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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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은, '인간과 나비들이…….'이다. 인간과 나비들이 하염없이 싸우고 하염없이 살기 위해 애쓴다. 그러다 죽는다. 로맹 가리는 장자를 읽었을까? 아니, 역시 아직 장자를 읽지 않았지만, 나비 마리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마치 종이처럼 팔랑대는 생명이 살려고 기를 쓰는 것을 보면 아연해지고 만다. 생명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짓밟히기 쉬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나는 나비랑 무어 그리 다를까.)

로맹 가리는 프랑스군으로 참전해 있을 당시 소설을 썼다. 2 세계대전 중이었고, 그는 용맹한 군인이고자 했으나 군인의 생도 역시 다른 생과 많이 다르지 않나 보다. 격렬한 순간은 짧고 기다림은 지루하며 초조하다. 동안 그의 번째 장편이다.(그동안 그는 동물원 우리 안에 들어가 앉아있는 기이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로맹 가리 평전에 나온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이야기. (번역은 빨치산으로 있다.) 2 세계대전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시작한 것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또한 그가 폴란드 빌노에서 잠깐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도 지나칠 없을 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배고픔이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내게 만드는 시절.

 

안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

 

도브란스키란 인물의 소설로 등장하는 단편 독일인 척후병들. 속에 버려진 독일인들이 겪는 환상. 사람, 어린 소녀 등등. 모르는 나라에 버려진 병사들. 그는 프랑스군으로 독일 항전에 참전한 그런 소설을 쓴다.

 

<유럽의 교육>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독일 병사. 만들어진 적의 속에서 희생된 팔랑거리는 생들. 자신에게 친절하던 독일인 슈뢰더를 죽도록 내버려둔 주인공 야나크,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분더킨트가 죽도록 내버려둔 주인공 야나크. 환상이 만들어낸 이념, 이념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로맹 가리는 사이의 비명횡사를 말한다. 사이 스쳐간 문장, 순간적인 황홀경, 홀림들.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이, 그다지도 별볼일 없는 인간이 아름다움에 감응한다. 음악, 조화, 신만이 있는 일일지도 모를 . 의미를 생성해내는 . 일까? 그럼에도 하나의 목숨은 조용히 사그라지는데, 어쩌면 정말 꾀꼬리의 노래일지도 모르는데,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야네크는 생각했다. 믿음을 품고 영감을 받은 꾀꼬리들이 영원하고 경이로운 노래들을 부르며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

 

아름다운 것들은 자꾸만 우리 마음을 미흡하게 할까. 혹은 충만하게 할까, 하는 의문이 떠오를 ,

로맹 가리의 답은,

 

'만약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에 절망이란 없을 것이다.'

 

니힐리즘, 염세주의,

그럼에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살다와 사랑하다 사이에서의 방황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역사가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 무수한 인간이 죽고 거기 점처럼 무수한 사랑과 아픔과 절망이 사그라들고 꽃피고.

 

그것이 현재다. 제국주의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나라에서조차. 멀리 바라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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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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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 웃을 일이 별로 없다. 하하호호도 아니고 풀썩도 아니고 빙그레 웃을 . 어제 밤에 시집을 보다 오랜만에 빙그레 웃었다. 어떤 시집은 괴로워서 읽겠더니 이번 시집은 빙그레~. 그래서 좋았다.

정보력이 뒤지는 나는 장석남 시집이 나왔단 얘기도 어느 술자리에서 주워 들었다. 달쯤 됐을 . 그래? 내일 사봐야지. 했지만 실지로 내일 사보기란 얼마나 힘든가. 책장에 쌓인 책들, 도서관에서 빌려다놓고 보지 못한 책들을 두고 무슨 사치를 부리냐 싶어 되도록이면 사기를 미루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실행력은 얼마나 없는지. 내일이 모래 되고 모래가 글피 되기 일쑤인데, 시집은 바로 술자라기 파한 다음날 사봤다.

그래, 샀으니, 버스에서도 읽고 방에서도 읽었다. 시집 읽는 노처녀가 되었어도, 요새 볕은 시집 읽기 좋다. 그리고 밤새 빙그레 웃었다.

오래전 그날들도 생각했다. 그와 같이 콩국수를 먹던 지나치게 허름한 식당은 사라졌다. 그런가하면 그의 시집 뒤편에 나온 성북동 과메기 집에서 술도 마셨는데. 그날은 취했던가? 이례적으로 자주 취하던 날들이었다. .
그때는 무어 그리 적대적이었나, 그런 생각들. 이제 나도 그와 같이 나이 들었나.

 

그의 시집을 보고 있노라면 흙밭에 쭈그려앉은 남자의 뒷모습의 떠오른다. 그는 일도 없이 흙밭에 쭈그려앉아 꽃이나 보고 흙이나 되짚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싸고 뜨겁고 언제나 비린 사랑' 맛을 알아 '포대기' 크기와 '골짜기' 첩첩에 대해 가을 하늘에 이마 대고 말하는 같다. 사람이 아주 깊이 베면 피맛밖에 나지만 그는 후시딘 바르고 밴드도 붙여 이제 아문 상처 같은 것을 지니고서 하늘에 이마 대고 서서 여러 꽃이름 외고 나르고 변기도 닦고 바람소리도 듣고  

그러나 맑게.  

맑다.

 

제대로 식물도감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 잠깐

시월 말엔 간송미술관 뒤뜰의 파초 보러 가야지 하는 생각 잠깐

 

생일인 사람 있으면 시집이나 떠밀어야지. 책을 누군가에게 떠민지도 오래된 같은데, 생일인 사람 있으면 시집 떠밀며 당신도 혼자 빙그레 웃는 시간을 가져보라 해야지 하는 철없이 좋은 생각을 잠시간 했다.

  

 


 

 

 

물맛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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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년
김성희 지음 / 수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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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인 30대의 여성의 삶이 고스란히 있다고 있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결혼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는 옳을지 모르겠는 30대의 . 부모에게 의지하다 그런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어머니아버지를 이해하려 하다가도 그들을 만나면 어떤 가로막힘 같은 것을 느끼고 거기에 대해 후회하는 자식으로서의 . 누구를 만나도 만족하지 하고 그런 채로 사랑하고 싶고 사람 사람 만나며 감정 사이를 오가는 현실적인 이야기.

이야기 후면에 80년대를 살아낸 부모님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삶이 지금도 역시 그렇듯.

이야기 속의 담담함이 좋았다. 며칠 집에 다녀와서 인생사에 대해 생각해보고 가지 결심을 하고 다시 거기서 좌회전 우회전 어디로 가야할지 깜빡이도 켜고 있던 언니 만화는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산단다 하는 같았다. 거기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삶의 고단함도 있고 다들 그렇게 사니 죄책감에 버둥거리지 말고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사랑하지도 말자고 말하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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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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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관심을 끌 만한 인생을 살다 갔다. 30여 권에 달하는 소설을 써낸 작가로서 이 아시아 촌구석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이 정도면. 남성으로서 두 번 결혼한 동안 한 여자는 영국 귀부인으로 자신보다 7살 연상의 여인이었고 자신만큼 재능이 있었기에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진 시버그라는 잊을 수 없는 배우, 20살 가까운 연하의 여자와 두번째 재혼을 한다. 그둘의 사진이 여기저기 아직까지 돌아다닌다.
그런가하면 군인 출신으로 외무성에서 일했다. 야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도 성공한 셈이다. 미국 토크쇼에 프랑스 공보관으로 활약하며 유럽의 정치적 입지, 프랑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은 충분한 영향력이 있었다. 토크쇼, 유명 잡지들이 그를 인터뷰하고 초대했다. 그가 외무성에서 활동하던 시절.
돈도 벌 만큼 벌어 나이가 들자 지중해에 별장을 마련해 거기서 지내기도 한다.

그는 실은 순수 프랑스인이 아닌 동유럽 출신(러시아)이며 프랑스로 10대에 어머니와 함께 망명한다. 그의 세련된 이름조차 그가 지어낸 가명이다. 스스로 기획한 이름이다.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등은 그를 따라다닌 이방인의 감각의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의 기획에 자신을 밀어붙인 이 남자의 마지막 걸작은, 에밀 아자르라는 가상 인물에 대한 연극이다. 프랑스 문학계에 대한 똥칠이기도 한 이 연극에서 그는 자신의 조카를 대타로 내세우고 우리나라에는 <가면의 생>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을 통해 조카의 심리(삼촌에 대한, 실은 자신에 대한 어떤 미칠 듯한 괴로움-자기가 내세운 대타에 대해 세계가 기대하고 있을 심리이기도 한)를 묘사하며 즐긴다. 갈리마르 출판사나 르몽드 지가 여기에 진심으로 응답한다. 그는 늘 딴청을 피우며 뒤에서 연극을 준비하고 즐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연출하고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그들이 떠벌리고 흥분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권총 자살한다.

이 정도면 흥미로운 인생이다. 어디 흥미롭지 않은 인생이 있겠는가 대꾸할 수 있지만, 이 정도로 화려하게 살기는 쉽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태어나 세계의 흐름에 응답해야 할 말을 준비하고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해낸 인간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남자의 전기다. 도미니크 보나의 입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실에 기초했다. 때로 낭만적인 문장이나 번역의 실패라 할만한 여러 문장이 걸리긴 한다. 그러나 거짓과 진실 사이의 게임에서 혼돈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이란 관점에서 흥미롭다. 그것을 끊임없이 밀어붙이며, 자기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뒤채고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지우기 위해 덧붙이기를 하는.


누구나 최대한 산다.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 어떤 면에서 다 촌년이고 촌놈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왕이고 영주다. 스펙트럼이 다를 뿐이다. 로맹 가리는 밀어붙일 수 있을 만큼 자기 스펙트럼을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세상을 조소한다. 그게 그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도미니크 보나는 말한다. <자기 앞의 생>에 나온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울림을 넘어선다. 슬프다. 그 문장은 실은 강박이며 조소이다. 그러나 내실한 고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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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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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자신이 문학도(이런 고리타분한 이름이 이젠 좀 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라고 자처한다면 누구나 이 소설의 제목과 저자를 접하자마자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애너벨 리라는 에드가 앨런 포의 시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작가인 (소설 속 화자이기도 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것이다.

애너벨 리라는 시가 지닌 기묘한 아름다움, it was many and many years ago, in a kingdom by the sea 로 시작하는, 흡수력을 가진 시를 처음 영문으로 들었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처음 입학하고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이 시를 칠판에 적었다. 바닷가 어느 마을, 친척들, 그런 단어가 막연히 불러일으키던 묘한 감각.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은 대학에 들어간 뒤 읽었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대 초반이었고 도서관이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이 시간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는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로는 두 번째다. 허당 문학도다운 독서다. 며칠 전 산 에드가 앨런 포 전집이 펼쳐진 적 없이 뒹굴고 있는 상태.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간다. 소설 속 화자는 노벨 문학상을 탄 노년의 작가이며 현실적인 많은 여건은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픽션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개인적 체험』과 마찬가지로 흡입력이 엄청나다. 이 흡입력의 정체는 뭘까?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인지 중심 사건에 대한 흥미(미하일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때문이지 기묘하지만, 어쨌든 소설은 초반부터 독자를 빨아들인다. 게다가 픽션과 같은 여러 정황(간질을 앓는 아들 히카리를 보살피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곧 오에 겐자부로의 삶의 한 단면일 것 같다)은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가속도를 끊임없이 높인다. 이 형식은 끝까지 유지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소설의 중심에는 사쿠라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패전 후 일본의 고아 소녀였으나 미군 장교의 손에 길러지다 그와 결혼한 배우이다. 어린 시절 아역 배우로 활약한 바 있으며 ‘나’는 어린 시절 그녀를 애너벨 리라는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삶의 숨겨진 뿌리가 소설의 핵심인 셈이다. 간략한 몇 줄의 소개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 사쿠라(벚꽃)라는 여성이 소녀 시절 겪은 상흔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리고 현재로부터 약 30년 전 기획된 미하일 콜하스 프로젝트에서 ‘나’의 어머니 이야기에 매료되어 미하일 콜하스라는 봉건 시대 반란 장군(?)을 여성으로 대체해 영화를 찍고자 하는 사이, ‘나’의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소설에 개입한다.

사실 모든 여성은 소녀의 시절을 지나 어머니의 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여성이란 약자의 위치는 자칫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이 상처를 위무하며 어머니라는 강인한 존재(내게도 역시)가 된다. 세계의 모든 상처 입은 자들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그녀의 품에서 자라났다는 몹시 단순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놀라운 깨달음이 이 소설 안에 담겨 있다. 한 고아 소녀(애너벨 리 시에 어울릴 법한, 만지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가 전쟁의 상흔 속에서 미군의 놀이개로 전락한 시절을 모든 밤 악몽 속에 재현해내고 있으나 그녀가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발견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승화한다는, 정리해보면 뻔하지만 거기 담긴 생의 무언가가 아찔하다. 연약한 한 생명체(칼로 베면 피가 나오고 툭 하고 꺾여버리기도 하는)가 지닌 거대한 힘의 발견(봉건 시대 반란을 이끈 자의 어머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자의 어머니, 시대(전쟁 등)의 모든 아픔을 감내하며 자식들(다음 세대)들의 생을 감싸안는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미하일 콜하스 영화 프로젝트는 30년 전 좌절된다. 그러나 일흔이 넘은 나와 친구 고모리는 그 세월 속에서 누군가가 드리운 세월의 그늘을 껴안고 노인이 되어 사쿠라의 상흔을 위무하기 위한 기획을 계속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 기획의 말미일지도 모른다는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 지점에서 소설이 끝난다.

연약한 것에 대한 지독한 애착이 담긴 시 애너벨 리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울 무렵 배운 시이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이 시를 접하게 된다. 이 시에는 무언가 마력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약한 것에 대한 한없는 애정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추악하게 발휘될 수도 있고 아름답게 발휘될 수도 있지만, 인류에게는 그런 연약함에서 부드러운 힘을 발견하는 내면이 있는 게 아닐까. 모든 문학은 인간이란 존재의 연약함에서 부드러운 힘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노년의 작품은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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