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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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좋은 책을 읽다가 덮으면 그 책에서 빛이 뻗어나가는 환상을 보곤 했다.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책에서는 성스러운 황금빛이 발하는 것을 나는 종종 경험하곤 했다. 활자들이 모여 소곤대는 소리가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는 다시 그 경험을 했다. 작고 네모지고 가방 속에 넣어 버리면 금방 감추어지는 한 권의 책, 그 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한 권의 책은 내가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더라도 실감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생생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이라는 개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얼마나 풍자적으로 그려놓았는가.


그것은 종종 당근과 채찍이라는 약간 묘한 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옛날에는 주로 나귀와 노새에게 적용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에게도 사용되었고 또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사 년 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머는 병이 찾아왔던 도시에 갑작스레 팔십삼 퍼센트라는 막대한 숫자의 인간들이 백지 투표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백지 투표를 했는가, 가 주요 질문이 될 것이다. 어떤 음모, 주술의 영향력으로 인한 집단 광기라는 뻔한 대답을 주제 사라마구는 넘어선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그들은 지겨워졌기 때문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 각처의 반응은 음모를 먼저 상상하고 대처한다. ‘모든 일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또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만의 독특한 반응 양식을 주제 사라마구는 압도적인 풍자의 정신으로 그린다.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적을 향한 공격은 수사, 수감, 거짓말 탐지기라는 인간만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는 거대한 장벽을 만든다.



그러나 이 집단과 정치에 대한 풍자는 갑자기 방향을 튼다.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명 사건은 하나이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혼자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사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왜 그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한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마 여자와 여자를 추적하던 경정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해도 사실이 되고 마는 법칙 속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의 음모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버릴 백색 투표 질병의 주범으로 낙인을 찍을 여자를 쫓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정은 여자를 쫓으며 겪던 도덕적인 혼란 속에서 어떤 문구를 기억해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그리고 경정에게 어울릴 경고는 그의 삶에 적중한다.


조심하시오, 당신의 혼란은 도덕적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도덕적 혼란은 불안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그 뒤에는 당신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소.


개인이 집단을 만들고 사회가 이룩되는 순간, 진실, 불안한 진실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진실에는 늘 불안이나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에요, 나는 지금 단순히 삶이 덧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작은 불꽃이라서 언제 꺼질지 몰라요,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나는 이 소설을 미국에 대한 풍자로 읽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듯 사건을 꾸미고 그 사건에 멋대로 대응하는 정치 세력이 가장 융성한 국가. 평화롭게 내버려두어도 될 많은 이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강요하고 마치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양 구는 미국의 방식은 이 소설 속 정치가-총리, 대통령, 내무장관- 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허구를 사실로 강요하는 이들의 방식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날카로운 풍자는 소설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 속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바보같이 세상이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렇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결국 바로 이곳, 지금,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


그 사람들이 찾아내든 못 찾아내든, 그 사람들이 옳다고 판명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옳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왔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란 모두가 똑같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화의 이야기꾼이 자신이 묘사한, 비록 여유작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묘사하고 있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는 아예, 아니 아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큰 벽에는 도시의 커다란 항공사진도 걸려 있으니 꼼꼼한 묘사로 한두 페이지를 채울 풍부한 기회가 있다. (중략)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장의 이마에 깊게 파인 불안한 주름들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이튿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시장과 운전사가 다시 만났을 때, 내일 본다는 것이 그 간단한 말과는 달리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암시를 하고 싶은 거요. 질문은 암시가 아닙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게 암시겠지요.


나는 멀리 갔을 뿐 아니라, 이미 도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누가 이렇게 완전히 죽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기가 사는 세상과 늘 전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요.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이런 말 뒤에 이어진 정적은 시간이라는 것이 시계, 그 생각하지 않는 기계와 느낄 줄 모르는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영혼도 없는 작은 기계가 말하는 시간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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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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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방식이 바로 살아온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기 전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가로 그의 전 존재는 함축되는 것이다.

각 철학자들의 죽음은 그래서 흥미롭다. 자신의 육성으로 삶의 가치와 지혜, 우주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이들의 죽음 속에는 생의 방식이 있다. 니체의 고독한 죽음과 베이컨과 윌리엄 제임스의 죽음에 대한 일화는 그래서 재밌다.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인데, 철학사를 훑기에는 이 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인용한 말은 각 철학자들의 철학의 핵심이라기보다는 내가 공감하거나 필요해 발췌해놓은 것이다.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철학 공부는 겉핥기는 즐겁지만 속으로 들어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머리에 쥐가 난다는 말이 이런 거군 싶다. 안타까운 일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가 바로 시작인 것 같다는 예감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지혜를 애구(愛求)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은 회의를 배울 때―특히 자신의 소중한 신념, 자신의 독단, 자신의 공리를 의심할 줄 알 때―시작된다.


모든 정치 형태는 기본 원칙의 과잉으로 멸망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민주정치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멸망한다. (중략) 민주정치의 결말은 참주정치(僭主政治) 또는 전제정치이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심리학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더 훌륭해지기까지는 어떠한 변화에 의해서도 본질적 변화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분명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잠들거나 병, 또는 정신착란에 걸려서 지력이 속박당해 있을 때, 참된, 또는 영감적인 직관에 도달한다. 예언자 또는 천재는 광인과 같다.


초등교육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


수학은 철학의 불가결한 서곡이고 최고의 형식이다.


정의는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일을 하는 것


사회에 있어서의 정의는 많은 유성이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면서 결합을 유지하는 조화로운 관계와 같다.


새로운 옷을 입더라도 진리는 항상 동일하다.

-플라톤


우리도 모두 인간의 가능성의 한갓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민감한 자는 주인이 되기도 어렵고 노예가 되기도 어려운 법이다.


“우리 인생의 극장에서는 신들과 천사들만이 관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사상은 대상의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사진이다.


어쩌면 철학의 대재건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조물주는 우리들에게 세계 전체와 맞먹을 만큼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을 주었다.


“중상을 입고 더운 피를 흘리면서도 상처를 입는 순간에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죽기를 바란다.”


그는 생명을 단념하지 않고 쾌활하게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썼다.


그는 유언장에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오만한 말을 남겨놓았다. “나는 나의 영혼을 신에게 유증한다. …… 내 몸은 아무도 모르게 묻을 것. 나의 이름은 후세와 외국에 전할 것.”


-베이컨


“때로는 나의 자연적 오성으로 거둬들인 수확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알게 되지만 나는 이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모으는 동안 나는 행복하며 탄식과 비애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참으로 선하고 또 그 선함을 전달할 수 있고 정신으로 하여금 그밖의 모든 것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지고의 행복을 누리는 능력의 발견 또는 획득이 가능한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중략)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은 고통이 생길 여지가 없는 쾌락에 의해 정신을 키워준다. 최대의 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많이 알면 알수록 자기 자신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더 잘 이해하고, 정신이 자기 자신의 세력 또는 힘을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더 잘 인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규칙을 만들어낼 것이다.”


사고는 욕망의 열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욕망은 사고의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최고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힘의 평등은 불안정 상태에 있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따라서 “불평등 속에서 평등을 구하는 자는 부조리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최초의 인간은 지혜를 완전히 알지 못했고 최후의 인간도 지혜를 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지혜에 담긴 사상은 바다보다 깊고 그 충고는 심연보다 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뾰족탑 끝에서 떨어지며 공중으로 떨어지는 것이 상쾌해서 ‘제발 이 상태가 계속됐으면’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다.”


“우리들은 둘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충심으로부터 확인한다.”(한 젊은이가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했을 때” 볼테르가 보낸 편지 내용 중)


천국이 파괴될 때, 비로소 지구는 정덩한 권리를 가질 것이다.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른다.


“확실성을 말하는 자는 허풍선이다.”


회의는 매우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한편 확실성은 가소로운 상태이다.


“최초의 성직자는 최초의 바보를 만난 최초의 사기꾼이었다.”


“신이 ‘무엇’이고 ‘왜’ 신이 현존하는 만물을 창조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너무 주제넘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나에게는 매우 주제넘은 일로 생각된다.”


-볼테르


철학에 있어서도 정치학처럼 두 점 사이의 최장 거리는 직선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절로 질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사고 자체가 정제 작용이기 때문에 질서를 갖게 된다.


물질이나 외계가 존재한다는 것 외외에는 우리는 물질이나 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도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에 알맞은 자가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가슴은 머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나름의 이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비사교성, 이 지지 않으려고 하는 질투심과 허영심, 이 소유와 권력에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자연에 감사하라……인간은 협조를 원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류에게 보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인간이 힘을 새롭게 발휘하고, 자연적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불화를 원한다.”


-칸트



“우리는 어떤 것을 욕구할 이유를 찾아냈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이유를 찾아낸다.”


기억은 ‘의지’의 하인이다.


“한번도 인생과 사물을 망상 또는 환상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철학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연의 참된 상징은 원(圓)이다. 원은 회귀의 도식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생의 기초적 자극이고 현실이며 쾌락은 고통의 소극적 유예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곤궁과 고뇌가 잠시 인간을 쉬게 하면 곧 ‘권태’가 다가와서 어쩔 수 없이 오락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또다시 고통이 생기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악 중의 어떤 것―예컨대 투쟁―은 삶의 본질적인 것이다.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유기체가 고등해지면 그럴수록 수난도 더 커지므로 인생은 악이다. 지식의 증대는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인식이 명석하고 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고통도 증대되는데, 인간에게서 최고도에 이르며, 인간의 경우 인식이 분명할수록, 곧 인간이 지성적일수록 고통도 크다. 천재는 가장 고뇌하는 법이다.”


인생은 전쟁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자연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투쟁, 경쟁, 갈등, 그리고 승리와 패배의 자멸적 교체를 본다. 모든 종은 ‘다른 종의 물질, 공간, 시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살려는 의지는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잡아먹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다. (중략) 인류도 가장 무서울 만큼 분명하게 이러한 갈등, 곧 의지의 자기 분열을 드러내며 우리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이리’임을 알게 된다.”



인생의 전경(全景)은 거의 생각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럽다. 인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에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목표 달성 이외에도 전과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 이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 때문에 모여 있는 고슴도치와 같아서 너무 가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비참해진다. 모든 일이 매우 이상하기만 하다.


“낙천주의는 인간의 표현할 길 없는 고뇌에 대한 통렬한 조소이다.”


“우리들의 노력, 분투, 투쟁의 보람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좋은 일은 덧없으며 세계는 결국 파산하며 인생은 손해 보는 장사이다.”


행복하려면 청년처럼 무지해야 한다.


경험이 정연한 지혜가 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에 두뇌와 육신은 시들기 시작한다.


죽음이 잠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양이가 가엾은 쥐를 놀리는 것과 같다.


“광기는 괴로워하는 본선, 곧 의지의 마지막 치료법이었다.”


마지막 피난처는 자살이다. (중략) 디오게네스는 호흡을 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살려는 의지에 대한 승리가 아닌가! (중략) 의지는 종을 통해 지속된다. 삶은 자살을 비웃고 죽음을 미소로 맞이한다. 자발적 죽음이 있을 때마다 무수한 비자발적 탄생이 있기 때문이다.


의지가 인식과 지성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한, 인생의 재난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은 의지를 정화한다.


천재는 의지 없는 인식의 최고 형태이다. 생명의 최하 형태는 전적으로 의식 없는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천재는 바로 가장 완전한 객관성, 다시 말하면 곧 정신의 객관적 경향이다. (중략) 순수한 인식주관으로서 세계를 밝은 눈으로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잠시 완전히 포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과학의 대상은 많은 특수를 포함한 보편이고 예술의 대상은 보편을 포함한 특수이다.


음악은 영원히 움직이고 노력하고 방황하는 의지, 마침내는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돌되돌아가는 의지를 보여준다.


언제 우리는 ‘의지’의 눈 앞에 도전장을 내던지고 감미로운 인생은 거짓말이며 최대의 은총은 죽음뿐이라고 말할 용기를 갖게 될 것인가?


염세주의자가 되려면 한가해야 한다. 활동적인 생활은 거의 언제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세계는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호레이스 월폴


30세가 넘으면 염세주의자가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


만년에 미쳤을 때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바그너의 초상을 알아보며 그는 ‘나는 이사람을 무척 사랑했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덕’의 배후에는 권력에의 은밀한 의지가 있다.


이성과 도덕은 이 열정의 손아귀에 든 무기이고 이 열정의 괴리이다.


“지옥은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천국이었다.”


“인간은 보다 착해져야 하는 동시에 보다 악해져야 한다.”


인류는 개선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개미가 살고 있는 광대한 언덕뿐이다.


“자기 시대의 도덕 체계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투쟁에는 반드시 복수가 뒤따를 것이다. ……안팎으로부터”-엘리스


“왜 인간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지를 아마도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인간만이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리스베트, 왜 울어? 우린 행복하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언젠가 그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창백한 얼굴이 밝아졌다. “아! 나도 몇 권의 좋은 책을 썼어.”라고 그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니체



우리는 공간적 개념으로 사고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유물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짙다.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창조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견해, 곧 기계론과 목적론을 극복해야 한다. 두 견해는 인간이 하는 일을 고찰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도달한 관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노력하는 것, 위로 위로 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것, ‘언제나 끊임없이 생산하는 우주적 충동’이다. 생명은 관성과 반대되고 우연과 반대되는 것이다. 생명이 스스로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저지하려는 물질이라는 저류, 다시 말하면 휴식과 휴지와 죽음을 지향하는 사물의 정체와 이완에 있어서, 생명은 각 단계에서 매체의 관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본능이나 기관이나 마찬가지이다. 본능은 정신의 도구인 것이다.


본능은 안정의 매체이고 지성은 모험적인 자유의 기관이다. 본능은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생명이다.


-베르그송


“예술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다. 심상은 상상력의 유일한 재산이다. 예술은 대상을 분류하지 않고 대상을 현실적 또는 상상적인 것으로 판별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예술은 대상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카


예술의 기적은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사상의 잉태에 있다.


-크로체


“태어났다는 것은 불사에 대한 흉조이다.”


“신화비평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노해서 신화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소지으며 시로 보는 것이다.”


조용히 공물을 받아들이는 한 명의 해적 두목(국가)이 경고나 제한없이 돈을 빼앗는 수백 명의 해적들보다 낫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생산하고 우리가 만들 물건에 압도당하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물건이 인간을 말[馬]로 삼아 타고 다닌다.”


“민중이라는 익명의 전제자보다 더 미운 전제자는 없다. 민중은 어디에나 파고들어 무슨 일이든 방해한다. 민중은 편재해 있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싹터오르는 새로움과 천재의 어린 가지를 모두 꺾어 버린다.”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훌륭한 철학에 따라 살아갈 용기만이 필요하다.


-산티아나



우주는 밀폐된 조화의 체계가 아니라 엇갈리는 흐름과 상반되는 목적의 싸움터이다.



온 인류의 눈물로도 영원한 계획서의 단 한 마디나마 씻어내지 못한다. 완성된 universe에서는 개성은 망상이다.(중략) 그러나 미완성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역할 중 몇 줄은 스스로 쓸 수 있고 우리들의 선택은 어느 정도 우리가 살게 될 미래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나 자신은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현존하는 경험의 최고의 형태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우리들과 우주 전체의 관계는 귀여운 개나 고양이와 인간 생활 전체의 관계와 같다고 믿는다. (중략) 우리들도 사물의 보다 포괄적인 생명에 대한 접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 종이에는 그의 마지막, 어쩌면 가장 특징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결론은 없다. 우리가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끌어냈는가? 말해둘 만한 예언도 없고 남길 만한 충고도 없다. 안녕.”


-윌리엄 제임스



“철학은 내세에 대한 꿈에 취해 버렸다.”


“환경에 대한 완전한 적응은 죽음을 의미한다.”

-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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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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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집 이후 아주 오랜만에 펴든 시집이다. 내게는 요즈음 나온 시집이라는 게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이다. 한동안 시집을 놓고 살았다. 놓고 싶지 않았는데, 요즘 시집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성찬이라는 편견이 책을 선택하는 나의 기준 한 켠에 자리잡았다.


더 깊어지기 위해, 뿌리 곳곳에 햇빛이 흡수되듯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시의 리듬과 고요함, 더불어 알 수 없는 어떤, 이 세계의 음모를 파헤쳐보게 되는 시각이랄까 그런 것들에 광합성하고 싶은데 요즘 시를 읽어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달까. 아주 짧은 소견일 뿐이지만 사실 그랬다. 시는 ‘몇 억년이 지나도 암호로 남아버릴 이 시간’에 대한 유일한 시각(視覺)이다. 언어가 품고 있는 암호의 성질, 언어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리듬, 음악성의 미(美)가 깊이있는 울림으로 공명해야만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자궁’-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열’, ‘죽음’, ‘서러움’, ‘꿈’, ‘외로움’,‘사랑’-부터 ‘바람이 다니는 아주 먼 곳’-‘우주’, ‘이역’, ‘방랑’, 다시 ‘꿈’, ‘사랑’, ‘죽음’-까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훑어간다. 관악기를 불기 위해 숨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음이 되어 나오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의 깊이있는 언어는 세계를 연주한다.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형에 관한 얘기’라는 그의 시집 초반의 선언은 결국 ‘너’와 ‘나’ 모두의 기형적인 내면에 대한 폭로이며 사유가 시작된 그의 내면을 따라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안내문이 된다. 그리고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비정하고 성스러운 이 세계’에 대한 ‘울음’을 ‘간직’한 것이 그의 시라고 말한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문득 이 세계의 기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들려온 방송 목소리의 낯설음과 낯익음 사이, 그 짧은 찰나에 지나쳐간 두 배반되는 느낌,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의 다리를 벌리 폼, 사람들의 각자 다르게 바랜 구두를 바라보며 이 생의 낯설음과 불편함을 깨우치고 마는 것이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바라본 세계는 당혹스럽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그 당혹스러움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동감한다. 거짓을 말하느니 시를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온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일, ‘바람의 피를 마시며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일이 바로 시를 읽는 일이다. 간만에 깨닫는다.

 혼자 있는 날 집에 앉아 중얼중얼 소리내어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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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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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를 권하지 못한 것. 물론 보다 근본적인 회한은 이런 사소한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전생애보다도 우선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이제까지 겹겹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안일에 대한 바람을 후회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내가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단순한 생존 혹은 더욱 편안한 생활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의미는 진실하고 참된 인간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깨우친다. 복잡한 세계에 대해서 더 이상 투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겹겹이 반성한다. 투정과 이기주의, 이유없는 분노, 나태에 대해서.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다. 작가가 아니라 변호사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회를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면 멋진 것이니까. 어떤 장벽 앞에서도 그 장벽을 장벽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의지와 실천 정신을 배우고 싶다. 그가 승소한 다양한 사건들-권양 성고문 사건, 망원동 보상 사건 등-이 당시의 사회적인 벽을 무너뜨리는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그만큼 진실하게 그 사건에 다가서고 기초부터 튼실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안일한 태도는 결코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 그 사건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의식과 맞서야한다는 것. 어떤 자리에 있건, 어떤 직업을 갖건 그와 같은 철두철미한 정신으로 살아야겠다.

또한 끊임없는 겸손의 자세.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위대한 책을 쓴 뒤에도 주변인에게까지도 끝내 자신이 그 책을 썼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깊이를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 어떤 결정 앞에서 흔들릴 때, 안일 혹은 물질이 유혹의 손길을 뻗칠 때는 늘 이 책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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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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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가는 대로 해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대체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 가는 것을 어떻게 봐서, 그것을 따라 가라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은 시스템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시스템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적응 기제를 가진 동물. 현재는 휴대전화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텔레비전이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적응한 동물이 21세기적 인간이다. 처음엔 두 발로 서는 것에 적응하고, 불을 사용하는 법에 적응하였던, 시스템화된 인간들. 물론, 시스템에 적응하며 겪게 되는 불협화음이라는 게 있다. 당장, 어떤 것을 선택할 때마다 겪게 되는 갈등, 이 불협화음이 마음일까.

그렇다면 뇌와 마음,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마음이란, 낭만주의적 환상이 아닐까. 사실, 답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책을 읽다가 지루해져서 그만 읽고 싶어하는 것을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뇌가 하는 일이라고 봐야할지 알 수가 없다. 인간 관계에 가면 마음의 문제는ㅍ더욱 복잡해진다. 내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생각은 과연, 마음인가, 뇌가 갖게된 다른 시스템을 가진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적응 기제의 발현인가.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질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다. 우리는 사실 이 넓은 우주에서 정말 개미만한 별에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조차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점차 미지의 영역을 밝혀나가는 일, 미지(未知)에서 지(知)로 나아가는 일, 인류의 발전이란 이것이다. 마치 게임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과 시간을 탐사해 나가는 게 인류의 과제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우주의 끝, 시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 등등-게임은 끝이 날까.


SF소설은 미지의 영역을 배경으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아직 시스템화되지 않은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에 대한 반응-이것을 마음이라고 불러도 될까-을 상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터미네이터’ 같은 경우는 과연, 기계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생겨난다면, 이라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결국 사라 코너의 생이 인류의 생존 게임이 된다. 당연히 영화는 숨막힐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평범한 인류-즉, 당신-의 생존이 달려있으므로.


필립 K. 딕의 소설은 어떤 조건을 제시함에 있어서,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에 대한 적응 기제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도 못말리는 M'이나 ‘두 번째 변종’ 같은 단편의 경우, 시스템화된 기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못말린다’는 건, 기계는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를 수도 없다는 뜻이래요.



최후의 적,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패배당하기엔 너무나 우둔하고 무감각한 적. 차라리 짐승이 더 나으리라. 바위처럼 단단하고 아둔하고 아무런 자질도 갖고 있지 않는 적. 무너뜨릴 수 없는 결단력만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을 결단하고, 끈질기게 버틸 것을 결단했다.


그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끼에 뒤덮여,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다리는 M. 비바람을 맞고 부식되어 가다가 마침내는 한 인간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M은 바위이기를 그치고, 잽싸게 활동 상태가 되어, 너비 30센티 길이 60센티의 상자로 변한다. 특대형 크래커 상자 모양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기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인용한 문장은, 이 기계가 생존을 위한 적응을 시작할 경우의 무참한과 공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적응하는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 일에 대한 두려움. 결국, 이것은 기계의 문제만이 아니게 해석된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에 대해 불협화음을 겪지 않는다면, 이라고 물어볼 수 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밖에 알지 못한다면.


필립 K. 딕은 이외에도 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기억이나, 욕망에 대한 것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등이 아마 이런 것들일 것이다. 가장 그래서 그의 소설은, 공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순수한 고통’ 속에서 헤맸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에 나오는 문장이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결코 쓰여질 수 없는 문장이다. 소설의 전체 내용도 물론 그렇다.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이런 인간은 어떤 욕망을 갖게 되는가. 인간은 한계지워질수록, 더욱 강해진다. 어떤 한계를 인식할 경우 이 한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겨난다. 이 소설의 그녀는 이러한 캐릭터이다. 과연 고통 받는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를 며칠 전에 영화로 봤다. 책은 아직 못 구해서 못 봤다. 나는 이 소설의 원제를 무지하게 좋아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안드로이드가 전기양의 꿈을 꾼다면, 안드로이드가 마음이 있다면, 인간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를 댈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안드로이드인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라는 기억이 제거된. 혹은 신의 장난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은 무한하므로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적응해온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없다면, 이러한 상상은 공상으로 머무르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포 속에서 사는 나름대로의 경험이었지, 안 그래? 그게 바로 노예로 사는 방법이야.


나는 이 말보다 노예에 대해 더 잘 정의한 말을 알지 못한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이 정도의 투철한 연구는 있어야만, SF소설이 의미있는 게 아닐까. 결국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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