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경계에 서 있다. 붉은 선의 경계. 넘으면 돌아갈 수없다. 그 경계를 넘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들려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고,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경계 너머는 현실과 비현실이 혼잡하게 섞인 세계.
피는 꽃처럼 터지고, 길고양이는 솜 인형처럼 느껴지는 부드럽고 잔혹한 세계.
도현이 그 경계의 선을 밟기 전에 누군가가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한다. 비린 냄새와 어두운 산이 존재하는 고통이 잇따르는 잔혹하기만 한 세상으로.
그렇지만 내일이 있는 세상으로. - P2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할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안쓰럽다는 걸, 불쌍하다는 걸, 가엾다는 걸, 애잔하다는 걸, 때때로 어떤 이들의 표정은 파도같이 잔잔하게 밀려오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오래전, 나인을 데리고 시내에 있는 키즈 카페에 가던 지모의 표정이 딱 부서진 파도 같았다. 예고 없이 멈춰 선 걸음과 도로 반대편을 응시하는 시선, 눈 밑으로 진 그늘과 힘 들어간 입술. 나인은 그 순간 지모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지모가 이 손을 놓고 저 반대편으로, 나인은 갈 수 없는 건너편으로 달려갈 것 같았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 이후로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지모의 표정은 나인의 기억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러다 차츰 그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파란불이 한번 깜빡이던 그 짧은 순간에 지었던 지모의 부서진 표정, 아주그리운 누군가를 봤던 거겠지. 지모가 두고 온, 어쩌면 버리고온 어느 한 시절을.
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찰나의 표정은 감출 수 없다.  - P112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라고,
- P158

사랑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걸, 사랑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지 않다는 걸, 사랑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사랑은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낙관주의라는 걸, 낙관주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아빠는 멈취 있는 것이 사랑이라 했지만, 엄마에게 사랑은 아마 흘러가는 강줄기 같은 것이었나 보다. 함께 흘러가는 물줄기였다면 같이 바다로 나아갔을 테지만 아빠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랑했지만 방식과 형태가 달라 두 사람은 섞일 수 없었다. 온수인지 냉수인지, 급류인지 완류인지, 흐르는지 머무르는지, 바닷물인지 민물인지가 중요하다. 사랑을 지속하려면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고, 그 말에 담긴 온도와 흐름까지 같아야 한다. 
- P173

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괴로운 거 같아. 누군가가 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찢고 나간 틈으로 또 다른 세상이 보여.
- P178

성에 갇혀 살던 아이가 성 밖으로 나간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주 조금의 용기만 있다면,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디면 그만이니까. 어려운 건 섞여 들어가는 일이다. 아이가 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던 세상의 쳇바퀴 속으로. 이방인을 맞이하는 조력자가 사라진 세상으로. 난도가 높지만 성공한다면 멋진 이야기가 되리라.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지만 제일 좋은 건 애초에 성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 P184

승택은 자신이 사는 세계의 크기와 나인이 사는 세계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모든 인간이 다 저만큼의 세계를 가졌는지는 다른 인간과 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던 승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과 나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만이확실했다. 그래서 자꾸 나인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됐다. 원래큰 쪽에 작은 쪽이 흡수되기 마련이니까.
- P185

시선으로 받은 상처는 나을 방도가 없다.
- P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밤에
문명예 지음 / JEI재능교육(재능출판)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밤 신비를 간결하게 책속에 담아내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슈바빙적인 것은 어떤 얘기 속에도 얘기 그 자체가 아니라 행간에 놓여 있다. 말해지지 않은 속에 억제된 감동, 욕망, 기대가 스며 있다. 돈, 시간표, 소시민 근성, 인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의 의식이 어떤 화제 사이에도 그들을 침묵 속에 굳게 맺어서 일종의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테마는 예술이다. 어디선지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있고, 조각을 쪼고 있고, 시가 쓰여지고 있는 곳, 감수성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질 청춘과 보헴과 천재의꿈을 일상사로써 생활하고 있는 곳, 위보다는 두뇌가, 환상이우선하는 곳, 이런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  - P50

언제나 아무도 안 사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안 읽을 시를 쓰면서 굶다시피 살면서도 오만과 긍지를 안 버리는 이 구역에 사는 모두가 가난했고 대개가 외국이나 타지방에서 모여든 화가나 학생이었던 그들한테서 나는 자유로운 생활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 같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또 나는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 것 같다. 정신만이 결국 문제되는 유일의 것이라는 것도, 국적도 피부색도 아무것도 거기에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교통이 가능하여 정신이 일치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벗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문제되지않았다.
슈바빙 구역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뮌헨이 그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