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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병실은 10층이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을 엘레베이터까지 데려다줄 때마다 사람들이 엘레베이터로 가는 길 통창을 지나며, 아래 쪽 중앙공원을 보고 병원 전망이 참 좋다, 고 했었다. 근데 저기 멀리 보이는 게 뭐지? 무슨 케이크 모양 같은 조형물이 있었다. 엄마와 아마도 어린이날 행사 때 쓰는 건가보다, 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었다. 실제로 어린이날 무슨 행사를 했는지, 어린이날 이전에 퇴원했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었다.
중앙 공원은 나도 참 좋아하는 장소다. 좋아하는 만큼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한 기억들이 깃들어 있는 곳. 볕이 매우 좋던 언젠가, 얼른 나아서 중앙 공원을 산책해야지,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링겔대를 끌고 나가서 종종 산책도 한다더만, 나는 환자복을 입고, 누렇게 황달있는 얼굴로, 링겔대 질질 끌면서 산책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실은 입원이 처음이라 나가면 안되는 줄 알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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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시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퇴원 후 일주일만이었다. 일주일동안 나는 정말 나름 열심히 약을 챙겨 먹었는데도, 점심약은 2번이나 빼먹었다. 그래도 감기 같은 거 걸리면 늘 약을 반도 안먹었었는데 (맨날 까먹어서) 이번에는 얼른 낫고 싶긴 낫고 싶었나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마구 기특해하던 나날들이었다. (주말에 교회 가느라 빼먹지만 않았으면 아마 나에게 상이라도 줬을 거다) 11시 반에 병원에 도착해 피를 뽑았는데, 채혈실의 언니들은 정말이지 프로였다! 또 고생할까 싶어 멍자국을 보여주면서 여기 혈관이 잘 뽑힌대요, 라고 이실직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고 간단하고 완벽하게 뽑아낼 줄은 몰랐다. 언니들 만세.
수치는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네요. 어느덧 많이 낮아진 수치. 이정도면 이제 다 나은 거 아닌가 하고 있는 나에게, 의사 아저씨는 "앞으로 2주 정도면 완전히 회복 되겠어요" 라고 하신다. 아. 멀고도 멀구나. 다음 병원 가는 날짜는 2주 후 월요일이다. 초거지모드라 회사에 좀 일찍 복귀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얄짤 없이 한달을 정말로 놀게 생겼구나. 무엇보다 억울한 건 정말이지 살이 엄청나게 찌고 있다는 건데, 잘먹고 잘쉬어야 낫는 병이면 잘먹고 잘쉬는 게 병 회복하는 데로 가야지, 어째서 살로 가고 있단 말이냐. ㅜ_ㅜ (회복하고도 남도록 많이 먹고 있는게냐 ;;;;) 처음 병원에 입원하던 날보다 (놀라지마세요) 무려 5kg이나 쪘다. 물론 이 때는 죽도 못먹던 시절이라 많이 빠지긴 했었지만, 난 그래도 아프니까, 저게 유지될 줄 알았지. 역시 뒹구는 것 앞에서는 장사 없구나. 그럼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니. 이 무슨 형벌인지. ㅜㅜ 웰빙병이라고 좋아하던 거 다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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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낡은 침대로 누우러 가기는 싫었다. 영화라도 한편 볼까, 했으나, 동네 영화관에 보고 싶은 영화는 단 한편도 없었다. 카페에서 샌드위치 먹으면서 책이라도 보자, 생각하며 카페로 가던 길에, 어랏. 충무김밥집.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충무김밥!!! 하면서 들어가 주문을 하고 생각해보니, 도대체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것들의 가지수만 따지면, 나는 한 1년은 병실에 있었던 애 같다.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군만두를 먹으면서도, 치킨을 먹으면서도, 이런것 저런것들을 먹으면서, 계속, 다, 이거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거에요! (계속 몸에 좋은 음식만 먹다보니 정크푸드들이 먹고싶었다. 정말. ㅠㅜ - 살찐 원인들이 아무래도 여기에...) 이제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건 다 먹었나보다 생각하며 충무김밥을 먹는 순간. 아. 이 맛이 아니었다. 명동에 있는 충무김밥집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아직은 무리. ㅜㅜ 주위를 둘러보니, 충무김밥을 먹는 건 나 하나. 충무김밥집에서 오늘의 정식을 시켜먹는 사람이 더 많은 건 다 이유가 있는건데, 나만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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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페로 갔다. 이 동네에 오래 살았음에도, 맛있는 카페 하나 제대로 심어놓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으나, 실은 아이스라떼를 마실 예정이었으므로, 굳이 상관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약간의 햇살과, 익명성, 그리고 익숙한 라떼맛 정도였으므로 그냥 스타벅스로 갔다. 다행히 창가에 자리가 있었다. 평일 낮인데도 꽉 차 있었다. 너무 오랫만에 들른지라, 커피값이 오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올 초 스타벅스가 가격을 올리느니 어쩌니 또 욕하는 기사를 본 것 같다. 그나마 스타벅스 커피는 싼 편이어서 좋았는데, 아무리 300원 올린 거라고 하지만, 앞자리가 바뀌고 나니, 슬쩍 맘이 상하기도 한다. 오늘의 날씨와 어울리는 화창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읽고 있는 책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 damien rice로 바꿔 재생했다. 음악과 음악 사이, 잠깐의 텀이 있는 동안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이 들렸는데, 공교롭게도 damien rice.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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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지나자 카페가 덥다. 바람은 차단한 채 햇살만 받아들이고 있는 실내의 한계. 창밖을 보니 나뭇잎이 흔들거린다. 밖으로 나가도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병실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중앙공원으로 갔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내 자리가 보인다. 밤벚꽃이 유혹을 지나칠 수 없던 어느 퇴근 길에 앉아 swell season의 노래를 들으며 이윤학의 시집을 읽었던 자리다.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뒤로는 이제 푸른 이파리만 남은 벚꽃이 멋드러진 그늘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음악은 꺼두기로 했다. 주말보다는 한산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물놀이를 하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쫓아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형 같은 강아지가 내게 다가온다. 나는 동물공포증이 있어서, 강아지가 나의 30cm 앞으로 온 순간에야 그것을 인식하고 몸을 움찔, 했다. 귀신같이 알아챈 강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돌린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강아지에게 좀 미안했다. 예쁜 건 알겠는데, 나도 예쁘다고 좀 쓰다듬어주고 싶고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 미안했다. 잠시 후 한마리가 더 다가오고 같은 상황의 반복. 잠깐 움찔했는데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게 신기하긴 하다. 사람을 따르는 동물이라, 예뻐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못하는 사람인지 민감하게 캐치해내나보다. 역시나 나를 해코지하지 않고, 조용히 가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ㅜ_ㅜ
책을 읽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비둘기 우는 소리다. 생각해보니 비둘기 우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 구구구구- 구구구구- 운다고 했었지, 그래서, 내가 비둘기 학번이었지. 그런데 실제로 들은 비둘기 우는 소리는, 떨림이 있는, 구구구, 가 아닌 구우우- 구우우- 구우우- 였다. 비둘기가 구구구구 우는 소리도 들어본 적 없으면서, 저는 비둘기학번이에요, 했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게 또 뭐가 있었더라.
선거운동 하는 아저씨들이 유세를 한다. 미안해요. 저 이동네 안살아요. 하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웃으며 받는 편이 더 간편해 보여서 그렇게 했다. 저 멀리 높이 나는 새가 보여 자세히 보니, 새 모양의 연이었다. 연날리기 동호회가 온걸까, 가족이 함께 연을 날리는 걸까, 아니면 원래 중앙 공원에 오면 연날리는 사람들이 많은걸까, 하늘에는 제법 연이 많이 떠 있었다. 예전에는 연을 왜 날리는 지 잘 이해를 못했었는데 (내 연이 못날아서 그랬을지도 ㅜㅜ) 오늘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을 보니 덩달아 제법 신난다. 저렇게 멀리 날 수도 있구나. 정말 시원하게도 난다. 선거유세하던 아저씨들은 연날리는 아저씨 옆에 가서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더니 같이 사진을 찍는다. 연날리는 아저씨와 찍은 사진 밑에 뭐라고 코멘트를 쓸 작정인걸까.
참, 내가 궁금해하던 그 조형물은, 무려, 탑이었다. 석가탄신일을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탑이 너무 알록달록하고 깜찍하다. 이렇게 화창한 날, 화창한 풍경을 맞으러, 환자복을 입고 나가지 않길 정말 잘했다, 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1분도 못되어 다시 병실로 복귀했을 거다. 정말이지, 5월이라도 5월다워서 다행이다. 벤치에 앉아 병원을 올려다본다.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오늘은 그 누군가에게 내가 눈부신 날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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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해가 지기 전에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정미경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였다. 하는 일이 없다보니, 읽은 책이 재미있으면 좋은 하루, 재미없으면 안좋은 하루, 뭐 이렇다. 오전에 병원에 가기 전에는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집에 책이 없다보니 교회 지인들에게 책을 좀 삥뜯었다. 좋아하는 책 두권씩만 빌려주세요. 라고. 그 중 하나가 어린 왕자였는데, 1978년에 김현이 번역한 책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또 눈이 하트로 변해, 저 그거 빌려주시면 안돼요? 모드로 돌변. 어린 왕자를 20년만에 다시 읽었다. 내 나이보다 조금 더 많은 그 책을 조심 조심 넘겨가면서. 덕분에 오늘은 좋은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법의 횡단보도 앞에 트럭 한 대가 눈에 띈다. 센베 과자를 파는 트럭이었다. 꺄아아,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거야. 나는 살이 디룩디룩 찐다며 툴툴대던 스스로를 외면한 채, 센베 과자 한봉지를 집어 들었다. 5천원이면 두봉지를 준다는 아저씨의 유혹을 뿌리친 건 그나마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이었다. 도대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병실에서 먹고 싶었던 음식은 얼마나 남아 있는 걸까. 회사 복귀하는 날 나를 아무도 못알아보면 어쩌나,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집에 도착했다. 나름 하는 일이라곤 앉아서 책본 것 밖에 없지만, 그래도 간만의 외출에 꽤 피곤했다. 지긋지긋하던 낡은 침대가 포근하고 사랑스러웠다. 한입 베어 문 센베 과자는, 정말이지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