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곱 개의 영등포시장 사람들 이야기

이전에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연극화한 작품을 보고 꽤 감동을 받았었다. 살아간다는 일의 생생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 역시 살아간다는 일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해관계가 뒤얽힌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멋지지도 쿨하지도 감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또 어떤 형용사로도 다 말해지지 않는

인간사를 그려낸다

소설을 보며 감히, 가장 한국적인 문화는 시장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가난해서 삶이 아니라 생활을 사는 듯 하지만

그 속에 가장 익숙한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은 그 익숙한 정서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소설적인 어떤 장치로서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그것

 

나는 꼬맹이의 등에 등껍질처럼 달라붙어 있는 어린이집의 가방을 바라보며, 사랑 뒤에 그저 한 마리 슬픈 동물이 되어 떠도는 저 아이의 엄마, 0번 아줌마를 떠올린다.

-<까라마조프가(家)의 딸들> 中



엄마가 버텨온 세월이 거기, 당신의 무릎 안쪽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가난 앞에 주먹질 한번 할 수 없었던 세월의 막막함이 거기 한줌의 응어리가 되어 박혀 있었다. 스스로 한 마리 우매한 소가 되어 그저 묵묵히 현재만을 일궈야 했던 늙은 어미의 무르팍엔 열매 대신 염증이 맺혔고 어미는 자신이 꽃 피워낸 그 흉한 꽃이 못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른 무릎을 감싸쥐었다.

-<엄마의 무릎>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
 

 

인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종에 대해서, 어쩌다 이 지구에 인류가 뿌리내려 지금까지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나도 인류인데, 왜 이렇게 인류란 말은 멀고 아득할까

박민규의 『핑퐁』은 이런 느낌에 대한 길고 긴 답장 같다


인류는 당신을 깜빡했어요

그렇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그냥 계속 그렇게 살면 되요

이런 건 아니라는 거다.


정말 탁구를 치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써브에 당신이 스매시를 날려주고 그렇게 이어진다면, 아 물론 언젠가는 경기가 끝날 테지만, 그래도 먼 훗날 그때는 참 행복했다고,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란다. 알겠니?

해도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헬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 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가장 늦게 시기를 잡는다면,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맹수처럼 서로 물고 뜯으며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건 엑스파일로 묻어두게 하는 게 세상사다.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게 엑스파일이 된 마당에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다. 어서 누군가에게 프레젠테이션할만한 아이디어를 찾아내야 하고, 어서 누군가에게 책잡히지 않을 만큼 살아내야 한다. 늘 우위에 서기 위해 협박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면 긴장해야 한다. 그게 시스템 탓인지, 인간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헷갈리기만 한다. 어차피, 시스템도 인간이 고안해낸 거지만. 이렇게 된 게 필연인지 우연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거리 어딘가에 처박혀 최소(정말 죽어도 최소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하루 여덟 시간을 노동하고 1/7, 2/7 정도의 휴식 비슷한 것을 취하려 전전긍긍하며 사는 게 아주 당연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도 헷갈린다.

헷갈려도, 아무리 헷갈려도,

공평한 시간은, 그렇다면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알아 보세요,

이런 걸 잘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지, 주변의 눈총이나 사회경제적 구조가 허락하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 속 ‘의견’이라는 말은 눈물겹다. ‘의견’이라는 건 어느 순간부터 필요치 않은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못은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개성이나 의견 같은 것도 알고 보면 남이 만들어낸 걸 따라가는 건데, 그걸 잘 몰랐던 것뿐인 인물이다. 내 ‘의견’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실은 대부분, 하라는 대로 하고, 해온 대로 한다. 주변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그 시스템에 익숙했지만, 못은 세계가 깜빡했기 때문인지 그 시스템을 익히지 못해 왕따를 당한 셈이다. 그러던 못이 탁구를 만나 '의견'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견은 바뀔 수 있지만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에 충격을 느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너무 많다. 뭐든 너무 많다. 그래서 나의 개성이나 나의 취향 같은 건 대단히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 그런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인터넷 속을 떠도는 무수한 정보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기분, 누군가 1분쯤 눈길을 주다가 휙 다른 정보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금방 잊혀지고 마는 그런 게 되어버린 기분. 그런 의미에서, 못과 모아이가 ‘마흔한명’ 속에서, ‘육백삼십칠명’ 속에서, ‘천구백십사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 중 한 명이라는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중학생이라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니라, 현대성의 체감일 것이다. 너무 일찍, 그것을 체감해버린 것이다. 도덕 책에 나오는 ‘자아 존중’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아찔한 막막함을 배워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는 뭔가에 집중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잠깐만 집중해 있다가, 깜빡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곳에 온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낯익음이라든가 친숙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모두 다른 ‘정보’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다가 잠깐 눈을 돌렸는데, 돌아갈 길을 잃은 미아 같은 기분. 현대성이라는 말조차 지루한 게 되어버린 지금, 못과 모아이는 이 현대성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비단 못과 모아이뿐 아니라, 핼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쿨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하다- 대체 'Celebration'을 부르는 ‘Cool And The Gang'처럼 즐거울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인가 고민한다.

현대성에 대한 강박 속에 아이들은 ‘탁구’를 친다. 둥근 공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탁구’는 이들에겐 최초의 정신적 몰입을 선사한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탁구’는 세계의 집약이다. 세끄라탱의 말에 따르자면, 인류는 끊임없는 듀스포인트의 연속인 것이다.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연속. 어머니가 기린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도, 세계가 냉장고에 보드라운 카스테라로 담겨 있다는 환상도 꿈꿀 수 없는, 어떤 향수나 그리움을 가질 기회도 얻지 못한 이들 세대가 꿈꿀 수 있는 건 ‘세계의 집약’ 앞에 서게 되는 일뿐이다.

세계가 탁구로 집약된다는 환상은 아마 이 세계에서 ‘음모론’이라는 단어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라고 말하고 살기엔, 너무 억울해서 대체 그 놈의 저 너머에 도대체 어떤 진실이 사냐고 물으면,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시작이었다고, 그저 핑퐁 핑퐁 탁구를 치는 일이었노라고 그런 대답이 들려오는 세계, 먹이만 주면 째깍째깍 공을 치는 새나 쥐보다는 인간이 우월한 세계, 적어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참 좋겠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구타당하는 것이 체화된 유일한 시스템인, 반사적이고 습관적으로 치수라는 같은 인간을 겁내는 한 존재를 통해 박민규는 ‘말하자면, 다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해보려 애쓰는 것이다. 




혹은, 저 너머에 혼자 사는 진실이 탁구로 집약되지 않는다 해도,

어느날 문득,

지금 이 세계를 유지하시겠습니까 묻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래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한 발작 더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다면 참 좋겠다. 그냥 알고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문득 약속 장소에서 만났더니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민규의 소설은 소설 이 시작되기 전 참 많은 말을 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지금 가고 있다.

나 역시 지금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은 나를 스쳐 가는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지금 가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도 내가 당신 길을 가줄 수 없고, 당신이 내 길을 가줄 수는 없다.


‘우리’라는 말이 있다.

앞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라는 말은 한없이 공허해진다. 아무래도, 사람은 각자 한 대씩의 자전거만을 인생에 부여받아 그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공동체란 참,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수풀로 덮여 가기 힘든 길이 있는가 하면,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있다. 공동체의 법칙이란 아마 아스팔트 길을 닦는 것과 유사한 의미일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행인』은, ‘나’라는 존재와 ‘우리’라는 존재 사이에 덩어리진 어떤 분위기를 풀어낸다.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는 종종 가족 안에서 ‘우리’가 되고, 친구와 함께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우리’안에서도 늘 ‘나’인 채이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어느 공동체에든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갈등은 어떤 현실적 갈등 양식-언쟁, 몸싸움과 같은-을 갖지 않은 채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갈등이 현실화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이 번거로움 대신 어색함(‘나’가 ‘우리’가 되지 못해 속으로 아우성치는 꼴)을 잠시 참고 견딤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소설  『행인』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인물은 동생인 지로이지만, 지로는 주인공인 동시에 주인공이 아니다. 소설의 대부분이 그가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에 할애되지만, 이 소설이 소설로써 매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지로의 형 이치로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치로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학자 타입의, 자기 중심적 성격이 강한 인물로 지로에 의해 묘사된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보면, 이치로는 ‘나’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라는 공동체에 존재하는 어색함을 풀어내 표면화시키고 이를 분석해 완벽한 이해를 꾀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모순된 이 세계 자체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다. 사건은 특히, 지로와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한 분위기를 형이 풀어내려 함으로써 구체화된다. 어찌보면 소설 속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인 이치로는 세계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폭로하고, 표면화시킴으로써 해결을 꾀하려는 그의 방식은 곧 고독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에서 ‘우리’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치로는 늘 ‘나’인 채로 세계에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조차.

그러나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 이런 이치로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은 결미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이전까지 소설은, 어떤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중심을 둔다. ‘나’가 부딪치는 모든 인물은 그들끼리 형성한 ‘우리’속에서 삐그덕대지만, 결코 그 갈등을 표면화시키지 않는다. (첫 단락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따님’이 갈등을 표면화시킨다는 말은 형님의 해석이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은 미치거나 죽거나 종교를 택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형으로 인해 그 갈등은 집안에서 숨겨지지 않고 폭로당하고 모든 가족 구성원은 이를 못마땅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다. 지로, 부디 내가 믿을 수 있게 해다오.


인간은 당연히 타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 ‘우리’로 존재하는 시간은 섬광처럼 짧고 희미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삶을 위해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이 각자의 포기된 부분을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형은 이 공동체의 비논리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으로 해서 괴리를 겪는다. 이는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의 고백에 대한 친구 H의 감정으로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친구의 이 모순적인 고백을 통해, 문제가 형에서 인간 전체로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생을 살아내야 하는 피로와 생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적인 책무 사이에서, 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쓰기 시작하여,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글을 마치는 나를 묘하게 생각합니다. 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개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것과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인간적 삶의 묘사 속에서 극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삶의 풍부함과 또 이러한 풍부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소설가와 얘기꾼」(『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中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전투가 동시에 치러졌고, 내 몸뚱이는 넓은 싸움터에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다른 천사, 다른 충동, 다른 자아관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다른 외국 작가들에 비하자면, 폴 오스터는 우리나라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다. ‘열린책들’의 오밀조밀한 폴 오스터 선집은, 어쩌면, 읽고 싶다기보다는 서가에 소장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며 서점에 나란히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대체 폴 오스터가 누구길래 이렇게 많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거야

라고 묻는 사람은 이 책을 집어들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이들에게는, 그의 잘 알려진 소설책 한 권이, 폴 오스터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잘 읽히느냐에 답해줄 것이다. 문장 속에 스며있는 폴 오스터라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닮은 분위기는 그의 소설 속에서 더욱 잘 발산된다. 그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이 단정은 그러나, 내가 그의 소설책을 두, 세 권 읽었다는 가정을 뒷받침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은, 그의 희뿌연한 분위기의 소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에세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삶, 고독을 곁에 두고, 그 고독과 함께 의사소통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따르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때 ‘고독’은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폴 오스터의 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서 한국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까지 번역될 수 있었던 건 왜일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밥을 먹고 똥을 싸고 한 군데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으로써의 삶에 대해 폴 오스터는 말한다. -제목이 『빵굽는 타자기』가 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원제는 ‘Hand To Mouth’이다.

다시 말해, 성공이라는 것의 좌표는 불확실하지만, 실패에 대한 예감은 늘 뒤켠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그 자리, 우둔한 미련일지도 모를,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겪었던 모험담(?)이 이 책의 주내용이다. 이국 파리의 거리를 방황하고, 선원으로 근무하며, 물질을 축적하는 대신, 소설의 자산이 될지도 모를 인상을 쌓는 삶을 택한 노정이 담담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노정에는 엄청난 위험 부담이 전제된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이 결정되지 않으며, 딱히 정해진 어떤 노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기 자신만의 솔직하고 순수한 검열 이외에 다른 누구도 그에게 잘하고 있다, 혹은,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치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불안과 혼란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실패를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빈정조의 거만한 말투와 지적 과시의 태도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내가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었고, 그런 상을 제정한 진짜 속셈은 나 자신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뚤어진 응모 규정은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타격을 피하고, 돈을 분산 투자하여 위험을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게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나는 벌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은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그가 처음 1부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편집장으로 있던 앙드레 지드는 그의 작품을 다시 되돌려보냈다. 그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소설가가 좋은 작품을 세계에 내보낸다 해도, 그 성공 여부에 대해 당장 내려진 선고가 옳지는 않은 경우도 많다. 어떤 소설가가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경로란 우여곡절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요소(시대적 상황, 출판계의 정황 등등 사회적인 요소와 우연적인 요소 등등)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 소설가의 지독할 정도의 순수함은 당연히 수반되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 다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폴 오스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뉴욕 3부작』 같은 경우를 되돌아보면, 그 소설은 뭐라고 딱히 정의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돈 한 푼 없는 상황으로 자주 치닫게 되면서도, 직업을 갖는 평범한 삶 대신 은밀하게 고수한 무엇(이 역시 나의 언어적, 인식적 한계로는 뭐라고 딱히 해명할 수는 없다)일 것이다. 삶은 선택적 성격(살아간다는 자체가 죽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나 지금 당장 죽을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밖의 현재의 삶의 모든 제반 요소-시간을 돈으로 환원하고, 노동력으로 돈으로 환원하는 모든 행위)는 알고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선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H.L. 흄스에 대한 삽화는 이 책의 성격을 강렬하게 해준다. 단 두 권의 책을 출판한 뒤 세계와 융합하지 못한 소설가의 삶은 폴 오스터의 삶과 어떤 교집합을 갖지만, 전혀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H.L, 흄스의 방식-거리를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돈을 주며 그 돈을 얼른 없애라고 함으로써, 돈의 기호화를 폭로하는-은 폴 오스터가 추구하려는 삶을 극적으로 과장한 것처럼 보인다. H.L,흄스의 목적이 진실로 지구에 뿌리내린 자본주의를 뿌리뽑기 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지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은밀한 퍼포먼스-이 퍼포먼스는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내밀한, 개인적인 종류의 즐거움을 주지만 인류와 소통을 통해 이 즐거움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개인적 작업을 통해 인류와 소통하려 드는 소설의 양식과 비슷하다-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계획을 떠벌였는데,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행위라기보다 일종의 정신적 퍼포먼스였다. H.L. 흄스는 화성의 지령 센터에서 훈련을 받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의식의 얕은 여울에 좌초하여 약탈당하고 불타버린 작가였지만,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기력을 북돋우기 위해 이 광대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돈 덕분에 그는 다시 관객을 얻었다. 사람들이 구경하는 동안은 생기와 의욕이 솟아나, 혼자서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처럼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그는 어릿광대처럼 뽐내며 걸어다니고, 재주를 넘고, 불꽃 사이를 통과하고, 대포에서 튀어나가는 인간 탄환이 되었다. 짐작컨대 그는 그 순간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수필의 본래적 성격대로, 이밖에 여러 가지 일화가 나열된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폴 오스터라는 사람의 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그의 작업은 결코 여유로운 작업이 아닐 테지만.

뒤에 소개된 희곡 같은 경우는 그의 소설 『뉴욕 3부작』 중 하나를 희곡화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DVD의 디렉터스컷과 같은 느낌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박상우 / 세계사 / 1993년 5월
평점 :
품절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는 생이 에고의 치열한 투쟁임을 고백한다. 모든 사랑의 이기적 속성(굳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이외에도 모든 행위가 동반하는 사랑의 감정까지를 포함하여)을 간파하는 이 시의 5, 6연에서 시인은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그 누구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중의적 비유로도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없는 삶, 그리고 그 암묵적인 삶의 한가운데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박상우의 소설 『블랙리포트: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는 ‘내’가 사막(111 통제구역~999통제구역)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횡단하여 사각지대라 불리는 통제 받지 않는 구역에 있는 ‘루시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지독히 단독적이며 내면적이다. 여러 명의 인물이 소설에 등장해 음성을 내뱉지만, 이는 ‘나’의 내면에 남겨진 음성, ‘나’에 의해 편집된 풍경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나’ 이외에 부피감을 갖추고 등장하는 인물은 오로지 나의 여정을 시작하게끔 해준 ‘루시아’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루시아는 나에 의해 설명될 뿐이다. 어느 날 사막을 건너 찾아온 루시아는 내게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나 버린다. (-거짓말이야.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럴 수도 있잖아.‘)‘나’는 그녀에 의해 사막을 인식하게 되고 사막을 통과해 통제당하지 않는, 그러나 일절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각지대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한때 루시아가 혁명을 꿈꾸며 떠났던 곳으로.


앞에서 인용한 황지우의 시와 박상우의 소설은 삶의 풍경을 사막으로 상징한다. 이는 자칫 달라 보일 수도 한다. 황지우의 시는 사막을 개인의 내면 풍경을 상징화하지만, 박상우는 섹스, 폭력, 환각, 종교적 이념 등으로 얼룩진 세계를 각각 특징에 따라 분류해 번호를 매겨 사막 통제구역으로 둔다. ‘나’는 이 황폐화되어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 세계를 사막으로 상징했을까. 단지 세계가 인간성을 상실해 가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나일 수 없게 하는 것과의 선명한 싸움.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며 언제나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내가 원해온 것은 오직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침해하는 외부와의 싸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음 흔들릴 때마다 툭, 툭, 귓전에서 마른 잎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던 시간들……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박상우의 상징은 세계의 황폐함 때문이기 보다는 내면의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막을 횡단하며 벌이는 투쟁은 철저하게 자아와 세계와의 투쟁인 것이다.


-그런 밤이 일생에 몇 번이나 더 되풀이되어져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으로 뒤바뀌어버리던 시절. 터무니없는 기다림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만 내가 내게 돌아와 그 거센 날갯짓을 잠재울 수 있을까. 그게 나와 나 사이에 가로질러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환상의 끝은 언제나 내 등뒤에 있었고, 돌아서서 내다보면 세상은 언제나 불모지대와 같은 황량함으로 턱없이 드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투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분열적 소설 공법을 선택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이 때문에 소설은 구체적인 갈등이 드러나지 않고 ‘시네마 파라다이스, 전광뉴스, 중앙정보통제국 체포지령’ 등등의 단편적인 세계를 드러내주는 삽화적 글들이 삽입된다. 이 글은 영화 광고 문구, 신문 기사를 첨부한 형식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하나의 풍경이며 ‘나’는 다름아닌 이 풍경, 다른 말로 하면 이 세계 전체와 갈등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에고의 사막을 횡단하기 위한 한 편의 서사시인 셈이다.


-죽어도 환절기의 서사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굳게굳게 맹세를 했다.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어, 마침내 내가 있던 자리에 나라는 욕망의 주체 대신,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하나의 기류가 형성될 때까지, 나를 치고, 나를 죽이고, 그리고 염두에 둔 나를 끝없이 없애야 하리라.



그러나 그의 서사시는 무법이 다른 문법의 창조가 되고 마는, 멸하지 않으면 결코 고독의 무게가 늘 인간을 짐지우는 세계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으며 끝이 난다.


-다가오는 것과 멀어져가는 것, 기억에 남는 것과 기억에서 소멸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투과시키는 장치로서의 몸이 우리에게는 필요할 뿐이었다. 첨삭도 불필요하고 수식이나 폄하도 또한 불필요한 것. 모든 것이 투사되고 투과되고,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동시에 투명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상태 - 그런 상태로 가는 길에 바로 우리들의 삶의 노정이란 게 던져져 있는 건 혹시 아닐까?


-내가 선택한 무법이 또 다른 문법의 창조였다는 사실. 삶이 끝나야 법이 풀린다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