 고통의 징후를 발견하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하는 인물인 것이다. 창녀들과 창녀가 창녀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서글픔을 그는 그대로 두고볼 수 없어 자신이 가난함에도 있는 재산을 모두 그들에게 베풀고 결국 스스로의 연약함을 탓하는 것이다. 물론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가난한 처지, 동생의 희생 앞에서 제대로 된 현실적인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냐에게 회개하며 자기를 죽인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이 현실을 가만히 지켜보며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그래서 그는 초인과 범인을 구별하는 논문을 쓰고 초인이 됨으로써 이 세계의 견딜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을 바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그가 견딜 수 없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범인으로 살며 초인을 알지도 상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범죄 이후로 더한 불안 증세를 보이며, 자신의 견딜 수 없음은 범죄에도 똑같이 미침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소설을 읽자 이런 질문이 생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이 세계를 살아야 현명한가. 소냐처럼 온갖 자기 희생으로 모든 것을 감내할 것, 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난 아직 생각이 너무도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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