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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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써진 스포츠 소설은 뭘까 라는 궁금증 때문에 읽었다. 이전에 신문에서 본 광고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펼쳐든 것이다.

스포츠 소설 답게 엄청난 흡입력이 있다. 야구 만화를 본 사람은 그 흡입력의 정체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속한 팀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대부분 예측할 수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그라운드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자기도 모르게 그 경기 당사자가 되고 마는 심리라고 할까. 『야구 감독』은 철저하게 이 심리를 이용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구라는 경기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의 야구 소설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는 정반대의 야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박민규의 소설이 완벽하게 정치적인 이야기라면-왜 야구는 즐길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승부해야 하는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인가, 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육체를 조각 내도록 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 소설을 이루고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 소설은 야구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게임이라고 박민규의 소설의 정 반대편 논리를 이야기한다. ‘게임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다’-이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야구 감독 히로오카의 논리이고 그의 간단명료하고 깔끔하고 스마트한 이상적인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이 캐릭터 안에서 모든 것은 이야기된다. 의례 스포츠 만화가 그렇듯 이 소설은 한 명의 캐릭터가 한 팀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이야기한다. 그 캐릭터가 선수가 아니라 감독일 뿐이다. 왜냐하면 야구는 팀 플레이이고 팀을 지휘하는 사람은 감독이고 야구는 공격이 아니라 수비, 팀 내 모든 선수가 자기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의 매력을 끌어내 소설로 완성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스포츠의 매력에서 끝난다. 그 시간 안에 마인드, 의지가 얼마나 발휘되느냐에 따라 경기가 결정되듯 히로오카로 명명되는 승리에 대한 투지와 정열이 팀 내에서 얼마나 발휘되느냐에 따라 엔젤스(히로오카가 이끄는 꼴찌 팀)은 이기거나 진다. 그들은 드라마틱하게 최하위 팀에서 최상위 팀으로 발돋움하고 선수 각자는 진정한 야구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인간적이지 않다. 모든 캐릭터는 일면적이고 단지 야구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조리는 단지 야구라는 스포츠에 종속되어 있다. 사회의 부조리, 현대성의 부조리는 어디에도 없다. 문장조차 이 법칙을 끝까지 지킨다. 어떤 소설은 자기 선을 적절히 지키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그 법칙을 따라 흡입력을 발산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딱 거기까지이다. 경기가 끝나면 삶이 기다리지만, 그 삶을 돌보지는 않는다. 만약 그래도 그 삶을 찾아야 한다면, 소설을 덮고 당신 일상으로 돌아가 히로오카처럼 깔끔한 마음으로 전심전력으로 세계에 임하라, 그러면 부조리라는 장벽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정도?
아, 하지만 다시는 이 사람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야구장이 가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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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만세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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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런 소설을 쓰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자면, 언어로 꿈꾸기를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처녀작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희뿌연 베일에 가리워진 그 꿈과 같은 세계를 베일을 한 겹 한 겹 어루만지듯 보여줬다면 『시간의 지배자』에서 그는 온갖 물건들, 모순으로 가득 찬 물체들-조각난, 이미 쓸모없는-로 이루어진 한 왕국을 그렸다. 그리고 『지옥 만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철 장수로 기계를 해체하는 母子의 이야기가 그 내용에 걸맞게 해체된(?) 문체로 그려진다.




온갖 환상적인 물건들, 도금한 은, 금, 온갖 종류의 부품, 램프, 열쇠, 또는 시계들!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찌그러져 쌓여 있는 거야.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을 다시 해체하며 벌어 먹고 사는 가족, 母子가 그것을 해체하면 아버지는 트럭에 그것들을 싣고 머나먼 곳으로 가 판다. 일주일 내내 운전을 하고 운전을 쉬는 동안 창녀인 롤라 베티나를 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동료를 통해 말한다. 이 소설의 초반은 『시간의 지배자』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들이 현대를 살고 아들을 낳았다면, 왕국의 지배자인 힘이 센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리고 어머니와 둘만 남은 조슬랭 시마르의 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딱딱하고 차갑게 날이 선 금속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조슬랭은 밤이면 연극을 하는 극장에서 생활하고 그 극장의 여배우 마엘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이다. 그가 마엘을 만나는 부분이나 그밖의 인물들-마엘의 부모, 파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서술은 대부분 완전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니, 문장의 흐름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문장 속에서 현대는 해체되고 모자이크된, 일인칭으로 가득 찬, 이해할 수 없는 곳인 셈이랄까. 분명 서사가 존재하지만 엄청난 리듬으로 이어지는 그 서사는 이리저리 찢겨있고 틈이 있으며 부서진 고철 덩어리들처럼 차갑고, 어긋난 채이다. 의도적으로 문장과 이야기가 찢겨 있으므로 그것을 애써 이어붙이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부드러움과 차가움을 이어 붙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온갖 인간들, 특히 창녀, 고물상, 란제리집 종업원 같은 프롤레타리아(소설에 직접 언급된다)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어쩐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가면의 생』을 이어붙인 것도 같다. 늙은 창녀를 아껴주는 포주가 되겠다던 모모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들이 살던 엘리베이터가 없던 아파트에 조슬랭과 마틸드가 함께 살고 있어도 될 것 같고 가면의 생의 번잡하고 따로 뚝뚝 떨어진 채 아귀다툼하는 이야기들, 문장의 향연이 떠오른다. 어쩌면 같은 프랑스 소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로맹 가리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향을 내뿜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자판을 치는 시대에만 탄생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결코 손으로는 펜을 굴려서는 이런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가면의 생』과 이 소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인가.

그러나 정말 이것이 지옥일까? 누구에게나 각자의 지옥이 존재하니까. 그런 면에서 이 완벽한 일인칭은 지옥일 수 있겠구나.

 

 

 

 

 

 

 



 쇠붙이와 씨름을 벌이는 생살. 나는 꿈의 기계장치에 대고 곡괭이질을 해댄다.




길은 텅 비어 있다. 위험은 차를 멈출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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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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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는 늘 잠복해 있으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차로 그 문제들을 끌어내며 그 횟수가 많아지게 될 때, 그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당신의 문제를 떠올려 보자. 나의 문제? 그 문제가 무엇이건 원인을 소급해가다보면-이것은 오래된, 인간의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원인을 소급해가기, 대체 무엇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서인가 완전히 후벼파기 위해서인가?-결국 그 원인에 이르러,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개체 이전 상태에서 개체로 나를 이끈 어떤 힘에 대해, 그 힘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오랜 우울증을 정신분석으로 치료하려 들며 라깡과 관계 맺고 정신분석에 대해 글을 쓴 인물이다. 이 책에도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에 대해 사실 이름만 알 뿐 제대로 된 저서는 거의 읽지 않는 나는 이번에도 알튀세르가 자신의 아내를 교살한 뒤 면소 판결을 받고 죽은 자가 되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쓴 자서전을 읽었다. 철학서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글. 그의 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는 글을 읽은 셈이다. 늘 개론서만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인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글은 그의 우울증에 대해 정신분석을 받으며 스스로 정리하고 머리 속에서 굳어진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이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이 어떻게 스스로 안에서 통합되었는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문제 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알튀세르는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다. 결벽증에 걸린 어머니와 냉혹한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나 한 명의 철학자가 되기 까지, 끝내 자신이 교살하고 만 자신의 아내 엘렌느와의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주관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결국 나마저 스스로를 정신분석적으로 해부하려 든다. 어릴 때부터 나의 삶에 잠복해있던 환상, 나의 부모님과 나의 관계 등등이 어떻게 내게 영향 미쳤는가를 해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지금은 다시 내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는데, 이 책을 읽는 도중에는 흥미진진하게 살아나곤 한다,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듯이.

더불어 이 세계의 불완전함, 불완전한 두 인간이 만나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며-이 갈등은 그들의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 자식을 낳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완전히 노출시킨 채-여기서 공포가 생겨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에게 그 불완전함이 유전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이것은 또한 전혀 상반되는 태도를 길러내 그를 더욱 혼란에 빠져들게 한다- 그 갈등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여러 유명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견해이다. 그러나 사실 일천한 지식밖에 갖지 못한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의 말 안에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뭔가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그의 말을 좀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공부하자는 결론뿐.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애정도 알아볼 수 있다-이 역시 앞에서 지적한 한계 내에서이다-.







그 대신 “나는 용감하게 말할 것이다. 자, 여기 내가 행한 것, 내가 생각한 것, 그리고 지나온 나의 모습이 있노라”라고 한 그의 선언(루소의 『고백』의 서두)에 내가 솔직하게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이해했거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 더 이상 완전히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 버린 것”이 여기 있노라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는 뭔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를 떨게 만들며 내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운명을 영원히 결정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환각이 아니라 내 삶의 현실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환각은 삶이 된다.







지금 나는 지출과 위험이 없는, 즉 돌발사건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돌발사건과 지출(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지출: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은 삶 전체의 일부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그 궁극적 진리에서, 그리고 하이데거가 너무나 잘 표현했듯이 삶이라는 그 ‘사건’(Ereignis)에서, 즉 삶의 출현과 그 귀결에 있어서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내가 깨닫게 된 것 같다.







도대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나 과도한 나르시시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조금도 모자람이나 미련 없이 완벽하게 뭔가를 줄 수 있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는 행위 자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받아들여지고’, 전달 통로를 제대로 찾아냄으로써 그 대가로 가슴속 깊이 희구하던 상대방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말해 사랑받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환의 자유로운 ‘주체’와 ‘객체’가 되기 위해서는 뭐랄까 그 교환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준 것과 똑같은 선물, 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그 대가로(계산적인 유용성의 원리와는 정반대인 대가) 받고 싶을 경우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리고 명백히 자기 존재의 자유에 한계가 주어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는 것, 즉 ‘거세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기 존재의 총력을(스피노자를 생각하자) 단 한 부분도 잃지 않고, 또 착각이나 허공 속에서 자기 존재를 보상받을 필요도 없이, 그 총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그리고 우선 자아에 대한 통제, 다시 말하자면 ‘전체’로 파악되는 대상과 자신이 갖는 관계에 대한 통제, 이것이 바로 철학인데, 철학이란 “철학자 자신이 자아와 맺는 관계”(마르크스)일 뿐이며, 따라서 철학자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런데 ‘전체’는, 총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고, 즉 ‘전체’의 모든 요소와 모든 접합들을 반영하는 사고의 엄격함과 명확성 속에서만 진정으로 사고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한 그 유명한 말, “이제까지는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라는 말을 반박하면서 이미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 세계를 변형시키기 위해서건 그것을 역행시키기 위해서건, 아니면 위험하다고 판단된 변화의 위협으로부터 현존하는 형태로 이 세계를 보존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해서건 간에 세계사의 흐름에 개입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대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철학자가 어떤 주관적 책임을 느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짓누르는 듯한 책임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모두 실험적이라고 간주하는) 과학처럼 검증할 만한 어떤 장치나 실험방법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명제들을 결코 직접 검증해 볼 수도 없이 오직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명제들의 효과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언제나 그것들의 효과를 예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그 명제들을 임의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그 경향에 대해 그가 포착하거나 포착했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또 그 분야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체계의 명제들에 그것들을 대립시키면서 제기한다. 그러나 항상 뭔가를 예견해야 하고 또 언제나 자시느이 역사적 주관성을 직접 느끼기 때문에, 그는 ‘전체’에 대한 자신의 이해(理解)(각자에게 자신의 전체가 있는 것인가?)에 직면해서는 무척 외로우며, 또 사실 뭔가를 바꾸고자 하기 때문에 타인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새로운 명제를 제기하려고 나서게 될 때에는 더더욱 외로운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욕망, 극단적으로 말해 마침내 나 자신의 욕망을 갖고 싶다는 욕망(욕망을 갖고 싶은 것 역시 하나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직 형식적인 욕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적인 욕망이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체적 욕망이 없는 이런 형태를 하나의 진짜 욕망으로 간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비극이었는데 그 비극에서 나는 이렇게 승리자가, 하지만 사고 속에서, 순수한 사고 속에서만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순수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포착된 나의 욕망, 마침내 욕망의 부정이라는 형태에까지 이른 나의 욕망을 실현한 것이다.







의식적이건 혹은 무의식적인 모든 철학자들의 내적 동기들이 어떠하건 간에 글로 표현된 그의 철학은 하나의 객관적 현실이며, 이 세계에 대해 그것이 어떤 효과를 미쳤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것은 객관적 효과이며, 극단적으로 볼 때 그 효과란 다행스럽게도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내면세계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이란, 각자 자기 자신의 유아론(唯我論) 속에 갇혀 있는 세상의 모든 주체들의 순수한 내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철학자임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합시키기 위한 철학적 작업의 결과인 뜻밖의 철학적 발견들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계급에는 이 통합을 담당하는 직업 철학자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범주들이 과학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과학도, 수학 자체도 지배 이데올로기 밖에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합된 이데올로기로 성립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투쟁 밖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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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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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6년을 이 소설을 읽으며 보냈다. 그때 이 소설은 문학동네에 연재 중이었고 띄엄띄엄 계절별로 나오는 이 소설의 문장에 밑줄을 긋기도 했다. 소설에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등장하는 까닭에 전체를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우연이나 존재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의미있게 느껴졌으므로, 도서관에 가 연재분을 읽고 나면 다음 문학동네 계간지가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제목이 바뀐 채 한 권의 책으로 나온 소설을 다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산다. 지금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그것이 누군가 다른 이의 꿈이 전도된 것일지라도 어쨌든 삶의 틀 안에서 후회로, 추억으로 언젠가는 회고될 삶을 살고 있다- 문학은 그 삶에 대해 나직하게 들려주고자 한다. 존재의 경이에 대해 또한 존재의 외로움에 대해.

이 소설 역시 존재의 경이와 외로움을 좇아간다. 한 사람의 삶의 둘레를 뒤따르다 마주치게 되는 많은 인물들이 소설 안에 등장한다. ‘나’,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애인인 정민, 그녀의 삼촌, 독일에서 만난 외국인들(헬무트 베르크, 그녀의 아내 안나, 이길용이자 강시우의 삶을 산 사내, 그의 애인이었던 상희와 현재의 애인 레이, 또 그들의 가족들) 등, 거기에 더해 많은 철학자들(소설의 끝에 등장하는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여인과 벤야민과 친했던 극작가 브레히트)과 문학가들까지 많은 이름들이 소설 안에서 마주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지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이보다 더 스펙타클하지는 않다 하더라도(‘나’는 1991년의 숱한 죽음들이 삶의 거리를 가로막던 그 시대를 횡단하는 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타인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식하고 그러다가는 방북예비대표로 독일로 가게 된다)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게 된다. 잠시 내가 만났던 사람들, 또한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아득해지게 되는 것처럼. 삶의 이 무수한 만남들과 헤어짐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냐고 묻는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또한 기억 속에서는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만남은 영영 우리의 삶에 지문을 남기지 않겠느냐고 한다. 별들이 서로 지나가며 자장에 따라 영향을 주고 받듯이, 거대한 바다가 달과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조수의 흐름을 따르며 지구라는 별에 묶여 순리의 움직임을 다하듯 우리 역시 서로의 자장을 빛내며 흐르고 파도치며 빛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그 순간이 어떤 화인처럼 한 사람의 생을 묶어버리기도 하고 또 그곳에서 풀려나려 몇 번이고 다른 생을 살려 하며 겹쳐진 생의 물줄기가 몸 속을 흘러도 어쨌거나 자기 자신으로 삶을 지속하며 오직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그것이 기적이라고 이 소설은 들려준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주에서 정민과 나란히 누워 바라본 밤하늘처럼 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해 여름 헬무트 베르크에게 들은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며 번을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주는 건 우리가 따르고 싶어하는 논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이야기로서 엮어내는 삶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횡단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실은 그 사건들 각각에 무수히 다른 성격의 내가 있고 단지 돌이켜보며 그 안에서 그때와는 다른, 지금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다 하여도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고스란히 아픔, 슬픔, 외로움, 사랑을 모두 한 몸으로 겪어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 사람이 대단하기도 하다. 그 많은 사건을 온몸으로 치받아 내었다니.


언젠가 친구와 주고받았던 얘기인데, 지나가면 모든 순간은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고, 아주 누추하고 초라했던 순간들조차도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어느 학교 계단에 앉아 얘기했었다. 또 이 순간도 그리워지고 말 게 아니냐고. 허나 잡을 수 없는 세월에 대해 불평해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자꾸만 어딘가로 가고 있다. 한시도 운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없는 물체인 우리는, 세포들의 결합체인 우리는, 그 그리움의 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지독하게 고독한 한 개인이지만 그렇게 빛을 발하며 묶여 있었다고 생각하면 사는 일이 좀 더 아름다워진다. 소설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 있다.

한 편의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소설이 좀더 많은 이들에게 날개짓을 하게 된다면 아마 서로 폭력적으로 상처 주고 한 개인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개인들이 정치적이건 그렇지 않건 서로 자장을 주고 받는 세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이 종래에는 우리의 선조가 만난 것 때문이라는 것은 좀 실망스럽지만, 또 그 꼬리를 물고 물다 보면 이 지구가 이런 모양이 된 결정적인 이유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으며 이 우연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세상에 대해 조금은 안도하게 되기도 하므로. 정말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토록 홀로인 우리가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서 모든 만남과 우연이 실은 어떤 운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덜 외로워지기도 한다. 또한 아주 차분하게 이 운명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따라갈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도 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꾸며낸 우리들의 논리적이고자 하는 본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우리의 연약한 이 본성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약간 템포가 빠르고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갑작스레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버겁다. 작가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알겠으나 그것이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벤야민이나 브레히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만다. 장사를 하려고 물건들을 벌였다가 누군가의 호각 소리를 듣고 갑작스레 정리를 해버린 느낌이랄까,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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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 세계문학 12
J.D.샐린저 지음, 윤용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3년 7월
평점 :
절판


 

예전에도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왜 코울필드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는지 공감을 했는지 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만다. 그래서 기록이란 걸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나도 이렇게 기록을 해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나는 이전에 종종 서울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며 노란 선을 따라 끝에서 끝까지 걷곤 했는데, 아마 그런 내 기분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때는 뭐 이 세상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려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뭔가, 그런 비슷한 류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세상에 정말 최악으로 나쁜 놈 같은 건 없는데도, 정말 저능아에 최악인 인간은 없지만 세상은 정말 최악이기 때문이다. 이번 삼성 사건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이 세상은 완전히 썩었다. 모두 영혼을 돈에 팔아 넘겼다. 모두 다 그래 버려서 이제는 사실 영혼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게 속 편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들 다들 좀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어딘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고, 그래서 그들을 욕하다가도 끝내는 쓸쓸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한없이 회전목마를 타는 동생을 보며 폭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이런 문장이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온다는  것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마. 그러면 모든 것이 그리워질 테니까.’ 하지만 이 번역본에는 그렇게 해석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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