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교육학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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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활자가 너무 많이 쏟아지고, 보고싶은 책도 많고, 그러면서 시간없다고 말하며 게으르기도 하고, 새책 평이 나오는 신문을 보고 메모하고 알라딘을 돌아다니니며 쇼핑을 하며,

그런데, 정말 이 많은 책을 내가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때론 두번 세번 읽고 싶은 책이 있기도 하다.  아주 느리게.

"민중이 자신의 언어로 억압자의 세계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상하도록 하는것" 이 프레이리가 말하는 희망의 교육이다.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노인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삶과 정의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하며 엄격하다. 탐욕적인 보수정치를 바꾸기 위해 대다수 헐벗은 민중을 '교육' 한다는 것에 참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한다. 그러나

'투쟁의 윤리와 저항의 미학'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프레이리를 보며, 우리는 모두 더 맣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반성을 했다.

무엇보다 좋은건 글이 쉽다는 거다. 평소 문체나 말투에는 이미 그 사람의 철학과 화제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려운 말로 해방과 혁명을 말하는 글에 대한 짜증 -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글들이 왜그렇게 민중과 멀게 있는지) 지식인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이미 다수를 소외시킨다. 이론의 엄밀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다수 민중의 논의수준이 상향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작자는 자기가 쓰는 글을 읽을 사람을 누구로 선정할지 쓰면서 이미 결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프레이리의 편안하고 적절한 문체가 감동적이다.

민중을 교육하고, 모순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자기자신에게 엄밀함의 자를 들이대고 실천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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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항
방현석 지음 / 일하는사람들의작은책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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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이 '아름다운' 저항일까?
흔히 사회주의자는 현제의 시간에 대해 비관적이고, 미래의 시간에 대해 낙관적이라고들 한다. 그럼, 과거의 시간은 아름다운가? 물론 과거의 모든 시간이 아니라 '저항'의 시간을 말하며 아름답다고 하지만, 형용사가 적절하지 않다.

20세기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저항들은 식민지 시대부터 유신이나 독재시절을 거쳐 신자유주의가 생존권을 위협하는 지금까지 너무도 치열하고 눈물겹게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1970년 전태일열사가 죽으며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말은 2004년의 시간에도 유효하다.

그럼, 현제의 저항도 아름다운가? 굳이 최근에 죽어간 열사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 철거민과 농민들...... 눈물겹다. 차라리 지겹다. 반복되고 있는 자본의 폭력과 모진 투쟁의 시간들을 경과하면서 아직도 되풀이 되고 있는 투쟁의 시간이 멀미가 난다.

아름답게 회상하는 것이 옳바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폭력은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과 역사까지도 고통스럽게 한다는 말이고, 그 무거움에 비해 아름답다는 회상은 이르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야만적인 자본의 폭력이 이제는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시대가 되거든 그때의 후손들이나 우리의 저항을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각 시대별로 선별한 사례들은 적절하다. 전체적으로 20세기 한국사회에서의 노동운동을 정리하기에 좋다. 인터뷰는 현장감이 있고, 지금 현제 그 역사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표현한것은 작자 역시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에 대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로서의 시선이 있다. 수필처럼 가볍게 읽어야 하기 때문에 소제목이 '노동운동사 산책'이다. 아름다운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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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 양장본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김규종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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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사회주의의 실험에 대해 많은 평가들이 쉽게 말하여 졌다. 어쨌거나 제 인민들을 굶주림으로 부터 보호하지 못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른바 독재정치에 대해 누가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순수한 열정을 갖고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수많은 인간들에 대한 평가는 한 모범으로 소중하게, 의식적으로 전승되어야 한다.

본래 사회주의적인, 혹은 진보적인 역사철학은 인간의 역사가 뛰어난 영웅 몇몇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노동과 창조적인 활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레닌이나 로자나 뜨로츠키로만 러시아의 혁명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그당시 압제에서 벗어나 인간해방을 위해 모든 열정을 다해 투쟁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빠벨'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혁명의 와중에 모든것을 다 바치고 불과 32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저자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키 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먼 미래의 어떤때가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위해 고민하는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래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실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고 그것이 힘차게 나날이 강고하게 건설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세계가 천년을 갈것이라고 생각하는, 혹은 거대담론을 논하는 것은 철지난 유행가로만 행각하는, 혹은 현실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모든 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패배와 후퇴의 시기에 사는 나는 차라리 열정을 바치며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시대가 부럽다. 우리의 역사에도 성공한 혁명에 대한 기억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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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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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저자와 책이름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저작중 공화주의자로서의 그가 더 잘 드러나는 <로마사 논고>보다 <군주론>이 더잘 알려진 까닭인것 갔다. 메디치가문의 눈치를 보며 쓴 이 군주론의 내용이 단지 도덕성이나 종교적이유를 말하지 않고 경험과 현실에 바탕을 둔 군주의 처세에 대한 저술은 그시대에는 과연 놀랍고 혁명적인 제안이 었을 것이다.

군주론이라하여 흔히 생각하듯 군주가 마음데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정치를 행하도록 권하고 있지 않다. 군주 자신을 위하여 인민을 안전하게 하고 인민으로 부터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세부적으로 차분하게 타당한 예들을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하는것이 깐깐한 학자의 면모를 보인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깝더라.

최근의 진보적인 정치관에서보면 한인물이 뛰어나고 잘나 군주가 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옳바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정치의 근본이 인민의 평안함에 있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민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민주적인 사고의 시작이다. 재미있는 고전. 소견없이, 철학없이 그저 권력의 중심만을 향해 철새처럼 움직이는 우리 정치계의 모리배들이 좀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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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꾸는 파업
장석준,김덕련 지음 / 이후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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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으로 관철되는 최근의 현실에서 파업을 논한다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계급문제와 착취와 그것의 극복으로서 노동자들의, 혹은 전 민중의 직접행동으로 단지 경제의 요구에만 머무르지 않는 대안 프로젝트에 대한 고민을 논하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동안 노동자, 민중들의 직접행동에 대해 고찰하며 체제극복을 바라는 현제의 '좌파'가 인식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노동자들의 축제로서의 파업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위함이다.

논의가 깊지못하다. 단지 신문의 기고문으로의 한계라 한다면 차라리 객관적으로 각 파업 당시의 상황이나 조건들에 더 치중하든지. 문제의식의 정리도 체계적이지 못하다. 파업당시의 상황과 이러저러한 논점들을 충분히 설명하지도 않고, 결론내지도 않고, 그리고는 '이 책을 보라'고 참고서적을 써놓는다. 결론적으로 논점이 뭔지 역사적인 배경을 모르면 잘 알수 없다.(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참고서적은 절판된 것들이다.)

파업자체에 대한 논문을 쓰고자 한것이 아니라 20세기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났던 파업들에 대한 소개라면 좀더 사실정황을 전달하는데 노력 했어야 옳다. 대중들의 파업은 그 하나하나의 상황만 제대로 알아도 충분히 감동적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제 21세기에는 어떤 파업들이 노동자대중의 환호속에 우리를 기다리는지 기대할 것이 아닌가. 그러한 역사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독자의 몫이고. 아무도 말하지 않은 '파업'의 긍정성에 대해 말하며 20세기의 파업들을 정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으로 의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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