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이상운 지음 / 하늘연못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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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정란의 소설 평론집 『연두색 글쓰기』에서 이 작품의 평론을 보고(알고 보니 『탱고』 뒤에 삽입된 작품 해설이었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우주, 거대한 시간의 연속성과 순간, 카오스적 내면, 우연. 내가 이런 쪽에 어느 정도 나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아니, 이전에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영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개인의 종말 이외엔 관심이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영원이라고 시간을 넓게 확장시켜 보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애적 편집증에 가깝다는 것. 영원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두려움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한 방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운의 『탱고』는 연애소설이라고 보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하긴, 연애소설이 아닌 소설이 정말 어디 있을까 싶지만, 사랑보다 더 커다란 사건이 이 우주에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이 연애소설은 그러나, 사랑을,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똑바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우주라는 거대 공간 속에서 자신을 점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사랑의 위대성을 감당하기를 주저한다. 이 소설 안에서, 혜리라는 존재는 미궁의 존재, 환상의 존재에 머물다 마지막에서야 편지 형식을 통해 그 껍질을 한 꺼풀 벗는다. 하지만, 그 껍질을 벗는 건 두 사람이 만남을 통해, 은밀하면서도 직설적인, 예감을 품은 대화와 사건을 통해서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혜리는 캐릭터가 없는, 그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여인, 이상의 그 누구도 되지 못한다. 그녀가 그 어둠 속에 몸을 감추는 방식이 바로 그녀의 캐릭터일진대, 그 방식이 약간의 상징과 해석하지 않으려드는 사건 속에 놓임으로 해서 이러한 벽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많은 문장들이 내게는 그닥 의미 있는 울림으로 읽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춤을 춘다던가, 가끔 함께 춤을 추지만 다시 각자의 춤을 춘다는 뜻의 문장들이, 너무 자주 반복되며, 소설을 답답한 구석으로 몰고가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코너에 몰려있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아니라 코너에 몰렸을 때 그에 대해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투쟁하는 인간을.

김정란의 평론은 이 작품이 역사와 맞물린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녀의 평론을 읽으면 수긍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작품을 읽고 그 정도로까지 해석을 해내는 건 지독한 애정이 없다면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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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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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운명을 유혹하지 말고, 완전히 무시해 버려라.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인지하지 못하는 그 모든 순간에도 끊임없이 운명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며 살기 십상이라는 것.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할 숱한 자기 고백과 직시, 상심, 주문 같은 통증에 대한 책.

그리고 존재를 꿰뚫는 문장. 무수하게 꾸불꾸불한 그 존재의 막다른 곳까지 타고 들어가는, 거기에 대해 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거기.

균열에 대한 직설, 명확하게 꼭 알맞은 수만큼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


정체성을 찾기 위한 치열한 전투 과정을 그린 한 편의 연애소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하며 거기서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낭만과 싸워야 하는가.





 


-그녀는 한 단어씩 나아갔다. 모든 글자에는 경계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크고 풍만한 입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은 어두운 집을 돌아다니며 불을 켤 수 있는 지점들을 점점이 또는 줄줄이 완벽하게 짚어내는 사람처럼 자신의 문장들 속을 휩쓸고 다녔다.

어떤 엄격함을 갖춘 관능.



-손가락이 굵은 땅의 사람들, 인간 잡초들, 단단하고, 서럽고, 늘 지진 같은 감정 폭발로 그들 삶의 칙칙한 껍질을 부수고 나올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그녀는 아마 평생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여 다니는 것처럼, 당당하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니, 갑자기 그녀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삶 앞에 제대로 서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이미 그녀가 죽을 때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그 나름의 말로 할 수 없는 그늘진 방식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침묵이라는 그릇된 명예에 너무 자주 의존하고,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것을 남용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릴리아에게 잘 보여주었다. 때로는 잔인하게 나의 얼굴을 비길 데 없는 가면으로, 가장 둔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재니스의 존 김, 절묘하게 입을 다물었던 존 김은 단층에 시달리는 땅덩이와 같아 흔들거리면서 격렬하게 폭발할 것 같지만 그러다가 스스로 꺼져 버린다. 자기 자신의 갈라진 틈 저 아래로 부드럽고 균일하게 폭포처럼 내려앉았다가 다시 빽빽하게 살이 차 올라온다.


-죽어 가는 사람은 약간 위에서 자신이 죽은 현장을 내려다보며, 그가 어떤 사람이든 나이가 몇이든 그 마지막 광경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좁은 것이고 부서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길고 넓은 군도에 흩어져 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부를 수 없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볼 수도 없다.


-내가 밋이라는 것, 이어 그녀가 밋이라는 것, 포개쌓은 우리 둘의 몸이 이제는 성장한 그 아이들 모두의 무게를 견디며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입술과 눈이 부풀어오르도록 서로를 거의 죽을 때까지 압박하면서, 눈물이 떨어지기를, 그 위대하고 자유로운 분노가, 그 크고 무겁고 살찐 우울이 떨어져 내리기를 우리 자신에게 빌었다. 분노와 우울이 순식간에 충분하게 겹쳐 쌓이면, 가끔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를 악물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럴 때면 우리는 먼저 씨팔하고 욕부터 해야만 진실의 맨 첫 부분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는, 우리 사이의 공간에서는, 그것이 모든 육체- 살아 있건, 죽었건 아니면 삶과 죽음 사이에 걸려 있건-가 나아가는 슬픈 길이었다. 결합의 가장 진실한 순간을 영원히 상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말짱한 희망이 찾아왔다. 이어 늘 찾아오는 명령들. 릴리아를 찾아라. 자, 이제 생각해라. 영원히 생각을 해라. 그런 뒤에 그 애의 죽음에서 불가사의한 것들, 진귀한 것들을 분리해 내라. 그래야 그것들이 네가 제대로 보도록 도와줄 것이다. 감상을 털어 버려라. 운명과 사랑에 빠지는 짓거리를 그만두어라. 가능하다면, 죽은 자의 마지막 거처에서 살아라.


-피에 대한 믿음, 아들이나 딸에게 네 인생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다독거려 주는, 깰 수 없는 연계.


-만일 내가 평생 가족의 배고픔을 느껴왔다 하더라도, 이제 그것이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될 것 같았다.


-밋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네 번 했다. 릴리아는 세 번 했다.

나는 이 말들을 그녀가 똑같은 말을 하던 다른 순간의 기억들 몇 가지와 비교했다. 우리가 함께 살기로 결정한 날 밤, alt이 태어난 날 아침, 내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여 바에서 술에 취했던 날.

나는 그 말에 편안함을 느꼈던 적이 없다. 늘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그 말을 하는 모든 방식에. 그 말은 축제를 기념하는 의미로도 할 수 있다. 확인을 해주기 위해서도. 감사의 뜻으로도. 요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연인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도, 자신을 방어하기 우해서도. 한참을 숙고한 끝에 그 말을 할 수도 있고,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할 수 있다. 진심으로 말할 때도 있고, 가끔은 진심이 아닐 때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늘 해야 할 때만 그 말을 한다.


-“말이야, 나는 모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 다 내 인생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지. 내 인생으로 돌아오라고. 마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평소처럼 나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다. 같은 페이지로 넘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헨리, 나도 재미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내 밤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우리 역사를 고쳐 쓰는 것을 그냥 놔두지는 않을 생각이야.”


-“나에 대해, 당신에 대해, 실제로 어느 날인가는 당신 머리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하나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 때로는 당신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러니까 말이야, 참여하고 있는 것,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당신은 정말 그럴 수는 없어, 그런 식으로 켰다 껐다 할 수는 없어. 영원히 그럴 수는 없어.”


-릴리아는 나를 만나기에 앞서 일련의 남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녀에게 늘 미안함과 혼란과 강도질당한 것 같은 느낌을 남겼다.


-이런 말을 해도 좋다면, 나는 늘 초대를 받은 곳, 아니면 초대 없이 가도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혀와 심장과 마음이 담긴 모든 범주의 침묵을 기념한다. 나는 현장의 언어학자다. 당신 역시 그 곤혹스럽고 전문적인 위력을 알지 모르겠다. 그 위력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단단한 표현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 그 얼굴을 보라. 당신이 보는 것은 언젠가는 모두 희미해질 것이다. 싸늘한 냉기만 남기고.


-“진실하게 말을 해도 악마나 배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해야겠죠.”

나는 그에게 나의 삶의 일관된 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좋은 첩자는 모든 절박한 순간의 은밀한 기록자에 불과하다.


-나는 굶주린 개처럼 모든 개인적 정서의 내장들을 쫓아다녀야 한다. 나는 작전 대상이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을 드러내야 하고 자극해야 한다. 마음의 매너리즘. 그의 삶의 상습적 경련.


-말하는 사람은 딱 어느 만큼만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는 그가 나오기를, 빛 속으로 들어서기를, 자신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는 이런 식이다.


-인간의 사건과 시간을 망라하는 우리의 불가결한 허구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더 큰 진실을 알기 때문에, 그냥 한 인물 안에 손전등을 들이대지 못하고, 강과 같은 인물을 덧없는 언어로 그려내지 못하는 것일까?


-나를 그렇게 가까이 두는 사람을 어떻게 추적할까? 내가 알 필요가 있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쓸까? 어디서 시작하며, 어디서 끝을 낼 수 있을까?


-“당신은 한 번에 조금씩만 살려고 해. 당신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만 살려고 해.”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지금 내가 모든 것을 목록의 형태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기억의 줄을 타고 내게 오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내로부터 나를 끌어내 이곳으로, 우리의 유령들의 장소로 돌아오게 하는 길고 서정적인 행렬.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견딜 수 있다. 숙련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단단하게 굳히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정반대의 일을 한다. 그냥 자신을 놓아버린다. 완전하게.


-사람이 시베리아처럼 고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늘 뿌리째 뽑아 버리려 하면서도 늘 이용하게 되는 유서 깊은 형제간의 약한 마음.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삶. 그래야만 아이의 반은 노란색인 넓적한 얼굴로는 얻을 수 없는 귄위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동화주의적 감성이며, 나 자신과 이 땅의 추하고 또 반은 맹목적인 로맨스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아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강렬한 느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자기 맨머리를 두드리게 할 수 없어. 모든 것이 거기에서 시작되지. 모든 것이. 무슨 일이 있어도 허리를 낮추어라. 최대한 자신을 보호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 서게 된 이유에 집중하라.”


-거리와 고개를 숙이는 절로 이루어진 우리의 말쑥한 언어로. 그 언어라면 진짜 비밀들을 천천히 불러낼 수도 있도, 천천히 드러낼 수도 있다.


-당신 요구의 살이 있는 형체를 보고 싶다. 당신이 잃은, 또는 누군가가 훔쳐간, 또는 사기쳐간 피를 알고 싶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간절히 돌려받고 싶어 하는 그 피를 알고 싶다.


-나는 아이가 너무 선선하게 헌신하고 존중하는 태도, 싸늘한 피, 그리고 한때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절대 살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타오르는 언어 같은 것들을 물려받았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 또는 내가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 않은 다른 친구를 갖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어떤 침로를 따라 항해할 때에도, 그 침로가 변덕을 부릴 가능성이 많다고 예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계시들은 나무들 속에 어둡게 감추어진 먼 강굽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야만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요구와 관심을 가지고 천사도 만들고 악마도 만든다. 길을 가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즉흥적으로 만들어낸다.


-나에게 가장 고귀한 것은 침묵이라는 고상한 재능이라는 것. 나의 고요와 평정의 가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라는 이민자의 추한 진실은 내가 나 자신을, 그리고 착취 가능한 다른 사람들을 착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나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우리는 억양과 관용어를 모조리 배울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유지하는 모든 허세와 관례를 고상한 것이든 황폐한 것이든, 모조리 벗겨낼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의 눈과 귀로부터 어떤 것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이것은 당신들 자신의 역사다. 우리는 가장 위험하고 충실한 당신 형제들이다. 우리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는 사나운 동시에 서글프다. 오직 당신들만이 나에게 이런 서정적인 양식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양식들을 통해 당신에게 대꾸한다. 이것이 내가 감히 키워올 수 있었던 유일한 재능이다. 이것이 내가 받은 미국식 교육의 전부다.


-안아 주려고 반쯤 들어 올리면, 아이들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바로 그 크기, 나에게는 너무나 경이로운 그리고 끔찍한 바로 그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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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밀란 쿤데라 지음 / 청년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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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mortalite


 



보름 전에 읽었는데, 간단하게 내용을 요약할 수가 없다. 책은 이미 도서관에 반납해버려 뒤적여 볼 수도 없게 되었다. 하긴, 책을 봐도 내용을 요약해내긴 힘들 것 같다. 괴테와 베토벤, 괴테 등등의 유명한 이들의 연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를 앞으로의 인류에게 지워지지 않게 하려 하던 한 여인의 이야기, 즉, ‘불멸’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여인의 이야기,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유명인이 되면 그 존재의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인류의 숫자만큼의 추문(?)을 낳는다. 무수한 속설과 구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 마디 반박도 할 수 없다. 그냥 그걸 다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물리적으로 존재는 사라져버렸지만. 그러한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이에 곁들여 자신의 존재와 육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여인과 그 여인과 정반대의 속성을 타고난(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싶어 미친 듯한,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살아있음이 증명된다고 믿는 것 같은) 동생, 그리고 여인의 남편(은 결국 동생의 남편이 된다) 이야기. 인간 존재의 속성과 관계가 얽히면 얼마나 복잡해지는가. 사실 사는 건 이보다 더 복잡할 텐데도 이 소설이 난해하달까 엄청난 사슬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밀란 쿤데라는 대단한 작가다. 현대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절대 현대를 바라보는 시각, 그 표면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성(?)이 우리에게 남기는 흔적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소설을 통해서.(아래 사진에 대해 인용한 문장 같은 경우) 이미지와 존재, 육체와 존재 사이의 선을 타고 넘나든다.

절대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소설.


『농담』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이라는 단편집을 볼 때도 확연히 느꼈지만, 밀란 쿤데라는 하고 싶은 말, 해야할 말, 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 의사는 결코 어떤 한 마디로 요약되는 문구가 아니라는 것(인간은 결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그 누구라도 그는 겹겹이 쌓이고 쌓인 존재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계선을 위태롭게 걷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쿤데라의 날카로움에 계속 계속, 끊임없이 경악하게 된다.


어쩌면, 두 자매(여인과 동생-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인간 안에 숨겨진 두 가지 성향일 수도 있다. 어떤 하나의 관념이 어떻게 인물로 태어나는가를 이 소설은 보여준다. 대체 관념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화할 수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불멸』은 인간의 내면, 감추고 싶은, 본능, 욕망과 그 욕망을 미적으로 (서살 그렇지 않을 지라도 본인에게는 그렇게 비치는) 이미지화하는 것을 메스로 해부하듯 보여준다. 이때 인간은, 추악하다기 보다는, 우스운 존재, 자신의 계산과는 전혀 달리 타인에게 해석되는 존재, 화살을 쐈으나(표적은 어떤 이미지, 화살은 행위), 대부분 표적을 비껴나간 발사를 하는 존재가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쿤데라의 소설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외따로이나 결국, 타인 속에서 파악되는, 몹시 모순적이고 불가해한, 인간만의(?) 방식이다.

 





-나는 그들을 증오할 수 없다. 나를 그들과 결합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았다.

-시의 천분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고독: 시선들의 감미로운 부재(不在).


-유일자의 눈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로 대체된 것이다. 삶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유일의 거대한 난교 파티로 탈바꿈했다.


-카메라가 고뇌에 빠져있는 당신을 촬영할 때 어디에 개인주의가 있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개인이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예요. 완전히 타인의 소유로 전락했다구요.

(중략)

사진 찍는 권리가 다른 모든 권리의 상위에 올랐지요. 요즘엔 그렇게 모든 것이, 정말 완전히 변해 버렸어요.


-서로 다른 두개의 얼굴을 닮은 사진을 나란히 놓으면 물론 당신은 그 두 얼굴의 서로 다른 점들을 모두 파악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 앞에 이백스물세 개나 되는 얼굴이 있으면 문득 당신은 그 얼굴들이 한 얼굴의 무수한 변이체에 불과하며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 모든 일들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확신에 젖어 있었으므로 도무지 그들의 전쟁을 괴로워한다거나 그들의 축제를 함께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우리에겐 가장 큰 미스테리인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이처럼 우리 모두를 알고 있다는 환상으로 속여넘긴다.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힘이 작동되며 힘은 첫 번째 표적에서 멈추지 않는다.


-음악: 영혼을 부풀리는 펌프기구. 이상팽창된 영혼들은 거대한 풍선들로 화하며 공연장 천장 아래로 떠다니며 끔찍한 혼잡 속에 서로 충돌한다.


-비존재의 관능


-인류와의 비연대성: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만이, 즉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만이 이 일탈로부터 그녀를 구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타인들의 운명이 그녀와 무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그 운명에 의존하며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까닭에 말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전생과 그들의 바캉스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느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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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6-02-03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지만 쿤데라는 참 글을 잘써요.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 저는.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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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이 책을 빌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아마 <화장>을 읽고 감동을 받았었고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읽었는지 말았는지 하고 다시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었다.

후배가 좋다고 소개를 해서 다시 읽어보니, 그 후배의 말마따나 좋은 소설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서로 전혀 다른 빛을 뿜어내며 다른 감상을 안겨주는. 그 중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소설은 하나도 없는.

나는 특히 전성태의 <존재의 숲>과 김승희의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을 좋게 읽었다. 전성태는 행간을 아는 작가가 아닐까 싶었고, 이런 소설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은 말이 넘치는 시대, 욕망이 넘치는 시대에 대한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이랄까, 그런 것들이 좋았다. 특히 마지막의 진흙이 허물어지는 느낌, 그렇다고 허무한 게 아니라 아스라이 깨어나는 꿈 같은 느낌이 좋았다.

이 정도만 써야겠다.




-오줌이 빠져나간 방광이 빈 들판처럼 느껴졌다.

김훈, <화장> 중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잘 말할 수 없다.


-사랑을 이룬다는 저 속된 말에 의지해서 인간이 희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보아도 숲에 온 것 같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해 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씨앗 한 개의 해안 표착은 무서운 인연이다.


-철새의 발바닥에 붙은 씨앗 한 개가 대륙을 건너가 새로운 숲을 이루기도 한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그는 절망을 부인하지도 않고 절망을 중언부언하지도 않았다.


-명량바다로 나가는 그의 마음은 칼에 시 한 줄을 새기는 그 단순성이다. 그리고 삶을 수식하지 않는 그 삼엄함이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 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김훈,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일 리가 0.4킬로미터니까 삼십 리는 별거 아니네. 하지만 그러나 그 시에선 가도 가도 온 천지에 비가 온다…… 이렇게 되는 것 아니야? 울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왕십리야.


-우리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흙파이잖아. 물기가 없어 버석버석하긴 하지만 울면 진흙이 흘러버려. 진흙이 마구 흘러내리면 우리는 자신을 잃게 되잖아. 굽자. 굽자. 또 굽자. 흘러내리려는 내 몸을 굽기 위해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거는 거야. 비 내리는 마음의 왕십리에서…… 진흙 파이를 굽기 위해. 구워야만 해. 구워야만 하지. 비 내리는 왕십리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창자 속의 회가 동하는 것처럼 우울이 발광하는 시간.

김승희, <진흙파이를 굽는 시간>

 

 

-캄캄한 삶을 밟아야겠지요. 그러면 말이 자연히 따르지 않겠소?

-자기 연민은 공연히 억지가 되기 십상이지. 그저 남 이야기나 재미나게 듣는 수밖에. 절실하면 남 얘기가 내 얘기가 되는 것 아니겠소?

-달밤에는 달빛 한 낱 한 낱이 옥수수 밭에 칼처럼 꽂혀서 밤새 나가 주울 것도 같았다.

-전성태, <존재의 숲>

 

-나는 그저 넓은 바깥에 쫓겨나 있을 뿐이다. 이토록 넓은 바깥에.


-삶과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표절하는 것 같다.

정미경,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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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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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를 쓰려고 읽었지만 결국 레포트는 이 책과 전혀 관계없이 쓰고 그냥 혼자 읽었었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놀라고 깨우치고 배우고 다시 생각하고, 그랬었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은 명기된 어떤 것을 넘어서, 다른 것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유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책이다.

두려움을 없애자고도 마음을 자유롭게 하자고도 문체는 태도라고도(각각의 저자들이 쓴 논문의 문체가 모두 달랐다) 생각했었다. 뇌와 마음에 대해 고민해봤고 결국 나는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값진 일이라는 결론을 얻었던가. 어쨌든 사유하는 즐거움을 알려줬었다.







-세계를 창조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지만 세계에 질서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마음이 어느 곳에든 ‘멈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이다.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세요. 숟가락은 없어요. 그러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인간은, “바라지 않기 보다는 無를 바랄 것”이다.


-허무주의는 본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주장이거나 다른 무엇을 향해 가는 준비 기간이다. 희망사항이라면, 부정이 긍정에게 자리를 내주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 위한 열쇠는, 모든 두려움을 놓아 보내는 것이다.


-메리는 난생 처음 장미를 보면서 무언가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계는 마음이라는 한계 안에 있으므로 마음은 세계의 구성 성분이 아니다. 마음은 세계성 The Worldliness of the World의 토대이자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스스로 그 토대에 의거할 수 없고 그 스스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세계에 대해 초월적인 특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사물’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물질적이지 않으면 의식은 사물이 아닌 것이 아닌가? 그저 우리는 무無를 제외하고는 사물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명사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환상 세계보다는 실재 세계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것이 환상 세계가 부도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매일 허구적인 것을 섭취하는 데 질려서 진짜로 생각되는 것, 그리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기분을 선호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의식 역시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사물을 드러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행위하는 것이다.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또한 그는 세계를, 사소한 문제에서 복잡한 사고에 이르는 모든 적대적인 힘들이 새로운 의식과 조직에 이르려고 분투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언제나, 모든 순간 그 장면 안에서 그리고 그 주변에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는 가상 시뮬레이션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불완전하거나 모순되게 만드는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모든 상징적인 매트릭스의 기능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를 달성하는 방법은 하나로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불완전하고 모순된 현실의 배후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음모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물론 곤란하다. 그러나 그것을 현대적인 대중 히스테리 현상으로 환원해서도 안된다.


-문제는 UFO 연구가들과 음모이론가들이 사회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집증적인 태도로 퇴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 현상 자체가 편집증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현실은 인류가 저항하게 마련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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