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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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철학자들 때문이었다. 학문의 암흑기라 불리는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하나 같이 신을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눈 가리고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아 하도 답답해, 대체 이 철학으로 만든 최상급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여 옛 기억에 의지해 빼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나의 미욱함을 느끼고 반성을 할 밖에. 대가가 쓴 추리소설이며 역사소설인 이 이야기 안에 사상은 또 얼마나 매끄럽게 녹아들어있는지…….

중세라는 천년 왕국 동안 이단을 매달아 화형대를 드높이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며 에코는 이야기 구조 속에 자신 나름의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곁들이고 있다. 기독교적인 것만을 탐하던 유럽의 중세가 내게는 동굴(태양)로 들어가려는 집단 아우성처럼 들렸다. 도착점은 하나인데 출발점이 전부 다르다보니 이 길로 가야 동굴이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저 길로 가야 동굴이 나온다는 사람도 있는 꼴이랄까. 그런데 실상 동굴은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이므로, 서로의 길이 잘못됐다고 싸울 수밖에.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한다.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때문에 강은 더 이상 제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즉, 강의 고유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 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主流)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 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 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를 태우는 불길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정체 모를 황홀, 여자와 함께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육체적인 결합에의 욕망, 약간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저 더할 나위 없는 부끄러움, 그리고 영원의 삶이라는 명분 아래 성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갔던 저 파멸에의 욕망 사이에 닮은 데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의미가 무궁한 사상(事象)을 단순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알 것도 같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巡行)의 표징이 된다.




사랑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 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정결함을 얻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성급함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善)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혜의 폭포를 영감에게 허락하시고도 한 가지를 더 허락하셨어. 그게 뭔고 하니, 세상에 대한 영감의 그 거지 같은 상상력이야. 이 세상의 그 잘난 체하는 진리의 해석자란, 오래 전에 배운 말이나 깍깍거리는 얼빠진 까마귀와 다를 바 없어!“


문득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이 성인은,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천사였다. 소년으로 변장한 천사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내려 성인을 곯려 주느라고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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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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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이 소설을 잡고 있었다. 놓지도 못하고 깊이 빠져들지도 못한 채로. 빠져들기엔 험버트 험버트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어지러웠고 놓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벨벳 코트를 입고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초연하고, 우아하고, 날씬한 사십 세의 병약자가, 자신의 사춘기 육체를 세포마다 땀구멍마다 알고 숭배했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그리고 조금은 지루하고,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사실―을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상스레 안경 쓴, 지친 잿빛 눈에서 우리들의 서툰 로맨스는 잠깐 떠올랐고 생각되었고, 그러고는 재미없는 파티처럼 치워졌다.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비 오는 날의 소풍처럼, 지루한 운동처럼, 어린 시절 주무르던 한 조각의 마른 진흙덩어리처럼.




추문의 뒷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한 사십 대 남자의 처연한 고백 앞에서 나는 잠시간 그를 동정하였다. 어린 소녀의 강간자인 한 남자를 동정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위대한 면이 있는 것일 게다. 소설이란 도덕을 뛰어넘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므로. 그러나, 사실 험버트 험버트(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는 것 같다)의 장광설, 풍광 묘사, 심리 묘사에 모두 감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의 이기적 속성을 반성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자신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모두 잃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과를 표하며. 그러나 그렇다하여도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의 극단적인 속성-결국 자신과 타인 모두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는-으로 사람은 상처입는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같은데,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가? 헌데 왜 그 방향은 종종 제멋대로인가?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퀼티는 사랑했었다. 대체 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으나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에 실패하고 결국 도취된 사냥꾼으로 머무르고 마는가? 아니,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모두 ‘도취된 사냥꾼’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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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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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추리소설이다. 어렸을 때는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고 그래서 거의 처음 접하는 장르인 것처럼 읽은 추리소설.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여러 번 봤어도 소설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초반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생(?) 후까시를 언제까지 내가 받아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캐릭터를 내가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때 까지, 또한 이 소설의 뒷받침이 되는 1950년대 미국 문화에 익숙해지까지는 좀 읽기 불편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이나 인간을 만나는 과정이나 비슷한 건지 결국 점차로 그 인물에게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필립 말로우의 생 후까시에서 점점 매력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고 인물의 개연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립 탐정인 그가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치 사람과 친해지는 것처럼 소설의 캐릭터를 따라가면 된다. 이 인물이 대체 사건을 어떻게 풀어갈지. 사건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신용하던 한 지인이 살인자로 몰리게 되고, 자살한다. 필립 말로우는 그가 살인을 하지 않았으리라 믿기 때문에, 단순히 이 믿음에 근거해 그 사건을 뒤쫓으려 하고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 한 알코올 중독 소설가를 돌봐달라는 사건이 중첩되며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지금 이렇게 써보니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인물들이 등장하며 사건은 결코 간단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다른 사건들도 한 번 보고 들춰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스타일을 팔아먹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결국 그의 스타일을 다시금 음미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사건 도중에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엿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지도 자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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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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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내게는 사랑도 권력이다'라고 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장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사랑에 숨겨진 권력이라는 속성을 기나길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연애라는 달콤함으로 포장 뒤에는 감정과 성조차 관계의 권력에 힘을 미친다. '두 사람이 연애를 했다'는 말은 낭만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듯이 보이지만 그 낭만과 함께 인간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온갖 악력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야한 영화로만 겉포장된 '경마장 가는 길'은 알고 보면 연애의 권력적 속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영화는 거의 가미된 요소 없이 소설을 압축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진정 성인 영화인 셈이다. 성인이 아니면 결코 연애가 얼마나 추악한 자신의 나락의 보여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남자를 이용한 여자와-어쩌면 그녀의 처음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알 수 없다.-그녀에게 이용당한 남자가 복수(?)하는 방식은 몹시 교묘하교 야비하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결코 인간이 인간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평생 영혼의 음악 따윈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왜 우리는 이기적으로 욕망하고 질리고 서로를 할퀴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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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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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평생을 쫓겨온 사람이 쓴 기나긴 서사시이다. 환상으로 도배된 독백들이 피어나고 스러져간다.

나는 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살았는지가 궁금했다. 단지 문학계에 대한 도전이라기엔 너무나도 길고 집요했던 그의 음모. 그리고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의 거대한 울림의 배후가 궁금했다. 결론은 여전하다. 사랑은 과장법으로 생에 기생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그 법칙을 알고 있었고 그 법칙에 신물나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신물나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로 환원된다. 평생 나는 나를 알 수 있을 뿐이므로.

또한 어디에도 진짜 삶은 없다. 그러면서도 삶은 나의 유일한 증거물이다. 젠장맞을 일임에 분명하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느끼는 그때, 그 사람은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는 내게서 아주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와힐리어까지 배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와힐리어로 말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문맥과 아무런 관계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줄곧 찾고 있다. 동류 의식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나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소속된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는 문자들은 어떤 설명, 어떤 대답이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가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여기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해독되려고 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찌꺼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피노체트, CIA, 기업, 고통에 대한 증오를 경계하렴. 조심해야 해. 그런 증오를 품게 되면 소설을 쓰게 될 위험이 있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인간적일 뿐 아니라 역겨워지기까지 할 거야.”




내 시는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 없이 어떻게 시가 진실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부재不在의 기본인 것이다.




말들은 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은 말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쫓아낸다. 엄숙성과 공허와 가면을 빼앗기면 언어는 건강을 위협받는다. 그들의 싱싱한 두 뺨은 빛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건강한 상태를 겁낸다. 건강한 상태가 그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운명의 입장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이름이…… 가명인 셈이오.




‘그’가 거기 있었다. 어떤 사람, 어떤 정체성, 어떤 생명의 덫, 어떤 부재의 존재, 어떤 불구자, 어떤 기형적 존재, 어떤 절단된 신체가, 요컨대 ‘에밀 아자르’가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엾은 녀석, 인간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그는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해져갔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멋진 모습들로 무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명명할 수 없는 고통, 두려움 자체를 자각하지 못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절박성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름 없는 내 공포에다 합벅적인 대의를 부여해야 한다.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우리의 멋진 모습들이 내 공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내 공포는 명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다.




마침내 내 고통은 타당성을 갖게 되고 나는 이 세상에 편입된다. 우리가 잔인한 체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따금 자신이 부식되어 주변에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가루가 되어 스러져버릴 것 같은 상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침식되고 소모되고 내부에서부터 삭아버려 한 줄기 바람만 불어도 가루가 되어 날아가 없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르웨이의 한림원에서 노벨 평화상을 주기 위해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자 팔다리가 없는 사람, 요컨대 지금의 역사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분열증 환자치고 인간은 혐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례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런 정신분열적 상태가 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잃기 위해 도박을 했던 것 같다. 그로서는 비극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비극은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제한당한다는 이유에서 정직성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스무 살의 그는 내면의 부르짖음에 못 이겨 시를 쓴다. 하지만 마지막 절규는 줄곧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절규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 절규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중대한 과오는 그의 안에 갇혀 있었다.




시인이 되는 것 역시 사람들이 줄곧 시의 맛을 음미하기 때문에 시인으로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증세는 일상성과 익숙함이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이 도대체 나와 닮은 구석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였고 나 자신의 부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글을 쓰는 거지? 어째서 누군가는 부르는 거지?” 하고 실체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없는 질문은 무책임한 심리적 요소로 무장된 흉기를 든 손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요. 잘 숨겨야 할 것이 있다면 허무뿐이에요. 나는 아무도 타락시키고 싶지 않아요. 따라서 그 허무를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동안 문학에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단숨에 현실로 빠져나온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단다.




희화화된 존재들에겐 사랑이 허락되거든. 왜냐하면 그들에겐 과장하는 것이 허용되니까.




안녕, 완치된 아자르. 멋지게 위장하며 사시오. 그것이 인간이 따라야 할 법칙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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