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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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성스러운 봄」


인간은 물질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무늬는 물질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다. 육체라는 물질 안에 갇혀서 마음은 끝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물질들의 세계임에 동시에 마음들의 세계인 셈이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물질들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마음들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작품집 속 인물들이 경제 활동의 주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물질의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인간은 자본을 축적하고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랏빛 사진의 추억」의 ‘나’는 엑스레이 촬영 기사로써, 「호텔 유로, 1203」의 ‘나’는 라디오 방송 작가로써,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유선’은 도서관 사서로써, 「성스러운 봄」의 ‘나’는 보험외판원으로써, 「비소 여인」의 ‘나’는 개미퇴치 용역업체의 사장으로써,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의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화 각색 작가로써 소설 속에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각각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밑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의 직업은 그들에게 영혼을 고양시키는-마음의 세계를 동시에 살 수 있는- 밑바탕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부분 ‘영혼의 좌천’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엑스레이 촬영 기사 이전에 사진을 찍던 ‘나’나, 방송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의 주변’이라는 모임에 나가는 ‘나’ 등은 물질의 세계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직업을 택한 셈이다. 이 직업은 ‘영혼의 성숙’을 가져다주던 꿈에 비해 하잘 것 없이 느껴지지만 이들은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이 직업을 삶의 동반으로 삼는다.


쉬운 말로 하자면, 문제는 ‘돈’인 셈이다.

사실 현실에서 가장 문제시되기 쉬운 문제는, 돈이니, 정미경의 소설은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싸움은 돈 때문에 유발되고, 살인 등의 각종 범죄도 돈 때문에 저질러지기 일쑤인 것처럼.

그러나 정미경의 소설을 읽으며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는, 그녀의 문장에서 기인한다. 그녀의 문장은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마음들의 사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양한 그림들.

인간이라는 물질은 결코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을 통해 스스로 타올라 항성이 되어 빛을 내기도 한다. 존재의 환희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엔 보지 못하는 것이 거기 있었다.’

절정의 순간에 있을 때는 결코 자신이 지금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결코 반추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그 절정 속에서는 과거를 회상하지도 미래를 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음악이 그러하듯, 생은 절정 다음 하강을 예비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야 내가 어떤 음악이 들려오는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고 깨닫는 것이다.

작품집 속 주인공들은 절정에서 미끄러지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자신의 생이 늘 마음의 환희가 들려오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빛을 낼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친 인물들인 것이다. 이 깨달음은 앞에서 말했듯, 꿈만 먹고 살아갈 수 없는 물질적인 세계의 현실을 통해서, 사랑의 상실이라는 마음의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다. 영영 몰랐으면 좋겠는, 이 깨달음이 생을 관통하는 순간, 영혼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추락한다. 추락에 고통이 함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닙니다.’

라고 정미경은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작품집에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혹은 추락한 영혼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고통임을 인식하건 인식하지 않건 간에, 그들은 영혼의 좌천을 경험하고 물질의 세계에 안주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러므로 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

-「성스러운 봄」

열등감은 존재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그런데 고통은 늘 부끄러움을 동반한다니, 영혼의 좌천에 대한 죄값을 부끄러움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존재인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 더욱 쪼그라드는, ‘나’. 삶은 누추하기 이를 데 없고 ‘나’는 수수깡 같아지고 마는 것이다.

「호텔 유로, 1203」의 쪼그라드는 ‘나’는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물질을 탐한다.

'물질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이토록 즉각적이면서도 강렬하다.‘

그녀는 어떤 뜨거움을 원하지만, 이미 그녀의 타락한 영혼에 찾아들지 않는 뜨거움을 그녀는 물질적으로 충족하려 한다.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내 지상의 삶에 새겨진 남루함을 일시에 지워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 거기 살고 있다. 구시대의 인간들이 추상 명사라고 생각하는 것들. 추억이나 행복, 사랑의 슬픔 따위가 형상을 부여받고 색채가 덧입혀져 진열되어 있는 그 아케이드’

그러나 그녀는 이 아케이드에서 산 옷을 입고 나갈 곳도 없다. 단지 마음의 만족을 위해 물질을 탐하는 것이다. 그녀는 상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결코 우리에게 상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환멸을 알고 있는 그녀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이 역시 그녀의 추락을 자꾸만 가속화시키고 환멸을 불러일으킨다.(그녀는 소설 결말부에서 몸을 팔기로 결심한다)

맨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나가는 짓 따위는 영화 속에서 볼 때에나 근사할 뿐, 따라 했다간 찢긴 발바닥과 독한 신열과 상한 기관지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결국 그녀는 물질과 마음의 두 세계이나 한 세계인 이 곳을 살아가기가 벅차, 허덕이고 마는 것이다. 말로도 되지 않는 ‘고통’을 물질로 채워보려 애쓰는 것이다.

‘이토록 눈부신 타인들의 삶 속에서 나도 명성을 획득한 그 무엇인가를 희롱하고 싶어진 것뿐이다.’

는 이유로.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호텔 유로, 1203」의 ‘나’는 ‘항성처럼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추락에 중독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즉물적인 행복감’을 탐할 것이다.

정미경 소설은 이처럼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물질과 마음 사이를 방황한다.

‘환락의 거리에 내걸린, 현란한 불빛 속에 감추어진, 아무 색깔도 들어 있지 않은 멍텅구리 네온 같은 시들.’

이나마 그녀는 쓸 수밖에 없다.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을 말하고 싶으므로.

청각이나 촉각을 이용한 감각적인 문장과 외래어(‘스프링서머 시즌 제품은 겨울 끝머리부터 디스플레이되고 있었다.’)와 동시에 마음의 무늬를 그린 추상어들이 그녀 소설 속에서 혼재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추락의 고통조차 삶이다. 그녀의 소설은 추락하는 뜨거움이 발산하는 빛을 통해 존재의 경이를 드러낸다.  <성스러운 봄>은 이러한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다. 암에 걸린 딸이 죽고 난 뒤 오롯이 남은 경제적 부담을 떠안은 가장인 '나'는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의 고통스러운 생의 그림은 그러나 뜨겁게 아름답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 생, 그럼에도 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음, 그 슬픔을 감당해야함에 대한 그녀의 헌사는 봄에 핀 개나리처럼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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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키요 사르니엔토 1 대산세계문학총서 4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지음, 김현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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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소설하면 나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떠오른다. 얄팍한 지식밖에 갖지 못한 탓에 그렇다.

그래서 중남미 소설하면 환상적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최초의 중남미 소설이라면 멕시코인의 이 작품은 환상적 리얼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이란 자고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이란 그 마음 속을 살펴보고 연구하고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렇지 않고 대충 한 몫 잡아보려 하면 갖은 인생 역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기 자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옴 붙은 앵무새새끼라는 주인공의 별명이다)는 자신의 인생을 자식들에게 펼쳐 보인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한 상황이다

주인공이 태어나면서 어떤 교욱을 받았는가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받은 교육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그 교육의 헛점으로 인해 자신의 그릇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그 그릇된 가치관을 토대로 살아가다보니 갖은 수난을 겪는다는 게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는 성직자가 되려다 그만두고, 의사, 약사의 보조자, 재판관 서기의 보조자, 군인 장교의 보조자, 도적떼의 일원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풍자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의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비꼰다. 자기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다양한 직업 군상을 보여주기 위해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이다.

결국 페리키요는 회개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다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이 쓰여지던 당시 멕시코는 막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상황이었으며 그 이후 왕정, 공화정을 거치는 정치적, 사회적 변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정치적 상황은 다루어지지 않는다.(막강한 검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에 나온 여러 풍자 대상들이 현대에도 여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올바른 교욱을 하지 못하는 선생이 있고 아무 약이나 대충 파는 약사가 있고 제대로 된 치료는 못하고 돈만 밝히는 의사가 있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판사가 있으니 말이다.

 

아직도 우리는여전히  '어느 꾀돌이 망나니가 귀족입네, 능력 있네, 부자네, 쓸모있네 하며 우리를 속이려들면 우리는 속절없이 속아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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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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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장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화자를 나타낸다. 나는 뭐가 좋다, 라고 확신할 수 있으므로 짧고 강렬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것을 '쿨하다'고 표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군자(君子)라는 얘기다. 소인배처럼 이리저리 남의 말에 따라 자기 주체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혼자 사려깊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책 속의 인간들은 군자인가. 나는 과거 따윈 신경쓰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실은 대부분 불쌍해지고 싶지 않은, 동정받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현인듯 한 행동들이 엿보인다. 과거 따윈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던 요인이 무언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그것은 지난 얘기니까, 말도 안 되는 심리학자들이 괜히 유년기가 인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는 둥 책 속의 화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과거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그 속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말하자면, 단편 <메뉴>에서 우리 엄마는 내가 다섯 살 때 자살했다는 정보를 가장 먼저 노출시키는 자체가 이미 그 사실에 엄청난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거기서 상처받는 방식의 남다름이랄까. 속으로 곪고 곪아서 완전히 껍질까지 같아져버린 경지이다. 여기에 대해 동정을 느껴야 하는가, 감탄을 해야 하는가. 나는 도대체 어떤 포즈를 취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대해 그랬다.

문제는 연애를 하며, 마치 당신과 나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태도를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도대체 이 책들은 가족과 연애 상대 말고는 누가 등장하는가.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게 가족과 연애 상대밖에 없다니... 이거야 말로 정말로 소인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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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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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웃음이 나오는 책이 좋다.

그러려면 적어도 그 책 속의 세계가 아름다워야 한다.

세계 전체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일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파쇼다. 아마, 그날 세계는 아니, 적어도 인류는 멸망할 것 같다 )

세계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하늘도 바다도 노래도 매미소리도 하나같이 아름다워진다. 그것들만의 의미를 깨치고 있기 때문에. 의미란 유일한 존재 의의일 게다. (모든 것은 유일하게 존재하며 가치가 있고 마음이 있지만 인간들은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이다.)

이 책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세계를 바라본다. 화자인 나도, 나의 아들도, 박사도, 어쩌면 박사의 옛사랑인 미망인까지도.

박사가 수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그 세계의 명쾌함 때문일 것이다. 신의 노트를 베껴적는 것처럼, 명쾌한 수학, 숫자 하나하나 속에 깃들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 이것이 박사라는 사람이다.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오로지 현재만을 살아야 하는 삶이지만, 고통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는 태도랄까.

이런 박사의 태도를 본받는 가정부 '나'와 그의 아들 '루트', 사랑은 전이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다시 수학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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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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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적어도 이틀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성은 모두 도망가고 뭔가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 영화의 영상과 언어들이 머리 속에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사랑과 이별(현재로선 도무지 그것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에 대한 그 영화의 통찰력에 놀랐달까. 한 마디로 멍해져버렸다.

그래서 책을 봤다.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단편집이었다.

일본 단편은 고등학생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것 이후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약간 생소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런 느낌이 일본 단편이어서인지 이 작가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은 단무지 같은 소설들의 조합이다.

뭔가 깔끔하게 상황 안에 버무려진 감정, 사회적인 것도 이성적인 것도 아닌, 그저 여성적인 어떤 감각이 상황 안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가.

아주 매력이 없지는 않지만 세상에 이런 소설들 천지라면 무지 짜증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사유하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 수는 없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고리타분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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