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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1.
"끔찍해라. 내가 돼지가 아리라서 참 다행이네!"
젊고 튼튼한 유르기스
리투아니아에서 자유와 성공의 기회를 찾아 미국 시카고로 온 그는
가축수용장의 도살장에서 돼지를 거꾸로 매달아 목을 따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다가 토막내고 가공하는 것을 구경한다.
우주에 돼지 우는 소리가 진동한다.
죽음을 향해, 죽음의 콘베이어 벨트를 타고가는 돼지를 보며 유르기스는 말한다.
정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또한 돼지와 동일한 운명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유르기스와 그의 가족들이 리투아니아에서 자유로운 미국으로 이주한후 거대하고 더러운 공장에서 어떻게 희망을 잃어가는지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자본의 이윤, 자본과 결탁한 공권력, 부자들과 지식인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경멸하며 그들의 등골을 빼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가 휘도록 부려먹은 후 병들면 미련없이 버리는지
노동의 과정과 재생산의 과정, 집을 사고, 겨울을 나기 위한 난방과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먹거리를 사기위해
저당잡힌 그들의 삶에 대하여, 대물림되는 가난과 죽음, 죽음의 콘베이어 벨트에 대해
2.
오래간만에 자본주의 사회의 야만적인 시스템에 대해
그 부품이 되어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쓴 책을 읽는다.
현실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쓰기만 해도 모든 노동자들이 왜 투쟁할수 밖에 없는지, 선동이 된다.
최근의 호흡에 비하면 많이 느리지만 생생한 서술에 힘이 있다.
사회주의자 업튼 싱클레어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레미제라블 장발장은 1800년대 프랑스의 비천한 자였다.
유르기스는 1900년대 미국의 비천한자, 장발장이다.
200년 전과 100년 전에 비해 세상이 많이 변했는가?
2000년대 한국에서 레미제라블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이윤을 위해 대물림되는 영혼의 파괴와 가난은 지금도 되풀이 된다.
자본의 욕망, 가축도살장의 비위생적이고 혐오스러운 상태를 직설화법으로 모두 드러내며 썼기 때문에 읽기 힘들기도 하다.
역겹기 때문에.
그런데 싱클레어의 문장은 혐오로 끝나지 않는 촉촉함이 있다.
외면하고 싶어 책을 덮었다가도 다시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유르기스로 대표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그 순진한 희망과 절망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잘 그려내기 때문이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마지막 장은 사회주의자들의 강령토론에 대한 대중적 버전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부록같은 장이지만
이미 100년전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의 수준을 볼수 있고
벌써 100년이 지났는대도 여전히 그 언저리에서 숨찬 이땅의 사회주의자들을 돌아보게 된다.
3.
그런데, 책의 말미에 붙은 채희석의 해제를 보니
아하! 1979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어 출간될때는 29장과 30장이 없었군.
도식적이기도 하고 사회주의라는 무서운 말이 들어있기도 해서라고 하는데 나는 후자때문이었을 거라고 본다.
번역하는자의 판단에 도식적이라해서 굳이 빼지는 않는다.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니까.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어디까지 모욕할수 있는지를 소름이 돋도록 밀어붙이는 업튼 싱클레어의 냉철한 문체는 아찔한 현지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문장에 동의한다. 채희석의 해제뒤에 연이어 붙어있는 방현석의 작품해설이 좋다.
오나를 사랑한 유르기스는 꿈을 꾼다. 오나를 만나기전에는 한번도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오나와 행복하게 살기위해 유르기스는 부자나 거지나 모두 똑같이 취급되는 자유로운 나라로 오게 된다고
비극은 언제나 사랑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방현석의 삶에 대한 직관과 작품을 읽는 안목에 신뢰를 보낸다.
메이데이의 성지인 바로 그 시카고에서 백년전 비천한 자들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시간이 그냥 세상을 바꾸지 않는 다는 것을, 현제진행형 정글에 대하여.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