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배자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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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배자> 보고 나니, 전작 <다다를 없는 나라> 상당히 간박(簡朴)하다는 느낌이다. 간결한 문장 사이로 넓은 의미의 공간이 펼쳐지지만, 그건 징검다리와 비슷하다.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자갈들 사이에 자리잡은 이름모를 물풀과 바삐 움직이는 물고기를 찾아보기도 하고, 산과 하늘에 눈을 돌리기도 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다시 앞을 바라보면 거기엔 언제나 커다랗고 편편한 돌이 단단히 박혀있어, 나아갈 길이 있음을,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결국 건너편에 도착할 것임을 확신케 한다.

 

비교하자면, <시간의 지배자> 일정한 길이 없는, 게다가 무거운 안개마저 깔려있는 커다란 숲이다. 이쪽엔 잡초와 이끼만 무성하고, 걸음을 옮기면 갑자기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고, 저쪽엔 관목이 어지러이 춤춘다. 제멋대로 시선을 끄는 대상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많은 것을 보았는데, 숲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모를 하다. 부분으로만 파악할 있을 , 전체 모습은 잡히지 않는다.

 

북쪽 지방의 아름다운 공국 시테, 생명없는 항구에 의해 갇혀버린 도시. 시테에 관한 묘사는 이런 역설로 가득하다. 생명의 온기를 뿜어야 온실은 죽음과 쇠락의 냄새를 풍기고, 절대 권력자의 왕궁은 휑뎅그렁하니 스산하다. 어둡고 쓸쓸한 도시의 거리를 퇴폐적인 향락의 소리가 할퀴고 지나간다. 없는, 그러나 여행자들에게 열정을 심어주는 도시, 시테.

 

시테의 지배자 공자그 공작은 권력에도, 무엇에도 재미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여자들의 육체에만 파묻혀 자신을 잊고 지낸다. 살아갈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르는, 권태에 빠진 남자. 온실, 도서관 이런 저런 흥미를 보이지만, 그의 정열은 순간만 지속될 이내 사그라든다. 왕궁의 시계를 관리하는 시간의 달인 아르투로는 거칠고 투박한데다 서투른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일이 있다. 그는 시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세계가 혼돈에 빠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시계 앞에서는 절대적인 정확성을 추구한다.

 

공작이 아르투로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절대적인 믿음과 열정이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투로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공작의 우정은 그가 살아온 방식만큼 비뚤어져 있다. 아르투로가 헬렌과 결혼하자 공작은 희망을 잃고 침묵에 빠진다. 우정도 사랑도 소유로 인식하고 있는 공작에게 헬렌의 존재는 훼방꾼일 뿐이다. 길을 잃은 공작의 소유욕은 아르투로와 헬렌의 로도이프스카에게로 이어진다. 비극적 결말.

 

바타이유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다다를 없는 나라>에서처럼 담백하다기보다는, 깊고 짙은 향을 내뿜으며 어지럽게 부유한다는 느낌이다. 그런 문장 자체가 시테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내게도 그곳에 관한 열정을 품게 한다. 그의 문장에 취한다. 스산하면서도 아름다운 시테가 사람들을 안에 품고 처연하게 쇠락해가는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하여 힘겹고 몽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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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박이 뭐죠?
그리고 사람 구미 당기게 써놓고 별점은 왜 그리 야박한지?

urblue 2004-09-1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박(簡朴)은 간소하고 꾸밈없다,는 뜻이구요, 말이 맘에 들어서 언제 한 번 써봐야지, 하고 있었답니다. 별점은, 네개 줄까 세개 줄까 고민하다, 두번 읽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그냥 세개. ^^; 말 안되나?

로드무비 2004-09-1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 읽고 코멘트 달아줘요.
어제 썼는데 블루님의 반응이 궁금.(그냥.)^^
예식장 가야죠?호호

2004-09-12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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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는 항시 소리들이 떠다닌다.

컴퓨터, 공기청정기, 냉장고가 숨죽이며 낮게 웅웅거리고,

열어 놓은 창으로는 행인의 발자국 소리와 올림픽을 시청하는 이웃의 탄성이 새어 들어온다.

 

순간, 사위가 고요해진다.

소리들은 툭툭 방바닥으로 가라앉고, 공간을 채우는 것은 바타이유의 문장들이다.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뽑혀 나온 문장들이 방안에 거미줄을 친다.

간결한 문장들이 이어지면서 공간이 생기고, 공간을 통해 의미의 지평이 점차 확대된다.

커다란 집은, 그러나 허약하지 않다.

짧고 가는 선들이 슬쩍 닿아 있기만 보여도, 거미줄은 필요한 만큼 튼튼하다.

 

이렇게도 소설이 이루어질 있다는 , 미처 알지 못했다.

책장을 덮었을 , 바타이유의 거미줄에 묶여 버린 했다.

 

다다를 없는 나라, 멋진 제목이다.

安南>이라는 원제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다소 환상적인 의미를 가질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친숙한 이름이다.

바뀐 제목은, 바타이유의 작품이 그러하듯, 아득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고향 프랑스를 떠나 일년 여의 뱃길로 도착한 베트남에서, 고향을 상실하고, 동향인들로부터 잊혀지고,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잃어가는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느 수녀의 여정은,

결코 다다를 없는 나라를 향한 부질없는 한걸음마냥 소연(蕭然)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 친구가 되었다.

자신들이 가장 본질적인 것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마침내 도미니크와 카트린느는 상대의 존재 속으로 빠져들어갔,

망각 속에서 무한히 존재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 사람 다 평화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은 다다를 없는 나라에 대한 질곡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닿은 것이다.

인간이 평생 찾아 헤매는, 자기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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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1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님의 리뷰를 보고 도서관에 당장 달려가 대출해 3시간 만에 읽었습니다. 그러고 저녁엔 비가 지랄맞게 나리는 데도 불구하고 친구와 종로에서 만나 [엘리펀트]를 봤습니다. 담백한 일요일이었습니다.

urblue 2004-09-1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백한 일요일, 이라...좋군요. 제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
 
내 말 좀 들어 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동연출판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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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렇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친구의 아내에게 반해버린 남자. 이제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남자가 여자를 먼저 만나 사랑하지 못한 처지를 탓하며 친구를 축복한다거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면 얘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남자, 올리버는 사랑을 하는 사람의 온당한 태도(친구에게서 아내를 빼앗아오는 ) 취하기로 결심한다. 명은 이제 당신을 앞에 두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같은 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주장을 듣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면 된다.

 

<사랑과 전쟁>인가 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이혼을 원하는 부부가 각자 입장에서 얘기를 하면 시청자가 이들이 이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방송국에 입장을 밝힌다. 그리고 다음 주에 방송국은 시청자의 의견을 종합해서 알려준다. (가끔 프로를 보면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소설은 마치,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자.

 

스튜어트  내 사랑이 뭐가 잘못되었지? 그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질리언  처음엔 스튜어트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금은 올리버를 사랑해.

올리버  이건 내 탓이 아니야. 난 질리언을 사랑한 것 뿐이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올리버는 질리언을 유혹했고, 질리언은 스튜어트를 버리고 올리버에게 갔다. 눈에 드러나는 상황은 그렇다. 그러나 질리언이나 올리버가 나쁘다고 잘라 말할 있을까. 부부 관계란 애초에 사랑 혹은 애정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증명할 수도 없는 감정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물론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식을 거치면서 죽는 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그건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혹은 감정이 지속되는 한에서, 라는 단서가 붙는 약속이다.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TV 보면서 사람들은 남편이 나쁘다, 아내가 나쁘다, 이혼을 해야 한다, 정도는 극복을 해야 한다, 쉽게들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라면?

 

사람이 당신에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한다. 사람 말을 들으면 말이 맞는 같고, 사람 말을 들으면 말이 맞는 같다. 인생은 그렇게, 상대적인 진실로 가득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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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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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책의 초반, 정말 재미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었다면, 홀로 킥킥거리고 있을 흘끗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번쯤은 느꼈을게다. 삼미의 선수들 이름을 대면서 화자가 웃지 말라고 협박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 웃지 않을 있을까. 협박은 박민규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는 다른 사람을 웃기고자 하는 이의 기본 자세다. 자기가 먼저 웃어서야 어디 얘기가 되겠는가. 하여간 시치미 떼고 너스레를 놓는데야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처럼 능청스러운 작가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쩌다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만한 사람은 알고, 그러면서도 낯선 재료에 눈을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재료를 엮어내는 작가의 '글발' 칭찬해 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삼미에서 화자의 대학 시절로 얘기가 넘어가면서 뭔가 이상해진다. 그렇게 사람을 웃기더니 이제는 내가 언제?, 한다. 리포트를 내라면 내고, 출석을 부르면 대답을 하고, 시험을 치라면 치는, 무료하고 의미없는 대학, 생각없이 참가했다 어이없이 그만둔 투쟁, 학교와는 다른 분위기의 홍대 까페, 역시나 이상한 까페 주인, 결정적으로 애인 셋에 섹스 파트너 일곱을 그녀까지, 평범해서 식상할 정도인 내용을 지나친 진지함으로 줄줄이 늘어놓는다. 도대체 그녀는 등장했냐고. 진부함에 피식 웃음을 흘리다, 혹시 이것조차 작가의 의도적인 장난이 아닌가 의심하게 정도다. (가만, 그러고보면 정말 하루끼혹은 하루끼에 경도된 작가들을 패러디한 아닐까?)

 

어쨌거나 초반에 삼미의 이야기로 흥미를 돋우고, 중반에 보통의 삶을 이야기한 후 내리는 결론은, 지나치게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이다.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 삼미의 플레이처럼, 과잉의 노력으로 필요 이상을 이루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다. 이건 사실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전부터 이미 '느림'이라는 것이 우리 생활의 화두로 던져졌다. 심지어 광고조차도, 일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주변의 사람들과 자연에 좀 더 관심을 두라고 충고한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능력과 돈이 필요하고, 그러지 못하는 너는 무능하다는 메시지로 평범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한다는 함정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작품이 차별화되는 것은 아마, 그런 함정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1 2 5리의 승률로도 행복할 있다고, 시선을 어느 곳에 두고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너같이 평범한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조근조근 일러주는데,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사실은 별 세개 반을 주고 싶다. 꽤 괜찮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빈약한 느낌이 든다. 역시나 삼미의 플레이 같다고 하면, 작가에게 칭찬이려나 비난이려나. 박민규에 대한 평가도 일단 유보다. 다른 작품을 노려본 후에야 계속 그를 읽을지 말지 결정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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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6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움을 훔치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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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소리·목소리·모양 따위가) 마음에 좋은 느낌을 자아낼 만큼 곱다(예쁘다)

 

‘아름답다’에 대한 국어사전 정의이다. 여기서 보듯 아름다움이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을 매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나 예술 작품 등 다양한 것을 보고 들으면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각은 매개일 뿐, 실제로 중요한 것은 ‘느낌’이다. 동일한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감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다른 것과 달리 사람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타인의 가슴에 닿을 수만 있다면, 외모에 관한 것이거나, 심성에 관한 것, 혹은 그 둘이 합쳐져 한 인간을 형성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획일적인 기준에 따른 외모로 더 많이 평가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히 서구의 영향이랄 수 밖에 없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일찍이 서구에서도 심히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던 모양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도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슈타이너 부인 프란체스카는 20여 년 간 수백명의 애인, 이라기 보다는 섹스 파트너를 가졌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았고,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기에 갈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에게 머무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늙고 지친 슈타이너와 난장이 레몽을 설득해 ‘아름다움의 건초장’에서의 은밀한 작업을 시작한다. 프란체스카의 주장은 이렇다. 아름다움이란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괴로움을 주므로 원천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갓 피어난 꽃처럼 싱싱한 여인들을 지하 골방에 가두어놓으면 불과 1~2년 만에 그들은 말라 비틀어진 노파가 되고 만다. 그녀의 주장은, 미친 소리임이 분명하지만, 나름의 철학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미(美)란 ‘두렵고 무서운 것의 시작’이라는 릴케의 말마따나 지나치게 아름다운 사람이 본의 아니게 타인을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해악을 극렬하게 주장하면서,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을 제거하면 아름다움은 스스로 시들어버린다고 말한 슈타이너 부부와 레몽이, 실은 젊은 미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정기를 마심으로써 자신들의 육체를 나이보다 젊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의 주장과 거기에 점점 이끌리는 뱅자맹의 모습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푸하, 웃고 만다. 스스로의 주장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부조리함이라니.

 

이 소설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외면적인 것, 특히 섹스 어필이다. 이는 '스무 살의 아름다움은 자명한 거야. 서른 살의 아름다움은 보상이고 쉰 살의 아름다움은 기적이지.' 라는 프란체스카의 대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아무리 곱게 늙어도 성적 매력이 감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젊음이야말로 육체적 성적 아름다움의 근원이고, 슈타이너 부부와 레몽이 훔치는 것도 실상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젊음이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에 몸을 맡긴 어리석은 이들이여.

 

<아름다움을 훔치다>는 인간의 헛된 욕망에 관한 풍자이고 조롱이다. 브뤼크네르는 젊음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아름다움에 현혹되는 사회의 경망스러움과 아름답게 늙어갈 줄 모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통렬한 이야기, 읽는 재미 또한 넘치는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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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주의 마이 리뷰 따라 왔습니다.(알라딘 서재에서...)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통렬한 얘기라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urblue 2004-07-2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소설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류의 얘기들이 잘 읽힙니다. 기회 되시면 읽어보세요. 아마 오랜 시간 잡아먹지는 않을겁니다. 이거 상당히 재밌거든요. ^^

IshaGreen 2004-08-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멋진 리뷰였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urblue 2004-08-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스스무 2004-11-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재미 있게 읽었던 책이죠...

많은 분들이 아름다움을 훔쳤으면 좋겠네요...