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로망 산뽀>는 "시노바즈도오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도 시대의 정취가 남아 있는 거리이자 재미있는 가게들이 많은 곳.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 보고 싶은 곳도 이곳이었다.

마지막날,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후 가방을 모두 짊어지고 시노바즈도오리로 향했다. 역에서 코인라커에 짐을 보관하고 주변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JR 니시닛포리역에서 내려 책에서 안내한 대로 남쪽 출구로 나갔다. 굉장히 시골스럽고 소박한 분위기. 심지어 코인라커도 없다! XX! 캐리어까지 끌고 다녀야지, 별 수 있나.

남쪽 출구로 나가서 왼쪽길로 접어드니 바로 天王寺가 나온다. 지도에도 나온 걸 보면 제법 큰 절인가보다. 우리랑 똑같이 캐리어까지 끌고 다니는 서양사람을 만났다. 생긋, 미소만.

 



 

천왕사에서 이어지는 길은 전부 묘지다.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데, '야나카 묘역'이었던가 어쨌던가. 여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족묘도 있다. 굳이 거기까지 가서 볼 마음이 들지는 않았기에 패스.
이 주변에는 절이 정말 많다. 족히 수십개는 되는 듯, 거의 서너 집 건너 한 번씩 절이 나온다. 일본인들의 장례는 대개 절에서 치뤄진다고 하던데, 이 주변에 특히 많아 보이는 것이 아마 이 묘지 때문이겠지.



 

묘지의 가운데 큰 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접어들어서 골목길로 들어가면, 이름은 잊었지만 <도쿄 로망 산뽀>에도 소개된 무슨 조각가의 박물관이 있다. 물론 찾아갔다. 그.런.데. 세상에, 금요일에 문닫는 미술관이 어디 있나. 정기 휴일이라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붕 꼭대기에 올라앉은 남자의 조각 하나만 보고 돌아섰다. 다시 한 번, XX!





 

길을 지나다 <도꾜 로망 산뽀>에서 본 지도랑 똑같은 지도가 벽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한 장에 100엔이라고, 동전 넣는 통과 함께 몇 장이 놓여 있다. 그 집은 찻집으로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포스터도 붙어 있다. 일단 들어갔다.



 

내부에는 밖에서 본 지도가 테이블마다 깔려 있고 중앙에 인형을 전시한 커다란 장식장이 있다. 전시장은 2층이래서 올라가봤는데, 아마 그 주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그린 듯한 소품들이 몇 점 걸려 있다.
주인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이라고 대답하고, 들고간 <도쿄 로망 산뽀>에 실린 지도를 펼쳐서 보여줬다. 엄청 좋아한다. 다음에 한국에 가면 책을 사야겠다고 해서 책 제목을 적어주었다.





 

차를 마시고 나오려는데 다음은 어딜 갈거냐고 묻는다. "스카이 쟈 바스 하우스 (SCAI the bath house)"라고 답했더니 거기 목욕탕 아니라고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알아요, 미술관이죠." 생긋.

 



달랑 전화번호만 적힌, 뭘 파는지 알 수 없는 가게도 보이고, 그 옆은 약선요리를 파는 곳.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광온 듯한 외국인들도 가끔 보인다.
설마 저 집에 전시된 상품들이 "made in china"는 아니겠지...?

 



역시 벽에 붙은 이 지역 지도. 이 집은 가방 가게라는데 입구를 찾을 수 없어 패스.

 



SCAI the bath house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다. 목욕탕이었다고는해도 굉장히 작은 동네 목욕탕이었던가보다. 욕탕이랑 탈의실이 나올까 싶은 작은 크기.
바닥에 색을 칠하고 그 위에 작은 유리구슬을 붙여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여러 작품이 전시중이었다.

배가 고프다. 라면을 먹고 싶은데 라면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중국집에만 라면 메뉴가 있다. 한참을 걷다가 지칠 무렵에 발견한건 오뎅 가게. 몇 개 샀더니, 주인아주머니가 그 앞 의자에 앉아 먹으라고 일러주신다.



이 오뎅가게 바로 맞은 편은 파이를 파는 작은 가게다. 간판도 제대로 없는데, 유리문 한 켠에는 여러 TV와 신문에 실린 집이라는 안내가 조그맣게 붙어 있다. 그럼 먹어봐야지. 맛은, 뭐, 그냥 파이같은데?

 



여기는 시장 골목. 우리의 시장처럼 북적대긴 마찬가지.
장어꼬치랑 양갱을 사 먹었다. 간식 기행이랄까. ㅎㅎ

 



저런 식으로 그림을 붙여놓은 집들이 많았다. 간판인지 그저 장식인지 잘 모르겠다.

 



마치 제 집인양 가게 앞을 지키고 있는 검은고양이.

 



목공예품을 파는 가게인데, 가격이 꽤나 비싸서 깜짝 놀랐다. 저 위 새장은 몇 만엔쯤 붙어 있었던 듯.

 



떠나기 전 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시장통에 있는 작은 가게인데도 커피맛은 깜짝 놀랄만큼 맛있다. 그렇게 맛있는 카푸치노는 거의 마셔본 적이 없다. 애인은 커피가 맛있는 나라 좋은 나라,라고 한다. 참.
일본 만화를 보면 동네에 꽤 맛있는 작은 가게가 있고 동네 사람들이 제 집 드나들듯 와서 쉬었다 가고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집도 그런 모양이었다. 문 앞에 내 놓은 저 탁자에 와서 앉은 아주머니들이랑 주인 할아버지(60대로 보인다)가 잡담을 나누며 웃는다. 가게 안에는 웬 할아버지도 한 분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쿄 로망 산뽀>에서 소개한 것은 실은 "시노바즈 스트리트"라기보다는 니시닛포리역에서 시노바즈 스트리트에 이르는 중간 지대이다. 거기에 실린 몇몇 가게들은 당최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지만 동네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았다. 도쿄에 간다면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

마지막으로, 저 카페에서 출발하여 니시닛포리역으로 돌아갔더니 그곳은 북쪽 출구다. 그리고 커다란 코인라커가 눈에 떡 들어온다. 세번째로 XX!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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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0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깨끗하네요^^

딸기 2006-11-0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으아... 넘 가고시포요!
하나헨로...라고 쓰여있는 건가요 -.-a 저 찻집 느무 이쁘네요

비연 2006-11-0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동경 갈 기회가 있는데 꼭 가봐야겠네요^^
저도 지금 도쿄 로망 산뽀 읽고 있는데...ㅋㅋ

2006-11-07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11-0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거리 말씀이신가요? ^^ 담배 꽁초나 쓰레기 떨어진 것도 없고, 깨끗하긴 합니다. 오래된 동네라 낡은 건물들이 많기는 하지만요. 우리나라에서는 70~80년대 이후로 거의 없어졌을 법한 옛날식 건물들이 도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좀 신기하지요.

딸기님, 에...일본어는 거의 잊어버려서리.. ( '') 그러고보니 하나헨로인 것 같기도... (.. ) 암튼, 이쁘죠? 안에는 테이블이 네 개인가 밖에 없어요. 방명록을 쓰라고 주셨는데, 다들 그림을 그려놨더라구요. 그래서, 그림 못 그리는 저희는 그냥 나왔습니다. 흑흑.

비연님, 많이 걸어야하니까 편한 신발 신고 가세요. 저 찻집에서 파는 지도도 하나 사시구요. 꽤 자세하답니다. 밖에서는 100엔, 찻집 안에서는 50엔에 팔아요.

2006-11-0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11-0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혼여행 때 관광도 많이 하신 모양이네요^^ 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인가요? 그런 놈 치곤 너무 귀티가 흘러요.

urblue 2006-11-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길고양이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사진을 찍고 난 후 유유히 걸어서 건너편 가게 앞으로 옮겨 앉더군요. ^^;

Mephistopheles 2006-11-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X 3번만 외쳤다면 좋은 여행이 아니셨나 생각됩니다..^^

nada 2006-11-07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어 꼬치랑 양갱..ㅎㅎ 귀여워요. 가끔 길거리 음식 먹으면 정신연령이 깎이는 것 같아 좋아요.

urblue 2006-11-0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하루에 세 번이더라도, 뭐, 나름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

**님, 그렇지요? 사야님도 말씀하셨는데, 땅값 비싼 동네에 저런 허름하고 독특한 외양을 한 건물이나 가게들이 그냥 남아 있는 건 좀 신기해요.

꽃양배추님, 전 길거리음식도 좋아해서 가끔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만, 정신연령이 깎이는 것 같아 좋다니, 님이 더 귀엽습니다. ㅋㅋ

blueblack7 2006-11-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뿐 거리~^^
간식기행 가고프네요~

프레이야 2007-02-0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 인상적이네요. 검은 고양이의 눈도...
몇달 전 결혼하셨나 봐요. 늦게나마 축하합니다.^^ (불쑥^^)
내내 행복한 생활 가꾸어 나가시길~~~

urblue 2007-02-0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고맙습니다. ^^
 



도꾜 골목 곳곳에서 마주치는 선거 포스터들은 한국과 달리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는지, 자민당은 자민당대로, 공산당도 공산당대로, 정당별로 각각 제 나름대로 붙어있었다. 물론 나름의 규칙이 있더라도 사정을 모르는 이방인의 눈으로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둘러보다 보니, 선거 포스터 바로 옆에 무슨 사립 탐정회사의 광고로 짐작되는, 새카만 개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공명당은 본디 창가학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수정당이지만, 나로서야 별다른 호오감정은 없다).

개 포스터를 붙인 이의 센스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한국에서라면 당장 선관위 고발대상이겠지만, 브라보~ 하고 외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쩌면, 見者는 실은 犬者인 것일까.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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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멍. 왜 이리 귀여우신 거예요.
얼블루 님. 결혼 잘 하셨어요. 귀여운 남자가 최고예요.

urblue 2006-11-0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핫. 애인이 쫌 귀엽기는 하죠. ^^;
 

 피터팬돌아온 피터팬

 어느 멋진 분의 선물.
 그러고보니, 피터팬을 책으로 읽은 적이 없는 듯하다. 어렸을 적 읽었을까.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학교 들어가기 전후로 읽은 동화책 전집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가끔 그런 걸 기억하는 분들을 보면 신기하달까.

 

 산 자와 죽은 자

 신간 안내를 보다가 책 소개가 마음에 들었고, 1권을 예약 주문하면 2권이 따라온다길래 낼롬 주문.
 오늘 오전 책을 받았는데, 완전 횡재한 기분이다. 한 페이지 25줄, 약 500페이지가 두 권이라니. 내가 출판사 관계자라면 무지 속쓰리고 아까울 듯.
 뒷 표지의 추천사에서 정몽준과 손학규의 이름을 발견하고 조금 기분이 상했다. "우리의 노사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정회장님의 말씀. 정말요?

 

 핑퐁

 "전설의 작품"이란다. 로드무비님이 리뷰를 쓰셨던 그 만화가 재출간된 모양이다.
선착순 30명에게 DVD 타이틀이 따라온다는데, 확인한 바로는 내가 13번째 주문일 것이다.

 

 사립 성카틀레야 유치원

 모님이 좋아하실 듯한 엽기코드가 아닐까, 추측. 
 알라딘 리뷰에 "일각에서는 '출판사 만세', 혹은 '이윤을 고려하지 않고 이런 만화를 출간하다니, 과연 당신들은 대단하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궁금하잖아.

 

 

 멸망하는 국가

 내 책만 주문할 수 없으니 애인 것도 한 권 넣어준다. 그나마 내가 같이 읽을 수 있는 걸로. ㅎㅎ

 

 

 엘리펀트

 한동안 품절이었는데 이제 주문이 된다. 단, 11월 9일에나 받을 수 있단다. 그래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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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0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자와 죽은자에 그런일이 ㅡㅡ;;;

쎈연필 2006-11-03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팬... 저도 생각해 보니 완역본을 읽은 적이 없더군요. 게다가 후속작까지... 저도 꼭 읽고 싶네요.
덕분에 좋은 책 소개 받아서 감사감사~^-^

urblue 2006-11-0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예약 이벤트 하는 거 모르셨나봐요. ^^;

또마님, 뭐 덕분이랄 것까지야. ^^

물만두 2006-11-0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말을 쓴 사람들 얘깁니다^^;;;
 
 전출처 : 로쟈 > 스타브로긴의 마지막 편지

가끔은 내가 써놓고도 까맣고 잊고 있었던 글들을 만나게 된다. 수년 전에 씌어진 걸로 보이는 아래의 글도 마찬가지인데, 말투로 보아 무슨 '댓글'로 씌어진 게 아닌가 싶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1872)의 주인공이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주석을 붙이고 있는데,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악령>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스타브로긴에 대한 연구입니다. 젊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은 수수께끼라고 했을 때, 그 수수께끼성을 가장 매력적으로(악마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스타브로긴이죠. <악령> 속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서 직접 털어놓고 있는 부분들은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요긴합니다. 원래는 삭제됐었지만, 작가의 사후에 포함된 '스타브로긴의 고백'(<찌혼의 암자에서>)을 제외하면 <악령>을 마감하는 그의 편지는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참조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편지는 다리야 파블로브나를 수신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우리'란 곳에 도피처 겸 거처를 마련해 두고 그리로 갈까 합니다(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자살입니다). 하지만, 무슨 대단한 걸 기대해서는 아니죠.

"나는 우리의 생활에서 무엇 하나 기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가볼 뿐이죠. 내가 일부러 음울한 장소를 택한 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내가 구속받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낯설 뿐이지요. 사실 러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 산다는 일보다 제일 싫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낯설음"이라는 것은 스타브로긴을 대표해줄 수 있는 정서입니다. 그에게 세계(특히 러시아)는 낯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지주의자인 샤토프(그리고 작가)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관념에 들려 있는 인물이죠. 다만, 어느 한 가지 관념(=사상)도 그를 만족시키질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너무 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넓이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가 말하는 "미학적'의 넓이가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입니다(*아래는 카뮈 각본, 안제이 바이다 연출의 연극 <악령>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 모스크바의 '동시대인' 극장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내 힘을 시험적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권했던 일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 또 남한테 보여 주기 위해 실험하면서도, 내 힘이 한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선행과 악행을 구별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그 자신에게도 그는 수수께끼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추악하고 엽기적인 행동도 그의 한계를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의 힘과 내면은 무한하거나 무한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식론적 자아의 무한성'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라스콜니코프의 경우는 소박하기 짝이 없죠. 도끼로 한 노파를 살해하자 마자 자신의 한계가 막바로 드러난 경우니까(앓아눕지 않습니까?).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12살 소녀 마트료샤가 자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습니다. 샤토프가 따귀를 때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겐 반응(reaction)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관심한 존재인 것이죠. 그는 타자의 어떤 목소리에도 응답할 줄 모르는 윤리적 백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식론적 무한은 윤리학적 무한의 결핍을 전제로 합니다. 그에겐 윤리학적 자아가 부재합니다. 무관심이 그 증표입니다. 윤리학적 자아란,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타자의 무한성과 대면하는 자아입니다. 인식론적 자아가 오딧세이의 귀향처럼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자아라면,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자아라면, 윤리학적 자아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결코 고향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지 않는 자아입니다. 즉 타자의 무한 속에서 실종되거나 몸둘 바를 모르는 자아인 것이죠. 제 생각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대지는 그러한 무한성의 표상입니다. 스타브로긴의 경우는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에 포박당한 채, 윤리학적 무한에는 끝내 눈뜨지 못하는 불행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불행은 사소한 것이지만, 삶을 더이상 지탱하기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말입니다. 더러운 곤충처럼 지구의 표면에서 근절해 버려야 함을... 그러나 나는 자살을 두려워 합니다. 그것은 아량을 보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나는 잘 알고 있소, 그것이 허위임을. 무한한 허위의 연속 속에 있는 최후의 허위임을..."

인식론적 무한은 동시에 허위의 무한(=무한한 가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차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론적 의미나 진실에 대면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은 한 걸음씩 물러나지요. 왜냐하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체계이며, 타자와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적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악무한인 것이죠. 그러한 사정에 눈뜨기 위해서는 타자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론적 무한의 맹목성과 비참(=가난)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분노와 수치와 절망을 동반하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스타브로긴에겐 결여되어 있으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살은 구원없는 필연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 다음부터 여섯번째 역의 역장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나이의 앞으로 회답을 써 주십시오. 주소는 따로 동봉합니다."

그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불행히도 우린 그의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군요!...

06. 11. 03.

 

 

 

 

P.S. 참고로, 최근에 권철근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한국외대출판부, 2006)가 출간됐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단행본 연구서로는 (놀랍지만) 국내 최초의 것이다. 이제까지 국내 연구자들이 펴낸 관련서로는 포괄적인 해설서와 사전, 그리고 논문모음집 등이 있었다. 새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간행된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번역이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과제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각과 축적된 연구역량을 과시할 만한 업적들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는 너는? 자고로 '주마가편'이라고 했다. 이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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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님과는 도쿄에 도착한 첫 날 오후에 사야님이 사시는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침 9시 비행기이므로 체크인을 하고도 아오야마 지역을 둘러볼 시간이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공항에서도 호텔을 찾는 것도 예상외로 늦어져 아오야마행은 포기해야했다. 대신 신주쿠의 오다큐백화점에서 사야님께 선물할 와인을 사고 위층 서점에 들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한층 전체가 서점이니 꽤 넓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건 고작 만화책 정도. <신의 물방울> 최신호가 나왔더라.

전에 도쿄에 가 본 적도 있고 해서 전철 갈아타는 걸 헛갈리지 않을거라 자신했지만, 웬걸, 초장부터 이리저리 헤매고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인으로 말하자면 거의 완벽한 길치인데(하이드님과 막상막하랄까. -_-), 위기상황에서 작동하는 안테나가 켜졌다나, 의외로 나보다 먼저 길을 알아내 나를 놀래켰다. '애인의 재발견'이라나 뭐라나. 흠.

아무튼, 결국 15분 가량 늦고 말았다. 비는 내리지, 벌써 어둑해졌지(도쿄는 놀랍도록 빨리 해가 진다), 입구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안 보이지, 이를 어쩌나 걱정했다. Information에 가서 전화를 쓸 수 있냐고 물었는데, 멀끔하게 생긴 아저씨, 여긴 공중전화가 없다, 저 뒤쪽 호텔에 가 봐라, 라고 웃는 얼굴로 모른척한다. 혹시 몇 호인지 알면 연락해주겠다지만 내가 가진 건 전화번호 뿐. 아저씨, 미워요!

밖으로 나와서 공중전화를 찾으러 갈까 어쩔까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딱 보니 사야님인줄 알겠다. 우와, 반가워라! 

비가 오지만 원래 계획대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사야님이 사오신 샴페인과 우리가 들고간 와인을 Information에 맡기러 들어갔다. 아까 그 아저씨 있으면 친구 만났다고 '흥!' 해 줄랬는데, 그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더라. 칫.

 



여기는 사야님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절이다. 이 사진을 찍은 때가 아직 5시가 안 되었을 무렵이다. 저렇게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나온다. (실은 야간촬영 모드로 바꾸질 않았다. -_-;) 한국의 시간이 도쿄에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야님 말씀으로는 도쿄 사람들은 교토 시간에 맞춰 생활한다고 불평한단다. 도쿄에서 몇일 지내보니 시간이 잘못된게 맞는 듯 하다. 5시면 벌써 서울의 7시 분위기다. 그러니 8시만 되어도 어디 갈 생각이 안 든다.  

사야님이 사는 동네는 정말 훌륭하다! 도심 한가운데에 사야님 집은 초고층 건물인데, 조금만 나서면 나무도 많고 골목길로 들어가면 옛날 풍경을 간직한 집들도 그대로 있다. 조용하고 옛스런 멋이 나는 에도 시대의 뒷골목같은 느낌이다.

 



시바 공원과 도쿄 타워 근처를 지났다. 그런대로 이 사진만은 잘 나왔다. 저 반짝이는 것들은 빗방울.

원래 2시간 코스라고 말씀하셨지만 비가 점점 많이 쏟아져서 일단 건물로 피신. 사야님네 건물 꼭대기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하고, 남편분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가기 전에 사야님께서 털어놓은 깜짝 소식은, 그날이 바로 두 분의 13주년 결혼기념일이라는 것! 와우! 결혼한지 하루 된 부부와 13년된 부부라니, 이 또한 멋진 조화다.

옮겨간 식당에서 사야님의 남편을 뵈었다. 사진에서 보던 거랑 똑같다. ^^ 우리 둘 다 영어가 제대로 안 되는 관계로 사야님께서 혼자 바쁘시다. 일어로 주문하시고, 우리랑 한국말로 대화하시고, 남편분이랑은 독일어 영어를 섞어쓰시고. 중국에서부터 내 그러셨다니, 대단하시다. 전에 중국여행 페이퍼 올리셨을 때, 남편분이 중국어를 잘 하시는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아니라는 말씀. ㅋㅋ

 



이 식당은 '야쿠자'들이 드나드는 맛있는 식당이라고 한다. 별로 넓지 않은 방에서 지나치게 깍듯하게 써빙하는 젊은 처자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맛만은 예술이다. 사진 찍은 거 외에도 여러가지가 나왔는데,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_-v 마지막 사진의 유리병은 1인용 술병. 가운데가 비어서 얼음을 넣게 되어 있다. 넷이서 각자 한 병씩 앞에 두고 알아서 따라 마셨다. 훗카이도산 사케가 꽤 맛있어서 술 안 마시는 나도 오랜만에 과음.

저녁 먹고 사야님 댁으로 이동. 샴페인과 와인파티다.  
도쿄타워가 보이는 사야님 댁의 전망. 사진을 여러장 찍었는데 모조리 흔들렸다. 역시 취했던게야.

 



사야님은, 글과 사진에서 풍기던 이미지와 꼭 같은 분이셨다. 쓸쓸하면서도 소녀같은 분위기. 사람사는거야 저마다 나름의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있을테고, 누구 사는 모습이 부럽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적어도 사야님과 남편분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은, 우리 부부가 닮았으면 하는 부분이다.

사야님과 알라딘에 관해 얘기하면서 알게 된 것, 난 역시 엄청나게 둔하고 믿을 수 없게 눈치없는 사람이라는 것. 뭐 그런 점이 나름대로 매력이라는데 사야님과 애인이 공감. 참. -_-;

어쨌거나, 사야님 덕분에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던 도쿄 뒷골목 산보와 맛 기행을 동시에 이룬데다, 무엇보다 보고픈 분을 만났으니, 그 고마움과 즐거움이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사야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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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6-11-02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제가 길치라고요? 무슨~ 그런 맞는 말씀을 ^^:;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그 좋은 시간이 부럽습니다.

urblue 2006-11-02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엄청 아쉽습니다. 에휴...

urblue 2006-11-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죄송...그치만 '길치'하면 떠오르는 건 애인과 하이드님 뿐이라... 힛힛..

blowup 2006-11-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렸던 페이퍼예요.
이상하게 제 마음이 두근두근.
사야 님은 성숙한 여인 같고 소녀 같고 그렇군요.
제 눈엔 가끔은 호탕한 사내처럼도 보이는데요.^^
사야 님과 맛난 것도 먹고, 산보도 하고, 영어, 일어, 독어, 한국어를 섞어 쓰는 희한한 대화에도 끼어 보시고. 유쾌하고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어둑한 하늘에 빗방울이 스치듯이 보이는 처음 사진, 애잔하게 예뻐요.
도쿄타워 사진도요.
사야 님 글이랑 사진 보고 싶네요.

조선인 2006-11-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이 보고파요.

paviana 2006-11-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사야님 글이랑 사진이 많이 보고프네요.흑흑
근데 엄청나메 둔하고 믿을수 없이 눈치없는 저도 그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네요.ㅎㅎ

urblue 2006-11-0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맞아요, 호탕한 면도 있으시죠, '사내처럼'이라는 표현에는 좀 갸우뚱이지만요. ^^ 12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어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지요. 사야님께서는 안괜찮은 사람들과 술 마시면 취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날 취하지나 않으셨는지 걱정이라니까요. ㅎㅎ

조선인님, 저두요.

파비님, 딱히 어떤 이야기라기보다, 어떤 분들은 페이퍼 하나로도 많은 걸 파악하시는데 저는 그게 안 된다는 얘기였어요. 똑같은 글을 읽었는데, 어찌 제 눈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건지 말이죠. 흑흑.

반딧불,, 2006-11-0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사야님 만나시는 줄 알았으면 뭐좀 들려보낼걸..흑흑.
보고싶잖아요..엉엉.

nada 2006-11-02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분이 같이 사진이라도 찍지 그러셨어욤.. (찍으셨는데 안 보여주시는 건가요..- -;;) 얼음 덩어리 같은 빗방울이 환상적이네요.

sooninara 2006-11-0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경뒷골목 구경이라니..사야님 덕에 좋은 구경 하셨네요.
야쿠자가 오는 맛난 집...침 삼키다 갑니다.

urblue 2006-11-0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에...미리 알리고 갈 걸 그랬죠? ^^;

꽃양배추님, 넷이 같이 찍은 사진은 사야님 카메라에 있습니다. 보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사진 찍어놓고 빗방울이 많이 튄 걸 알았는데, 그게 의외로 괜찮더라구요. 늘 그렇듯 의외성이 재미있는거지요. ^^

urblue 2006-11-0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님, 사야님 아니었음 모를 뻔한 것들이지요. 저녁 맛있는 거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