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를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까. 판타지의 기본 전제는 ‘다른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와 <나니아 연대기>의 나니아는, 적어도 작품 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판의 미로>에서는 이 점이 불분명하다. 요정들이 사는 지하 왕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단지 오필리아의 환상인 것일까.
이 영화가 다른 판타지 영화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점은 역사성에 있다. 1944년,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으나 곳곳에서 게릴라들의 반정부 저항이 계속되고 있던 스페인, 그것도 게릴라와 정부군이 대치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으니, 애초에 아동용 판타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필리아가 처한 상황을 보면 이모 부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해리 포터의 고통 따위는 감히 고통이라고 언급할 수도 없다. 차라리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을 떠올릴 수 있다.
왜 재혼을 했느냐고 묻는 오필리아에게 엄마는 혼자 살기가 힘들었다고, 너도 크면 이해할 거라고 대답한다. 세상은 냉정하고 잔혹한 곳이니까. 엄마의 말 그대로 오필리아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섭다. 게릴라 토벌대 대장인 새아버지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군인이다. 포로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들은 식량도 의약품도 부족하여,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상처 입은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모두 오필리아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새아버지의 싸늘한 눈빛과 게릴라를 돕는 사람들의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일찌감치 세상에 대한 공포를 느낄 법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고, 보름달이 뜨기 전에 세 가지 임무를 마치고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요정 판은, 오필리아의 공포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오필리아가 갇혀 있던 방에서 탈출한 것을 제외하면 지하 왕국이나 요정의 존재, 마법 등이 실재한다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영화는 상당히 도식적으로 진행된다. 한 쪽에는 끔찍한 전쟁 상황이, 다른 한 쪽에는 동화 같은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지지만, 양쪽 모두 딱 정해진 틀을 따라 움직인다. 오필리어에게 주어진 임무조차 용기, 인내, 희생이므로, 어떤 식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갈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필리어가 임수 수행 중 실수를 하는 것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만 리얼할 뿐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없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내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이다. 어째서? 이미 충분히 예상한 결말인데. 그랬다. 알고 있었는데도, 심장이 아프고 눈물이 차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힘일까. 지독히도 끔찍스런 현실의 장면들(피튀기거나 잔인한 묘사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과 햇빛이 들지 않는 평화롭고 고요한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필리아의 모험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주며 끝을 향해 마구 몰아가는 용기. 그리하여 그 불행한 혹은 행복한 결말을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목격하고 판단하게 하는 냉정함.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힘겨웠지만, 올해 본 영화들 중 최고라고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이 작품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한 번 더 보고 싶고, DVD를 구입하여 소장할 생각이지만, 다시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