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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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들 종이인형 같다. 얇고 팔랑대는 종이인형들의 세계. 그래서 그 중 어떤 종이인형이 모자나 오뚜기로 변하거나 뒤편에 문이 달려있다거나 해도 ‘아, 그렇구나’ 하게 되지, ‘에이, 설마,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황정은의 서술 방식, 황정은의 문장은 이런 반응을 유도한다. 짧고 간결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런 것이다, 뿐이다. 하지만 단순하다거나 건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애들이 생각나는 대로 지어서 부르는 즉흥곡 같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시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동화적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데에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영향도 크다. 짓빠, 짓빠라거나 풉풉풉풉, 퐁퐁 같은 의성어들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의성어가 빠지면 허전할 만큼.

황정은의 서사는 변신 이야기처럼 가지각색의 변신이 등장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변신 그 자체-무엇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의 반응이다. 변신을 받아들이는 주변 인물들은 그 변신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거나 절대 일어나설 안될 일이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한다. 따라서 소설을 따라가는 독자도 뭐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하며 소설을 계속 읽게 된다.

하지만 왜 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은 변신할까. 이런 구차한 질문을 굳이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사실 소설의 서사가 말해주는 것이 이 변신의 이유이다. 오뚜기로 변신한 기조씨가 물속에서 수영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라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난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꿈이잖아. 

꿈이래도, 있잖아, 사람들이 헤엄쳐, 난 힘이 빠져, 잠방잠방하다가, 가라앉아. 머리 위로 수면이 점점 멀어지고, 내가 가라앉은 자리에서 파문을 만들며 헤엄치는 내 다음 사람의 배가 보여. 그런데 그 사람도 결국 가라앉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중략)

마지막 사람이 가라앉고 나면, 역시 물만 남을까.

남겠지.

흑. 흑. 흑.

왜 울어.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해서.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 주체의 상실이라도 부를 수도 있는 이 막막함이 인물들의 변신을 이끈다. 더 이상 변혁의 의지가 없는 세계, 지금 이 세계는 옳은가 혹은 그른가에 대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긍정적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막함은 인물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고 싶게 하고 다른 것이 되게 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표제작이기도 한 ‘일곱시 삽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나온다. 파씨는 동물원에 가는 일이 인간적이기에 동물원에 가자고 한다.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두고 관람하는 인간적인 세계의 인간적인 평화. 누군가를 극악무도하게 괴롭히고 거기에는 분명 인과가 있고 그래서 인간적인 세계. 그러나 똑같이 보복하지 않는 것도 인간적인 세계.

다시 앞으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그래서 황정은의 인물은 종이인형 같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인간적’이라는 것, 맹렬한 욕구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책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변신은 표면적으로 맹렬히 원해서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태로 처리된다, 마법사님이 불쌍하고 평범한 주인공의 마지막 희미한 바램을 들어준 것처럼- 인간이 모여 인간이 이룩한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세계의 기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다 문득 하일지의 『경마장의 오리나무』가 떠올랐다. 그 작품 초반에 주인공이 남산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왠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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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 안소연 옮김 / 이마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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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을 읽었는가. 몇 차례나 졸려하며 스파이더 카드놀이, 파일 정리 같은 다른 짓을 병행하면서도 끝까지 어떻게든 끝까지 읽었는가 하면, 처음에는 자료 수집 차원이었고 그 다음에는 오기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그래도 끝까지 읽고 나면 뭔가 좀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거나.

사실 이 책이 가르쳐주는 비밀이 세계와 너무나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가도 또한 너무나도 아무 관련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것이 비밀임을 알았다고 해서 내가 프리메이슨에 대해, 핵무기 운반의 위험에 대해 자그마한 정보를 얻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여전히 프리메이슨은 프리메이슨인 채로 남아있을 것이며, 핵무기 운반은 이루어질 것이며, 군사 비밀 작전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언젠가 쓰나미가 닥쳐온다해도 어쩔 수 없다. 또한 프로이트가 코카인을 복용하고 홍보했다고 해서 그의 전집에 드러난 업적을 포기할 수도 없으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면 남는 것은 회의와 냉소이며 인간은 미친 동물이고 언젠가 이 미친 동물도 끝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정도? 작가는 끝까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대체 ‘진실’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이 남자의 손가락과 뇌는 어떻게 생긴 걸까? 그래, 어쩌면 몇 명의 목숨을 구해내거나 몇몇 정의를 구현할 수 있긴 하겠지만, 결국 소중한 건 작은 생명 안된다면 인간의 생명만이라도 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공허한 울림인 진실보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를 읊는 여성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라디오나 너무 많은 비밀을 알아버린 스파이들을 가둔 감옥, 우리의 통화는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언제라도 감청당할 수 있으며 마약을 먹이는 실험을 하는 쌍유리가 달린 마약 실험 매춘업소도 있다. 쌍유리 건너편에서 손님들을 관찰하는 CIA 정보요원 있는 세계.

브론토사우루스라는 있어본 적 없는 초식공룡이 100년 동안 어린 아이들의 꿈속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 공룡의 실제 이름은 아파토사우루스(속임수 공룡)이며,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프랜시스 크릭은 LSD(마약)를 자주 복용했으며, 후천성 면역 내성을 발견해 1960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넷 경은 생물학무기를 개발하여 지나치게 인구가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를 공격하자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촉구하는 보고서를 냈으며, 1970년 레서스원숭이 머리를 절단하여 살아있지만 머리가 없는 다른 레서스원숭이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한 화이트 박사는 뇌가 둘인 개를 만들기도 했으며, 고아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용된 난민들을 상대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에이즈 약물 실험이 행해지며, 과학자 뉴턴은 생애의 마지막 50년 동안 연금술 연구실에서 ‘현자의 돌’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는가 하면 이 세계가 2060년에 멸망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뉴턴의 연금술 문서를 구입한 뒤 이렇게 말했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의 첫 번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마법사였다.”

미국은 1930년대 전쟁계획 레드라 불리는 캐나다 침공 계획을 세웠으며 전쟁 중 공군들은 암페타민을 복용한 뒤 전투기를 조종하고(“약물을 통한 폭격 향상”) 미국은 1997년 개정되기 이전까지 ‘국방부는 생화학 약품을 실험할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미국 공법에 따라 민간인 거주지역에 곤충을 이용하거나 가스를 살포해 실험을 했으며 쿠바를 공격하기 위해 도시 무작위 테러, 민간 항공기 납치 폭발, 미국 해상 운송선 공격 등 사건을 벌인 뒤 쿠바의 짓으로 덮어씌우려 했다. 전쟁을 위한 거짓, 무엇을 위한 전쟁?

분유를 팔아먹으려고 거짓 광고를 일삼아 유아들은 모유를 먹지 못하게 되고 환타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탄생했으며 IBM은 나치를 위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이용하는 유대인 관리 솔루션을 제공했으며 소니는 1998년까지 초감각 지각을 연구하는 부서를 두었으며 이를 상용화하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 코카콜라는 한때(1900년대 이전) 코카인을 함유한 코카콜라를 만들어 팔았으며 담배회사는 니코틴 함량을 높이는 유전자변형식물로 담배를 만들며 제약회사가 어려운 국가에 보내는 약품 기부는 판매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이나 필요 없는 약품(금연 기구, 제모 크림, 입술 보호제, 체중 감량제와 같은)이며 이를 통해 조세 감면 혜택을 받는다. 쿠바에서 럼주 회사를 세운 바카디의 전 회장 호세 페핀 보슈는 쿠바 정부가 회사의 경영권을 몰수하자 쿠바의 대통령을 암살 계획에 자본을 대고 정유회사를 폭파하려 했으며 쿠바 펜싱 팀이 탄 항공기를 폭파한 혐의로 선고를 받았다.

미국 CNN은 기자들에게 민간인 사망을 보도할 때 몇 가지 보도 지침을 넣도록 강고했으며 폭스 뉴스의 앵커 브리트 흄은 “전쟁이라는 지옥 속에서 사람들은 죽기 마련이다. 몇몇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큰 뉴스인가?”라고 말하는가 하면 많은 신문사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민간인 사상자 사진과 기사를 싣지 않도록 지시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1939년까지 나치 정권을 강력 지지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미군은 원자병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조롱했으며, 적군 병사들이 서로 성적 충동을 느끼도록 하는 ‘게이 폭탄’이나 햇볕에 노출되면 살이 불타게 되는 무기도 미국 생화학무기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다.

뒤쪽에서 총을 맞았다고 주장하는 해군병리학자의 공식적인 증언과 달리 이송 당시 의사들은 JFK가 앞쪽에서 총을 맞았다고 증언했지만 그의 뇌는 사라져 버렸으며 그의 형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승리하고 호텔을 나서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150센티미터 이상 떨어져있었으나 부검 결과 의사는 총이 3센티미터 이상 9센티미터 이하 거리에서 발사되었다고 하였지만 그 당시 총을 들고 있던 개인 경호원 유진 세자르의 총은 사라져 버렸다. 

달 표면의 일시적 월면 현상(TLP)-분화구 바닥에 보이는 붉은 광선, 보라색 빛과 하얀색 광선-에 대해 과학은 함구하며, 일반 과학계는 지구나 태양계가 아닌 곳에서 와 72초 동안 기록된 무선전송신호인 ‘와우! 신호’가 외계 생명체의 신호라는 주장에 대해 사이비 과학이라고 공격하며, 1960년 2월 어떤 국가에서 보낸 지 알 수 없는 ‘흑기사 위성’이 지구 주위를 맴돌았으며 이에 대해 추측을 계속한 사람은 필립 K. 딕과 같은 SF 작가 밖에 없었으며, 다윈 이론에 따르면 진화한 생물체가 더욱 복잡한 유전자 구조를 포함해야 하지만 인간의 염색체는 23쌍인데 비해 달팽이의 염색체는 56쌍이지만 과학계는 이를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다윈설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은밀한 창조론자라는 혹평(?)을 감수해야 하며, 오르곤이라는 생명에너지 형태를 주장한 빌헬름 라이히의 책은 나치 정국의 독일과 미국에서 모두 불태워졌으며, 시각장애자가 얼굴에 묘사된 감정을 추측할 때 정보는 뇌의 시각피질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표시된다는 등의 오감과 관련 없는 정보를 뇌가 받아들이는 비밀 프로세스가 있다는 실험 발표는 무시당한다.

영국의 요크셔 북부 황무지의 멘위드 힐은 하얀 골프공 같은 이상한 구조물이 27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는 미국 땅이며 지역첩보기지의 본부이고, 바티칸 도서관에는 세계 어느 도서관보다 많은 사탄, 오컬트, 외설, 이단 관련 서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런던 웨스트엔드의 심장부인 피커딜리 서커스의 지하에는 런던 프리메이슨 법원이 있으며 이곳에서 프리메이슨 법을 어긴 형제들을 재판하며, 미국 버지니아 주 베리빌 근처의 마운트 웨더는 작은 사무실 건물 몇 외에는 지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나 산의 화강암 깊숙이 세워진 2미터 40센티미터의 문 뒤에는 자체 발전소, 라디오와 텔레비전 스튜디오, 병원, 영화관, 개인용 급수 탱크, 화장장, 수천 명이 잘 수 있는 공간을 모두 갖춘 비밀 도시가 있으며 거기 미국인 10만 명 이상의 자료가 왜 있는지, 마운트 웨더에 보내질 생존자 6500명 누구인지는 비밀로 부쳐져 있다.

앨빙 박사는 일리노이 주 스테츠빌 교도소의 죄수 441명을 대상으로 말라리아에 감염된 혈액을 주사해 실험했으며, 정신과의사 이완 캐머런은 캐나다에서 MK-ULTRA 실험을 했으며 이 실험은 한 사람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이중간첩으로 이용하거나, 미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 사람을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암살범으로 이용하는 마인드 컨트롤법이다.

마피아, 사이엔톨로지, 해골단(부시),  프리메이슨, 통일교 등 이상야릇한 단체들의 오컬트 의식

정기적으로 어린 처녀들과 벌거벗고 잔 마하트마 간디(그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후세에 바이러스로 태어나 인류를 절감하기를 꿈꾼 필립 공, 처칠의 드루이드교, 반유대주의자 포드, 마리화나를 예찬한 칼 세이건, 코카인 홍보대사였던 프로이트, 섹스 파티를 벌였던 마틴 루터 킹.

6200만 년마다 한 번씩 대량 멸종이 일어나는 주기가 있다는 이론, 마약보다 더 위험한 게 분명한 알콜과 니코틴.

그러니까, 사실 세계는 거의 대부분 엠바고인 채로, 그러니까 실은 평화는 말뿐인 공허한 울림인 채로.

그러니까, 우리는 핵이라든가 정치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욕망이라든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달아나야 하는데 결국 달아날 곳은 없음이 분명하며, 그러니까 우리는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하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계속 먹고 살아가는 일에 골몰해야 하는지도. 우리가 골몰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번역이 좋지 않아서인지 고유명사가 많아서인지 읽는 데 자꾸만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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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시인선 37
진이정 지음 / 세계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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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혹은 언어는 물질과 영혼 사이에 있다. 분명 글자를 적으면 보이되 그 의미는 결코 만져지지 않는다. 그저 기억, 니은, 디귿, 리을의 향연 같기도 한 글자가 어느 순간 의미의 연기에 휘감기고 만다. 모든 말들이 내뱉어지는 순간마다 유물론과 영혼 사이의 그 아찔함이 피어난다.

사실 잘 된 책은 모두 물질과 영혼 사이를 오간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우리는 물질인가 영혼 혹은 정신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는 빼곡한 문장들이 이야기를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명 단일한 유기체이고 모든 고통은 제 몫이기는 하나 어느 순간, 말풍선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정신은 공유된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고 있으므로, 내가 너라는 말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도록 만들어진 우리는.

그리하여 결국 사랑의 문제에 가 닿는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사랑은 肉이며 섹스라는 행위인 동시에 정신의 치열한 교류이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성과 속을 모두 걷게 되므로, 육과 혼이 합쳐지는 경계에서만 사랑이 번개치므로? 나와 너 사이에서 위태롭게 번뜩이는 사랑. 자기 자신은 결코 자신을 볼 수 없고 타인만을 볼 수 있는 생물체 인간의 조건은 사랑으로만 자기 자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 때문에?




진이정의 시는 이 물질과 영혼 사이에서 애타게 방황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 속 풍경에는

평행을 달리는 진리 사이로 무수하게 빼곡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다른 짓을 한다. 똥을 싸고, 순대를 먹고, 우유를 마시고, 섹스를 하고(해야 하고), 자위를 하고(해야 하고), 남색하고, 친척들과 원없이 싸우고, 잦은 방귀를 뀌고, 그래서 거리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고, 카페가 있고, 유곽이 있다. 공포의 뒷면 같은 삶, 이 모든 스캔들, 다른 말로 하자면 질질 흘러내리는 애욕의 전쟁터 아메리카 대통령 국가 조국 국가 보안법.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얼굴로 진리의 갈래이거나 聖의 갈래, 사랑의 갈래이기도 한 곳에서 -소크라테스와 아고라의 진리, 십자가와 성서의 진리, 원효대사와 해골바가지와 탑과 심심산골 불공과 반야심경과 중중무진의 진리, 아트만과 군달리니 요가의 진리의 갈래에서 살아간다.

진이정은 성과 속 사이를 한 발씩 디디고 걷는 사랑 혹은 가로지르기 도중 가로지르고 가로지르다가 그만 엎어져 버렸거나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을 잃었거나.(혹은 죽음의 문 앞에서 한없이 절박해졌거나.) 그 위로 장대비가 퍼붓고 그는 그만 울어 버렸고 혹은 여전히 울고 있고 어쩌면 그것은 울음이 아니라 그저 메탈리카 같은 비였는지도 비와 울음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물고문이다. 고통스럽게 나의 울음과 모두의 조건 사이를 오가므로.

물질과 영혼, 성과 속 중

어느 것이 빛이고 어느 것이 피인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어디가 서대문 형무소이고 어디가 명월관인지

아무도 모른다.

용서와 분노의 분출 사이

그림자와 빛 사이에서

겨우 뼈대로만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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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월드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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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버치와 스칼렛 요한슨, 스티브 부세미가 나왔던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원작 만화이다. 영화에서는 스티브 부세미 역할이 커졌는데 만화에서는 스티브 부세미의 역할이 거의 미미하다. 역시 영화란 남자와 여자가 찌찌찌 하는 걸로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 하긴 그래도 스티브 부세미라면 괜찮긴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별달리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이니드와 레베카가 여기저기 카페나 음식점 같은 데를 오가며 이야기하는 게 주요 내용인데, 말하자면 빈둥대기의 방식은 무엇인지 알려준달까. 싫은 건 많지만 좋은 건 별로 없는 청춘에 대해. 아, 저것도 아니야 그럼 저건? 저것도 아니야 그러다보면, 그러니까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30살을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돼 싶지만 실제로 뭔가 구체적으로 직장에 다니거나 하는 그런 30살도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 다들 지지리 폼은 잡지만 실은 알고보면 있는 척 하고 싶어 안달난 것들의 거지 같은 사기일 뿐이란 걸 알아 채고 나면 그냥 별달리 할 게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잔인하게 인생은 매일 굴러가고 그러다보면 엇 하는 순간 어어어어어 하다가 이 세계의 거대한 시스템에 맞쳐서 척척척 몇 번 돌다가 시스템에 꼭 들러붙어 아무리 빼려 해도 빼지 않는 나사가 되고 마는. 그러므로 노먼이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고스트 월드를 떠나시오! 어디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그래야 나사가 되도 좀 덜 억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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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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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말을 우습게 만든다. 논평이나 분석 같은 것들을 하는 행위가 왠지 대단히 허세스럽고 그래서 부끄러워지는. 이 책은 그렇다. 스타일리스트라거나 모더니스트라는 평들이 어딘가에 꼭 못을 박아버려서 박제시키는 것처럼, 이 책에 대해 그런 평을 한다면 날아가는 나비나 교미하는 잠자리를 잡아서 산 채로 꼭 못을 박아놓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이 책에 나오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 에스타와 라헬은 글자를 능숙하게 거꾸로 읽을 줄 아는데, 왠지 이 책도 거꾸로 읽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거꾸로 읽었을 때 색이 달라지는 인물은 아마 막내 코차마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앞뒤로 봤을 때 달라지는 인물이 문제인 건가? 투명하지 않게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하지만 순간, 속이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걸, 우선 너 자신부터 봐봐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한 개인의 문제가 결국 인간 역사의 문제이고 인간 본질의 문제라는 통찰력. 가족 대대로 전해내려온, 아니 인류에게 전해내려온 본성들이 충돌하는 현장. 사랑의 문제나 죽음의 문제, 그 사이사이의 교차로들에 서있는 이들. 그러나 작은 것들은 작은 것들로 온전하게 생을 이어나가고 우리는 결국 작은 것들일 뿐이며...작은 슬픔을 그러안고 살아가고 그 작은 슬픔의 폭발력으로 무너지고 모든 것이 바뀌기도 하고...

체제를 말하고 싶다면 그 체제 속에서 뒹구는 인간을 말해야 한다.


문득, 이 책을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실은 한 권의 이야기 책을 쓸 능력을 누구나 타고 나는 게 아닐까. 단 한 권의 책. 그 정도면 충분한 게 아닐까.

 

-기차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그처럼 짧은 순간을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참마 잎사귀들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처럼 기차가 지나가고 나서 한참 뒤에까지도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타는 그의 어떤 부분이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아니라 다치지 않은 다른 어떤 부분이. 그것은 어쩌면 그의 팔꿈치나 어깨일 수도 있었다.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을 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그녀를 만진다면 그녀와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한다면 떠날 수가 없었다. 또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들을 수가 없었고, 싸운다면 이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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